박위

 



朴葳
(? ~ 13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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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위화도 회군까지
4. 비극의 중앙 정계
5. 비극적인 최후
6. 대중 매체에서
7. 그 외


1. 개요


박위와 같은 인재(人材)는 쉽사리 얻을 수가 없다.

-이성계 《태조실록》 태조 3년 1394년 갑술 1월 21일(신유)

여말선초의 군인으로 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으며 창왕 당시 왜구를 뿌리 뽑기 위한 차원에서 대마도를 정벌했다. 공민왕과 이성계가 재능과 능력으로 인정하였다. 밀양 박씨 정국군파의 중시조이다.[1]
할아버지는 전법판서[2] 박천명이고 아버지는 보문각[3] 대제학 박광후로 문벌이 있는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찬성사 김영휘[4]의 딸이다. 외아들 박기는 조선조에서 이조참판, 오위도총관을 지냈고, 아버지 사후 밀양으로 낙향해 변계량과 후학을 양성한다. 박위의 동생으로는 박천, 박번이 있고 박천은 영의정을 지냈고 구산 박씨로 분파했다. 박번은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공민왕 때 왕의 호위 장교인 우다치로 등용됐다. 대마도를 정벌하고 이성계 뜻에 따라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을 폐하고 최영 제거에 동참했다. 우왕의 아들인 창왕 역시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함으로써 공신의 지위에 올랐다. 충의백(忠義伯), 정국군(靖國君)에 오른 후 회군공신, 중흥공신에 책록됐다.
조선 건국의 혼란한 시기에 역모로 몰려 죽을 위기를 몇 번 넘겼으나 결국 이홍무의 옥사를 넘지 못하고 파직됐다. 공신은 죄를 가볍게 여기는 면죄 조항 덕에 사면되고, 서북면도순문사로 복직했으나 계속되는 탄핵에 시달렸다.
1차 왕자의 난인 무인정사 당시 도제조 겸 친군위도진무로 도성 수비를 맡았는데 숙직 도중 살해당했다.

2. 위화도 회군까지


공민왕 때 이미 고려는 중국의 홍건적과 일본 왜구들의 침입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경상도 상주, 김해, 영흥 부사, 진주 목사, 계림(경주) 부윤을 역임하고 합포 수령을 세 번 역임하는 등 수많은 왜구의 경상도 침입을 모두 이겼다. 정몽주의 포은집에 따르면 박위는 행정력이 탁월하여 피해지 복구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내는 등 신망이 대단했다고 호평을 내렸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겨 적으로 하여금 방자하게 굴지 못하게 하였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를 지장(智將)이라 칭찬하고 있다. - 《해동잡록 본조》1 박위(朴葳)

조선 중기에 쓰여진 해동잡록으로 야사를 기록한 책이다. 이때까지도 박위의 이름이 유명했다는 뜻이다. 야사에는 과장이 있기 마련이지만, 정사에도 패배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누차 진급하여 지문하부사에 이르렀다.네 번이나 수령을 지내고 세 번이나 남쪽 변방을 지켰는데 왜구는 그쳐지고 백성은 편안해져 성망과 치적이 대단하였다. - 《해동잡록 지지(地志)》 박위(朴葳)

부산 동래, 울산 신학, 김해 분성 등에 산성을 짓는 등 공역을 관리하는 데도 탁월했다. 상주 부사로 있을 때,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에서 몽진하는 공민왕을 안동까지 무사히 피난시키는 공을 세웠기도 하다. 상주 중모현 전투와 고령현 전투에서 왜적을 대파했고 김해 부사로 재직 중이었을 때에는 황산강(낙동강)을 거슬러 밀양에 당도한 왜선 50척과 그 후속부대들을 고려 군선 30척으로 전멸시키는 공을 세웠다.
1388년(우왕 14년) 최영과 우왕의 요동정벌 때 경상도 상원수(慶尙道上元帥)로서 출정했다. 좌군 도통사 조민수 밑으로 배속돼[5] 우군의 이성계[6]를 견제하는 역할도 있었지만, 결국 무리한 진격명령만 하달하는 최영에게 반기를 들고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했다. 곧바로 개경을 점령한 그들은 최영을 체포하고 우왕을 폐위시켰다. 이로 인해 박위 역시 회군 공신에 올랐다.

3. 대마도 정벌


1389년(창왕 1년) 1월 군사 1만과 배 100척으로 대마도를 정벌해 왜구 소굴과 적선 300여 척을 불태우고 고려인 포로 100여명을 구출하는 커다란 공을 세우게 된다. 조선 침략을 겁낸 류큐(오키나와)의 증산왕은 신하를 자청하고 특산물인 유황, 후추 등을 조공하기 시작해 그로부터 200년 넘게 조공을 지속했다. 아울러 당시 일본 주고쿠 지방과 규슈 지방을 제패했던 오오우치 씨, 쇼니씨 등 봉건 영주들이 저자세로 나오기도.
1390년 5월 규슈 절도사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고 1391년 8월에는 고려인 남녀 포로 68명을 돌려 보냈다. 그러나 고려, 일본 양국 모두 경제적 빈곤층을 돌보지 못했기 때문에 왜구는 근절되지 못했고 결국 이들의 출몰은 계속됐다.[7] 다만 빈도는 줄었다.
<고려사 : 박위 열전>에서는 40년간의 왜구 침입에 대마도 정벌의 필요성은 이미 모두 알았지만 다들 실제로 실행하기를 꺼려하고 방어에만 힘썼다고 기록돼 있다. 고려군은 사병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군을 움직이려면 권문세족들의 돈이 필요했고 이들에 대한 보상이 필요했다. 대마도는 땅이 좁고 물산이 적어 보상으로는 불충분했으며, 수군을 이끌고 간다한들 주변 해역을 잘아는 왜구들이나 쓰시마 어민들을 이기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요동 정벌을 기획한 최영을 주살하고, 우왕을 폐하는 것으로는 아직 북원과의 관계를 의심하는 명나라를 안심시키기에 부족하다고 느꼈던 고려의 신료들은 생각을 쥐어 짜냈다. 그들은 일본으로 군을 보냄으로써 만주를 도모할 뜻이 없음을 명나라에 표시하고, 관계 회복 시그널을 명나라에 보낼 필요를 느꼈다.
다분히 중앙 정부의 대외적 목적을 포함한 작전이었지만, 조선 초인 1396년의 김사형, 1419년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과 달리 1389년 정벌은 어디까지나 박위를 중심으로 그의 친인척들과 다른 신흥 무인들이 합세해 완수된 정벌이였다. 박위가 고려 말 다른 무인들과 차별점을 갖는 이유는 집안의 문벌을 기반으로 동시대 친척 문신들, 왜구와 실전 경험이 풍부한 경상도 지방 장수들, 경상도 유지들을 규합할 수 있었고, 박위 스스로도 이성계와 접점이 적어 정몽주를 위시한 보수파들의 지지까지 얻을 수 있었다.

4. 비극의 중앙 정계


이후 흥국사 회담에서 창왕 폐위에 참여하여 공양왕을 즉위시킨 흥국사 9공신(이성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 중 한 명이 된다. 이후 박위는 중앙 정계로 진출한다.
1390년(공양왕 2년) 김종연의 옥사(이성계 암살 모의 사건) 명단에 박위의 이름이 나왔다. 그는 옥에 갇혀 고문을 받고, 관직과 공신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적극적으로 사면시켜 관직은 물론 회군공신 직까지 돌려받았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초기 경복궁은 지금과 달리 2층 건물이 많았고, 궁성이 단순한 담장울타리가 아니라 성곽이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박위는 참찬문하부사 겸 도제조로서 광화문을 공사하고, 경복궁 궁성 공사 총책임을 맡았다고 한다. "임금이 궁성(宮城)을 순시(巡視)하고 능하지 못한 감독관(監督官) 수십 인을 태형(笞刑)에 처하고,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박위(朴葳)로 도제조(都提調)를 삼아서 능하고 능하지 못한 것을 고찰하게 하였다." [8]
이후 실록에 의하면 박위는 점쟁이에게 이성계의 사주팔자가 어떠한가 물어보고 다른 왕씨들 중에 운명이 좋은 사람들이 있는가 물어보았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대통령의 사주팔자부터 시작해서 관상풀이까지 신문, 블로그, 카페에 버젓이 올라와 풀이되는 등 별거아닌 문제지만 조선 시대 관점으로는 당연히 역모 예비음모가 된다. 이로 인한 역모 혐의로 신하들의 엄청난 탄핵을 받았으나 태조는 신하들을 만류하며 박위를 보호했다. 그러나 매일 같이 박위를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와 결국 파직당했고, 결국 이 일이 불쏘시개가 되어 왕씨 학살의 피바람이 불게 된다. 조선이 창업된 이후, 신진사대부고려를 적극적으로 부정했던 세력들 사이에서는 왕씨들을 화근으로 인식하고 벼르고 있었던 차에 박위의 일이 자연스레 불쏘시개가 되었다.
박위는 실록에 확인되는 바에 따르면 총 9번 탄핵되었으나 그때마다 이성계는 탄핵하는 신하들을 꾸짖고 박위를 인재로 기용해 쓰겠다는 뜻을 확고히 하였다.

대간과 형조에서 함께 나아와서, "박위(朴葳)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자, 옥에 갇힌 박위를 풀어주면서, "정무(政務)를 보기를 그전과 같이 하고 의혹(疑惑)하지 말라. 비록 천만인(千萬人)이 말하더라도 나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3월 1일

간관이 참찬문하부사박위(朴葳)를 탄핵하므로, 임금이 장무(掌務)를 불러 꾸짖고, 박위에게 명하여 정사를 보게 하였다.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3월 22일


5. 비극적인 최후


이후 관직에 복권되어 박위는 무인정사 때 정1품 도제조 겸 친군위도진무(궁궐 치안대장) 겸 오위도총부 총관(수도 경비사령관)을 맡고 있었는데, 전투의 유무와 전투의 양상에 대해서는 각종 매체끼리도 상충되며 실록 자체 내에서도 일관되지 못함이 많이 드러난다. 실록에서의 최후 묘사는 이렇다. 투항 이후 박위가 숙직실에 들어가 있었는데, 이방원이 회유하기 위해 나오라고 하자, 세 번이나 불러도 한참이나 나오지 않고 매우 늦게 나왔는데, 회안대군 이방간이 박위를 죽일 것을 건의해 그때 죽였다고 하기도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방원을 무시하는 태도로 볼 수 있으며, 회유에 적극적으로 응하는 태도가 전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방원은 인재 활용폭이 이성계보다 좁았다. 자신이 관리하기 힘든 거물급 인재들은 회유할 때 제대로 숙이지 않으면 전부 숙청했는데 그 명단 속에는 자신의 아버지인 이성계는 물론 정몽주, 정도전, 남은 모두 있었고 박위 또한 피해갈 수 없었다.
세세한 것들은 알 수 없으나 객관적 기록으로 보자면, 박위는 살해당했고 공동으로 지휘를 맡았던 조온은 살았다는 점, 궁궐 내 다른 곳의 수비를 맡았던 이무 등은 지휘부가 꺾였다는 소식을 듣자, 기다렸다는 듯 적극 투항해 살아남은 것, 오위 중 하나인 호분위의 군사 전원이 이성계 가문 가별초(사병)들인 것.[9] 남은, 심효생, 정도전, 이제, 유만수 등과 당시 일부 생존해 활동하던 개성 왕씨들도 전부 살해당했다는 점이 모두 사실이다. 전투는 거의 없었다고 하며 호분위를 포함하여 궁궐 내 대부분의 병력이 이방원에 회유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연히 전투 없이 이방원에 숙청당했다는 것이 정론.

6. 대중 매체에서


용의 눈물에서 박건식이 연기했다. 고려 말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조선 개국 이후부터 제대로 다루기 시작하는 드라마의 특성상 대마도 정벌은 전혀 언급이 없고 위화도 회군에 참여한 모습도 부각되지 않으나, 점을 잘못 쳤다가 곤욕을 치르는 장면은 제대로 묘사되어 있다. 최후에 대해서는 정도전의 일파로서 1차 왕자의 난 당시 대궐을 숙위했으나 태종을 지지하는 세력이 삼군부를 이미 장악한 뒤라 중과부적으로 패해 참수되는 것으로 그려졌다.

7. 그 외


대단한 명문가였다. 아버지 외할아버지 모두 2품 이상의 관직에 있었으며, 그의 친인척들 중 꽤나 많은 이들이 문무文武 양면에서 고루 활약했다. 이성계의 회유를 거절해 은거한 이들도 많은 반면에 관직에 출사한 친인척들도 적지않다. 신흥 무인 중에서도 꽤 많이 보인다. 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알 정도로 유명하진 않지만 모두 사병을 적지 않게 가지고 있어, 박위가 대마도 정벌할 때도 합세하였다. 다만, 박위가 당시 박씨들의 당주라 하기 어려운 것은 이미 고려때 박씨는 밀양박씨만 하더라도 대종大宗이라 구성원이 너무 많았으며, 각자 의견이 하나로 일치되지 않았다. 조선 왕조에 적극적으로 충성한 규정공파 계열 안에서도 관직에 출사한 사람, 또는 이성계의 제의에도 거절하고 은거한 사람, 중도파 등이 나뉘었다. 이는 경제,군사 기반 또한 분할되어 나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위는 고려때나 조선때나 항상 신하로서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대세를 따라갈 뿐 중앙정계에서 파벌을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모습은 전혀 안보인다. 정몽주,이성계,최영,정도전,이방원 등 중앙정계의 굴직한 인물들과 충분히 깊게 결탁할 수 있었지만 다른 인물들에 비해 그러한 행보는 많이 보이진 않고 중앙권력에서 늘 한발 뒤에서 겉돌았다. 그러한 연유로 실록과 세간에서 기회주의자란 비판을 많이 받았다. 박위가 점을 쳐서 왕씨 반란 가입여부를 결정하려고 했다는 것은 이런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822년(순조 22년)에 후손인 박성기의 주청으로 밀양 사림들의 공론을 모아 경상도 밀양도호부[10]에 신남 서원을 창건해 박위, 박기 부자를 모셨다.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따라 사당은 철거되었으나 강당은 경보당(景報堂)으로 이름을 바꾸어 재실(齋室)로 삼고 박위, 박기 부자의 제사를 계속 모셨다. 1981년에 후손들의 발의와 고을 유림들의 호응으로 서원을 1868년 철폐 전의 상태로 복원 해 상모사(尙慕祠)를 그 전대로 중건 해 박위, 박기 부자의 제사를 매년 모시고 있다.
박위 이전까지는 문관 출신이 다수였고 박위부터 조선 왕조에서 무관이 다수 나왔다. 박위의 후손 중 병마절도사가 여럿 있다.
대한민국 해군 장보고급 잠수함의 4번함인 박위함은 박위의 이름을 붙인 함선이다. 해군관련 인물들 이름은 기본적으로 붙는데, 대마도 정벌 관련 인물이니 당연한 결과.
북한에 있는 평양성 읍호루 현판은 그의 글씨라고 한다.
이상하게 사전에는 최후 사실이 실려있지 않는 경우가 많고 몰년까지 ?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용의 눈물 방영 전까지 박위가 제1차 왕자의 난의 희생자였다는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을 정도였다. 네이버에 올라온 두산백과의 항목에도 몰년이 1398년까지는 나왔지만 박위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가 근래에 이의제기를 통해 겨우 수정되었다.[11]

[1] 박위의 후손들은 신라 53대 경명왕의 장자 밀성대군 박언침의 군호를 따라 밀성 박씨라고 한다. 정국군파의 정식 족보 명칭도 밀성 박씨 정국군파보이다. 어쨌든 밀양 박씨는 신라 경명왕의 손자 박욱이 고려 조정에서 삼한 벽상 공도 대장군을 지내면서부터 문벌을 뽐낸 집안으로 박씨의 대종이며 조선 시대 때 역시 문과 급제자 200명 이상을 낸 삼한갑족이다.[2] 전법판서: 지금의 법무부 장관[3] 보문각: 고려 시대 왕의 경연과 궁내 도서관을 관장하는 부서. 성균관과 함께 고려 시대 유교 기관이었다.[4] 김영휘: 삼별초를 토벌한 김방경의 손자로 안동 김씨(구 안동). 당시 김영휘의 집안은 친원파였다.[5] 요동정벌 당시 좌군 소속: 도통사 조민수, 서경도원수 심덕부, 양광도원수 왕안덕, 경상도 상원수 박위, 조전원수(백업) 최공철 등[6] 요동정벌 우군 소속: 도통사 이성계, 안주도원수 정지, 안주도 상원수 지용기, 조전원수(백업) 배극렴 등[7] 정도전(드라마) 등에서도 고려인 출신 왜구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고려를 싫어한 산적들이나 도적들, 농민봉기를 모두 왜구라 칭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들과 일본에서 온 왜구들이 합세했을 가능성도 높다.[8] 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 2월 6일 계미 1번째 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9] 이들은 황산 대첩, 개경 탈환 작전, 나하추 전투, 이오르 티무르 전투 등에 참전한 동북아 최강의 정예 부대였다.[10]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11] 최초에는 네이버 백과사전애도 몰년으로 표시 되어 있었으나 박위의 후손이 밀성박씨 정국군파보와 조선왕조 기록을 제시하며 수정 요청 해서 1398년으로 수정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