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린
1. 개요
고려 말, 조선 초의 대신. 성여완[1] 의 아들이다. 창녕 성씨는 조선 초기에 이름을 날린 명문가로, 성여완의 세 아들인 장남 성석린, 차남 성석용, 막내아들 성석인은 모두 과거에 급제한 뒤 고위직을 역임했다.
1357년 20세에 문과에 급제했고 신돈의 모함으로 해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3개월 만에 조정에 복귀한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에게도 재능을 인정받았고, 공민왕에게도 중용되는 등 학자 및 관리로서의 재능도 출중했다.
1380년 왜구가 침입한 위기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막아낸 일화도 있다.
학유, 전리총랑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양광도 관찰사 시절에는 의창을 설치하고 국가적으로 시행할 것을 건의해 받아들여졌다.경신년 여름에 왜적이 승천부(升天府)에 들어와서 서울을 거의 함락시킬 뻔하였는데, 이 때 석린은 원수(元帥)가 되고, 양백연(楊伯淵)은 편장(褊將)이 되었다. 여러 장수들은 적의 선봉(先鋒)이 매우 날랜 것을 보고는 물러가서 다리를 건너고자 하였으나, 석린이 홀로 계책을 결정하여 말하기를,
"만약 이 다리를 지나간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이반(離叛)될 것이니, 다리를 등지고 한번 싸우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그 말에 따라, 사람이 모두 죽을 힘을 내어 싸우니, 적이 과연 이기지 못하고 도망하였다.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와 공모하여 우왕,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옹립해 찬화공신에 올랐다. 조선이 개국되자 이색과 우현보의 일파로 몰려 추방되었다가 돌아와 한성부판사, 좌의정 등을 역임했으며 특히 태종 때에는 영의정 4번에 걸쳐 영의정을 나누어 역임하는 등 상당한 거물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잠저에 있을 때부터 큰 총애를 받았는데, 태조가 기쁘지 않은 일이 있더라도 성석린을 보내면 화가 풀릴 정도로 그를 신임했다. 왕자의 난으로 인해 권력을 모두 잃어버린 채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말년의 태조를 모시고 잔치를 여는 등 그의 마음을 돌리는 데 힘썼으며, 이성계가 동북면으로 훌쩍 떠나 머물 무렵에는 태종의 명을 받아 이성계를 설득해 도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때 태종이 '부왕께서 믿고 중히 여기는 이로 경 같은 사람이 없다'고 당부하는 등, 태종으로서도 아버지 상대로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카드였던 모양. 그러나 태조와 태종의 대립이 가장 극렬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던 조사의의 난 때는 민제 등과 도성 수비를 맡느라 태조를 만나지 않았고, 그 대신 안평 부원군 이서와 화엄 도승통 승려인 설오대사가 사절로 파견되었다.[2]
86세(세종 5년)까지 장수했으며, 말년에는 궤장을 하사받는 등 원로대신으로 대우받았다. 오랫동안 재상직에 있으면서 재능을 발휘한 정승이었고 그의 형제들 역시 고관의 자리에 오르는 등 현달한 인물이었으나, 하륜이나 이숙번처럼 기책을 발휘해 태종의 즉위에 공헌한 타입은 아니었기에 이들 측근 세력에 비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성공적인 관료의 삶을 살았으나 과연 신은 공평한 것인지 직계 자손들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두 아들로 성발도, 성지도를 두었는데, 성발도는 형조판서 및 의정부 참찬을 지내는 등 아버지를 따라 출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이 성석린보다 조금 먼저 죽었다. 성지도는 맹인이었기에 후사를 잇지도, 관직에 나갈 수도 없던데다가 성발도의 사위들[3] 에게 부동산을 빼앗기고 모멸을 당하는 등 모진 고통을 당했다. 유전적인 요인이 있었는지 성지도의 아들 성귀수마저 맹인이었으므로 성석린이 죽고 나서도 후사를 이을 사람이 없었다. 세종 20년인 1438년 성귀수가 아들을 낳자 이야기를 듣고 딱하게 여긴 세종대왕이 부사직을 마련해 준 덕에 다행히도 경제적인 부족함은 없던 모양이다.[4] 결론적으로 성석린은 후사가 끊어진 셈인데, 뒷날 성삼문의 일가가 화를 당한 것을 생각하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연려실기술에서는 태종의 밀명을 받고 고향에 있던 이성계를 만나러 가는데, 우연히 지나가는 척 하면서 이성계 주위를 얼쩡거리다가 이성계가 성석린을 알아보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성석린이 슬그머니 도성에 돌아오라는 얘기를 꺼내자 이성계가 노해 칼을 꺼내 들고 "너 방원이가 시켜서 왔지?"라고 하자 성석린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제 자손들이 눈이 멀 거예요."라고 둘러대 위기를 넘긴다. 결국 성석린이 한 맹세가 그의 후손들에게 미치면서 눈이 멀게 되었다고 한다. 성지도와 성귀수가 맹인이라는 데에서 착안한 야사. 당사자들이 들으면 참 억울할 소리임에 틀림없지만, 어쩌면 당대 사람들도 명신이던 성석린의 아들과 손자가 줄줄이 맹인이 된 것이 기구한 운명이라고 생각했기에 이 같은 야사가 등장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5]
성석린의 첫째 동생 성석용은 사육신 성삼문과 생육신 성담수의 증조부이고 둘째 동생 성석인은 용재총화의 저자 성현의 증조부이다.
맹사성의 집이 성석린의 집 바로 밑에 있었는데, 맹사성은 성석린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갈 때마다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맹사성의 온후한 일품을 보여주는 일화.
대중 매체에서는 용의 눈물에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려면 CD를 비싼 값에 구해야 했던 시절이라 야사가 폭넓게 활용된 만큼 함흥차사 이야기가 그대로 나오며, 위의 일화도 약간 각색되어 묘사되었다.
2. 관련 문서
[1] 1309-1397. 고려 말에 정당문학(중서문하성의 종2품 재신)을 지냈다.[2] 이 두 사람 역시 이성계에게 신뢰를 받은 사람들이었기에 파견된 것이었다. 그러나 길이 가로막히면서 결국 허탕을 치고 돌아오게 되었다.[3] 김연지, 김수지, 송석동. 김연지는 백성을 구휼하는 능력이 있어 세조 대에 당상관이 되고, 송석동은 사육신에게 동조했다가 함께 처형된다. [4] 세조 12년(1466)에 성귀수의 집 종이 세조에게 온천 위치를 알려주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 성귀수가 첨지중추부사로 소개되는 것에서 명예 부사직이 이 때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5] 해당 일화는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각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