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월(작곡가)
1. 개요
'''일제강점기 후반 ~ 대한민국 초창기의 대중가요를 평정한''' 대한민국의 작사가/작곡가, 가수. 당시 대부분의 대중가요들은 이 사람의 손에 거쳐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중가요 역사의 레전드.
2. 상세
어린 시절 집안이 제법 유복했으나, 고등학교를 다니던 도중 집안의 형편이 어려워져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양복점을 하는 숙부를 찾아가 제단 등을 배우며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어린 시절에도 제법 가창력이 뛰어났는지 당시 청주시내에서 '노래하는 양복쟁이'로 통했다고 한다.
당시 청주 지역에서 노래대회 등이 열리면 모조리 상을 휩쓸고 1939년에 조선일보와 태평레코드가 주최하는 '전국 콩쿠르 대회'에서 입상하여 가수로 데뷔하였다.
활동 시에 예명도 많이 보유하고 있었는데, 평소 반야월이라는 예명을 자주 사용했고, 가수 활동 시에는 '진방남'이라는 예명을 사용하였다.
대표적인 곡이 '꽃마차', '마상일기', '불효자는 웁니다' 같은 곡들이었다. 이 외에도 '추미림', '박남포', '남궁려', '금동선', '허구', '고향초', '옥단춘', '백구몽' 등 여러 예명들도 썼다. 예명을 여러개나 쓴 이유는 작사를 너무 독식하는 느낌을 피하려고 그랬다고 한다.
작사가 활동 시의 대표작들로는 소양강 처녀,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 고개, 산장의 여인, 산유화, 만리포 사랑, 무너진 사랑탑, 아빠의 청춘, 열아홉 순정 등이 있다. 가수 활동 시의 대표작들로는 불효자는 웁니다, 잘 있거라 부산항, 마상일기, 꽃마차 등이 있다.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노래를 작사하고 가장 많은 히트곡을 낸 작사가이면서, 가장 많은 노래비를 보유한 작사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현재 청년층 사이에서도 이 사람이 제작하거나 직접 부른 멜로디나 노래 제목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대중가요의 한 획을 그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슬하에 2남 4녀를 뒀으며, 그 중에 아들 박인호[1] 도 작곡가, 작사가, 가수, 기타 연주자, 프로듀서, 음악 평론가, 작가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3. 노래
- 단장의 미아리 고개 (반야월 작사 / 이재호 작곡)
이 노래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서울특별시 성북구 미아동에 거주하던 반 씨가 인민군이 서울을 포위하자 단신으로 급히 피난을 떠났다가 9.28 수복으로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당시 5살이었던 반 씨의 딸이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아사되어 세상을 떠났는데 묘소까지 찾을 길이 없자 비통한 마음에 지은 노래라고 한다. 매년 6월이면 한국전쟁과 함께 불려지는 노래다.
- 울고 넘는 박달재 (반야월 작사 / 김교성 작곡)
이 노래는 반 씨가 유랑극단을 이끌며 지방순회 공연을 다니던 도중 충주에서 제천으로 이동하려고 천등산 박달재를 넘어가던 중 저 멀리서 농부로 추정되는 부부가 헤어지는 모습을 보고 아내의 심정을 생각하며 지은 노래다.
- 불효자는 웁니다 (김영일 작사 / 김교성 작곡 / 진방남 노래)
이 노래는 1940년 업무차 일본을 방문한 반 씨가 음반 녹음 도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게 되는데, 충격을 받아 당시의 심정을 어머니께 쓰는 편지로 김영일 작사가에 전달하여 울음 섞인 목소리로 녹음을 마친 노래다.
4. 여담
- 일제 강점기 말기에 가수로 〈소년초〉, 〈조국의 아들〉 등을 불렀으며 〈결전 태평양〉, 〈일억 총 진군〉와 같은 군국가요 작사에 참여한 경력이 있어, 2008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이에 대해 그는 2010년 6월 친일행적에 대해 사과를 했다. 그는 "무슨 말을 해도 핑계다. 있었던 일은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 말년에는 지상파나 언론 인터뷰, 기사 등에 근근이 모습을 비추었다. 그러던 중 2012년 3월 26일 오후 3시 20분 경, 노환으로 인해 급작스럽게 사망하였으며, 빈소는 이대목동병원에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