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의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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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문
3. 상세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


영국의 작가이자 백인우월주의자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년 <정글북>으로 1907년 노벨 문학상 수상)이 1899년에 발표한 시 <백인의 짐 - 미국필리핀 제도>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영어 원문으로는 "The White Man's Burden". "백인의 짐"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2. 전문


백인의 짐을 져라.

너희가 기른 최선을 최전선에 보내라.

네 포로들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너희 아들들을 보낼 지어다.

퍼드덕대는 사람들과 야생에 맞서

육중한 마구를 차려입으라.

네 불만투성이 표정의 갓 잡아들인 포로들,

반은 악마요, 반은 아이인 자들에게.

백인의 짐을 져라.

끈기있는 인내로

공포의 위협을 덮어버린 채

긍지를 때맞춰 드러내면서.

공개적인 언설과 단순함으로

몇 번이라도 반복하라.

타인의 이득을 살피고

타인의 성과를 돕기 위해서.

백인의 짐을 져라.

평화의 야만적인 전쟁,

기근의 입을 채워주고

역병이 끝나도록 명하라.

그리하여 너희 꿈이 가까워질 때

타인을 위한 목표도 이뤄질 지니,

너희의 모든 희망을 없애버릴

나태와 이방인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라.

백인의 짐을 져라.

왕들의 천박한 지배가 아닌

농노와 청소부의 노력,

평범한 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아직 입항하지 않은 항구,

아직 걷지 않은 길,

가서 너희 삶의 족적을 남기라.

죽음의 족적을 남기라.

백인의 짐을 져라.

그리고 오랜 성과도 거둬라.

너희가 받을 더한 모멸,

너희가 맞닥뜨릴 증오,

너희가 다루어야 할 주인들의 통곡,

(아아, 천천히!) 빛을 향해..

"어이하여 그자는 우리를 그 사랑스럽던 이집트의 밤에서,

속박에서 데리고 나왔는고?"

백인의 짐을 져라.

너희 피곤을 가리기 위해

너희는 몸을 덜 웅크리지도

더 크게 자유를 떠들어대지도 말거라.

너희 모두가 울부짖는지, 속삭이는지

너희 모두가 떠나는지, 책무를 다하는지

조용하고 뾰루퉁한 자들은 너희 신과 너희를 평가할지니

그렇게 어린 시절은 끝났나니.

손쉽게 주어진 명예와

마음에서 쉽게 우러나온 찬사따위는.

이제 너희 웅대함을 시험하기 위해

그 모든 고마워할 줄 모르는 세월을 통해

차갑고도 날선, 값비싼 지혜와 함께

너희 동료의 심판이 다가올 지어다!


3. 상세


1899년 2월, 스페인이 필리핀에서 물러나고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게 되자 키플링은 이를 지지하며 시 <백인의 짐-미국과 필리핀 제도>를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반은 악마, 반은 어린애'''인 필리핀인을 미국인이 지배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시는 모두 일곱 연이며, 각 연은 “백인의 짐을 져라(Take up the White Man's burden)”로 시작한다.
이 시에서 키플링은 "야만적인 흑인황인종을 개화시키는 것은 힘들고 고되지만, 그들에게서 보답은커녕 원망과 비난을 받을지라도 고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얼핏 보기엔 '힘이 있는 사람들이 희생이 있더라도 약한 이들을 돕자'는 좋은 주장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곱씹어보면 잘난 백인이 못나고 무지한 유색인종을 도와야 한다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즉 백인이 상전이고 유색인종을 아랫것으로 깔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이며, 이 시를 통해 키플링은 백인이자 대영제국의 국민인 자신의 인종차별적 편견과 우월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내세운 배경에는, 키플링 자신이 대단히 제국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지만 징병 신체검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아 병역면제를 받았다는 콤플렉스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있었다. 결국 그는 그 한을 자신의 아들을 통해서 풀었다. 원래 아들은 해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시력검사에서 떨어졌고, 이후 육군 장교에 지원했지만 역시 시력검사에서 떨어진다. 키플링은 군대의 인맥을 이용해 아들을 '근위 보병 제4연대'에 입대시켰지만, 결국 아들은 1915년 9월 18세의 나이로 전사하고 만다. 그렇게 아들이 전사하고 나자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키플링은 높으신 분들의 욕심과 무능 때문에 희생당하는 건 어느 나라나 젊은이들이라는 내용의 반전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그렇다고 비판을 완전히 피할 수 없는데, 인종차별과 자신의 아들을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만든 뒤에 참회하고 반성하는 글을 쓴 것. 어떻게 보면 자기 아들을 죽이게 만든 것은 키플링 본인이기도 하다.[2]
이 백인의 의무는 당시 제국주의 사상 및 식민지 확장을 정당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제국주의 문서에 나오듯이 식민지 경영으로 인한 이익 자체는 크지 않거나, 크더라도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고 소수 자본가 등에게만 그 이익이 돌아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대중들과 정치인들은 그 이익으로 인한 단꿈에 현혹되고 여기에 이 백인의 의무와 같은 사이비 이론이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면서 제국주의가 그 정당성을 얻은 것. 자세한 내용은 제국주의 문서를 참고할 것.
다만, 이것은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여론조작이라고 받아들이면 안 되고 더 노골적이든 온건하든 간에 당대 유럽 지식인 사회에 만연한 분위기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맞다(그 논조에 동의하라는 말이 아니다). 심지어 당시 아프리카와 아시아, 아메리카에서 순수하게 선의로 봉사한 의사와 선교사들 역시 그렇게 다르지 않다. 왜냐 하면 그들의 활동은 식민지 행정이 없이는 보장될 수 없었기 때문이며, 그들의 활동을 떠받친 동기는 순수하게 평등한 인류애보다는 종교관에 기인한 바가 컸기 때문이다.[3]

4. 기타


한편 미국-스페인 전쟁을 처음에는 찬성(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반대했기 때문)했지만 미군이 벌인 학살을 보고 경악하고서 필리핀 전쟁을 '미국이 저지른 죄악의 상징'이라고까지 비난했던 작가 마크 트웨인은 <전쟁을 위한 기도>(미국에서 1923년까지도 출판이 보류되었다)란 책자에서 '''"하느님, 이 야만적인 백인들을 위하여 제발 기도해주십시오. 백인들의 무식한 짐으로 피가 넘칩니다."'''라는 글로 미국과 키플링을 동시에 깠다. 덕분에 키플링은 마크 트웨인을 무척 싫어했다. 전쟁을 위한 기도는 지금 봐도 상당히 급진적이다. 반전, 반제국주의 성향의 사람들이라면 감명 깊게 볼 수 있지만, 이때가 20세기 초반이고 현재 행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한 비판인 점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용기있는 책이었다.''' 하여간 꼭 삽화와 함께 봐 볼 만하고 유튜브 등에서 볼 수도 있다. 비슷한 책으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전쟁 교본>도 있다. 이것은 마크 트웨인 것보다는 참혹함 대신 비꼬는 성향이 크다. 조지프 콘래드어둠의 심연도 백인의 의무라는 사상이 결국 백인들의 탐욕과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핑계임을 비판하는 소설이다.
이렇게 마크 트웨인과 갈등을 빚었던 키플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술했던 것처럼 아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하자 높으신 분들의 탐욕에 희생되는건 무고한 젊은 이들이라는 반전사상을 설파하는 시를 쓰며 여생을 보낸다. 결국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에 당대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였음에도 제국주의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기 때문인지 키플링의 작품은 오늘날 정글북이 가장 유명하고 그나마 왕이 된 사나이가 조금 알려졌을 뿐, 무려 400여편에 이르는 그의 소설과 시집 등 서적들은 서구에서도 묻혀버렸고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에 와서는 대놓고 이런 주장을 하지는 못하지만 매체의 "백인 구세주" 클리셰처럼 여전히 좌우를 가리지 않고 암암리에 깔려있다는 비판이 있다. 지나친 정치적 올바름 또한 유색인종은 백인의 도움 없이는 혼자 일어서지 못한다는 잠재적인 우월의식을 깔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영화 샤이닝에서 잭 토렌스가 과거의 호텔에 잠식되어 갈 때 바에서 백인의 짐 드립을 친다.

5. 관련 문서





[1] 라이프 지의 삽화, 백인들이 짐을 진다는 인종차별적인 시의 내용과 다르게 이 삽화에서는 오히려 유색 인종들이 백인들을 짊어지고 고생하고 있다.[2] 다만 키플링을 조금 옹호해주자면 일단 키플링의 아들이 원치 않는데 키플링이 억지로 밀어넣은 것이 아니라 키플링의 아들도 원했다. 더욱이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때였는데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어서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경우엔 엄청난 불이익이 뒤따랐다. 즉 키플링의 욕심만이 비극의 원인이 아니라 시대적인 분위기도 한 몫을 했다. 게다가 키플링만 이런 비극을 겪은게 아니고 키플링 자신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당시에는 전쟁 하면 참혹함보다는 공을 세우고 영웅이 되는걸 더 먼저 떠올리던 때라서 참혹함은 생각도 얺은 채 너도나도 전쟁터에 갔다가 죽거나 고생을 실컷 하고 돌아온 후 뱐전주의에 나서게 된 사람이 많았다.[3] 허나 동시에 정말 선의의 목적인 사람을 앞에 내세워 식민지배에 대한 명분을 만들거나 심지어 선교사가 그 앞잡이가 되는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