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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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자 부여창의 일기토로 유명한 전투. 《삼국사기》를 비롯한 국내 사서에선 등장하지 않으며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다. 사실 한국 고대사 관련 사료에서는 그냥 이런저런 상태로 싸웠다 정도로 간략하게 기록되는 경우가 많은데[1] 이 경우 고대 한국의 전쟁치고는 그 진행 양상이 눈 앞에서 이야기하듯 생생하고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2. 배경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에 따라 공동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고구려 남부 땅을 빼앗았지만, 《일본서기》에 따르면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고구려가 신라와 손을 잡아버렸다. 553년 10월 20일, 백제의 왕자 부여창이 대군을 이끌고[2]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위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3] 이에 양원왕이 친히 고구려군을 이끌고 내려오게 되었고, 이 두 전력이 마주한 곳은 백합이라는 이름의 벌판이었다.
3. 전투
백제군은 백합에서 진을 치고 보루를 쌓고 대비를 했었는데 그날 밤에 고구려군이 백합의 벌판에 당도해 고구려군과 마주하게 되었다. 10월 21일 새벽, 고구려군에서 5명의 병사가 나와 "내가 왔다."라며 "그대 이름이 뭔가?"라며 일기토를 신청한다. 이에 부여창이 직접 나서서 "내 성씨는 고구려 왕가의 성씨와 같고[5] 관직은 간솔[6] 이며 나이는 29살이다. 너는 뭐냐."라고 대꾸해주었다. 고대 한반도에서는 중세 일본의 나노리와 유사한 풍습이 있었던 것 같다.(553년) 겨울 10월 경인(庚寅)삭 기유(己酉; 20일), 백제(百濟)의 왕자 여창(餘昌)【명왕(明王)의 아들 위덕왕(威德王)이다】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고려국(高麗國)을 향했는데, 백합(百合)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이날 저녁 바라보니 커다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사람의 자취는 드물고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 갑자기 북치고 피리 부는 소리가 들리니 여창이 크게 놀라 북을 쳐 대응하였다. 밤새 굳게 지키다가 새벽이 되어 일어나 텅 비었던 들판을 보니 군대가 푸른 산처럼 덮여 있었고 깃발이 가득하였다. 때마침 날이 밝자 목에 경개(頸鎧)[4]
를 입은 자 1기(騎), 징을 꼽은 자【징(鐃)인지 아닌지 자세하지 않다】 2기(騎), 표범 꼬리를 끼운 자 2기(騎) 모두 합해 5(騎)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묻기를 "어린 아이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맞이하는 예를 행하지 않겠는가.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미리 알고자 한다."고 하였다. 여창이 "성(姓)은 (고구려 왕실과) 같은 성이고 관직은 간솔(杆率)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백제 편에서 반문하니 또한 앞의 법식대로 대답하였다. 드디어 표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 때 백제(왕자)는 고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여창이) 머리를 창끝에 찔러 들고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 고려군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이 때 백제군이 환호하는 소리에 천지가 찢어질 듯하였다. 다시 그 부장(副將)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고려왕을 동성산(東聖山) 위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그후 고구려 장수와 부여창이 일기토를 시전했는데 부여창이 고구려 장군을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트렸고 그 목을 따서 창에다 걸었다. 이에 백제군이 엄청난 사기를 얻었고 이후 고구려군과의 교전에서 크게 승리해 양원왕과 고구려군을 동성산(東聖山)[7] 위쪽 지역까지 쫒아 보냈다고 한다.
고구려를 일단 격퇴한 백제군은 이후 554년 1월 다음 목표로 신라를 공격한다. 관산성 전투 문서 참조.
4. 여담
참고로 이 일기토 기록은 태조 이성계와 호발도의 일기토와 더불어 한국사에 통틀어 두 개밖에 안 남아있는 구체적인 일기토 기록이다. 일신의 무력만 따진다면 보우마스터 이성계와 더불어 한국사 역대 국왕 중 최고 레벨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
[1] 당장 기벌포 전투만 해도 23번이나 싸웠다는데 그 진행 양상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수준이다.[2]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 전역의 군대를 모아서 출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 참고로 이 해 7월에 백제가 한강 하류 유역을 포기했고, 신라의 장군 김무력이 백제 동북쪽 변두리를 쳐서 신주(新州)를 설치했다.[4] 목에 두르는 갑옷.[5] 물론 당시 고구려의 국성은 고씨였고, 백제는 부여씨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것은 온조왕이 고구려에서 내려왔다는 백제 건국 설화에서도 드러나듯 두 나라의 연원이 같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6] 백제의 16직책 중 하나며 5품의 높은 직책이다.[7] 현재 김포시 월곶 군하리로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