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왕

 


'''고구려 24대 국왕'''
'''陽原王 | 양원왕'''
'''시호'''
'''양원왕(陽原王)'''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
'''양강왕(陽崗王)'''
'''성씨'''
고(高)
''''''
평성(平成)
'''왕태자'''
고양성(高陽成)
'''부왕'''
안원왕(安原王)
'''모후'''
중부인(中夫人)
'''생몰년도'''
음력
?[1] ~ 559년 3월
'''재위 기간'''
음력
545년 3월[2] ~ 559년 3월 (14년)
1. 개요
2. 생애
3.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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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제24대 임금. 는 평성(平成).
양원왕 치세의 고구려는 대내외적으로 악재가 연달아 터지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끝내 고구려가 차지했던 한반도의 중부 영토를 대부분 백제와 신라에 빼앗기면서 광개토대왕 때부터 100여 년간 이어진 고구려의 전성기가 끝나고 급부상한 신라에게 한반도 정세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선대 고국원왕에 못지 않게 난세를 보낸 임금. 내부에서는 추군과 세군의 싸움, 간주리의 난 등 내란이 연달아 터지면서 정치가 어지러워졌고, 외부에서는 돌궐, 백제-신라 연합군 등이 사방에서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에 몰리고 말았다. 그나마 돌궐의 침공은 고흘의 활약으로 물리칠 수 있었지만 551년 백제-신라 연합군에게 한강 유역을 내주게 되었고 이후 고구려는 한강 이북을 몇 차례 공략하기는 했지만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대체로 임진강에서 신라와의 국경이 형성되었다. 칠중성 전투가 예시.

2. 생애


이 해(545년) 고려(高麗)가 크게 어지러워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다.【《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12월 갑오에 고려국(高麗國) 세군(細群)과 추군(麤群)이 궁문(宮門)에서 싸웠는데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세군(細群)이 패하고 군사를 해산하지 않은 지 사흘이 되자 세군(細群)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무술(戊戌, 24일)에 코마노쿠니(狛國, 박국)[3]

누타노스오리코케(鵠香岡上王, 곡향상강왕)[4]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중략)

이 해(546년) 고려(高麗)가 크게 어지러워 무릇 싸우다 죽은자가 2,000여 명이었다.【《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고려(高麗)가 정월 병오에 쿠노 오리쿠쿠(中夫人, 중부인)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나이 8살이었다. 코쿠오리코케(狛王, 박왕)에게는 세 오리쿠쿠(夫人, 부인)[5]

가 있었는데 마카리 오리쿠쿠(正夫人, 정부인)는 아들이 없었다. 쿠노 오리쿠쿠가 마카리 요모(世子, 세자)를 낳았는데 그쪽의 외척이 추군(麤群)이었다. 시소 오리쿠쿠(小夫人, 소부인)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쪽의 외척이 세군(細群)이었다. 코쿠오리코케의 질병이 심해지자 추군과 세군이 각각 쿠노 오리쿠쿠와 시소 오리쿠쿠의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세군의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안원왕의 장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사를 둘러싼 정쟁 속에서 순탄치 못한 즉위를 해야 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546년 안원왕에게는 정부인[6]이 있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중부인[7]의 8살 아들인 평성을 왕으로 옹립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8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는 것. 그러나 공교롭게도 소부인[8]에게도 아들이 있었고 안원왕이 와병 중인 상황에서 중부인의 친가인 추군과 소부인의 친가인 세군이 왕위 다툼을 벌여 추군 측이 승리를 거두면서 세군측 2,000여 명을 몰살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일본서기》에만 전해지고 있는데 타 사서와 교차검증이 되지는 않지만 당시 고구려의 왕권이 불안했다는 방증은 국내 기록을 비롯해 다방면으로 나타나는 탓에 학계에서는 왜곡이 아닌 실제 고구려 정계의 소식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기록으로 남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양원왕은 이렇게 불안한 시국 속에서 즉위했다.[9]
학계에서는 양원왕이 즉위하면서 귀족 연립 정권이 수립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특히 대대로에 관한 기록에서 귀족들이 대대로가 되기 위해 수도 한복판에서 군사를 이끌고 서로 싸우는데 왕은 문을 걸어 잠그고 이를 지켜보기만 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전까지는 국상 등 왕의 지휘를 받는 고위 관료 조직이 중요한 정보였는데 양원왕 이후로는 최고 관등인 관료 직위가 아니라 일종의 직급인 대대로 자리를 놓고 귀족들끼리 분쟁을 벌이는 기사가 증가한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나이 기록대로라면 아들인 평원왕을 상당히 어린 나이에 본 셈이 돼서 다소 의문이 남는다. 죽기 2년 전인 557년에 양성(평원왕)을 태자로 삼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어서 평원왕이 이전 해에 태어난 것은 확실한데 양원왕의 나이 기록은 《일본서기》 외에는 교차 검증이 불가능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특히 《삼국사기》 <안원왕 본기>에는 안원왕 3년(533) 정월에 왕자 양성을 태자로 삼았다는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본서기의 기록과 맞지 않다. '''양원왕의 재위 기간과 아들 평원왕의 존재를 생각해 보면 어린 나이에 즉위한 게 맞더라도 최소한 《일본서기》의 기록보다는 나이가 많았을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548년에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 끼여서 활로를 찾던 가야 연맹의 일원인 안라국의 구원 요청으로 동예 출신의 병사들을 대거 동원해 백제독성산성공격했지만 신라가 구원군을 보내온 탓에 끝내 나제 동맹의 연합군에게 완패하고 말았다.
한편, 북쪽에서는 몽골 초원에서 기존의 강자 유연을 몰아내고 북방의 신흥 강자로써 한참 성장 중이던 투르크계 돌궐유연과 우호 관계에 있던 고구려의 신성백암성을 침공하는 사건이 벌어졌다.[10] 앞서 백암성과 신성을 개축한 적이 있는데 이후 돌궐이 백암성과 신성을 공격했으니 고구려 측에서도 뭔가 낌새를 채고 대비한 모양이다. 이때 고구려의 장군 고흘이 1만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적 1천여 명을 참살하며 그들의 침입을 저지시켰지만 이 전투를 눈치챈 남쪽의 나제동맹군이 한강 유역을 대대적으로 공격해 하류는 백제에게, 상류는 신라에게 그대로 내주고 말았다(...) 이 때 백제의 성왕은 수도 평양성까지 진격하고 싶어했지만 양원왕이 일단 급한대로 신라와 일시적인 화친을 맺는데 성공하여 가까스로 무마시킬 수 있었다.
까딱했으면 고구려 멸망이 100년은 앞당겨졌을지도(...) 백제와 신라는 더이상 연합군을 결성해 고구려로 북진하지 않고 서로 으르렁대기 시작한다.
553년 백합야 전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했지만 패하고 말았으며,[11] 554년에는 관산성 전투 패배 이후 혼란에 빠진 백제의 웅천성을 공격했으나[12]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후 백제까지 때려잡고 잘 나가던 신라군에게 계속 맥없이 당해 한때는 옛 옥저 땅(지금의 함경남도 지역)까지 신라군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진흥왕은 여기에 직접 행차해 둘러보고 진흥왕 순수비를 현재 알려진 것만 2개나 박아놓고 갔으며, 현재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어있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왕족장배왕이 무리를 이끌고 이 시기에 일본으로 망명해 높은 지위를 보장받았다고 하는데, 그만큼 당시 고구려의 내부 사정이 불안정하고 혼란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참고로 북제 박릉 출신의 사신인 최유가 고구려에 파견되어 북위 말기에 고구려로 이동한 북위 유민 5,000호를 돌려달라고 했는데 고구려에서 응하지 않자, 양원왕을 직접 두들겨 패고선 허락을 얻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북사》최유의 열전에만 전해지기 때문에 사실일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삼국사기》에도 없고 《북제서》에도 이런 내용은 전혀 없다. 그리고 북제의 국력을 봤을 때 정말 최유가 그런 짓거리를 했다간 그 자리에서 처참히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당시 북제는 돌궐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근근이 연명하는 안습한 처지였는데 고구려는 쇠퇴기였다고는 해도 양원왕 시절에 신성백암성에 쳐들어온 돌궐을 털어버리며 다시는 덤비지 못하게 했던 나름 강대국이었다.[13]북사》란 사서가 당나라 때 편찬된 사서이고 고구려에 대해선 철저하게 안 좋은 방향으로 왜곡했던 게 그들의 주특기였기에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허구의 기록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위와 같이 고구려가 대내외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에 처해있던 시기라 반란의 적기로 여겼는지 557년 10월에 환도성에서 간주리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한 후 붙잡혀 처형당했다.
동국통감왕산악거문고를 만든 시기가 바로 양원왕 8년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안습의 치세 속에 559년에 승하했으며, 왕위는 아들 평원왕이 잇게 된다.

3.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양원왕 본기'''
一年春三月 양원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二年春二月 배나무가 특이한 현상을 보이다
二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二年冬十一月 동위에 조공하다
三年秋七月 백암성과 신성을 수리하다
三年 동위에 조공하다
四年春一月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도움으로 실패하다
四年秋九月 환도에서 좋은 벼이삭을 바치다
四年 동위에 조공하다
五年 동위에 조공하다
六年春一月 백제가 도살성을 빼앗다
六年春三月 신라에게 2성을 빼앗기다
六年夏六月 북제에 조공하다
六年秋九月 북제가 왕을 책봉하다
七年夏五月 북제에 조공하다
七年秋九月 돌궐의 침입을 물리치다
七年 신라가 10성을 빼앗다
八年 장안성을 축조하다
十年 백제 웅천성 공격에 실패하다
十年冬十二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一年冬十月 호랑이가 평양에 들어오다 잡혔다
十一年冬十一月 금성이 낮에 나타나다
十一年 북제에 조공하다
十三年夏四月 양성을 태자로 삼다
十三年冬十月 환도성에서 반역 사건이 일어나다
十五年春三月 양원왕이 죽다.
[1] 일본서기에는 즉위했을 때 8세였다고 쓰여 있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기록이 충돌하는 등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2] 일본서기 흠명기에 따르면 546년 1월이다.[3] 일본에서는 고구려를 '''박(狛)''', '''駒(구)'''로 표기해놓고 '''코마(こま)'''라고 훈독하였다. 이는 백제에서 부르던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고구려가 백제를 '백잔'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던 것처럼 삼국은 서로를 오랑캐, 짐승 등 나쁜 의미로 부르곤 했다. 현대 일본에서는 '고려(高麗)'를 '코라이(こうらい)'라고 음독하지만, '코마신사(高麗神社)', '코마씨(高麗氏)'의 경우처럼 전통적인 부문에서는 관습적으로 '코마'라고 훈독하기도 한다.[4] 여기서 '곡향'은 '곡림향화(鵠林香火)'라는 불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라고 한다. 이를 근거로 추군은 국내성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던 귀족 불교 세력, 세군은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한 신진 불교 세력이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6세기 이후 국왕 중심적인 불교가 쇠퇴하면서, 추군과 세군으로 나누어진 귀족 불교 세력 사이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한 상황이 닥치게 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5] 백제에서 왕후를 가리키던 말인 '어륙(於陸)'과 동계통의 단어임이 분명하다.[6] 1번째 부인으로 추정.[7] 2번째 부인으로 추정.[8] 3번째 부인으로 추정.[9] 고구려의 승려 혜량이 나라가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신라 거칠부의 손을 잡고 고구려를 떠나 신라로 넘어간 때도 이 시기이다.[10] 이에 대해서는 아직 돌궐이 요동의 고구려에서 저 멀리 떨어진 몽골의 서쪽 귀퉁이에서 유연에게 막혀있던 시기라 이 기록 자체가 시기가 틀렸거나 허구라는 주장도 있으나 당시 유연은 세력이 크게 쇠락한 상황이었고 이듬해 정월 돌궐이 유연을 격파한 위치가 하북성 북쪽의 장자커우 일대였으며, 고구려도 내몽골 깊숙히 거점을 두고 유목민족들을 통제하는 등 서북쪽 국경은 상당히 세력들이 중첩되어 있었던 만큼 둘의 충돌이 불가능하지는 않다.[11] 이 전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일본서기》에만 전해져온다. 이 때 백제의 태자 창과 고구려 장수의 일기토가 전해내려 오는데 엄청난 무력을 앞세워 백제 태자 창이 승리를 거둔다.[12] 당시 구도상 신라 영토인 한강 하류를 통과해서 백제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550년대 초반에 고구려와 신라가 잠깐이나마 손을 잡은 건 《일본서기》나 진흥왕 순수비 등 여러 기록상 거의 분명하다고 봐야하는데, 마침 신라와 손을 잡은 타이밍에 고구려의 역사적 숙적이던 백제를 완전히 짓밟으려던 의도로 보인다. 고구려와 신라가 사이가 벌어지고, 대신 백제와는 가까워지는 건 좀 더 이후의 일이다.[13] 이 때의 대립 이후 고구려와 돌궐은 오히려 같은 주적인 수•당을 둘러싸고 서로 일정 부분 협력하는 사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