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블런트
1. 소개
前 농구 선수. 창원 LG 세이커스에서 뛰었으며, 지금도 프로농구 역대 최고의 외국인선수 논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선수이기도 하다.
2. KBL 입성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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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기록
세인트 조셉 대학교[2] 시절 신입생때부터 3학년때까지 팀의 득점 리더였고, 현재까지도 세인트 조셉 대학교 역대 득점 순위 2위[3] 를 기록 중인 명실상부한 레전드다. 4학년때 무릎부상을 크게 당하는 바람에 시즌 3경기만 뛰고 유급, 1년 뒤인 1994-95 시즌에 복귀하면서 총 5년간 세인트 조셉에서 뛰게되었고, 평균 16.7득점-6.2리바-2.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블런트 재학시절엔 팀성적이 컨퍼런스 내에서도 중하위권 수준이라, 재학시절 한번도 NCAA 토너먼트에 진출하지 못했다.
1995년 NBA 드래프트에서 낙방한 뒤, 1996-97 프리시즌에 워싱턴 불리츠에 합류하기도 했지만 시즌 개막 직전 방출되었다.[4]
3. KBL에서의 활약
블런트는 1997년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에서 전체 16순위로 신생팀인 경남 LG 세이커스에 입단했다.
사실 당시 블런트는 전체 18순위 지명권을 가진 대전 현대 다이냇이 지명하는 것으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LG가 암묵적 동의를 깨고 블런트를 지명해버리면서 현대는 울며 겨자먹기로 다른 선수를 뽑게 되었는데 그 선수가 다름아닌 '''조니 맥도웰'''이다.[5]
그리고 97~98시즌 개막전, 제이슨 윌리포드, 정인교, 주희정 등이 건재한 전 시즌 준우승팀인 원주 나래 블루버드를 상대로 34점을 기록하며 화려한 데뷔전을 치른다. 188cm의 신장으로 외국인 선수치고는 단신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있었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운동능력과 득점력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았고, 이후에도 꾸준한 활약으로 LG의 상승세를 주도한다.
에이스감으로 지목했던 양희승이 부상으로 일찌감치 시즌을 접은 상황에서, 이충희 감독은 나머지 국내 선수들의 수비 조직력를 극대화해 상대의 득점을 봉쇄하고 공격은 오로지 아이솔레이션을 통해 블런트에게 몰아주는 전략을 택했는데, 지역방어가 허용되지 않았던 당시의 프로농구에서 1:1로 블런트를 막아낼 선수는 거의 없었다.[6] 결국 블런트는 평균 25.4득점, 6.6리바운드, 5.5어시스트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고, LG는 28승 17패로 대전 현대 다이냇에 이은 정규리그 2위를 차지했다. 비록 4강 플레이오프에서 허재가 이끄는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에 무릎을 꿇었지만, 어쨌든 블런트는 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키게 된다.
다음 시즌인 98~99시즌, LG는 양희승이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고, 여기에 센터 박재헌의 부상, 그리고 새로운 외국인선수인 아미누 팀버레이크의 저조한 득점력 등이 겹치면서 블런트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심해지게 된다. 블런트는 두 차례의 트리플 더블을 기록했으며 1999년 1월 17일 원주 나래전에서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인 52점을 쏟아붓는 등 시즌 내내 팀을 먹여살렸고, 29.9득점(리그 1위), 9.2리바운드, 4.6어시스트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친다. 블런트의 맹활약 덕에 LG는 정규시즌 5위로 간신히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지만, 정규시즌 내내 홀로 팀을 지탱하느라 체력이 바닥난 블런트는 플레이오프에서 평균 16점에 묶이는 부진을 보였으며, 팀도 일찌감치 탈락한다.
3.1. 이중계약 파문
시즌이 끝난 후 LG는 블런트와의 재계약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결혼식에 프런트 직원을 보낼 정도로 정성을 쏟았고, 블런트도 흔쾌히 재계약에 동의했다. 하지만 99~2000시즌을 목전에 둔 11월 1일, 블런트는 돌연 구단을 이탈해 미국으로 야반도주한다. 그리고 11월 4일, 미국 하부리그인 IBL의 트렌튼 스타즈 로스터에 블런트의 이름이 올라온다. 이른바 이중계약을 한 것.
참고로 IBL은 99~00, 00~01까지 존재한 리그로 선수수준도 낮고 장사도 안돼서 두 시즌만에 망했다. 당시 블런트의 연봉 수준은 알려진게 없지만 NBA 정식 하부리그인 G리그의 연봉수준은 2017시즌까지 1만9천에서 2만6천 달러 사이였다. 또 다른 하위리그인 ABA는 '''샐러리캡'''이 10만달러다. 당연히 20년전인 당시엔 이것보다 훨씬 적게 받았을 것이므로, LG가 주던 8만 4천달러 연봉과 비교가 안된다.
사실 KBL은 리그 자체가 선수들에게 어필하는 요소가 거의 없기 때문에(영미권 선수들에겐 낯선 문화권인데다가 경기력 수준이 낮아 여기서 아무리 잘해봤자 NBA진출에 하등 도움이 안된다) 외국인선수들 대접을 무지하게 잘해주는 편이다. 2000년대 중반에 도저히 KBL연봉 수준으로 못 데려올 선수들이 뛸 당시엔 이들이 계약외 수당을 받는다는게 공공연한 비밀로 잡지 루키에서 기사도 나온 적이 있으며, 세금도 안 떼고 온갖 편의를 봐준다. 본인이 왕대접받을 수 있는 리그를 포기하고 미국에서 눈물젖은 빵을 먹기로 결심한 건 NBA를 향한 미련이 남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블런트의 대학시절 기량은 대단해서 2016년에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팬사이트 중 거의 준 언론 수준으로 규모가 큰 사이트에서 나온 글에서도 그의 이름이 언급된다. (https://thesixersense.com/2016/10/07/philadelphia-76ers-injuries-harkens-back-to-st-joes-basketball/) 여기서 블런트는 "(스테픈) 커리와 같은 엄청난 잠재력을 지녔으며 진짜배기 NBA스코어러의 기질을 지녔다"고 묘사되며 부상 전까지 프로(NBA)가 될 가능성이 높은 선수였다고 언급된다. 무려 23년 뒤에도 팬들에게 언급될 정도로 뛰어난 대학선수였다는 소리. 부상만 아니었으면 NBA가 결코 꿈이 아닌 선수였던 만큼 젊은 나이에 현실을 받아들이고 안주하긴 아쉬웠을 것이다. 물론 이게 자신을 믿어준 구단과 팬들을 배신 때리고 불법 이중계약을 해서 쥐새끼처럼 도망친 걸 정당화해주는 건 결코 아니다.
개막을 앞두고 졸지에 에이스를 잃어버린 LG로서는 어안이 벙벙했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아낸 KBL은 블런트가 타국 리그에서 활동할 수 없도록 강경하게 조치를 취했다. 블런트의 이탈로 전력에 큰 타격을 입은 LG는 주전 선수들의 줄부상과 더불어 대체 외국인 선수들이 힘을 쓰지 못하며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신생팀인 LG를 최고의 인기구단으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던 선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에는 LG를 추락시킨 장본인이 된, LG 팬들에게 있어서는 말 그대로 애증의 선수였다.
이후 블런트가 해외리그 진출을 위해 신분조회 신청을 할 때마다 창원 LG는 '''"절대 계약해선 안 되는 선수"'''라고 회신하며 소심한 복수를 해왔다.
4. KBL 이후
야반도주 끝에 미국 하부리그 IBL로 떠나버린 블런트는, 이후 유럽의 포르투갈 리그와 미국 USBL 등을 돌며 총 8시즌 동안 프로선수로 활약하다 은퇴한다.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간 블런트는 지역 유소년팀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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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즌별 성적
6. 관련 문서
[1] 4학년 때 부상으로 유급하는 바람에 1년을 더 다녔다.[2]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 인근에 있는 대학교다.[3] 1위는 올랜도 매직에서 오래 뛰었고 현재 뉴올리언스 펠리컨스 소속인 자미어 넬슨(2000~2004)이다.[4] 당시 크리스 웨버도 있었고 동부 8위로 플레이오프에도 진출했으며 방출당하지 않고 실력을 인정받았다면 8~90년대 레전드 선수들(조던, 피펜, 하킴, 드렉슬러, 바클리, 말론, 스탁턴, 유잉, 데이비드 로빈슨, 밀러, 로드맨, 멀린, 케빈 존슨, 팀 하더웨이)과 팀 메이트 웨버를 비롯하여 페이튼, 켐프, 페니, 힐, 샤크, 키드, 모닝, 가넷 및 당시 루키 시즌인 아이버슨, 알렌, 코비, 내쉬 등 젊은 선수들과도 뛰는 영광을 누렸을 것이다.[5] 트라이아웃이 끝난 후, 숙소로 돌아온 현대 신선우 감독은 분을 참지 못하고 LG 이충희 감독에게 쓰레기통을 집어던졌다고 한다.(...)[6] 해설진이 반 농담조로 LG전은 블런트를 20점 내로 묶으면 이기고 3,40점을 넣도록 못 막으면 진다고 말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