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니 맥도웰
1. 소개
대전 현대의 중흥기를 이끈 외국인 농구선수이자, KBL 초창기 최고의 언더사이즈 빅맨 중 하나였다. 현재 외국인 선수 득점 2위 7,077점에 기록되어 있다. 1위는 애런 헤인즈.
2. KBL 입성 전
NJCAA[1] 소속의 하워드 칼리지에서 2년을 보내고, 1991년 텍사스 알링턴 대학교[2] 에 편입해 2시즌을 보냈다. 팀이 워낙 약체였던 탓에 겨우 6-5(196cm,미국신장)[3] 의 맥도웰이 센터와 파워포워드를 오가며 골밑을 지켜야했고, 2시즌 내내 팀내 최다 득점과 리바운드를 올렸다.(2시즌 평균 16.9득점-9.7리바운드-2.7 어시스트)
1993년 졸업 후 NBA 진출에 실패한 맥도웰은 미국 하부리그인 USBL[4] 의 마이애미 트로픽스에서 1시즌을 뛰었고, 이후 스페인 4부리그팀인 히혼 발론세스토에 입단해 2시즌을 뛰는데, 1994-95 시즌에는 히혼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3부리그에 진출시켰지만, 바로 다음시즌에 리그 최하위에 그치며 다시 4부리그로 추락했고, 맥도웰은 팀과 이별했다.
이후 1997년 여름 KBL 트라이아웃에 지원한 맥도웰은 20명의 선수 중 전체 19순위로 대전 현대의 지명을 받으며, 낯선 동아시아 국가에 발을 내딛었고, '''그렇게 전설이 시작되었다.'''
3. KBL에서의 선수생활
3.1. 대전 현대 다이냇/걸리버스 (1997~2001)
KBL 시절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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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조니 맥도웰. 오른쪽에는 제이 웹. 사실 대전 현대 입장에서는 나중에 LG에서도 혼자 팀의 공격을 이끈거나 마찬가지였던 세인트 조셉 대학교 출신의 득점기계 버나드 블런트를 지명하려 했지만, 이충희 당시 LG 감독이 암묵의 룰을 깨고 지명해 버리자 신선우감독이 힘이 좋아 보이던 맥도웰을 뽑았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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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힘이 뛰어난 맥도웰은 단단한 체구와 파워를 바탕으로 KBL 내 다른 팀의 골밑을 박살내는 활약을 펼쳤다. 힘이 워낙 좋은 선수였던지라 매치업에서도 밀리지 않는 활약을 펼친데다, 팀의 동료는 국내에서도 손꼽히던 라인업인 전설의 이, 조, 추 라인업이었다. 특히 이상민의 볼배급이나, 이상민과 보여주었던 2:2 픽앤롤 플레이는 호사가들이 한국의 존 스탁턴과 칼 말론의 픽앤롤에 비견할 정도의 파괴력을 갖춘 것이었다. 와도 훌륭한 호흡을 자랑했던 맥도웰이 있었기에 대전 현대는 90년대 후반 KBL의 지배자로 군림할수 있었다.
대전 현대 시절 맥도웰의 업적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2시즌 연속 (1997~1999) 챔피언결정전 우승
- 3시즌 연속 (1997~2000) 챔피언결정전 진출
- 3시즌 연속 (1997~2000) 정규리그 1위
- 3시즌 연속 (1997~2000) 최우수 외국인 선수상
- 3시즌 연속 (1997~2000) 베스트 파이브
1997~2000 3시즌 동안 제이 웹(201cm), 로렌조 홀(203cm) 등 파트너가 바뀌는 와중에도 "골밑의 지배자" 맥도웰의 위치는 굳건했고, KBL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3년 연속 외국 선수상'''을 차지한다.[6] 오죽했으면 99-00 시즌 챔프전 준우승에도 불구하고 재계약 하려했던 센터 로렌조 홀은 "더이상 맥도웰의 그늘 아래 있기 싫다"면서 재계약을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로렌조 홀이 재계약을 못한건 그거 외에도 너무 강한 힘과 거친 플레이로 부상자들이 속출하자 다른 9개 구단들이 담합해서 홀을 재계약하면 가만 안있겠다고 들고 일어나서인 탓도 있다.
00-01 시즌들어 갑자기 "토털 바스켓볼"병에 걸린 신선우 감독이 정통 센터 대신 스윙맨 데이먼 플린트(195cm)를 데려오면서 맥도웰이 센터로 나서야했고, 190.5cm의 단신센터 맥도웰은 , 무스타파 호프(200.7cm) 등 떡대 센터들을 상대로 고군분투 했지만 팀성적은 리그 6위까지 추락하고 만다. 이 와중에 맥도웰은 자신의 포지션과 팀 운영방침에 대해 신선우 감독과 갈등을 일으켰고, 시즌 종료 후 재계약에 실패하며 4년간 몸담아 온 대전 현대와 이별한다.
3.2. 인천 SK 빅스 (2001~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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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시즌에도 맥도웰은 팀내 득점-리바운드-어시스트-스틸-블록까지 전부 팀내 1위를 기록했고, KBL 입성이후 6시즌 연속 20-10의 기록을 이어나갔지만, 조동현 등 주전들의 줄부상에 센터 외인들의 부진이 겹치며 팀은 7위로 플옵진출에 실패한다.
3.3.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 (2003~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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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SK와 재계약에 실패한 맥도웰은 다시 트라이아웃에 지원, 2라운드 전체 15순위로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 최희암 감독의 선택을 받는다. 하지만 만 32세의 맥도웰은 급격히 노쇠한 모습을 보이면서 03-04 시즌 새로 영입된 찰스 민렌드, 앨버트 화이트 같은 테크니션 4번들에게 탈탈 털렸고, 팀이 최하위로 추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맥도웰은 4라운드를 채우지 못한채 중도 퇴출되며, 화려했던 과거와 이별하게 되었다.
4. 시즌별 성적
5. 이후
- 2019년 4월 7일 ~ 4월 14일 (3회 ~ 4회) tvN 예능 미쓰 코리아 3회 방송에 등장해 은퇴를 한 계기가 당시 두살의 아들을 위해 농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자신의 옛동료였던 이상민과 조성원의 영상편지를 보고 반가움과 함께 눈물까지 보였다. 영상
6. 플레이 스타일
파워를 앞세워서 매치업 상대를 누르고 골밑을 휘저었고, 리바운드를 잘 따냈다. 사실 힘만 단순히 좋은 플레이어가 아니었고 펌프 페이크나 포스트에서 드롭 스텝, 준수한 스피드와 속공에서 트레일러 역할 등 신선우 감독의 전술에 잘 따르는 선수였다. 나름대로 미들슛도 갖춘 선수였다. 게다가 시야가 넓고 패싱 센스도 좋은 편이라 한 시즌당 평균 4개의 어시스트를 해줄 능력을 갖춘 선수였다.
KBL은 첫 시즌 당시 각 팀이 191㎝ 이하의 선수 1명과 191㎝~203㎝의 선수 1명으로 단신 가드와 장신 빅맨 조합으로 외국인 선수를 뽑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첫 시즌은 그에 맞게 제럴드 워커(안양 SBS), 칼 레이 해리스(원주 나래)등의 가드 용병이 활약하기도 했다. 허나 정작 리그를 제패한 팀은 클리프 리드를 단신 선수로 뽑아 4번으로 쓰고 다른 외국인 선수인 로버트 윌커슨(193cm)를 5번으로 빅맨 쓴 기아 엔터프라이즈였다. 이런 트위너 빅맨 2인 용병조합으로 골밑을 용병으로 점령하여 흥한 기아 엔터프라이즈를 벤치마킹해 단신 빅맨 혹은 유사시 3번으로도 뛸 수 있는 선수를 찾는 팀들 역시 있었고, 그런 환경에서 현대 다이넷이 찾아낸 선수가 바로 조니 맥도웰.
맥도웰은 NBA나 유럽 등의 상위리그에선 빅맨으로 뛰기에는 한계가 있는 신장이지만, 아시아 리그인 KBL에선 충분히 골밑을 박살낼 수 있는 힘과 능력의 소유자였다. 재키 존스등의 센터 파트너와 함께 실질적인 4-5번 콤비로 골밑을 휘젓고, 외곽에서도 플레이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모습으로 KBL을 제압했다.
이렇게 단신 선수 기준으로 빅맨 역할을 하는 선수들이 계속 나오자, KBL은 최대 키 208cm 한계에 두 선수 합계 398cm 안에서 마음대로 선수를 뽑을 수 있게 기준을 바꾸었고, 이렇게 되자 모든 팀들이 기준 안에서 외국인 선수들을 2빅맨 혹은 1트위너+1빅맨 으로 뽑아 채우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서장훈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인 빅맨은 전멸하고 기존에 인사이더 보던 선수들이 스몰 포워드 자리로 밀려나 트위너가 되었다. 클리프 리드와 맥도웰은 KBL에서 한국인 빅맨들을 반쯤 멸종시킨 최강의 골밑 조합이었던 것. 그리고 역시나 2000년대 KBL 용병 역사를 적을 때 포지션에 PF, C만 꽉 차게 만든 장본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8]
그러나 이후 외국인 선수 제도의 개편으로 매치업 상대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노쇠화로 자신의 운동능력이나 파워가 감퇴하면서 자연스랍게 하락세가 찾아왔고 한국농구 커리어를 마감하게 되었다.
7. 기타
- 한국 문화에 큰 거부를 드러내지 않고 받아들이고, 팀원들과 친화력 있게 지내려는 모습으로 한국형 용병 타이틀을 얻으며 많은 인기를 끌었다. 다만 간혹 감독들에게 뒷돈을 요구했다는 의혹이 있는데, 당시 잘나가던 용병들은 누구나 크고작은 뒷돈 의혹을 달고 다니던 시절이었기에 설령 사실이라 해도 맥도웰 한명만을 비난하긴 어려운 문제이다.
- KBL에서 오래 뛰어서 한국과 한국 팬들에 대한 애정이 깊어져서 2004-2005 시즌때 귀화 및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 2011-2012시즌 올스타전 당시 레전드 올스타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몇몇 외국인 OB를 초청하려는 계획이 있었고, 맥도웰에게도 참여해 달라는 연락이 와서 맥도웰 역시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KBL에서 취소했다고(...).
- 링크드인 페이지도 있는데, 최근에는 미국에서 중견 물류회사[9] 에서 근무하고 있었다가 퇴직한 것으로 보인다. KBL 20주년 기념 레전드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에 기뻐했고 초창기 전성기를 이끌었던 과거 동료들과 만나고 싶다고 인터뷰했다.
- 2017-18시즌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에 대체 외국인 선수로 영입되었던 브랜든 브라운이 제2의 맥도웰이라 불리며 기대를 모았다.[10] 다음 시즌 브라운은 맥도웰이 몸담았던 팀의 후신팀으로 갔다.
- 2019년 4월 7일 ~ 4월 14일 (3회 ~ 4회) tvN 예능 미쓰 코리아 에서 은퇴후 근황이 공개되었다.
- 자신의 현역시절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며 눈가가 촉촉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팀원들과 버스를 타고 지냈던 것이 그립다는 말을 했다. 아무래도 본인이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한 리그이기도 하고,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국내선수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등 만족스런 선수생활을 보냈기에 여러모로 그리움이 남은 모양.
- 멕도웰이 97-98 챔프전 5자천에서 서장훈 못지 않게 예능인으로 활약 중인 허재와 리바운드 경합 과정에서 본인의 팔에 맞아 부상당해서 눈썹 주위에 피를 흘리는 레전드 장면을 만들게 함과(?) 동시에 허재를 챔프전 투혼의 사나이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8. 관련 문서
[1] National Junior College Athletic Association. 1938년에 창설된 미국 내 2년제 대학교들의 스포츠 경기를 관할하는 단체다. 남자종목은 1,2,3부로 나뉜다. 4년제 대학들의 단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NCAA다.[2] University of Texas at Arlington. 댈러스와 포트워스 중간에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텍사스 대학교는 오스틴에 있다.[3] 하술하겠지만 실제 신장은 190cm 정도로 NBA의 포인트 가드나 슈팅 가드의 신장이다. 미국 선수들은 신장 측정 시 신발을 신고 재거나 1인치를 올려서 말하는등 실제 신장과 프로필 상 신장이 다른 경우가 제법 있다.[4] 야구의 마이너 리그처럼 유망주들의 리그이며 이 곳에 기량을 갈고 닦아 NBA나 유럽 농구리그로 진출하려는 선수들이 주로 뛰었다. 2008년부터 리그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5] 트라이아웃이 끝난 후, 숙소로 돌아온 대전 현대 신선우 감독은 분을 참지 못하고 창원 LG 이충희 감독에게 쓰레기통을 집어던졌다고 한다.(...)[6] 마르커스 힉스가 2001~2003 2시즌 연속 수상한걸 마지막으로, 외국 선수상을 2연패한 선수는 한명도 없을 정도다.[7] 하지만 6강 플레이오프에선 5위팀 창원 LG에 어이없게 2연패를 당하며 탈락한다. [8] 극 소수 가드 포지션 등록선수가 있었으나 대부분 대체용병 수준에 그쳤고, 꾸준하게 나왔던 선수는 팀에 서장훈이 있어서 굳이 빅맨슬롯을 채울 필요가 없었던 팀에 따라다녔던 장신 스윙맨 용병 로데릭 하니발외엔 2000~2010년간은 가드용병이 씨가 마르다시피 했다.[9] 독일 슈넬렐케 그룹의 미국사업부. 이전에는 BLG로지스틱스에서 근무했다. 근처에 벤츠공장이 있어서 하청업체로 보여진다. 특기사항으로 구사가능 언어에 한국어와 스페인어가 있다.[10] 빅맨치고는 작은 키(브라운이 193.9cm), 엄청난 파워, 키에 비해 엄청나게 긴 윙스팬(윙스팬이 무려 221cm이다.) 등 비슷한 점이 매우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