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헌

 



'''박재헌의 수상 및 명예 '''
[ 펼치기 · 접기 ]









'''창원 LG 세이커스 코치'''
'''CHANGWON LG SAKERS'''
'''박재헌
朴載憲 / Jae-Hoen Park'''
<colbgcolor=#c30452> ''' 출생 '''
1973년 4월 20일 (51세)
[image]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1]
''' 국적 '''
[image] 미국[2]
''' 신체 '''
200cm|체중 97kg
''' 직업 '''
농구선수(센터 / 은퇴)
농구코치
''' 종교 '''
개신교
''' 학력 '''
Artesia H.S. (졸업)
UC 데이비스 (자퇴)
고려대학교 (졸업)[3]
''' 프로입단 '''
1997년 창원 LG 세이커스 창단멤버
''' 병역 '''
[image] 공익근무요원 소집해제[4]
''' 소속 '''
''' 선수 '''
[image] '''창원 LG 세이커스(1997~2004)'''
[image] 서울 SK 나이츠 (2004~2006)
'''감독'''
[image] 청주 KB 스타즈 (2015 / 대행) [5]
'''코치'''
[image] 청주 KB 스타즈 (2013~2015)
[image] 청주 KB 스타즈 (2015~2016 / 수석코치)
[image] 창원 LG 세이커스 (2017~ )
1. 개요
1.1. 고교-대학 시절
1.2. 프로 시절
1.3. 국가대표
2. 은퇴 후
3. 지도자 생활
4. 플레이 스타일
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캘리포니아 특급"이란 별명, 센터로서 KBL에 이름을 남겼던 선수.

한국의 전직 농구선수이며 포지션은 센터였다.
미국에서의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농구선수로서의 인생을 선택하였다. 선수생활이 한창이던 33세 때 미국 영주권 만기 문제로 인해 캘리포니아로 떠나면서 아쉽게 선수생활을 마쳤고, 현재 코치로 활약 중이다.
창원 LG 세이커스의 창단멤버이자 창단 주장이었고 2004년까지 활약한 이후 2017년에는 은퇴 이후 무려 13년만에 코치로 돌아온 리얼 LG 맨이다.
2020년에는 수석코치로서 활약하고 있다.

1.1. 고교-대학 시절


서울 대방초등학교 5학년 때 농구를 시작하여, 전희철, 김병철등과 함께 선수 생활을 했다. 허재의 모교이기도 한 용산중학교에 진학하였으나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하면서 농구를 그만두었다.
미국 학교에 잘 적응하며 지내다 우연히 학교 관계자 눈에 띄어 Artesia 고교에 진학하면서 농구를 다시 시작했다. JAY PARK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전미 고교농구 최우수 선수였던 에드 오배넌 형제와 함께 Artesia 고교의 돌풍을 주도하였다.[6]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UC 데이비스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연세대에게 서장훈을 빼앗기고 발을 동동 구르던 고려대학교 박한 감독의 제안을 받고 귀국하여 고려대학교 93학번으로 입학하게 된다.[7] 서장훈 선수도 훗날 미국 유학길에 올랐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대학농구 센터가 미국 대학리그 에서 게임 한번 뛰어 보기 힘든 밴취맨버로 다시 한국을 돌아왔기도 했듯이 ,미국농구와 한국농구는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며 다만 본토 농구와는 여러가지로 다른 한국농구에 적응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시적으로 힘든 부분이었을 것이다.
전미 최고의 고교선수 에드 오배넌과 환상의 콤비를 이루며 "무명의" Artesia 고교를 캘리포니아 주 최강으로이끈 컨퍼런스 No.3 수준 센터. 여기까진 진실이다 BUT 신장 205cm, 서전트 점프만으로 링을 부술듯한 덩크를하고 흑형급 탄력의 만능 파워포워드."""이건 오버 기사인 것이다 !!!!!덩크만 하면 농구를 잘하고 , 꼴때를내려찍고 부서야지 최강파워 플레이어인가 !! 어것이 어이없는 그시절 한국농구 관점이라 본다 . 동양인 센터가굳이 무엇때문에 덩크를 하고 링을 부서버릴듯이 플레이를 한다고 호들갑을 떨어댔는지는 참으로 웃긴일다 . 휘문고 시절부터 한국 농구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아온 서장훈과 달리 박재헌은 국내에 한번도 선보인 적 없는 선수다보니, 소문은 또다른 소문을 낳았고 심지어 박재헌이 가세한 고려대를 1993년 12월에 열리게 될 1993-94 농구대잔치 우승후보로 꼽는 전문가가 나타나기도 했다.유례 없는 관심 속에 1993년 3월 23일, 박재헌은 1993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 2회전 명지대와의 경기에서 국내 데뷔 무대를 가졌고, 팀은 대승했지만 주전센터로 나선 박재헌은 8득점 8리바의 평범한 스탯에 그쳤다. 같은 날 데뷔전을 치른 서장훈이 25점 9리바의 압도적 활약을 펼친 것과 많이 비교되긴 했지만, 이제 겨우 첫 경기고 이틀후 연세대와의 맞대결 때 박재헌의 진면목이 나올 것이란 기대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승자준결승에서 고려대와 맞붙은 연세대는 87:69로 완승을 거뒀고 "양교 기둥센터" 중 서장훈이 20득점 11리바운드를 기록한 반면 박재헌은 7득점 2리바운드의 초라한 기록만 남기며. 이날 경기에서 30득점을 퍼부운 연세대 모선수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박재헌의 플레이는 어떤 것 같냐?'는 질문에 "미국에서 왔다고해서 기대를많이 했는데, '별거 아닌 것 같습니다' 라도 했다 한다 그럼 본인도 그별거아닌 미국무대에서 함 뛰어보심이 어떠신지?? 같은 선수로서 그런발언은 참으로 경솔하다는 생각이든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대답인 것이 국내 모든 프로 ,아마추어 구단까지 매년 본토 농구 배우러 많은 경비를 쓰면서 매년 미국을 향하고 있는게 웃기는 부분이다!!!! 별겨아닌 미국정통농구를 말이지 ....다시 돌아보자 MBC배를 이후 여름 훈련기간 내내 절치부심한 박재헌은 이후 모두가 아는 수비형 센터로 완벽하게 변신 하면서의 약점을 완벽히 상쇄하였고(수비형 센터 이런말또한 웃김 ) 기회는 항상 맘껏던지라고 하는 일부 선수에겐 ,,,이쯤하자...전희철-박재헌 더블포스트의 활약 속에 고려대는 라이벌 연세대, 중앙대를 각각 격파하면서 9월과 12월 993 대학농구연맹전|1, 2차연맹전을 모두 석권2차 연맹전은 중앙대와공동 우승하며 시즌 2관왕에 오른다. 비록 소문 속의 흑형급 탄력이나 화끈한 공격력은 없었지만 다른 대학팀센터들보다(( 월등한 프레임을 적절히 활용해 몸싸움))으로는 서장훈과도 비등할 정도였고, 무엇보다 탁월한 박스아웃으로 리바운드를 충실히 잡아준 덕분에 장신의 맘놓고 중거리슛을 쏠 수 있었다. 박재헌의 (((헌신)))덕분에 고려대는 1993-94 농구대잔치에서도 돌풍을 일으키며 정규리그 4위로 8강까지 진출한다.
재미교포 출신 선수라는 특이사항에 잘생긴 외모 유창한 영어실력 , 성실함 그리고 본인의 입학 직후 소속팀고려대가 대학농구 강호의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 데뷔 첫 해부터 팀의 주득점원이 된 박재헌역할이 더 컸다.한국농구계에 새로운 화제거리가 되었고,1993-94 농구대잔치|농구대잔치 와 같은 시기에 방영된 드라마 마지막 승부에서 박재헌을 롤모델로 한듯한 재미교포 선수 '마이클 최'라는 역활이 나오기도 했다.
1학년 때부터 국내농구에 적응을 완료하면서 1994 시즌의 활약을 더 기대하게 하였으나, 고려대 94학번 현주엽이 등장은 박재헌의 대학시절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1994년 3월 열린 MBC배 결승에서 박재헌은 서장훈을 육탄방어하며 전시즌 농구대잔치 우승팀인 연세대에 대역전극을 펼치며 우승하였고 박재헌은 MVP까지 수상한다. 1994년 한해동안 전희철과 현주엽이 국가대표에 연이어 차출되면서 자리를 비운 사이, 박재헌은 신기성. 김병철, 양희승 등1994 대학농구연맹전 1, 2차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데 기여하지만, 국가대표 멤버들이 모두 복귀한 1994-95 농구대잔치부터는 벤치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당시 고려대 박한-임정명 코칭스탭은 신기성-김병철-양희승-전희철-현주엽의 베스트 5만 주구장창 돌리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유는 있지만 여기서 밝히진 않겠다 . 이로 인해 박재헌, 등의 지나치게 훌륭한 벤치멤버들은 웬만큼 가비지 타임이 나지 않으면 출장기회를 잡기가 힘들었다. 고려대가 대승하는 경기에서 마지막 5분 정도씩만 뛰면서 겨우겨우 감을 이어가던 중, 농대 정규리그 마지막경기였던 연세대 전에서 서장훈의 마크맨으로 깜짝 출장하게 된다. 덕분에 가비지타임이 꽤나 많이 나오면서 박재헌, 박훈근 등 후보선수들에게도 기회가 자주 오긴 했지만, 게임 집중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풀게임을뛸수없는 5분 맴버로서 맘껏 보여줄수도 할수도 없는 기회 훌륭한 선수 썩히기는 아주쉬운것같다 .1995년 고베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표팀 감독이었던 명지대 진성호 감독은 서장훈이 빠진 유니버시아드팀에 고려대 백업센터 박재헌을 선발하면서 전체 엔트리 12명 중 고려대 선수만 6명(박재헌 ,신기성,김병철 ,양희승,전희철,현주엽이 뽑히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1996시즌, 전희철이 졸업하면서 다시 주전센터가 된 박재헌은 미국에서 갓 귀국한 서장훈을 잘 마크하며 고려대의 1996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 우승에 기여이렇게 박재헌의 대학시절은 후보 신세로 마무리되고,동기이자 국가대표팀 포워드 양희승과 같이 신생팀 입단하게 된다.

1.2. 프로 시절


[image]
선수 초년인 창원 LG 세이커스 시절[8]
[image]
선수 말년인 서울 SK 나이츠 시절
대학 시절 만년 후보였던 선수가 프로에서 얼마나 하겠냐 싶었지만, KBL 데뷔후 박재헌은 180도 달라진 모습과 본인의 잠재속에 있던 본토 미국농구의 탄탄한 기본기를 사용하며 1997-98 시즌 신생팀이던 경남 LG 세이커스 돌풍의 중심이 되었다. 지금이야 무능한 감독의 대명사로 불리는 이충희 감독이지만 이 때만 해도 KBL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던 명장으로 손꼽혔는데, 주전 라인업 중 버나드 블런트를 제외하곤 모두 수비에 일가견 있는 선수들과 로버트 보이킨스)로 구성하면서 원조 "짠물농구"를 통해 팀을 '''창단 첫 시즌에 정규리그 2위까지 올려놓았다.'''
특히 박재헌은 고려대 벤치 시절의 울분을 토해내는 듯(5분밖에 기회가 없었던 고대 시절) 게임당 평균 30분 이상 출전하며 적극적인 몸싸움으로 제이 웹(201cm, 대전 현대), 존 스트릭랜드(200cm, 수원 삼성) 등 외인 센터들을 상대했고, 덕분에 다른 팀 장신 외국인 선수들보다 상대적으로 높이가 낮았던 골밑 파트너 로버트 보이킨스(194cm)[9]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비록 팀은 플레이오프 4강에서 허재기아를 만나 패했으나, 박재헌은 1997-98 시즌 '''KBL 기량발전상''' 및 '''수비 5걸'''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1998-99 시즌에는 다소 부족한 기량의 파트너 아미누 팀버레이크(202cm)와 함께 골밑을 지키면서도 팀을 정규리그 5위로 플레이오프까지 이끌었고, 박재헌 개인은 2시즌 연속 '''수비 5걸'''에 이름을 올리며 이 활약을 바탕으로 1999 후쿠오카 아시아선수권 대회 대표팀으로 출전했다. 그시절 저녁뉴스 경기 인터뷰는 항상 승리의 주역이었던 박재헌이었다 .
1999-00 시즌까지 마친 후, 재미교포 1.5세대임에도 병역 해결을 위해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였고 부상재활까지 마친 후 2003-04시즌 창원LG로 복귀하였지만, 이때는 이미 골밑이 완벽히 외인들 차지가 되어버린후였다.골밑에서 박재헌은 주전센터로서 출장시간이 대폭 감소하고 만다. 01-02 시즌 이후부터 서장훈, 김주성을 제외하곤 주전으로 뛰는 토종 빅맨은 찾아볼수 없었다. 2003-04 시즌을 마치고 FA가 된 박재헌은 서울 SK 나이츠로 이적했고 2005-06 시즌 종료 후 박재헌이 갑자기 은퇴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유는 미국 영주권 유지를 위한 영구 귀국.
중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 간 박재헌은 고려대 입학 후에도 미국 영주권을 유지하며 비시즌마다 미국을 오가고 있었는데, 2005년 미국 입국 당시 실제로 미국에 거주하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미국 영주권을 박탈하겠다고 경고하였다. 박재헌은, 비록 한국에서 병역의무까지 완수했음에도 결국 미국에서의 생활을 선택하고 서울 SK 나이츠에서의 잔여연봉을 포기한 채 은퇴, 캘리포니아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서장훈 이후 센터가 약해지만 서울 SK는 백업센터진에 큰 구멍이 생기게 되고 김선형최부경의 입단전까지 플레이오프 연속 탈락기록을 이어나간다.

1.3. 국가대표


1997-98 시즌 창원 LG에서의 맹활약 덕분에 1998 아테네 세계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국가대표팀에 처음으로 선발되지만, 이 때 무릎 연골 수술을 받으면서 최종 엔트리에선 빠진다. 이로 인해 중앙대 1학년 센터 김주성이 국가대표팀에 대신 합류하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도 역시 이름을 올렸으나 부상 회복이 덜되어서 역시 합류하지 못했고, 인천 대우 제우스의 토종센터 이은호가 대신 합류하였다.
연이은 부상으로 인해 박재헌의 국가대표팀 출전은 1999 후쿠오카 아시아선수권 대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되었다. 전희철이 공익근무로 인해 국가대표팀 차출이 안되면서[10] 대표팀 골밑은 부동의 주전 현주엽-서장훈에 백업으로 박재헌, 이은호, 정경호로 구성되었는데, 박재헌은 이들 백업센터 중엔 언제나 No.1이었다.

2. 은퇴 후


은퇴 후 가족들이 거주하던 캘리포니아로 돌아갔고 이후 컴퓨터 관련 회사에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일을 시작해 많은 사회경험을 생활했지만 농구에 대한 미련을 버릴수가 없어 그만두었다.

3. 지도자 생활


2013-14 시즌을 앞두고 WKBL의 전통있는 팀인 청주 KB 스타즈의 신임 코치로 부임하게 된다.
모교 선배인 서동철 감독의 요청속에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2015-16 시즌 직전에는 수석코치로 승진하여 서동철 감독을 보좌하는가 하였으나, 서동철 감독이 십이지장 종양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으면서 갑작스레 ~감독대행~ 으로서 한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감독 부재속에 시즌 내내 고전하던 청주 KB 스타즈였지만 시즌 막판 극적인 7연승을 달리며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하며 해피엔딩으로 시즌을 마치게 되었지만 챔피언결정전 진출 실패의 책임을 지고 서동철 감독과 함께 팀에서 물러났다.
2017년 4월 27일 창단멤버 출신으로 주장을 맡았던 친정팀인 창원 LG 세이커스 코치로 부임하였다.
후배인 현주엽 감독의 요청 속에 센터들을 맡게 되었다. 팀이 2018-2019 시즌부터 D 리그를 운영하면서 간간히 D 리그에서도 감독역할을 하기도 했다.
3년 뒤 현주엽 감독의 성적 부진에도 불구하고 조성원 감독의 적응을 도울 수석코치로 팀에 유임하게 되었다. 주로 센터들의 지도를 맡을 예정이며 부상으로 같이 뛰지는 못했지만 2000-2001 시즌 호흡을 함께했던 LG의 정규리그 MVP 출신 슈터인 조성원 감독을 직접 보좌하면서 적응을 도울 예정이다.

4. 플레이 스타일


국내 센터 중 거의 최고 수준으로 넓은 어깨, 단단한 하체 등 튼실한 몸으로 KBL 초창기 외인센터들을 잘 막아냈다. 1997-98 시즌에는 대학시절에 보기 힘들었던 중거리 슛을 전희철 급으로 팡팡 터뜨리며 공격력까지 만개, 평득 13.9점을 올리며 팀 내 득점 3위에 오르기도 했다. 반면 탄력은 좋은 편이 아니지만 성실히 골밑에서 본인 책임을 다해 움직이는 착실하고 기본기좋은 국내 토종 센터다.

5. 관련 문서


[1] 초등학교때 미국으로 이민하였다.[2] 귀국 후에도 주소지를 미국에 두고 미국 영주권을 보유하고 있던 중, 2006년 미국 이민국의 영주권 박탈 경고(미국 국적임에도 미국에서의 소득이 없었던 게 문제가 되었다.)를 받았고, 고민 끝에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였다.[3] UC 데이비스 1학년을 마치고, 고려대 신입생으로 입학하였다. 이바람에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전희철, 김병철의 1년 후배로 입학하게 되었다.[4] 재미교포 1.5세대임에도 병역 해결을 위해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5] 서동철 감독 재임 중 입원[6] NBA스타 제임스 하든도 Artesia 고교 출신이다.[7] 일찍부터 미주교포 커뮤니티에서 유명한 박재헌을 박한 감독이 눈여겨 보고 있었다고 한다.[8] 초년이라고하기에는 좀 그런데 2003-2004시즌에 찍은 사진이다.[9] 단신이었지만 '''서전트 점프가 무려 101cm에 달하는''' 초고탄력 빅맨이었다.[10] 상무와는 다르게 공익근무 중인 선수는국제대회 출전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