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웨버

 


[image]
'''새크라멘토 킹스 No. 4 '''
'''메이스 에드워드 크리스토퍼 "크리스" 웨버 3세
(Mayce Edward Christopher "Chris" Webber III)
'''
'''생년월일'''
1973년 3월 1일 (51세)
'''출신지'''
미시간디트로이트
'''신장'''
208cm
'''체중'''
111kg
'''윙스팬'''
222cm
'''포지션'''
파워 포워드, 센터
'''출신학교'''
미시간 대학교
'''드래프트'''
''' 1993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올랜도 매직 지명'''
'''소속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1993-1994)
워싱턴 불리츠/위저즈 (1994-1998)
'''새크라멘토 킹스 (1998-2005)'''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2005-2007)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2007)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2008)
'''등번호'''
4번, 2번, 84번
'''수상내역'''
'''올-NBA 퍼스트 팀 (2001)'''
NBA 올스타 5회 (1997, 2000-2003)
올-NBA 세컨드 팀 3회 (1999, 2002-2003)
올-NBA 서드 팀 (2000)
NBA 올해의 신인상 (1994)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94)
NBA 올해의 리바운드왕 (1999)
네이스미스협회 선정 올해의 대학선수상 (1991)
1. 개요
2. 환희와 악몽의 대학시절
3. NBA 커리어
3.1.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3.2. 워싱턴 불리츠
3.3. 새크라멘토 킹스 시절
3.4. 킹스 시절 이후
4. 플레이 스타일
5. 이것저것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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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WEBB'''
NBA 선수. 케빈 가넷, 팀 던컨과 함께 3대 파워 포워드로 명성을 떨쳤다. 뛰어난 기량과 스타성을 겸비한 선수로서 평가된다. 별명은 C-Webb. 다만 전성기 시절 잦은 부상과 우승경험이 없어서 위에 두 라이벌들과는 달리 저평가 받는 부분이 있는편.
디트로이트 미시간에서 태어났고, 생후 10개월부터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9살때부터 농구를 시작했고, 컨츄리 데이 고등학교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서 학교를 주 챔피언으로 올려세웠다. 미시간주의 미스터 바스켓볼에 선정되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후 크리스 웨버는 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한다.

2. 환희와 악몽의 대학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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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 웨버는 주전자리를 꿰찼다. 이때 같이 들어온 신입생인 주완 하워드, 제일런 로즈, 지미 킹, 레이 잭슨 등과 함께 NCAA 농구판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사람들은 이들을 '''Fab(Fabulous의 약자)5'''[1]라 칭하며 열광했다. 특히나 이들은 패션센스도 뛰어났고, 그중에서도 웨버는 단연 최고의 관심을 받았다. 큰 키에 빠른 스피드와 넓은 시야, 그리고 긴 슛거리 등 기량 면에서도 최고였고, 그리고 미남에다가 세련된 패션감각 등을 바탕으로 기량과 스타성을 동시에 보유한 선수로 찬사받았다. 미시간 대학은 돌풍을 일으키며, NCAA 파이널까지 올랐지만 아쉽게도 듀크 대학에게 패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1학년 때 최고의 인기를 얻었고 또 준우승이긴 했지만 웨버와 Fab5의 길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2학년때 NCAA 토너먼트 노스 캐롤라이나와의 경기에서 경기 종료 11초전 2점차로 미시간이 지고 있었고, 볼은 웨버에게 있었다. 노스 캐롤라이나는 웨버에게 더블팀을 붙었고 당황한 웨버는 타임아웃을 불렀는데, 이때 미시간 대학은 타임아웃을 다 써버려서 더 이상 사용할 타임아웃이 없었다. 결국 웨버는 테크니컬 파울을 얻었고, 미시간 대학교는 73대 71로 패배하면서 탈락했다. NCAA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사건으로 이 웨버의 타임아웃은 누누이 회자되었고, 그는 이때 '''미스터 타임아웃'''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웨버 본인도 "정말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일" 이라고 말할 정도로 본인에게는 흑역사.
NCAA 우승을 꼭 하고 싶었던 웨버였으나 이 타임아웃 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 대학에 남아있을 명분이 사라졌고, 웨버는 미련 없이 NBA 드래프트를 신청한다.
하지만, 2002년 들어 Fab5는 이들의 입단 과정에서 드러난 금품 수수 등의 부정행위로 조사에 들어갔고, 크리스 웨버 본인이 미시간 입학 대가로 금품 수수를 한 것이 드러나면서 미시간 대학교의 농구팀 기록이 삭제되고 선수 스카웃도 금지되는 결과를 맞으면서 웨버의 대학 커리어는 씁쓸하게 마무리 된다.

3. NBA 커리어



3.1.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크리스 웨버는 1993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순위[2]올랜도 매직에 지명되었다. 지금이야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2학년만 마치고 1순위로 픽된 것은 1979년의 매직 존슨 이후 최초의 일로 당시엔 꽤 화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올랜도 매직에 지명되자 한 해 먼저 올랜도 매직에 입단한 샤킬 오닐과의 막강골밑 듀오 탄생에 흥분했지만, 당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감독이었던 돈 넬슨은 큰 키에 다재다능한 플레이를 펼치는 웨버를 눈여겨보고 있었고, 결국 드래프트 당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가 1라운드 3순위로 지명한 앤퍼니 하더웨이와 트레이드 되어 웨버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루키시즌을 시작하게 된다.
웨버는 신인시절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큰 키에도 불구하고 가드처럼 드리블하고 패스하면서, 운동능력도 뛰어났고 또한 골밑플레이도 당연히 능했던 웨버는 루키시즌에 평균 17.5점 9.1리바운드 3.6 어시스트, 1.2스틸, 2.2블록슛. 여기에 55.2%라는 무시무시한 필드골 성공률까지 더하면서 뛰어난 신인으로 기량을 떨쳤다.[3] 신인상은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루키 시즌 중 압권이었던건 속공 장면에서 드리블을 하며 찰스 바클리(..)의 수비를 피해 비하인드 백으로 공을 돌려 찰스 바클리 면전에다 인유어페이스를 날려버린 것, 당대 최고의 힘을 가진 바클리를 날려버린 이 장면은 웨버와 계약하며 시그니쳐 슈즈까지 만들어줬던 나이키에서 광고로 활용했다. (바클리가 허락을 했을까..)[4]
하지만 시즌 내내 감독인 돈 넬슨과 불화가 심했다. 돈 넬슨은 웨버가 좀 더 '''센터답게''' 플레이 해주기를 원했지만, 어린 시절 매직 존슨을 동경하며 농구를 시작했던 웨버는 가드처럼 플레이하길 원했다. 이런 둘의 엇박자는 시즌내내 계속되었고, 웨버가 '''패스를 하면 할수록''' 돈 넬슨의 표정은 굳어져갔고 급기야 작전타임 때 '''"내 말 좀 들어, 임마!"''' 라고 할 정도였다. 93-94시즌이 끝난 후 웨버가 트레이드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웨버는 트레이닝 캠프에 불참했다. 기자들은 돈 넬슨에게 "익명의 제보자에 따르면 웨버가 곧 트레이드 된다던데요?" 라고 물었고 결국 폭발한 돈 넬슨은 "그 익명의 제보자가 누군데?" 라고 추궁했는데, 그 익명의 제보자는 '''웨버 본인이었다(...).'''
여담으로 NBA 2K8로 플레이 하다보면 객원해설자로 찬조출연하는 웨버의 멘트를 통해 이와같은 성향을 엿볼 수 있다. (게임 속 발언이지만 웨버가 녹음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웨버 본인의 발언이다)
해설자들이 과거와 달리 파워 포워드들이 3점슛을 많이 쏘는 트렌드에 대해 물어보며 당신도 지금 뛰었다면 3점슛을 더 많이 쐈을 거냐고 물어보자, "당연하다. 예전에는 빅맨들은 포스트에서 플레이하라고 (팀에서 요구했다. 그래서 나도 워싱턴 시절에 3점을 쏘기도 했지만 포스트플레이를 주로 해야했다. 현재 뛰었다면 3점을 훨씬 많이 쐈을 것"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웨버의 슛거리와 슈팅력은 당시 파워 포워드 중 정상권에 속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3점 갯수가 많은 편은 아니라 성공률은 들쭉날쭉했다. 웨버의 능력과 별개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시절엔 거의 3점을 쏘지 않았고 전성기였던 새크라멘토 킹스 시절엔 외곽의 마이크 비비, 덕 크리스티, 페자 스토야코비치가 있어 웨버가 3점라인까지 나와 공격하는 경우가 극히 적었기 때문에 평균 시도수가 0.6개밖에 되지 않았다. 시도도 적거니와 웨버를 위한 3점 전술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시간에 쫓겨 쏘거나 전술과 상관없이 기습적으로 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성공률이 높을 수 없는 상황.
웨버 본인의 말대로 3점슛을 그나마 쏜 건 워싱턴 시절이 유일했는데, 이때는 네 시즌동안 성공률 33.6% (2.5개 시도/0.8개 성공)를 기록했다. 95-96시즌에 2.3개를 던져 44.1%를 기록한 건 15경기 출장밖에 안되어 신뢰도가 떨어지지만, 96-97시즌에 경기당 2.1개를 던져 0.8개를 넣어 39.7%를 기록하기도 했다. 다음시즌에 31.7%로 떨어지긴 했지만.
포인트는 당시 웨버는 분명히 "3점 던지는 빅맨"으로 활약할 수 있는 슈팅터치와 슛거리가 있었지만 당시 트렌드 상 3점을 제대로 쏜 적이 거의 없어 이런 능력을 뽐낼 기회가 많이 없었다는 점이다.[5]

3.2. 워싱턴 불리츠


결국 웨버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인연은 한 시즌만에 끝났고 웨버는 워싱턴 불리츠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 워싱턴에는 대학 동기이자 Fab5의 일원인 주완 하워드가 있었다. 또 당시 워싱턴 불리츠 감독 짐 라이넘은 웨버에게 골밑플레이를 강요하지 않았고 웨버는 자신이 원하는 플레이를 할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적 첫시즌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결장했고, 워싱턴은 웨버 효과를 전혀 누리지 못한체 21승 61패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야했다. 1995-96시즌에 부상당했던 왼쪽 어깨 부상이 재발하면서 단 15경기 출전에 그쳤다. 부상당하기 전 까지 웨버는 SF그랜트 힐이라 스카티 피펜스러운 1차 스탯을 기록할 정도로 점차 본인의 다재다능한 기량을 코트에서 선보였기에 아쉬운 시즌이었다. 워싱턴은 또 한번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아이러니하게도 대학동기이자 친구인 주완 하워드는 이 시즌에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1996년 FA 최대어 중 한 명이 되어 몸값 1억달러의 주인공이 되었다.[6]
다음 시즌인 1996-97시즌에는 도중에 감독이 두 번 교체되는[7] 악재에도 불구하고 웨버는 모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72경기에 출전하고 올스타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 워싱턴은 막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겹경사가 터지기도 했다. 물론 1라운드 상대는 시카고 불스(...)였고 3전전패로 광속탈락하고 말았다. 이 시즌 웨버는 20득점 10리바운드 4어시스트 이상을 기록면서 본인의 다재다능함을 마음껏 보여주었고 동부 올스타에 이름을 올렸다.[8]
1997-98시즌에도 웨버의 개인 성적과 팀 성적은 작년시즌과 비슷했으나 아쉽게 1승 차이로 뉴저지 네츠에게 밀려서 동부 9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올스타 선발에도 뽑히지 않는 등 다소 불운한 시즌이었고, 이 시즌이 끝난 후 웨버는 또 다시 트레이드를 통해 새크라멘토 킹스로 이적했다.[9]

3.3. 새크라멘토 킹스 시절


처음에 웨버는 새크라멘토 이적을 좋아하지 않았다. 당연하기도 하겠지만 당시 새크라멘토는 존재감이 매우 희박한 스몰마켓 프랜차이즈였고, 하지만 이 트레이드로 웨버의 농구 인생이 바뀌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킹스는 1998-99시즌을 앞두고 대대적인 전력보강을 했다. 1999년 드래프트에서 7순위로 뽑힌 화이트 초콜릿 제이슨 윌리엄스, 유고 출신의 페자 스토야코비치블라디 디박 등 수준급 선수들이 영입했고, 킹스는 단축시즌으로 치러진 1998-99시즌에 5할승률을 찍으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이때 제이슨 윌리엄스와 크리스 웨버가 선보인 화려한 농구에 많은 이들이 매료되었다. 이때 평균 리바운드 1위를 차지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리바운드 1위에 올랐다. 웨버는 데니스 로드맨, 디켐베 무톰보, 벤 월러스, 하산 화이트사이드, 디안드레 조던 등 수비유형의 선수가 아니라 득점을 책임지는 에이스 선수인데 당시 리바운드 1위는 상당히 의미있는 개인 기록이다.
2000-01시즌에는 더욱 일취월장한 기량을 선보이며 평균 27.1점 11.1리바운드, 4.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 시기의 킹스는 어느덧 서부 컨퍼런스의 강팀으로 우뚝서게 되지만 2라운드에 LA 레이커스에게 4전전패를 당하면서 탈락했다.
2001-02시즌에 킹스는 아예 우승을 목표로 잡았다. 화려하지만 여러모로 불안했던 제이슨 윌리엄스를 트레이드 시키고 마이크 비비를 영입했다. 또한 페자 스토야코비치는 리그 최고의 슈터로 거듭났고, 기존의 블라디 디박과 덕 크리스티 그리고 팀의 최고 식스맨이었던 바비 잭슨도 건재했기에, 충분히 우승을 노려볼 수 있는 전력이었다. 팀은 61승 21패를 기록하면서, 리그 전체 1위 승률을 기록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유타 재즈댈러스 매버릭스를 꺾고 드디어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LA 레이커스와 맞붙었다. 홈코트 어드밴티지가 있었던 킹스는 1차전을 내줬지만 2·3차전을 내리 따내고 4차전에서 45분 넘게 리드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4차전 종료직전 터진 로버트 오리의 3점슛으로 4차전을 내주고 말았다.
이 경기는 킹스 팬들에겐 거의 금기어 수준인데, 이 때 코비 브라이언트가 돌파 후 슛이 짧았고, 오닐이 리바운드해 풋백한 것도 빗나갔는데 하필 이 때 블라디 디박이 슛을 걷어낸다고 쳐낸 게 하필 3점라인 밖에서 기다리던 오리의 손에 운 좋게 들어가 그가 슛을 꽂아넣었기 때문이다. 디박은 그 상황에서 딱 해야 할 플레이를 한 것이고[10] 오리가 스틸이나 리바운드를 한 것도 아니고[11], 말 그대로 가만 있다가 운 좋게 공이 손에 들어갔으니 킹스 팬들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인 것. 게다가 단 2초만 버티면 되는 것이었다. 또 사실 전반 끝에 사마키 워커의 하프코트 버저비터가 있었는데 이 당시에는 비디오 판독 시스템이 도입되지 않아 그 샷을 인정했었으나 버저비터가 울리고 나서 던진 슛이라 킹스에게는 억울하게도 오심으로 3점을 내준 감이 있었고, 이게 나비효과가 되어... 오리의 슛이 게임위너샷이 되었다.
5차전을 승리했지만, 심판이 승부조작에 관여하여 억울하게 6·7차전을 내주면서 킹스의 우승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12] 승부조작이 없었다면 7경기까지 가진 않았겠지만 이 7경기를 놓고 보면 킹스가 실제 이긴 3경기와 4차전(오심으로 인한 레이커스의 승리) 6차전(팀 도너히의 공식적인 승부조작 경기)정도는 킹스가 이겼으리라는 예상이 있다.
2002-03시즌도 변함없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댈러스와의 플레이오프 컨퍼런스 세미파이널 2차전에서 벌어졌다. 가비지 타임으로 흘러가던 경기 막판, 무릎 부상을 당해버린 것. 결국 킹스는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댈러스에게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탈락하고 말았다. 당시엔 그리 심각한 부상이 아닐 줄 알았지만, 결국 이 무릎부상을 기점으로 웨버는 과거의 운동능력을 거의 잃어버리게 된다.
더 잔인한건 웨버가 결장한 상태로 치른 2003-04시즌 초반, 킹스의 경기가 오히려 잘 돌아갔다는 점이다. 새로 영입한 센터인 브래드 밀러는 블라디 디박의 가르침 덕분에 뛰어난 패싱센스를 겸비한 빅맨을 거듭났고, 팀의 중심도 웨버에서 페자 스토야코비치로 넘어가 있었다. 스토야코비치는 프린스턴 모션 오펜스의 해결사로 이 한 시즌만은 물만난 고기처럼 펄펄 날면서 MVP급 포스를 보였다. 시즌 막판 웨버는 돌아왔지만, 과거의 운동능력을 잃어버리면서 수비에서는 잉여가 돼버렸고, 킹스의 원활한 패싱게임이 웨버에게 공이가면 뚝뚝끊기는 일도 많아졌다. 점점 웨버의 입지는 좁아져만 갔다. 심지어 웨버가 없을때 59게임 44승 15패를 기록하며 서부 1번시드 다툼을 하던 팀이 웨버가 출전한 경기에서 23게임 11승 12패를 하면서 4번시드로 떨어졌다. 2003-04시즌 그의 야투성공률은 41%대로 대폭 추락했고, 어느덧 중거리슛만 던져대기 시작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2라운드에서 당시 돌풍의 팀이었던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게 패배[13] 하면서 다시 우승 도전에 실패하게 된다.[14]

3.4. 킹스 시절 이후


2004-05시즌이 되면서 더욱더 좁아진 팀내 입지에 웨버는 불만을 터트렸고, 팀 동료를 비난했다. 새크라멘토 킹스 역시도 기량이 옛날만 못하고 거액의 장기계약을 가지고 있는 웨버가 부담스러웠고, 결국 웨버는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로 1대3 트레이드 된다. 비록 기량은 저하되었다고는 하나 당시 그의 존재감은 엄청났었기 때문에 앨런 아이버슨은 처음에 크리스 웨버가 온다는 말을 듣고 '''"농담하지 마라"'''라고 했을 정도였다.[15]
하지만 필라델피아에서의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옛날의 그가 아니었다. 무릎부상으로 이미 예전의 기동력과 운동능력을 잃어버렸고, 픽앤롤 수비시에서는 그야말로 꿔다놓은 보릿자루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새크라멘토에서는 자신이 팀의 작전의 중심이었지만 당시 필라델피아는 '''아이버슨의, 아이버슨을 위한, 아이버슨에 의한''' 작전을 구사하는 팀이었기에 웨버는 더욱더 팀 전술에 녹아내릴수 없었다. 결국 그는 06-07시즌 중간에 필라델피아에서 방출되고 만다. 이렇게 그의 농구 인생도 끝인가 싶었지만...
고향팀인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물론 우려도 있었지만 웨버는 아직까지 건재한 패싱능력과 특유의 농구센스로 의외로 디트로이트 농구에 적응했고, 플레이오프에서도 깨알같은 활약을 펼쳤지만 아쉽게도 디트로이트는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이끄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게 패배하며 탈락했다.
06-07시즌이 끝난후 자유계약 선수가 되었다. 이미 전성기 시절의 기량은 아니지만 디트로이트에서 보여주었던 죽지않은 패싱능력과 농구센스 그리고 외곽슛 능력 덕분에 그를 노리는 강팀은 몇몇 있었다. 하지만 웨버는 전혀 뜻밖에도 자신이 NBA 경력을 시작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 계약하면서 모두를 놀라게했다. 놀랄수 밖에 없었던것이 당시 골든스테이트는 약팀이었고, 웨버가 우승 타이틀을 노리기에는 한참이나 뒤떨어진 팀이었기 때문이었다. 돈 넬슨 감독 역시도 "우리팀 전력이 좋지 않아서 웨버가 올지 확신이 안섰다." 라고 했을정도였다. 거기다 당시 워리어스의 농구는 "닥치고 달리고 또 달리는" 공격농구였기 때문에 기동력을 잃은 웨버에게는 어울리는 팀이 아니었다. 돈 넬슨은 웨버를 9경기중 8경기에 선발로 출전시켰을 정도로 중용했지만 그리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결국 웨버는 은퇴를 선언했다.
이미 지난 과거지만 골든스테이트에서 웨버, 라트렐 스프리웰 원투 펀치에 전성기에서 슬슬 내려오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경쟁력이 있었던 크리스 멀린이 뒷받침을 했다면 서부강호로 꾸준히 이름을 올렸음은 당연한 사실이였다. 성공적인 93/94시즌을 보냈음에도 역할 갈등으로 불과 1시즌만에 팀이나 웨버 본인에게 결과적으로 최악의 선택을 해버렸고 웨버는 한창 성장할 커리어 초창기 부분을 어이없이 날리고 말았다. 그래서 올스타 출전이나 올 NBA가 명성에 비해 적고 점차 시간이 지나자 웨버가 보여준 플레이나 임팩트도 서서히 과소평가 되는 부분이 생기기 시작했고 특히 팀 던컨, 케빈 가넷, 디르크 노비츠키, 파우 가솔 등 웨버와 커리어가 겹친 파워 포워드 들이 '''최소 17시즌''' 이상 하는 등 건강에도 앞서나가며 상대적으로 짧은 선수생활을 보낸 웨버의 평가도 낮아졌다.[16]

4. 플레이 스타일


4번 포지션으로 딱 맞는 체격에 센터도 소화가 가능했다. 무엇보다 웨버를 대표하는건 바로 다재다능한 플레이. 빅맨으로서의 본연의 플레이도 뛰어났지만 뛰어난 패싱능력과 긴 슛거리 등은 그를 막기 까다로운 선수로 만들었다. 2m8cm의 빅맨이 가드처럼 크로스오버 드리블을 하고 중장거리 슛을 던질수 있고, 가드처럼 빨리뛰고 돌파하는데다가 전성기 시절에는 골밑에서도 전투적인 플레이를 펼치고 보드 장악력도 뛰어나니 상대 마크맨 입장에서는 "이걸 어떻게 막아" 소리가 절로 나올수 밖에 없다.
크리스 웨버의 이런 플레이스타일이 더욱더 빛을 보게 된건, 당시 새크라멘토 킹스의 프린스턴 모션 오펜스 덕분이기도 했다. 한 명이 공을 잡고 있을때 다른 선수들은 끊임없이 빈 공간을 찾기 위해 움직여야 하며, 빅맨의 스크린과 더블 스크린, 플레어, 컷, 베이스라인을 활용하며 상대팀의 허점을 파고드는 것이 모션 오펜스의 주 모태이며, 가드 뺨치는 패싱능력과 넓은 시야를 가진 웨버는 이 전술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수 있었다.
패싱 센스도 굉장했다. 위에 기재된 웨버 선수시절 어시스트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패스 자체를 상당히 잘 했다. 대부분 빅맨급 선수들은 더블 팀이 올때 빠르게 외각이나 노마크 선수에게 공을 주고 어시스트를 올리는데 반해 웨버는 본인이 공이 몰고가면서 패스를 주는 장면도 상당했고 이미 워싱턴 시절 부터 비하인드 백패스를 자주 선보였을 정도였다.
루키 시절인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시절에는 얼굴에 반항기도 있고 제법 악동 느낌도 있었는데 시간이 가면서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무릎부상은 그의 장점 대부분을 빼앗아갔다. 기동력과 운동능력을 잃고난후 그는 돌파대신 중거리 슛만 던지면서 플레이의 생산성이 크게 떨어졌고 상대의 픽앤롤, 픽앤팝에 속수무책으로 털리게 되었다. 그나마 커리어 말기에는 패싱능력과 농구센스로 커버하긴 했지만.
은퇴 이후 방송에서 해설을 하고 NBA 관련 프로그램에도 나오는데 살이 찌기는 커녕 오히려 전성기 시절의 몸매와 얼굴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레지 밀러그랜트 힐도 마찬가지.[17]

5. 이것저것


참으로 굴곡진 농구인생를 보냈다. 대학시절 초창기에는 정말 인기도 많았지만 타임아웃 사건을 계기로 조롱거리가 되었고, 프로 신인시절에는 돈 넬슨 감독과의 불화, 새가슴 논란, 그리고 멘탈적인 문제까지 다양했다.
3대 파워 포워드인 케빈 가넷, 팀 던컨과는 달리 우승은 커녕 파이널에 한 번도 올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위 두 명보다는 저평가 되는 경우가 많다.[18] 그 이후 덕 노비츠키가 성장하면서 웨버에 대한 가치나 전성기 시절 보인 성과마저 과소평가되는 부분이 없지않아 존재한다. 하지만 그 뛰어난 기량은 여전히 올드팬들이 그리워하는 부분. 지금도 잘생겼지만 젊은시절에는 그야말로 미남소리 나오는 얼굴 덕분에 인기는 대학시절 다른 Fab5보다도 월등했다. [19] 패션센스도 좋고. 3대 파워 포워드 중에서도 가장 잘생겼다. 웃지 않으면 철근이라도 씹어먹을듯한(...) 가넷이나, 무뚝뚝한 인상의 팀 던컨에 비해 정말 잘생기고 웃는것도 매력이 넘친다. 검색창에서 웨버 이미지를 검색하면 그의 웃는 사진이 정말 많이 나온다.
은퇴 후에는 객원해설가로 종종 활동하며[20], 자신이 설립한 크리스 웨버 재단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2005년 뉴올리언스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한바탕 쓸고 간 후에 그곳에 교과서를 보내주기도 했다.
비록 새크라멘토 킹스와 모양새가 좋지 않게 헤어졌지만, 킹스는 팀의 전성기에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크리스 웨버의 4번 유니폼을 영구결변 시켜주었다. 웨버도 이 영구결번 기념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며 팬들과 동료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이 자리에는 과거에 같이 뛰었던 동료인 덕 크리스티와 블라디 디박도 함께 자리해 그를 축하해주었다.
1997년 8월 13일 한국에 방문했다. 당시 웨버는 나이키를 떠나 그랜트 힐, 제리 스택하우스를 중심으로 농구시장에 한창 투자를 올리고 있던 휠라의 스폰서십을 받았고 때마침 한국농구 역시 1997년부터 KBL이 정식으로 출범하고 있어 휠라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웨버를 2박3일 여정으로 초청했다. 13일은 일산의 한 복지단을 방문하여 휠체어 농구단과 시간을 보냈으며 이후 당시 정재근, 제럴드 워커가 이끄는 SBS 스타즈를 방문하여 만남을 가졌다.
14일 역시 양재동의 교육문화센터에 방문하여 어린이 농구단과 시간을 보냈다. 같은 해 8월에 리복 후원의 샤킬 오닐이 일본 스케줄 다음으로 한국을 방한하였는데 당시 농구화 및 용품의 매출 규모와 농구의 인기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21] 당시 인터뷰 기사 중 자신의 최대 라이벌은 칼 말론을 뽑았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BEST 5는 로드 스트릭랜드, MJ, 주완 하워드, 칼 말론, 하킴 올라주원을 선정하였는데, 스트릭랜드와 하워드는 같은 팀원의 의리로 선정한 것 같다.[22]
2018년 영화 '엉클 드류'에 주전 5인 중 한 명으로 출연하였다. 아기에게 침례를 주면서 비하인드 백플립을 하는 목사 역인데 아내로 등장하는 인물은 WNBA 레전드였던 리사 레슬리. 마지막 공격을 시작하면서 엉클 드류가 이제 타임아웃이 더 없다고 강조할 때 '''하나쯤 남은 것 같은데''' 하고 드립 치는 게 백미.
[1] '경이적인 5인'이란 의미로, 비틀즈를 'Fab4'로 불렀던 것이 근원이다.[2] 샤킬 오닐의 입단으로 호성적을 거두었으나 이듬해 또 1픽을 올랜도 매직이 얻게 되자 NBA는 드래프트 로터리 규정을 손본다.[3] 이때 플레이스타일은 이후 전성기와 비교하면 사뭇 다르다. 필드골 중 2/3가 골대 근처에서 이뤄졌고, 나중에 웨버의 최대장점 중 하나로 꼽히는 중거리슛은 오히려 성공률이 낮았다. 또한 이때는 시즌 통틀어 3점슛 성공갯수가 단 하나도 없었다. 또한 그는 전성기 시절 자유투 성공률을 7할대까지 끌어올렸지만 이때 그의 자유튜율은 야투율보다도 낮은 53.2%에 불과했다. 한 마디로 내외곽을 오가며 중거리슛으로 많은 득점을 한 전성기와 달리 루키 시절 그는 골밑을 적극적으로 파고드는 짐승같은 플레이스타일이었다. 물론 이와 별개로 유망주 시절부터 유명했던 사기급 패스와 드리블 능력은 이때부터 돋보였다.[4] 후에 오픈코드에서도 바클리는 이 순간을 가장 망신 당한 순간 중에 하나로 골랐다. 그 자리에 웨버가 있었기에 훈훈하게 마무리가 됐다.[5] 실제로 90년대, 그리고 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성공률과 상관없이 빅맨이 3점을 쏘면 "어 빅맨이 3점을 쏴?"나 "쟤 뭐하냐;;;"는 시선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3점능력이 리그 정상급이었던 디르크 노비츠키도 초창기엔 분명 슛을 쏙쏙 잘 넣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시선을 받아야했고, 01-02시즌부터 08-09시즌까지 경기당 1.4개 성공/4.1개 시도 (35%)의 성공률을 기록한 라쉬드 월러스도 포틀랜드 시절 "에이스가 빅맨 주제에 외곽만 싸돌아다니니 팀이 망하지"란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정작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시절에도 그는 꾸준히 1개 이상의 3점슛을 성공시켰으며, 심지어 05-06시즌엔 커리어에서 가장 높은 1.9개 성공/5.4개 시도를 기록했는데 올스타에까지 뽑혔다.[6] 어이없게도 이는 하필 주완 하워드의 '''인생 최고의 활약'''이 되어 (성장세가 딱 멈췄단 말) 이후 하워드는 역대 최악의 먹튀 중 한 명이 된다.[7] 짐 라이넘-밥 스타크 감독대행-버니 비커스태프.[8] 비록 전패긴 했지만 싱겁게 관광당한 건 아니다. 1차전은 12점차로 패했지만 2차전은 5점차로 근소한 차이었고, 3차전에는 단 1점 차이로 패했다. 당시 시카고 불스는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베테랑 팀이었고 끝판왕까지 있었던 걸 생각하면 젊은 선수들이 주축이 된 어린 팀치곤 꽤 잘 버틴 셈.[9] 새크라멘토 get: 크리스 웨버 ↔ 워싱턴 get: 미치 리치몬드, 오티스 소프[10] 리바운드가 훨씬 강한 오닐이 바로 옆에 있었기에 잡아내기에는 무리였을 수 있다.[11] 기록상 그의 공격리바운드로 기록되긴 했다.[12] 6경기는 팀 도너히의 공식적인 승부조작 경기로서, 심판진들에 의한 고의적인 승부조작이 있었던 경기이다. 시리즈의 흥행을 위해 7경기까지 끌고 가려는 목적과 도너히의 도박사들을 배려한 레이커스 밀어주기식 파울콜이 있었다.[13] 이 시리즈는 7차전까지 이어졌으나, 최종전에서 케빈 가넷이 30점 20리바운드가 넘는 스탯에 상대팀을 거의 전부 커버하는 무지막지한 수비, 거기다 막판에 포인트 가드 역할까지 하는 괴물급 대활약을 펼치며 미네소타가 가져간다. 7차전에서 종료 직전 킹스가 3점차로 뒤지고 있는 가운데 웨버가 3점슛을 던졌으나 아깝게 빗나가면서 패배하고 만다. 이때 장면을 보면 버져가 울리고 바닥에 엎드려 안타까워하는 웨버와 바로 옆에서 환호하는 가넷이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14] 그러나 장기결장에서 돌아온 선수가 적응기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웨버는 이때만해도 팀의 에이스로 여겨졌으며 2005시즌 당시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되기 전까지 20-10-5에 가까운 성적을 올리고 있었다.[15] 여담이지만 당시 필라델피아에서 웨버의 등번호 4번을 달고 있건 건 루키 안드레 이궈달라였다. 그러나 이궈달라는 웨버에게 4번을 양보하고, 웨버는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고급시계를 선물했다고.[16] 현재는 역대급 파워 포워드들인 던컨-가넷-노비츠키를 묶어서 일명 '던가노'라고 부르지만, 웨버의 새크라멘토 킹스 시절엔 노비츠키가 아닌 웨버가 그 자리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던컨이 이견없는 역대 원탑 파워 포워드로 커리어를 끝마치고, 가넷노비츠키도 우승을 경험하며 역대 파워 포워드 넘버2가 누구냐는 논쟁의 주인공이 될 동안 웨버는 그들보다 확실히 아래 수준으로 격하된게 사실이다.[17] 사실 한 번 체중이 조금 불어보인 적이 있었는데 금방 다이어트를 했다.[18] 특히나 뼈아픈게 오심으로 얼룩졌던 2002년 서부결승전이었다. 레이커스 항목에도 나오지만 그 당시 상대는 뉴저지 네츠였는데 뉴저지 네츠의 골밑부대는 양민수준이었기 때문에 웨버가 충분히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정말 승산이 있었을 것이다. 만약 새크라멘트가 오심경기가 없고 운만 조금 따라줬다면 레이커스의 쓰리핏도 없었을 것이고 '''그 레이커스'''를 꺾고 우승한 웨버의 평가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새크라멘토의 에이스는 명실상부 웨버였다.[19] 르브론 제임스의 경우 자신의 고등학교 농구팀을 Fab5라고 칭했었다.[20] 생각보다 많은 지식과 괜찮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해설한다는 평가. 국내방송 경기에서도 레지 밀러, 제프 밴건디, 션 엘리엇과 함께 자주 보인다.[21] 여담으로 놀랍게도 외환위기 시절인 1998년 여름에는 앨런 아이버슨, 코비 브라이언트또한 방한했다.[22] 스트릭랜드는 98년 세컨드 팀과 무려 제이슨 키드, 존 스탁턴 등 역대급 가드들을 제치고 어시스트 왕을 차지했고 지금은 실력 대비 고액연봉으로 꽤나 비판을 받은 주완 하워드는 1995-96시즌 NBA 올스타와 서드팀에 뽑혔으며 데뷔 2시즌 만에 평균 20득점 이상에 8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하는 등 미래가 촉망되는 선수였지만 그 이상 성장하지 못한 아쉬운 선수로 커리어를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