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윌리포드

 

'''제이슨 윌리포드의 수상 및 영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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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제이슨 윌리포드(Jason Williford)
'''생년월일'''
1973년 6월 10일 (50세)
'''국적'''
미국
'''출신학교'''
버지니아 대학교
'''포지션'''
스몰 포워드, 센터(KBL)[1]
'''신체사이즈'''
194.4cm
'''프로입단'''
1995년 Haukar Club (아이슬란드 리그)
'''KBL 소속팀'''
원주 나래 블루버드 (1997~1998)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1998~1999)
'''수상경력'''
KBL 외국 선수상 1회 (1997)
KBL 베스트 5 1회 (1997)
1997 시즌 리바운드/블록 1위
1. 소개
2. 대학시절 ~ KBL 입성 이전
3. KBL에서의 선수생활
3.1. 원주 최초의 프랜차이즈 스타
4. 지도자 생활
5. 여담


1. 소개


'''KBL 단일시즌 PER 역대 1위(48.00, 1997시즌)와 3위(34.75, 1997-98시즌)''' 기록 보유자.[2]
KBL 출신 외국인 선수 중 가장 성공한 인물로 현재 지도자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2. 대학시절 ~ KBL 입성 이전


대학시절 기록
92-93시즌(2학년) 16강전 vs. 신시내티 (풀영상)[3]
94-95시즌(4학년) 16강전 vs. 캔자스 (풀영상)
버지니아 대학교 시절 코리 알렉산더(185cm,G)[4], 주니어 버로(199cm, PF)[5] 등 쟁쟁한 멤버들과 함께 버지니아 캐벌리어스를 3차례 NCAA 토너먼트로 이끌었다.[6] 특히 4학년때는 전국구 스타였던 동기 주니어 버로를 제치고 팀의 주장을 맡아 1989시즌 이후 6년만에 팀을 '''Elite Eight'''으로 이끌기도 했다.[7]
하지만 3-4번을 오가는 포워드로서 작은 신장인 6-6 (198cm, 미국신장 기준)의 윌리포드가 NBA 무대에 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곧바로 해외리그를 눈을 돌려 아이슬란드 프로리그의 Haukar Club에 입단하게 된다. 프로 첫시즌부터 맹활약한 윌리포드는 1995-96 시즌 아이슬란드 프로리그 외국인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아이슬란드 리그에서 뛰던 당시 소속팀의 유스팀 코치를 겸하기도 했는데, 아마 이때부터 지도자로서의 커리어를 준비했던 걸로 보인다.
이후 1996년 11월에 열린 KBL 트라이아웃에 참가, 전체 11순위[8]로 신생팀이자 약체로 평가받던 원주 나래 블루버드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3. KBL에서의 선수생활


KBL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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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아웃 때만 해도 평범한 운동능력과 신체조건을 가진 윌리포드는 별로 돋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고무공같은 탄력을 자랑하던 클리프 리드(부산 기아)나 제럴드 워커(안양 SBS), 전체 4순위로 뽑힌 팀 동료 칼 레이 해리스는 물론, Division II 대학 출신이었던 빈스 킹(수원 삼성, 3순위)과 라펠 맥길버리(대전 현대, 7순위)가 더 주목받았다.[9][10]
프로 원년인 1997년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에 오는 외국인 선수는 무명 대학 출신[11]이 대부분이었는데 반해, ACC의 명문 버지니아를 졸업한 윌리포드는 단연 돋보였고 194cm인 그는 대학 시절 포워드였지만 한국에 오자마자 리그 최고의 센터로 등극했다.
1997년 원년리그 윌리포드는 27.9점, 12.8리바운드, 3.6스틸, 1.4블록슛을 기록하며 팀을 정규리그 3위로 이끌었고, 윌리포드는 초대 '''외국선수상'''을 비롯, '''시즌 베스트 5''', '''리바운드 1위''', '''블록 1위'''를 석권했다. 골밑의 윌리포드, 외곽에 ‘사랑의 3점슈터’ 정인교, 거기다 시즌 득점왕인 칼 레이 해리스 3인방이 버틴 원주 나래 블루버드는 1997년 챔프전까지 오르며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와 김영만, 클리프 리드가 맹활약한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에게 초대 우승을 내준다. 프로원년 시즌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윌리포드는 원주 나래와 재계약한다.
다음 시즌인 1997-98 시즌을 앞두고, 수련선수 출신 가드 주희정과 새 외국인 선수로 38세(;;;)의 포워드 윌리엄 헤이즈(188cm)가 합류하였고, 윌리포드는 여전히 팀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며 원주나래를 2시즌 연속 플레이오프로 이끈다. 그러나 두번째 시즌에 이르러 2m대의 장신 외국인 센터들을 보강한 팀들이 나타나면서 센터로서 윌리포드의 위력이 다소 감소하였고, 윌리포드의 3점슛 시도는 늘어만 갔다. 거기다 당시 KBL에 만연했던 외국인 선수들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으로 인해 심판 판정에서 불이익을 받은 것은 물론, 정재헌, 정재근 등의 마크맨들은 일부러 폭력적인 파울들로 윌리포드를 자극하려 했다. 특히 당시 인천 대우의 파워포워드였던 정재헌은 TV 중계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윌리포드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다.[12]
새 외인 헤이즈는 너무 나이가 많아 경기력이 전시즌의 칼 레이 해리스와 비교하기 미안할 만큼 떨어졌고, 상대팀의 집중수비 탓에 정인교의 위력도 줄어든 터라 윌리포드는 팀의 에이스로서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겨우겨우 리그 4위로 6강 플레이오프에 올렸지만 5위 대구 동양에 아쉽게 지면서 탈락한다.[13]
1998-99 시즌을 앞두고, 윌리포드는 원주 나래와 재계약 한뒤 정인교와 함께 기아로 트레이드 되면서 윌리포드는 다시 한 번 우승을 노리게 되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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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시즌간 라이벌이었던 클리프 리드와 파트너를 이루면서 부산 기아를 정규리그 2위로 이끌고 팀을 챔피언 결정전까지 올렸으나 정작 윌리포드가 플레이오프에서 부상을 당했고, 윌리포드가 부상 투혼을 발휘하며 분전했지만 팀은 -- 트리오에 조니 맥도웰, 재키 존스 콤비까지있었던 대전 현대에게 힘없이 무릎을 꿇는다. 1998-99 시즌까지 KBL에서 총 3시즌을 뛴 윌리포드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하고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다.

3.1. 원주 최초의 프랜차이즈 스타


원주 나래 블루버드에서 뛴 것은 겨우 2시즌 뿐이었지만 제이슨 윌리포드는 정인교와 함께 소도시 원주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타였다. 농구대잔치 시절 최약체 팀이었던 산업은행, 한국은행 두 팀의 인원들로 급조해서 만든 팀인 원주 나래 블루버드는 KBL 관계자들로부터도 창단을 환영받지 못했던 팀으로, 모두가 예상하는 만년 꼴찌팀이었다. 하지만 프로 원년시즌 초특급 외인이었던 제이슨 윌리포드-칼 레이 해리스 콤비의 맹활약 덕분에 원주 나래는 정규시즌에서 깜짝 단독 1위를 달리기도 했고(최종 순위는 3위), 플레이오프에서는 우지원-김훈 콤비의 인천 대우 제우스정재근-오성식이 이끄는 안양 SBS 스타즈 등 스타군단들을 연파하며 챔피언결정전에 오르는 돌풍을 일으켰다. 수용인원이 2천명이 채 되지 않았던 치악체육관은 매경기 만원관중으로 인해 입석표를 팔아야했고, 원주는 물론 춘천, 홍천 등 주변 지역에도 원주 나래의 촌스런 진파랑 유니폼[15]을 입고 다니는 청소년 팬들이 있을 정도였다.
특히 독불장군 식으로 나홀로 공격을 펼치고 경기 도중 오리 울음소리를 내는 등(....) 기행을 일삼던 칼 레이 해리스에 비해, 묵묵하게 골밑을 지키면서도(원년 시즌 리바운드왕) 득점과 팀플레이 모두 완벽했던 윌리포드의 인기는 실로 엄청났고, 윌리포드 자신도 인터뷰 때마다 원주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표시하곤 했다.
1998-99 시즌을 앞두고 이루어진 윌리포드의 트레이드는 원주, 아니 강원도 전체의 농구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고 농구 대통령 허재가 영입되는 상황임에도 윌리포드의 방출을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기도 했다.
영구결번된 레전드 허재김주성이 입단하기도 전인 1997 KBL 원년 시즌, 소도시 원주가 완벽한 농구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원조 프랜차이즈 스타 제이슨 윌리포드라는 외국인 선수의 역할이 있었다.

4. 지도자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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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차근차근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1999년부터 모교 존 마샬 고교에서 코치로 일했다. 이후 그는 아메리칸대학과 보스턴대학에서 코치 생활을 한 뒤 2009년부터 토니 버넷 감독 밑에서 모교 버지니아대학의 코치를 맡고 있다.
2016년엔 코치 신분으로 모교를 NCAA 8강에 올려놓는데 한 축을 담당하는 등 탄탄한 그의 경력을 감안할 때 NCAA 감독 데뷔도 멀지 않았다는 평이 있다. 2019년에는 코치로 모교 버지니아의 사상 최초 NCAA 우승을 함께 했다.

5. 여담


한국 생활 2년차부터 정재헌, 정재근을 비롯한 한국 선수들의 폭력적 견제와 심판들의 이해할 수 없는 판정 때문인지 성격이 좀 다혈질적으로 변했고 이 때 기억 때문에 한동안 외국 선수들의 KBL 트라이아웃 참가를 말리기도 했다.
[1] 비교적 단신이었지만 KBL에서는 내내 센터였다.[2] 단, KBL 원년시즌이었던 1997 시즌은 정규리그 경기 수가 고작 21경기, 두 번째 시즌인 1997-98시즌도 45경기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경기수 및 표본이 너무 적다 보니 KBL 초반 시즌 PER은 다들 높게 나온다.[3] 22번 선수가 윌리포드. 무릎이 멀쩡한 주니어 버로(4번)와 함께 가벼운 몸놀림을 보여준다.[4] 대학무대에선 탑클래스 포인트가드로 손꼽혔던 재능을 가졌지만 부상을 자주 당해 많이 활약하진 못했다. 1995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9순위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선발, 샌안토니오 스퍼스, 덴버 너기츠 등에서 백업가드로 총 7시즌을 뛰었다. 2005년 샬럿 밥캣츠 창단 당시 확장드래프트에 지명받아 NBA에 복귀하기도 했지만 오래 뛰지 못했다.[5] 1995 NBA 드래프트 2라운드 33순위로 보스턴 셀틱스에 선발, 95-96시즌 단 1시즌동안 뛴 후 유럽 무대에 진출해 커리어 대부분을 보냈다. 단테 존스와 함께 2004-05 시즌 안양 SBS 15연승의 주역이며 외인 자유계약시절이던 2004~2007 3시즌 내내 KBL에서 뛰었다. 무릎이 싱싱하던 대학시절에는 무려 찰스 바클리, 엘튼 브랜드와 비견되는 엘리트 파워포워드 재능이었으나, 결국 그 무릎이 모든걸 갉아먹고 말았다;;; 미국 기준 신장은 6-8(203cm)이다.[6] 2학년이던 1993년 16강(Sweet Sixteen), 3학년때 2라운드(32강), 4학년때인 1995년 8강 (Elite Eight)[7] 이후 버지니아대는 한동안 8강은 커녕 16강에도 못오르다가 윌리포드가 코치로 부임한 이후 2015 시즌 Sweet Sixteen, 2016 시즌 Elite Eight까지 오른다.[8] 11월 트라이아웃엔 광주 나산 플라망스가 불참하여 총 7팀만 참가하였고 14명의 선수가 뽑혔다. 결국 뒤에서 네번째로 뽑힌 셈;;;[9] 막상 프로농구를 출범시키긴 했지만 당시 우물안 개구리였던 한국 농구 상황상 각 팀 감독들이 NCAA나 해외리그를 챙겨볼리 만무했고, 오직 3일간 트라이아웃에서의 활약만 보고 선수를 뽑았었다. 당시 최장신이지만 기량이 많이 딸렸던 로이 해먼즈(201cm)를 5순위로 뽑고 대구 동양 박광호 감독이 만세를 불렀다고 하니;;;[10] 빌라노바 대학교의 득점기계 에릭 이버츠는 트라이아웃때 아예 선발조차 되지 못했다가, 추가 창단승인을 받은 광주 나산 플라망스의 특별지명으로 전체 16순위로 겨우 선발된바 있다;;;[11] 디비전 II, III, NAIA 소속 대학을 졸업한 선수들도 자주 뽑히곤 했다.[12] 이런 추태를 벌이고 나서 경기 후 인터뷰한 게 더 가관이었다. "더 이상 한국농구를 무시하지 못 하게 할겁니다!!" [13] 시즌 막판 안양 SBS와의 경기에서 윌리포드는 상대 수비수 정재근과 한판 붙었고, 이는 양팀간 난투극 위기까지 이어졌다. 윌리포드는 난투극의 주동자로 2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는데(정재근은 징계가 없었다.) 이바람에 6강 플레이오프 1차전에 결장하게 되었고, 팀의 에이스이자 기둥센터를 잃은 원주 나래는 강병수(191cm)-최호(193cm)로 골밑을 돌려막아보았지만 결국 전희철키넌 조던(198cm)에게 골밑을 접수당하며 대구 동양에 맥없이 패한다. 이후 징계에서 복귀한 윌리포드는 2차전에서 47점을 몰아넣는 등 맹활약했지만 결국 1차전 패배가 빌미가 되어 2승 3패로 6강에서 탈락하고 만다.[14] 부산 기아 get 정인교, 윌리포드, 원주 나래 get 허재, 데릭 존슨(204.4cm)[15] 위의 사진에서 윌리포드가 입고 있는 유니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