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우
1. 개요
한국의 전직 농구 선수이자 전직 농구 감독. 선수 시절에는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금메달의 주역이었고, 센터로써 190cm가 안되는 작은 키와 부상에 불구하고 골밑을 지켰던 센터였다. 감독으로도 성공해서 신산으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국농구의 전설로도 통한다.
별명은 자주 언급되는 신산이자 NBA의 전설적인 명장 중 하나인 KBL의 래리 브라운이다.
그 중 미디어 등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별명은 '''신산(神算)'''이다.
'''신산(神算)'''의 의미는 '신의 계산'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전략과 전술이 뛰어나다는 의미다. 그 뜻은 머리에서 사오는 신의 계산을 줄인 말로 남들이 예상하는 수에서 몇배의 수로 수싸움에 능해서 붙인 뜻으로 붙인 별명이다.[3][4][5]
90년대 말에는 최인선 감독과 김동광 감독, 00년대 초중반에는 김진 감독과 전창진 감독, 00년대 중후반에는 유재학 감독과 추일승 감독과의 라이벌 구도를 각자 만들었던 KBL 최고 명장 중 한명이였다.[6]
2. 선수 시절
용산고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센터였고, 박수교와 함께 연세대를 이끈 선수였다. 센터로서는 그리 크지 않은 키인 188cm 이지만, 당시로서는 그래도 제법 큰 키였고, 무엇보다 농구 센스가 좋아서 작은 키를 커버했다. 특히 골밑에서 외곽으로 적절할 때 빼주는 패스가 일품이었다고.
그러나 선수로서는 나름대로는 성공적이었지만, 많은 경기에 뛰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잦은 부상 때문이었다. 이미 대학교 시절에 허리 디스크로 고생했는데,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릎 관절염까지 앓으면서 선수로서의 기능이 치명적으로 떨어졌다. 결국 1979년에 가면 일시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재활에만 매달리는 상황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비록 1977년에 현대의 창단 멤버로 합류해서 잠시 뛰기는 했지만, 이 무릎 부상으로 인해 뛰어난 활동량은 절반으로 감퇴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부상에 대한 재활 끝에 1982년에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하면서 코트에 복귀할 수 있었고,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대표로 합류해서 대표팀의 골밑을 지키면서 중국을 누르고 사상 첫 아시안 게임 남자 농구 금메달을 차지하는데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을 하얗게 불태운 결과였고, 또 다시 무릎 부상이 도지면서 결국 신선우는 1984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활약해서 1983-84 초대 농구대잔치 우승을 현대에게 안겨주고 은퇴는 했다.
참고로 연세대 출신 중 삼성의 선수이자 기아의 코치였던 동기인 박인규도 있었다.
3. 지도자 시절
3.1. 현대 감독 선임 전까지
은퇴 후 1986년 창단한 현대중공업 여자 농구팀의 코치로 선임되면서 지도자의 첫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 농구팀이 현대증권으로 이관되는 과정에서 신선우는 농구 지도자의 세계를 떠나 현대증권의 평사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제법 능력을 발휘하며 1993년에는 부장자리까지 승진하면서 승승장구했고, 법인 영업 부장으로 활약하며 그대로 증권맨으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1994년 동기인 박수교[7] 가 사퇴한 현대전자 남자 농구팀의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증권맨 생활을 접고 농구판으로 다시 돌아왔다.
3.2. 대전 현대 다이냇/걸리버스
1994년 부임 당시 현대전자는 농구대잔치의 강호로서의 명성은 완전히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기아자동차는 건재했고, 라이벌인 삼성전자가 스카우트 싸움에서 그래도 간간히 대어를 건진 것과 달리 현대는 전혀 스카우트 싸움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신선우는 일단 이상민과 조성원을 영입했지만, 이들을 모두 군대로 보내면서 후일을 기약했고, 프로 출범이 임박한 상황에서 이들을 프로 출범에 맞춰서 쓰려는 계획이었는데 '''이 판단은 신의 한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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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출범 원년인 1997 시즌에는 8개팀 중 7위로 부진했지만 1997-98 시즌 이상민과 조성원이 제대하고, 추승균이 입단하면서 현대의 전력은 단숨에 강해졌다. 그리고 여기에 신선우의 절묘한 묘수로 영입한 외국인 선수가 바로 조니 맥도웰이었다.[8][9] 맥도웰의 힘과 탄탄한 기본기를 주목한 신선우는 2라운드에서 팀의 파워포워드 자리를 맥도웰에게 맡겼고, 거기에 이-조-추 라인이 추가된 힘이 보강되면서 정규시즌 3연패 및 챔프전 2연패를 차지하며 일약 왕조의 반열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999-2000 챔피언 결정전에서 로렌조 홀을 데려오기 위해 라이벌인 최인선 감독이 있는 SK 나이츠로 트레이드 시킨 재키 존스에게 밀리고, 여기에 SK의 포워드 로데릭 하니발에게 이상민이 키에서 밀려서 눌리는 것을 보고 당했다. 결과는 기아 왕조를 끌어내렸던 최인선 감독의 SK 나이츠에 3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을 하고도 1999-2000 KBL 파이널에서 높이열세로 인해 대실패를 당하면서 결국 SK에게 최종우승을 내줘 3연패 달성이 좌절됐다.[10]
2000-2001 시즌에는 토털 바스켓 볼로 전 선수를 장신 포워드로 꾸려서 승부를 보기 위해 조성원을 양희승과 바꾸면서 선수들의 장신화를 꾀하기 시작했다.[11][12] 그 결과, 팀은 20승 25패로 정규리그 6위를 기록했어도 다행히 플레이오프 진출은 성공했으나 6강에서 청주 SK에게 2연패로 완패당했고, 현대 다이넷-걸리버스는 같은 라이벌이었던 기아 엔터프라이즈와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13][14]
3.3. 전주 KCC 이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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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C 이지스로 인수되었던 첫번째 시즌인 2001-2002 시즌에는 12연승을 달리면서 어느 정도 안정세를 찾았다. 하지만 2001-02 시즌 PO에서 외국인 선수 1명으로 맞서던 SK 나이츠에게 4강 PO에서 패하면서 챔프전 진출은 좌절되었다. 그리고 토털 바스켓볼은 점차 센터의 높이에서 밀리면서 그 위력이 떨어졌다. 애당초 2001-02 시즌의 성공도 현대 시절에도 뛴적이 있었던 재키 존스의 위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1999-2000 시즌부터 3 시즌 연속 포스트시즌에서 최인선 감독에게 또 다시 무릎을 꿇는 굴욕사는 또 이어가게 되면서[15] 토털 바스켓볼을 포기하고 팀 재건에 나서야 했다.
2002-03 시즌에는 양희승 대신 2001-2002 창단 첫 통합우승과 2002 부산 아시안게임 농구 금메달 신화를 창조했던 김진 감독이 이끄는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전력약화를 노렸는지 샐러리 캡으로 인해 잡기 어려웠던 전희철을 트레이드로 영입하면서 높이를 더 높였다.[16] 하지만 높이에서 전희철의 공백을 절감했으나 이 트레이드는 KCC에는 최악의 한수로 남게 되었고, 높이를 높였지만 외국인 문제와 조화는 커녕 가득했었던 악재 때문에 가장 최저 성적이었던 20승 34패로 정규리그 9위라는 굴욕을 당했다.
자존심이 상했던 신선우 감독은 2003-2004 시즌을 앞두고 외국인선수 트라이아웃 1순위로 찰스 민렌드를 선택했다. 여기에 시즌 도중인 12월 3일 전희철을 SK 나이츠에 내주고 조성원[17] 이 KCC에 복귀함과 동시에 이조추 트리오가 다시 뭉쳤면서 민렌드도 준비하게 시작했다. 신선우 감독도 그 사실에 조성원을 생각하면 미안하다고 했고 다시 과거의 이조추 시절 트리오의 명예회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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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에 진출한 KCC는 통합우승을 노리는 정규리그 1위팀 원주 TG삼보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기존의 이조추 트리오와 찰스 민렌드의 시너지를 노렸던 덕분에 KCC는 7차전 접전 끝에 누르고 우승에 성공했다.[18]
2004-05 시즌에도 한번 더 대권에 도전했지만, 여전한 우승후보이자 전년도 통합우승에 실패한 원주 TG삼보가 KCC의 전략을 막아내 복수에 성공하면서 첫 KBL 통합우승과 함께 V2를 달성했다. 그리고 신선우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구단에서 재계약을 검토했으나 이를 거절했고 당시 최고 대우였던 역대 최고 연봉인 3억원으로 창원 LG 세이커스로 이적하면서 10년 넘게 정들었던 현대-KCC를 떠났다.
3.4. 창원 LG 세이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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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006 시즌 이적 이후 3년간 연봉 3억이라는 당시 최고 대우와 함께 LG스포츠의 형제 야구단인 LG 트윈스에서 시구를 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었다.
창원 LG 감독에 새로 부임한 신선우는 현대-KCC의 프랜차이즈였던 유도훈 수석코치, 이지승 코치와 함께 동행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황성인이 문제가 있었는데 가드 라인 보강을 검토하면서 신기성을 영입할려고 했으나 구단과의 상의 끝에 높이 보강 차원에서 2002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멤버로 20년만에 한국농구의 아시안게임 우승을 이끌기도 했던 당시 최고의 올어라운드 포워드인 현주엽을 FA로 영입을 하면서 새 출발을 시도했다.
역시 평가는 우승후보였는데 전임이었던 박종천 감독 시절 가드에 문제가 있는 황성인 선수가 있지만 기존의 조우현 선수가 있는 상황에서 아주 높은 높이는 아니지만 포인트포워드라는 별명을 얻은 현주엽 선수를 신기성 선수를 대신해서 영입한 것도 바로 신산의 계산 중 하나다.
미디어는 신선우와 현주엽의 만남만으로 우승후보로 띄웠다.
외국인도 드미트리우스 알락센더라는 최고의 올어라운드 빅맨을 통해 높이를 높이는 데 성공하게 된다.
남은 관건은 바로 신 감독이 현대-KCC 시절부터 강조한 "조화"였다.
그러나, 새 팀에서의 첫 번째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알렉산더의 반대의 헥터 로메로와 로먼 롤란 사이의 외국인 문제가 있었고 현주엽 또한 토털 농구 대신 추일승 시절과 그 이전의 약팀 시절 에이스 모드만 고집하면서 공수조화를 찾지 못했다. 그로 인해 결과는 정규리그 8위라는 부진과 함께 6강 PO에서 탈락하면서 최고 명장으로서의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19]
그것도 자신의 친정으로 허재가 부임한 전주 KCC 이지스와 김동광 감독의 안양 KT&G 카이츠 그리고 김진 감독의 대구 오리온스와 공방율 경쟁까지 갔으나 홈 최종전인 KCC전에 패하면서 LG는 자신의 후배였던 전임 감독인 박종천 시절을 포함해서 2년 연속 플레이오프 탈락의 비극을 당하게 된다. 추가로 전임 감독이었던 김태환 감독의 서울 SK 나이츠도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사실 05-06 시즌은 각 팀간의 전력차이가 크지 않았는데[20][21] 당시 4강 후보였던 LG와 SK는 그야말로 농구팬들에게는 충격과 같았다.
이로인해 신산이라 부르는 신선우는 KBL 최고 명장의 자존심에 다시한번 상처를 입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현주엽은 신선우의 계산 대신 나홀로 매직 존슨 모드로 가끔씩은 팀워크와 반대의 농구를 하면서 비판을 받게 된다. KTF 매직윙스 시절만 보면 추일승 감독의 경우 자신을 맞추도록 하는게 아니라 살리도록 하는데 정작 신선우는 그것을 하지 못했다.
절치부심한 신선우는 LG 세이커스의 창단 10주년이었던 2006-2007 시즌을 앞두고 LG의 창단 첫 KBL 통합우승을 위해 LG라는 이름을 제외하고 팀 자체를 대폭 개편하게 된다. 시즌 개막 전에 전자랜드와 시간차 트레이드를 단행하면서 대폭적으로 팀 개편을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LG는 당시 2002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시절 막내였던 을 보내는 3대3 트레이드의 핵심으로 KTF 소속이었던 99-00 SK 나이츠의 창단 첫 플레이오프 우승과 2002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멤버 중 하나인 슈터 조상현을 FA가 되자 즉시 영입했다. 추가로, 그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알짜 선수들을 보상으로 내주지 않기 위해 벌인 일종의 계산같은 거래였다.
먼저 1999-2000 SK 나이츠 시절 자신에게 아픔을 주었던 2002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 시절 대표팀 슈터였던 조상현을 영입하기 전인 4월 30일, LG는 현금 3억원을 받으면서 조우현, 정종선, 정선규를 전자랜드로 보낸 후 6월 1일에 마침내 FA 최대어 슈터였던 조상현을 영입했다. 문제는 LG가 이런 식으로 사전에 로스터를 대거 정리하는 바람에 KTF가 지명할만한 선수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추일승의 KTF는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보상선수로 전년도 평균득점 0.9의 임영훈을 지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6월 13일에는 다시 전자랜드와 트레이드를 하여 황성인과 3억원을 주고 박지현, 박규현, 박훈근, 임효성을 데려오게 된다. 결과적으로 시간차를 두고 전자랜드와 4:4 트레이드를 한 것이다.[22] 이 트레이드는 신선우만이 할 수 있는 역시 신산(神算) 다운 극한을 보여준 트레이드로 평가된다.[23][24]
어쨌든 이렇게 트레이드와 FA 영입으로 전력을 보강하고 외국인 선수도 2003-2004 시즌과 2004-2005 시즌 KCC 이지스에서 함께했던 영리한 스코어러 출신인 찰스 민렌드를 다시 데려오고, 퍼비스 파스코라는 괜찮은 수비형 센터를 데려온 뒤 2년간 성적부진과 함께 KBL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3순위로 경희대 출신 땅꼬마(?) 포인트 가드이자 이해 LG의 창단 첫 신인왕이었던 이현민을 지명하면서 전년도와 다르게 전력을 대폭으로 보강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2006-07 시즌에는 현주엽-조상현-이현민 트리오와 찰스 민렌드의 득점력과 함께 마침내 성적을 내게 된다. 그것도 2위 경쟁을 했던 KTF 매직윙스와의 4강 플레이오프 홈 코트 어드벤티치를 놓고 시즌 막판까지 경쟁하다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4강 PO 3차전에서 상대의 거친 수비에 말린 파스코가 심판을 폭행하는 초유의 사태에 휘말리면서 퇴출되었고, 결국 KTF에 골밑 수비를 막아내지 못하면서 자동으로 진출했던 4강 PO에서 그대로 탈락하면서 기대 이하의 1승 3패라는 충격으로 이어지게 되면서 KBL 파이널 진출에 실패하게 되었고, 창단 10주년에 챔피언을 노렸던 창원 LG의 꿈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었다.[25]
2007-08 시즌[26] 에는 29승 25패를 기록하며 간신히 6위로 PO 진출에는 성공했으나 6강 플레이오프에서 전자 라이벌인 삼성에게 0:2로 패하면서 탈락했다. 그리고 LG는 우승이라는 목표가 어긋나자 KBL 명장인 신산 신선우 감독은 결국 LG와 이별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실 신선우 감독은 12년간 감독생활로 인해 지쳐있었고 구단과의 면담 끝에 재충전을 스스로 원했는데 절대로 경질이나 사퇴가 아닌 계약만료에 따른 퇴임이었다.[27][28] [29]
3.5. 서울 SK 나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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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야인으로 지내며 KBL 위원장으로도 활동하던 신선우는 몰락을 거듭하던 KBL의 레알 마드리드라 불리우는 SK 나이츠의 부활을 맡게 된다. 2009-10 시즌 중 연말에 자진 사퇴를 했던 KBL 대표명장인 김진 감독의 후임으로 서울 SK 나이츠 6대 감독으로 예상보다 KBL 감독으로 일찍 부임을 했다.
하지만,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다.
현대-KCC 시절 우승트리오였던 이상민과 조성원 그리고 추승균만 아니라 이적생이었던 양희승과 전희철과의 마찰이 있었고 LG 시절만 해도 현주엽과 조상현 및 박지현과 이현민을 장악하는 데 실패하면서 과거 카리스마형 농구로 인해 전임 김진 감독 시절 자율 속 체계에도 불구하고 부상과 슬럼프가 깊은 SK를 구해낼 지는 반신반의하기도 했다.
LG 시절에 함께했던 이지승 수석코치와 함께 명예회복을 위해 지휘봉을 잡게되었다. 2009년 12월 26일, 신산은 LG 세이커스 감독 시절 이후 무려 1년 8개월만에 복귀전을 치렀다.
그러나, 2009-2010 시즌 중도에 선임이 된 나머지 전임 감독 시절부터 이어진 연패 기록을 그대로 이어가 구단 역대 최다인 12연패를 당했다.[30]
외국인 또한 사마키 워크와 조셉 데버트를 모두 교체하면서 조 크래븐호프트와 크리스토퍼 가넷으로 변화를 주었으나 기량미달의 외국인이었고 이로인해 과 김민수에게 몸싸움과 스크린 등 궂은일을 타임아웃 때 강조하면서 탈출구를 찾을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전임 감독 체제에 적응된 베테랑들인 문경은과 주희정도 그 이전 시절에 비해 달라진 팀 분위기 적응에 끝내 실패를 하면서 최악의 시즌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결과론으로 연말에 충격적인 사임을 선택했던 김진 감독의 사퇴는 큰 의미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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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SK 구단은 SK 프런트에서 이미 영구결번과 함께 차기 감독으로 세우기 위해 준비중이었던 문경은은 2009-2010 시즌 이후 선수로서 은퇴를 한 이후 SK D 리그 코치로 준비하면서 신선우 감독은 그나마 있었던 최고 슈터 하나마저 잃게 된다.
이 여부와는 별개로 신선우 감독은 마치 조성원처럼 유종의 미를 원했던 문경은을 배려했다. 문경은은 이미 은퇴 이후 인터뷰에서 밝혔는데 출전시간은 오히려 김진 감독 시절보다 더 많은 기용을 했다. [31]
하지만, 그 자리에는 취약점인 슈팅 가드에서 마치 조성원으로 생각했던 모비스 피버스에서 통합우승을 했던 스윙맨인 브라이언 킴이라 불렸던 테크니션 가드인 김효범을 SK 레전드였던 문경은의 은퇴와 SK 간판이었던 의 부상문제로 인해 FA로 영입하게 되었다.
2010-2011 시즌을 앞두고 주희정, 김효범, , 김민수 등 국가대표팀을 구성할 만한 호화멤버들이 여전하면서 시즌 전 전망에선 늘 우승후보로 꼽힌다. 외국인도 테런스 레더와 마퀸 챈들러라는 검증을 찾으면서 이 정도면 재건이 아닌 우승도전이었다. [32]
초반엔 반짝 상승세를 타는 것도 최근 2~3년간의 패턴이 반복되었지만, 시즌 중반만 되면 뒷걸음질을 쳤고, 부상 후유증에 걸린 방성윤은 시즌 중반 코트에 복귀했지만 특급 선수에서 평범한 선수로 후퇴했다.
실제로 3 라운드에서 4 라운드까지 5할 승률에 6강 플레이오프 권을 유지했으나 끝내 누적된 부상과 체력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게 되며 재임기간 동안 2년 연속으로 21승 이상을 거두지 못하더니 2년 연속 7위의 성적과 함께 굴욕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서 SK 나이츠는 KBL 통합우승 출신 2명의 감독을 연속으로 선임하고도서도 시련사만 반복하는 암흑기로 또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 이렇다 할 전력 향상을 보여주지 못한 채 20승 34패 정규리그 7위를 기록하며 차기 시즌 외국인 영입을 위해 출장 중 구단으로 부터 경질 포함 1년 총감독직을 주면서 불의의 퇴진을 당했다.[33][34][35][36][37]
사실 신선우 감독은 10-11 시즌 정규리그 종료 이후 차기 시즌 외국인 영입을 위해 해외출장을 갔는데 돌아온 것은 뒤통수였다. 마치 김성근을 뒤통수 친 SK스포츠단의 흑역사와 SK 나이츠 프런트의 계산에 자신이 부메랑을 당한 격이었다.
09-10 시즌 16승과 10-11 시즌 20승 그리고 문경은이 감독대행이 된 11-12 시즌 19승과 9위에도 불구하고 SK 프런트의 문경은 감독 만들기에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대학과 실업 선수시절과 프로 감독 시절 평생의 라이벌이었지만 알고보면 대표팀의 동료이자 동갑이었던 안준호 감독도 삼성에서 퇴진한 뒤 자신으로 인해 신산이 물러나게 되었던 점에 씁쓸함을 보였다.
4. 행정가 및 야인 시절
서울 SK 나이츠 감독에서 물러난 신선우는 농구행정가의 길을 선택해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한국프로농구 기술위원장과 한국여자프로농구 전무이사를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행정가로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 유도훈 감독과는 친한 후배를 넘어 친동생인지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의 2011-2012 시즌 6강 플레이오프에서 마치 산신령이 오신듯 농구팬으로 직관한 모습까지 나오면서 역시 현대전자 시절 스승과 제저의 인연이 오래됨을 증명했다. 실제로 감독으로 경쟁할 때 담배까지 선물했을 정도였다.
2014년, 최경환 총재가 기획재정부 장관(경제부총리) 취임으로 총재대행을 맡았다가 2015년 5월 14일에 총재로 선임된 이후 2015년 여름에 오프시즌에 2군리그 컵대회인 '박신자컵'을 개최하며 총재로서 여자농구의 저변을 넓히기도 했다.
2017년 3월 11일 한때 지휘를 했던 창원 LG 세이커스의 창단 20주년을 기념하는 영상에서 현주엽, 조성원과 함께 소개되기도 했다.
5. 비판
현대-KCC의 명장이었지만 LG와 SK로 이적 이후 예전같지 못했고 심지어 행정으로 흑역사도 추가되었다.
5.1. 전술 & 전략만 가득찬 야심가 그리고 조성원이라는 그림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전술가로서의 야심만 가득했다.
동세대 라이벌인 최인선 감독에게 1999-2000 시즌 KBL 3년 연속 통합우승 실패 이후 조성원을 내놓으면서 몰락했던 게 사실이다.
이로 인해 높이를 높이고자 장신슈터 양희승과 장신포워드 전희철을 영입했다.
외국인도 골밑일지 아니면 다재다능일지 바꾸는 건 귀신이지만 생각보다 많이 꼬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도 미디어는 현대-KCC를 우승후보로 띄웠다. 하지만, 엄청난 폐혜로 이어졌다.
우승후보가 6강 또는 그 이하의 성적으로 체면을 또 구겼고 끝내 조성원을 다시 부르면서 잠시나마 고등후배이자 라이벌인 전창진을 겨우 이기면서 KBL PO 3번째 우승을 했다.
추가로 LG에서는 포인트 포워드였고 토털농구에 맞을꺼라는 현주엽도 보기 좋게 참패를 당했다.
이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신선우 감독이 추구하는 다양한 공수 패턴 농구였다.
그 과정에서 신선우의 패턴 농구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양희승과 전희철은 자유를 갈망했고 현주엽 또한 출전시간 문제로 인해 재임기간 중 기싸움 속에 힘들어했다.[38] 말년에도 애초부터 외곽형 포워드인 김민수에게 골밑을 못하는데 공수 모두 골밑 플레이를 지시(강요)하는 등 감각에서도 예전같은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추가로 유리몸임 에게도 몸싸움과 리바운드를 지시하면서 부상을 악화시킨 부분도 없지 않다. 실제로 문경은과 주희정도 전임 김진 감독 시절에 비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39]
사실 오늘의 명장 신선우를 만든건 이조추 트리오 중에서 슈터 조성원이라는 사실을 아는 농구팬들은 많지 않은 편이다. 실제로 조성원의 이적 이후 현대-KCC는 우승후보였으나 기대이하의 경기력을 드러냈고 03-04 시즌에 복귀해서 다시 PO 챔피언이 된 점을 보면 처음 호흡했던 멤버들의 손발과 조직력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느낄 수 있다.
LG 감독 시절에는 슈퍼 매직히포인 현주엽도 간간히 3점을 던졌고 슈터 조상현은 원래 KBL 최고 슈터 중 하나였으며 LG 첫 신인왕이었던 가드 이현민도 간간히 3점을 넣으면 경기력이 좋았다.
SK 감독 시절을 보면 과 김효범 그리고 김민수 문제점이 심각했는데 문경은은 그나마 연패 속에서도 SK를 살리는 한방을 넣은 점을 보면 의미하는 바가 있다. 문경은의 은퇴 이후가 김효범이었다. 결론적으로 토털 농구로 높이를 높였지만 결국 3점포의 유무에 따라 경기력에 기복을 드러냈다.
요약하자면, 초창기 시절에는 전략과 전술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명장이었으나, 후반부 들어서는 시대의 흐름에서 완전히 뒤쳐지면서[40] 창원 LG 세이커스에는 기복을 드러냈고 서울 SK 나이츠 시절에는 그것보다 심하게 성적을 내지 못하며 빛과 그림자가 뚜렷한 인물이었다.
5.2. 외국인 제도 뒷돈의혹
추가로 외국인 영입으로 인해 오해를 받기도 했거나 뒷돈의혹에 시달렸다. 트라이아웃 제도로 회귀한 이후 드래프트에서는 그저 그런 선수를 뽑아 퇴출시키고, 그 다음에는 A급 선수를 뒷돈주고 데려오는게 아니었냐는 의혹이 생겼다. 자유계약제 시행한 프로농구는 NBA 출신을 비롯해 유럽 상위리그에서 활약한 대거 몰려왔지만, 특급선수 영입 과열 경쟁과 뒷돈 거래와 들러리로 전락한 국내선수 등 각종 부작용들이 속출하면서 외국인 문제와 관련해서 구설수가 많이 생겨난 감독은 SK 5대 감독 겸 LG 6대 감독과 SK 6대 감독 겸 LG 4대 감독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41][42]
5.3. 행정가로서 흑역사
WKBL 총재 재임 중 부천 KEB하나은행의 첼시 리 사기 사건이 터지고도 이에 대해 여자프로농구의 수장으로서 책임지기는커녕 배째라식 태도로 일관하며 팬들도 등을 돌렸고, 결국 그 영향으로 2018년 4월 19일, WKBL 총재에서 물러났다.
6. 여담
- 농구선수로 활약했던 신석은 조카이다. #
- 감독 재임 시절 스트레스를 등산으로 해결했는데 감독으로 떠나고도 계속 등산을 즐겼다.
- 농구인들과 농구팬들에게는 옷 하나 잘입는 감독으로 유명했다.[43] 실제로 창원 LG 세이커스 4대 감독 재임 시절에 2006-2007 시즌 한중 올스타전에서 양복이 아닌 하얀 한복을 입고 올스타 선수단을 지휘했다.[44][45]
- 가수 김광진이 중학교 시절 전국체전에서 마주쳐 사인을 해달라고 부탁하자 경기장 안에 데리고 들어가줬던 인연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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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문서
[1] 25회 졸업[2] 경영학과(1974학번)[3] 까는 별명으로는 규정의 허점을 극한으로 이용하는 트레이드 수법으로 인해 붙은 '''꼼산'''이 있다.[4] 또 등산을 취미로 즐기면서 ‘신산(神算)’이 아닌 ‘신산(神山)’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5] 신산이라는 이름 앞 두 글자가 의미하는 부분은 인터뷰하기 어려운 사람, 특이한 사람, 접근이 어려운 사람이었으며 지휘봉을 내려놓고 산으로 떠돌면서 그의 이미지는 더 굳혀졌다. ‘신선우를 보려면 산으로 가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으니까. 청계산 밑 KBL 회식 모임에서 그를 본 순간에도 그는 등산복을 입은 산신령처럼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산과 낚시를 좋아하고 뱀을 좋아하는 그에 대한 상상은 산산조각 부서졌다. 어수룩하고 투박한 말투에 순진무구한 환한 웃음. 이 정도면 그의 인간미가 있다.[6] 특히 현대 및 KCC와 LG 감독 시절에는 토털 바스켓을 바탕으로 포지션의 개념을 파괴한 몸싸움과 스크린이 포함된 농구의 주인공이었고 상대팀 에이스와 상대팀 감독에게는 도저히 막을 수 없었던 공포의 대상이었다.[7] 향후 최인선 감독과 박인규 감독 그리고 허재 선수가 만들었던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대몰락과 모비스 오토몬스에서 강동희와 김영만이 FA 때 나가게 된 빌미를 제공하면서 흑역사로 불리우게 된다. 전자랜드 감독-단장으로서도 대실패를 하게 된다.[8] 맥도웰의 영입은 사실 신선우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는데, 원래 신선우가 점찍고 있었던 외국인 선수는 맥도웰이 아닌 버나드 블런트였다. 앞 순위에 있던 창원 LG 세이커스의 창단 감독이자 LG 초대 감독이었던 현대 시절 후배였던 이충희 감독이 블런트를 스틸픽하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대신 선택한 선수가 맥도웰이었던 것. 트라이아웃이 끝난 후 분을 참지 못한 신선우 감독은 이충희 감독에게 쓰레기통을 집어던졌다는 훈훈한(...) 뒷이야기가 있다. 블런트는 LG의 주득점원으로 2시즌을 맹활약하다, 이중계약 파문을 일으키며 KBL을 떠나게 된다.[9] 당시 외국인 선수 선발 제도는 193 미만 1명, 193~205 사이 1명을 영입할 수 있었는데, 맥도웰은 192.5cm로 아슬아슬하게 단신용병에 들어올 수 있었다.[10] 이 참패는 결국 명장 신선우 감독의 자존심에 상처가 되었고 뜬금없는 전략을 세우기에 이른다.[11] 이전에도 토털 바스켓 볼을 조성원과 추승균의 미스매치를 활용하기도 했으나 역시 기아 시절 허재와 김영만에 당했고 SK 시절 서장훈과 조상현에 당하면서 더 이상 어려운 판단에 계산을 한 것이다.[12] 이 트레이드에서 조성원은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상태였고 구단에 요청하기도 했다.[13] 부산 연고였던 기아 엔터프라이즈는 모기업인 기아자동차가 현대기아차 부품회사인 모비스에 인수되었고, 현대모비스 공장과 기숙사가 있는 울산으로 연고지가 이전되어 모비스 오토몬스로 재창단되었다. 대전 연고였던 현대 다이넷-걸리버스는 모기업인 현대전자가 같은 범현대가인 금강고려화학에 인수함에 따라 전주 KCC 이지스로 바뀌게 되면서 그대로 그 팀의 초대 감독을 역임하게 된다.[14] 모비스 오토몬스와 현대 다이넷-걸리버스 모두 인수로 인해 전신 팀의 역사는 승계했지만 농구 팬들은 연고지도 바뀌면서 사실상 창단팀으로 간주한다. 심지어 강동희와 김영만이 기아 출신인데 왜 빨간색 유니폼이 아닌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놀랐고 이상민과 추승균이 현대 출신인데 왜 녹색 유니폼이 아닌 파란색 유니폼을 입었는지 팬들이 갸우뚱했다.[15] 이해 SK 나이츠의 외국인은 체력이 약한 에릭 마틴이었다. 그만큼 신선우 감독으로서는 한계가 드러났다. 또 어이가 없었던 건 골밑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던 김진 감독이 이끌면서 전희철과 김병철에 김승현과 마르커스 힉스가 등장한 대구 동양 오리온스에 최종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 끝에 준우승에 머물게 된다. 이 부분을 보면 신선우 감독의 계산보다 김진 감독의 신뢰가 더 빛이 났다.[16] 결국 동양은 이현준을 현금 6억원을 받는 조건으로 샐러리 캡의 부담을 덜었지만, 사실 이현준의 수비전문 공격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동양은 영리했던 김진 감독이 이전부터 슈터였던 박재일을 중용하면서 그 이전부터 준비를 했다.[17] 조성원은 2000-2001 시즌 양희승과의 맞트레이드 이후 LG의 창단 첫 정규리그 MVP로 가치를 높였으나 무릎부상으로 인해 전성기에서 내려오면서 높이 열세로 인해 LG를 떠난 뒤 김영만과의 맞트레이드로 SK로 갔지만 여전히 높이로 고전했다. 게다가 SK 나이츠 구단의 기대에 부응못해 미안함을 드러낸 조성원은 현대 시절 지도를 받았던 신선우 감독의 도움을 받아 예전의 모습을 되찾도록 노력을 다짐했다.[18] 신선우 감독은 당시 하위권에 쳐졌던 모비스와 용병 맞 임대를 단행하면서 모비스의 주축 센터였던 R.F. 바셋을 임대 영입했다. 다만 임대 과정에서 1라운드 지명권을 넘겨줬는데, 이게 1픽에 걸리면서 양동근은 모비스에서 은퇴할 때까지 팀의 에이스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바셋 임대는 역사상 최악의 꼼수 트레이드로 지탄을 받았고 KBL은 부랴부랴 규정을 고쳐 임대 트레이드를 원천봉쇄하였다.[19] 사실 신 감독은 현대-KCC 시절부터 매번 인터뷰 때 조화를 언급했는데 개성강한 스타군단인 LG에는 이런 토털 바스켓볼의 구성을 하기에는 현주엽과 황성인의 공존문제가 컸는데 그나마 드미트리우스 알렉산더라는 최장신 외국인의 높이와 득점력 덕분에 그나마 6강 경쟁을 할 수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한계였다.[20] 최하위 인천 전자랜드가 단 8승 46패로 꼴찌를 거둔 것을 제외하면, 9위 서울 SK 나이츠도 24승 30패를 기록하는 등 모든 팀이 최소 40% 이상 승률을 기록했다. 사상 첫 5할 승률 PO 탈락팀도 이 때 나온 것이다. 1위 울산 모비스도 성적이 36승 18패에 불과해 당시 1위팀 중 가장 낮은 성적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21] 그나마 서울 SK는 부상 악재라는 면죄부가 있었던 반면, LG는 초호화 멤버를 갖추고도 시즌 내내 조직력 문제로 삐걱거리며 끝내 팬들을 실망시켰다.[22] 황성인+조우현+정종선+정선규↔박지현+박규현+박훈근+임효성.[23] 이 트레이드가 논란이 되자 이후 5라운드부터 챔피언 결정전 종료 시까지, 그리고 FA 협상 기간에는 트레이드를 할 수 없게 바뀌었다.[24] 참고로 당시 전자랜드의 감독은 신선우와 연세대 동기이기도 했던 최희암이었다.[25] 그런데 LG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 전 유도훈 수석코치가 도중 KT&G 카이츠에서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이지승 코치가 수석코치를 맡게 되면서 팀을 꾸리게 되었다.[26] 이 시즌에는 동부와 KCC의 독주와 리빌딩에 들어간 모비스을 제외하면 KTF와 오리온스가 초반부터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전반적으로 승수들이 높은 시즌이었다. 하지만, 정규리그에서 강세를 보였던 전자 라이벌인 서울 삼성 썬더스를 고르기 위해 6라운드 막판부터 경기를 느슨하게 하는 등 팬들의 비판이 있었다.[27] 여기에 같은 계열사 구단인 야구 LG 트윈스의 감독이었던 김재박 감독과 함께 형제인 현대의 최전성기를 열었던 감독들이 이적한 팀이 LG인데 모두 우승에 실패하면서 쓸쓸하게 감독직에서 물러났다.[28] 당초 LG는 역대 감독 재계약 기준이 최소 KBL 파이널과 KBL 정규리그 우승으로 매우 까다롭다. 시즌 중 자진 사퇴는 단 한번이 없지만 우승을 못하면서 새로운 감독의 무덤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 기준은 서울 SK 나이츠 이외는 없다. 남은 팀들은 재정이나 명성에서 LG와 SK급은 되지 못한 편이다.[29] 후임 감독은 김진과 전창진 사이로 예상외의 카드였던 고려대 출신이지만 당시 명지대 감독이었던 온전 대학 출신의 강을준 이었다.[30] 실제로 신선우 감독은 그 이전부터 부상병동으로 인해 시한폭탄과 같았던 슈터이자 스코어러였던 을 기다리기 시작했고 훈련부터 모범을 보였던 주희정이라는 포인트 가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단 자체가 로스터가 두터운 데 비해 부상기사단으로 인해 토털 농구 시도를 해보았지만 바꾸는 데는 실패를 하게 된다.[31] 알고보면 SK 프런트의 계산 중 하나로도 볼 수 있다. 이미 SK는 김태환과 김진의 후임으로 유재학을 원했는데 이미 모비스는 그 움직임을 눈치채고 장기계약으로 못가게 했다. 유재학은 SK 빅스의 사령탑이었지만 향후 전자랜드 블랙슬래머로 인수되며 당시 빅스 직원들은 나이츠로 이전했다.[32] SK 나이츠의 별명이 한 때는 KBL의 레알 마드리드였다. 화려한 스타에 비해 수비와 집중력이 부족한 흑역사도 있다.[33] 하지만 문경은은 10-11 시즌 중 감독대행으로 시험을 치르게 되었고 11-12 시즌 19승 9위라는 성적부진에도 불구하고 애초부터 프런트에서 감독을 만들려고 했고 1년 뒤 정식 감독으로 승진되었다.[34] 이 해 SK스포츠단은 야구에서도 SK 와이번스 명장인 김성근 감독도 프런트와의 간극 끝에 해임되는 초사태가 나오게 된다.[35] SK의 전력 자체는 어느 감독이 맡아도 매 시즌 6강이 가능한 전력으로 화려한 이름값을 가진 선수들은 많았지만 그걸로 끝이었고, 신선우 자신도 이를 팀으로서 재조합하는 데는 끝내 실패했다. 한 때, 프로농구 정규시즌 최다승에 빛나는 감독이었지만 SK에서의 신선우는 전성기였던 현대-KCC 시절과 선전했던 LG 시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36] 황금의 드래프트라는 2010 드래프트에서 변기훈과 2011 드래프트에서 김선형을 뽑았다는 점이 있었지만 알고보면 문경은을 위한 큰 그림이라는게 문제였다. 어쩌면 이 LG와 SK에서의 잇따른 실패 때문에 신선우 감독을 보는 시선이 과거보다는 좀 더 냉정해졌는지도 모른다.[37] 감독의 무덤이라는 오명답게 최인선 이후 계약만료로 퇴임한 감독은 아직까지는 없다. 오히려 최인선 감독 또한 연장계약을 놓고 구단과의 차이 끝에 스스로 사임했다. 김태환 감독은 경질과 함께 총감독이라는 굴욕을 당했고 김진 감독은 자신은 슬럼프라며 SK 스포츠단의 인사단행이 있었지만 자진 사퇴 형식을 빌리면서 모두를 아프게 했다. 또 하나의 감독의 무덤은 KBL 10개 구단의 지원을 보면 다른팀보다 한 때 몸담았던 LG였다.[38] 이걸 제압한 건 강을준[39] 일부 언론에서는 신산의 계산이 오작동이라는 비판을 했고 세월의 흐름인지 모르겠지만 그도 끝내 선수의 신뢰를 얻는 명장은 아니었다.[40] 현주엽을 토탈 농구라는 전술 속에서 정해진 룰에 따라 따르게 하면서 말년 들어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게 된다.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포인트포워드로 부산 KTF 시절만 하더라도 MVP 후보로까지 거론되었으나, LG로 이적하면서는 정해진 룰에 따라 플레이를 하면서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서울 SK에서도 이는 똑같이 반복되는데, 애당초 수비력이 좋지 않은 공격형 파워포워드인 김민수의 쓰임새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공수에서 골밑 플레이를 주입을 시키려는 모습을 보였다. 알다시피, 현대 농구는 단순히 특정한 전술만으로 굴러가지 않으며, 선수들의 쓰임새와 움직임을 모두 신경쓰면서 가동해야한다. 신선우는 이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며 한계를 드러내면서 감독 생활 말년 들어서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다.[41] 버나드 블런트와 조니 맥도웰을 시작으로 재임 중 이렇게 비난받기는 쉽지 않은 것이 중심이었다. 현대-KCC 시절부터 서론을 하면 재키 존스와 로렌조 홀이 있었으며 LG 시절에는 드리트리우스 알렉산더도 한 몫을 했으며 캘빈 워너도 그런 의혹이 있었다. SK 감독 시절에도 죠 크래븐호프트 같은 외국인을 쓴 듯 하나 역시 성적을 이유로 테런스 레더를 데리고 오면서도 뒷돈이라는 의혹의 중심이었다.[42] LG 초대 감독이었던 이충희 시절의 최고였던 버나드 블런트 사태를 시작으로 KCC 이지스 시절 R.F 바셋 트레이드와 LG 시절 퍼비스 파스코 사태를 보면 스코어러든 빅맨이든 지나친 계산에 따른 정통 농구의 명암이 극명하게 갈리기도 했다.[43] 반대로 정장 포함 옷을 못 입는 감독은 호랑이라 불리우는 후배 전창진 감독이다.[44] 반대로 자신이 퇴임했던 서울 SK 나이츠를 이끌고 있는 문경은 감독과 전희철 코치는 2016-2017 시즌 중 설날 경기에 한복을 입고 선수단을 지휘했다.[45] 참고로 서울 SK 나이츠는 스포테인먼트를 앞세운 마케팅이 뛰어난 팀으로 원조관중흥행팀인 창원 LG 세이커스와 맞먹는 팬층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