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베투

 

<color=#373a3c> '''베베투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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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1994'''

''' 브라질 민주노동당 '''
'''Partido Democrático Trabalhista'''
<colbgcolor=#ee151f> '''이름'''
'''베베투
Bebeto'''
'''본명'''
주제 호베르투 가마 지올리베이라[1]
José Roberto Gama de Oliveira
'''출생'''
1964년 2월 16일 (60세)
브라질 바이아 주 사우바도르
'''국적'''
브라질 [image]
'''체격'''
177 cm / 71 kg
'''직업'''
축구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감독
정치인
''' 소속 '''
<colbgcolor=#ee151f> ''' 선수 '''
EC 비토리아 (1981~1983 / 유스)
EC 비토리아 (1983)
CR 플라멩구 (1983~1989)
CR 바스쿠 다 가마 (1989~1991)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1992~1996)'''
세비야 FC (1997)
EC 비토리아 (1997)
크루제이루 EC (1997)
보타포구 FR (1998~1999)
토로스 네사 (1999)
가시마 앤틀러스 (2000)
EC 비토리아 (2000)
CR 바스쿠 다 가마 (2001~2002)
알 이티하드 (2002)
''' 감독 '''
리우데자네이루 유스 (2005)
아메리카 FC (2009~2010)
''' 정치 '''
브라질 민주노동당
'''국가대표'''
75경기 39골 (브라질 / 1985~1998)
1. 소개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은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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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브라질의 축구선수 출신 정치인.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올타임 탑 스코어러.
호마리우와 더불어 90년대 카나리아 군단의 공격을 책임진 선수였다.

2. 클럽 경력


국가대표팀 커리어에 비해 베베투의 클럽 커리어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국가대표팀에서 호흡을 맞췄던 호마리우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임팩트 있는 클럽 커리어를 보냈다.
베베투는 20대 대부분을 브라질에서 보냈다. 비토리아를 거쳐 플라멩구에서 1983년부터 1989년까지 80경기 34골, 바스쿠 다 가마에서 1989년부터 1992년까지 53경기 28골을 득점했다.
[image]
1992년 여름 만 28세, 다소 늦은 나이에 처음 유럽 무대를 밟았다. 행선지는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프리메라 리가 91-92 시즌 간신히 강등을 면한 무명 구단에 불과했다. 베베투가 오기 전까지 데포르티보는 이렇다 할 트로피도 하나 없었고 2부 리그에 머물던 정말 보잘 것 없는 팀이었다. 그렇기에 당시 베베투의 이적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전문가들은 '갸날픈 베베투가 라리가의 피지컬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라며 의구심을 품었지만 베베투는 데포르티보 그리고 라리가의 역사를 뒤흔들었다.
1992-93 시즌: 베베투는 37경기 29골을 터트리며 득점왕을 차지한 동시에 데포르티보를 3위까지 견인했다. 이는 데포르티보 구단 역사상 가장 높은 순위, 첫 유럽 대회 진출, 첫 득점왕 배출이었다.
1993-94 시즌: 34경기 16골을 기록했고 데포르티보를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준우승은 데포르티보 팬들의 한이 깃들어 있는데 우승 목전에서 바르셀로나에게 트로피를 내줬기 때문이다. 리그 마지막 경기 발렌시아 전에서 데포르티보는 경기 종료 직전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성공시킨다면 FC 바르셀로나를 제치고 리그 우승을 확정짓는 상황이었다. 페널티킥 전담 키커였던 베베투는 부담을 느끼고 미로슬라프 쥬키치에게 양보했는데 듀키치가 실축하면서 우승을 코 앞에서 놓친 것. 만약 베베투가 나서 페널티 킥을 성공시키고 우승을 확정지었다면 그의 평가는 훨씬 더 높아졌을 가능성이 높다.
1994-95 시즌: 26경기 16골. 데포르티보의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끌었다. 리그는 2년 연속 준우승. 데포르티보의 구단 역사상 그리고 베베투에겐 유럽 무대 진출 이후 첫 트로피였다.
1995-96 시즌: 34경기 25골. 데포르티보는 UEFA 컵 위너스컵[2] 4강까지 진출했으나 리그는 9위로 마감. 베베투는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데포르티보를 떠나 브라질로 컴백했다.
이후 베베투는 보타포구 FR, CR 바스쿠 다 가마, EC 비토리아 등 브라질 리그의 주요 클럽 및 J리그가시마 앤틀러스에도 몸 담았다. 2002년 알 이티하드에서 잠시 뛴 후 은퇴했다.
무명 클럽 데포르티보를 라리가의 신흥 강호로 거듭나게 만든 장본인으로 괜히 '''데포르티보 팬들 가슴 속엔 호마리우보다 위대한 공격수'''가 아니다. 베베투 세대의 일원들이 기반을 닦아놓지 않았더라면 데포르티보의 99-00 시즌의 우승 및 제2의 전성기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라리가에서 영구결번 시스템이 있었더라면 데포르티보 역사에 베베투 이후 11번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브라질 국적이지만 베베투의 조상은 데포르티보의 연고지인 갈리시아 출신이었다. 본인 역시 '''나의 조상은 갈리시아 출신이다. 나는 여러분의 가족이다.'''라며 남다른 애정을 과시했다. 훗날 구단 창립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데포르티보를 떠나 브라질로 컴백한 것을 제일 후회한다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3. 국가대표 경력


대표팀 통산 75경기에 출전해 39골을 꽂아넣을 정도로 준수한 결정력을 자랑했다. 90년대부터 축구를 봐 온 국내 팬들에게 가장 익숙한 브라질의 공격수이기도 한데, 그는 브라질의 유니폼을 입고 무려 세번의 월드컵[3]에 출전해 우승과 준우승을 기록했다. 특히 호마리우와 콤비를 이룬 1994 미국 월드컵의 활약이 백미였다.[4][5] 그리고 1988 서울 올림픽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도 국가대표로 출전해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했다.
1989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6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올랐고 브라질을 우승시키기도 했으며 그 활약으로 1989년 남미 올해의 선수에도 선정되었다. 당시 호마리우는 3골을 넣었고, 이 당시에 이미 베베투 - 호마리우 콤비는 세계 최고 수준의 위용을 과시한 바 있다.

[image]
<color=#373a3c> '''1994 미국 월드컵 8강 네덜란드전 득점 후 요람 세레머니 中'''[7]
베베투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요람 세레머니'''의 원조로 유명하다. 1994 미국 월드컵 8강 네덜란드전 직전에 아내가 출산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경기에 출전해 아들의 탄생을 자축하는 골을 넣은 뒤 호마리우, 마지뉴와 함께 아기를 어르는 이른바 '요람 세레머니'를 펼쳤다.[8] 이후 축구선수의 아내가 출산을 하게 되면 이 축하 세레머니를 하는 것이 암묵의 룰이 되었다.
대표팀 내에서는 약간 시니컬하지만 정상인 기믹을 맡아서 팀을 추스르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대표적 또라이인 호마리우와는 오래 같이 공격진에서 뛰며 발을 맞췄지만 지극히 사무적인 사이였고,[9] 주장인 둥가는 지나치게 수비 중심적이었으며 독선적인 모습으로 팀을 통솔했다. 이에 대해 다른 팀원들이 불만을 가지면 베베투는 "짜증나지만 그래도 우리는 저 놈을 따라가야 된다."고 팀원들을 추슬렀다고 한다.

4. 플레이 스타일



베베투는 브라질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173cm의 스트라이커로서 상당히 왜소한 체구를 가졌지만 반대급부로 상당히 민첩했고 발도 빨랐다. 여기에 브라질리언 특유의 테크닉과 축구 지능은 덤. 1경기에 2골, 3골 몰아치고 3경기, 4경기 득점하는 선수가 아니라 꾸준히 골을 넣어줄 수 있는 공격수기도 했다. 여기까진 왠만한 B급 공격수도 해낼 수 있는 수준이지만 베베투가 아직까지도 기억되는 이유라면 바로 플레이메이킹 능력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 골 냄새를 맡는 것 뿐만 아니라 넓은 시야와 뛰어난 볼 키핑을 바탕으로 동료들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는데도 능했다. 사실 베베투는 커리어 초반엔 공격형 미드필더 내지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뛰었다. 본인은 하얀 펠레라 불리는 지쿠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은퇴 이후


[image]
세월이 흘러 세레모니의 주인공인 막내 아들 마테우스[10]는 성인이 되었고 2014 브라질 월드컵 기념으로 부인, 아들과 세레모니를 재현했다. 그리고 아들 마테우스는 브라질 청소년 축구대표팀에도 뽑혔고, 브라질의 플라멩구를 거쳐 포르투갈 2부리의 팀인 에스토릴에서 프로 선수로 활동 중에 2017년 5월 17일, 포르투갈의 스포르팅 리스본과 2022년까지 6000만 유로의 바이아웃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스포르팅에서 자리를 못잡고 비토리아 SC로 임대를 가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면서 두 시즌 동안 4골 6어시스트의 그럭 저럭 괜찮은 스탯을 올리게되고 다시 스포르팅으로 돌아갔지만 전력외 취급을 받으며 한 경기도 출전을 못하고 한 시즌을 날리게된다. 또 다시 2020년 9월 브라질 세리A의 코리치바 FC로 다시 임대로 가 활약중이다.
배구 선수 출신인 Denise Oliveira와 결혼해 2남 1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둘째 딸인 스테파니에는 모델로 활동하다가 프로 축구 선수인 카를로스 에두아르도와 2019년 결혼했다.[11]
그리고 현재 베베투는 브라질에서 중도좌파인 민주노동당의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1] 외래어 표기법영어를 제외한 로망스어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 (#)[2] 현재 UEFA컵 통합[3] 1990 이탈리아 월드컵, 1994 미국 월드컵, 1998 프랑스 월드컵[4] 호마리우와 베베투는 환상의 투톱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호마리우는 5골 베베투는 3골을 기록했다.[5] 16강 미국전에서 의외로 고전하다 후반 27분께 호마리우가 드리블로 어시스트를 하고 베베투가 마무리한 후 격렬하게 얼싸안을 때 브라질 사람들 모두 감격했다.[6] 티아고 알칸타라, 하피냐 알칸타라의 아버지[7] 양 옆에 있는 사람은 마지뉴 [6]호마리우이다.[8] 사실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카메룬과의 경기에서도 골을 넣고 요람 세레머니를 했었다. 다만 조별리그의 세레머니는 네덜란드와의 8강전 자체가 워낙이나 명경기였고 또한 당시 호마리우와 사이가 나쁘다는 말이 있었는데 호마리우가 달려와서 함께 세레머니를 하는 등의 임팩트가 있어서 아무도 기억을 못한다.[9] 호마리우 曰: "나는 카레카와 베베투를 합한 것보다 낫다."[10] 실제로, 독일의 전설적인 축구선수 로타어 마테우스의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11] 포지션은 공미. FC 포르투의 벤치 자원으로 있다가 2014-15시즌 프랑스 리그 1의 OGC 니스로 임대를 가 10골 5도움을 기록하기도했다. 이런 좋은 활약으로 니스는 완전 이적을 바랬고 AS모나코에서도 이적 문의를 했지만 포르투는 단호히 그 제안을 거절하고 임대에서 복귀 시켰다. 거상답게 포르투는 에두아르도를 2천만 유로(263억)의 금액으로 사우디의 명문 클럽 알 힐랄 FC로 팔아 넘기게된다. 에두아르도는 알 히랄에서 5시즌 동안 총 75골을 기록하였다. 이는 알 히랄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외국인 선수로 기록되기도했다. 2020년 여름 이적 시장때 아랍에미레이트의 샤바브 알 아흘리 두바이 FC로 이적해 활약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