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
1. 개요
기사단이라 함은 기사들로 이루어진 단체 및 군대를 뜻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상 이름 있는 기사단 중 절대 다수가 기사수도회이므로 사실상 기사수도회의 줄임말이 기사단이라 봐도 무방하다.[1] 기사수도회는 십자군 전쟁 이후로 탄생한 특수한 형태의 가톨릭 수도회로, 일반적인 수도회와 달리 이교도(무슬림)로부터 그리스도교 왕국을 수호할 군사적 임무와 수도자로서의 의무를 함께 서약했다.
영어로는 결사, 집단 등을 뜻하는 'Order'나 기사 모임을 뜻하는 'Knights'라 한다. 흔히 'Order'라고 하는데, 이 말은 본래 결사나 집단 등을 뜻하는 일반 명사지만, 기사수도회는 기본적으로 수도회(Religious order)이므로, 'order'가 기사단을 뜻하는 말로 굳어졌다. 반면 기사로 구성된 집단이라는 개념을 강조하기 위해 'knights'라고 쓰기도 했다.
대중문화에서 기사단은 '가톨릭 수도자'로서의 이미지보다는 기사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하지만, 사실 이들은 기사이기 이전에 수도자들이다.[2] 그렇기 때문에 기사단 내에서 기사들이 연애놀음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3][4]
여기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동아시아에서 기사단과 제일 비슷한 단체들을 꼽자면 다름아닌 승병들이다.
2. 역사
2.1. 중세 초기
상당수의 사람들이 중세 시대 내내 각국에 국가 기사단이 실존했던 것처럼 알고 있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기사는 자기 영지(장원)를 갖고 평시에는 자기 장원에 매여 있는 농노들의 노동을 감독하면서 무술을 연마하거나 사냥 등으로 소일하다가 왕이나 영주의 명에 따라 소집되어 싸우는 지방 영주의 형태이기 때문에 영주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이라는 개념은 불가능했다.
귀족의 성이나 왕의 궁정에 거주하며 직접 호위하는 기사들도 있었지만 딱히 이들을 기사단이라 부르지는 않았고, 그런 호위하는 기사들도 일부는 40일간의 봉건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궁성으로 와서 일하다가 자기집으로 다시 내려가는 기사들, 일부는 하우스홀드 기사(House-hold knight)라 부르는 반영구적으로 봉신이 되는 대신 기사위를 수여받아 왕실/영주 직영지에 거주하거나 직영지에서 장원을 받은 기사, 또는 장원을 아직 못받은 기사들로 구성된 느슨한 경호대였다. 왕도 기사단을 평시에 유지하기 보다는 실력있는 용병을 장기 고용하는 쪽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물론 특정 국가에 소속된 기사들을 묶어서 그 나라의 기사단이라고 부를 수는 있으나,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흡사 상비군스러운 그런 기사단은 없었다. 그래서 배넉번 전투 문서에서도 표기하듯이 전투에서 봉건기사를 모아 부대로 운용할 때 “기사단”이 아니라 “기사대”로 표기한다. 기사단과 기사대의 구분이 당연한 것이, 기사단은 처음부터 평소에도 함께 활동을 같이 하는 하나의 집단을 의미하지만, 기사대는 보병대나 궁병대처럼 평소에는 따로 지내던 여러 지역의 봉건기사들을 모아서 임시적으로 부대를 편성한 것이니 말이다. 기사단은 원래부터 하나의 조직이라 자신들만의 명령체계가 있지만, 기사단이 아닌 봉건기사들로 이루어진 기사대는 (대우는 달라도) 각지의 일반 농민들을 모아 보병대를 꾸리는 것처럼, 각지의 붕건기사들을 모아 부대를 꾸린 거라 그때마다 지휘체계를 만들어야해서, 기사단과 기사대의 운용법이 상당히 다르다.
2.2. 십자군 전쟁 시기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자 장기적으로 팔레스타인에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고, 조직적으로 통제가 가능한 '기사들의 단체'가 필요해졌다. 하지만 기사들은 본래 봉건 영주들이므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유럽인들은 '수도자들을 무장시키자'는 발상을 하게 되고, 이는 매우 혁신적인 개념이었다.[5] 왜냐하면 수도회는 여러 명이 동거하며 공동생활을 하는 곳이므로, 기사'''단'''으로 쓰기에 너무나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수도자들은 엄격하고 체계적인 교육이 가능했으며, 사유재산을 포기하였거나 매우 제한적인 형태로만 인정받는 사람들이므로 세속적인 이해관계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심지어 종교적 계율로 무장했기에, 기존의 무력집단과 비교하면 도덕성도 상대적으론 좋은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더해 '가톨릭 수도회'이므로 십자군 전쟁에서 당연히 사기도 높았다. 따라서 이 시기에 성전기사단이나 구호기사단, 튜튼기사단 등 많은 기사수도회들이 조직되었다. 사실상 성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종교적인 목적이 없었다면 기사단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특히 가장 높은 활약을 한 것은 가장 유명한 3대 기사단이 아닌 이베리아 반도, 즉 에스파냐의 기사수도회들이다. 무슬림의 점거가 이루어졌던 이베리아 반도의 그리스도인에게 무슬림은 저기 멀리 중동에 있는 적들이 아니라, 바로 코앞에 존재하는 강력하고 현실적인 침략자들이었기 때문이다.[6] 또한 본거지가 전장이랑 가까우니 전투에 필요한 인력이나 물자를 훨씬 쉽고 빠르게 충원할 수 있다는 장점까지 가졌다. 그렇기에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일찍이 기사수도회들이 발달하였다. 칼라트라바(Calatrava) 기사수도회를 비롯한 레온(León) 의 알칸타라(Alcántara) 기사수도회, 포르투갈의 오비쉬(Oviz) 수도회, 아라곤(Aragón)의 몬테사(Montesa) 수도회 등 수많은 기사수도회들이 발달하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기사들은 역시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구심점으로 적(무슬림)과 자신들을 구분하긴 했으나, 그때부터 이미 카스티야, 아라곤에 대한 민족적 국가적 충성심으로 결속하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이베리아 반도의 기사수도회는 결과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탈환'이라는 목적을 완전하게 이루었으므로,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한 다른 기사수도회와 비교할 때 넘사벽으로 큰 실적을 남겼다 할 수 있다.
십자군 시기 기사단 중 일부는 나중에 성지 탈환을 위한 전비 확충을 빌미로 무역을 독점했으며, 성전기사단은 그렇게 모은 부가 화근이 되어 교황과 프랑스 왕의 협공으로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개박살이 났다. 물론 그들이 모았던 재화는 프랑스 왕과 교황이 나눠 먹었어야 했는데, 다 나눠 먹지는 못하고 상당수의 재산이 생존자들에 의해 빼돌려졌다고 하며, 이런 재산과 성전기사단의 생존자들이 나중에 온갖 비밀결사처럼 관련성 있는 떡밥이 되었다.
2.3. 그 이후
유럽 각국의 왕과 귀족들이 이런 종교적인 기사단을 모델로 왕립 기사단을 창설하게 되지만[7] 이러한 왕립 기사단이 생성된 시기는 중세 중후반에서 르네상스 초엽이었다. 물론 이들 기사단들도 상당한 용맹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왕립 기사단에 들어올만한 인물은 그에 걸맞은 훌륭한 태생일 것이 요구되고, 귀족이 만든 기사단들도 친구들끼리 만든 친목회에 가까운 경우가 많아서 머릿수가 십수 명에서 몇 십 명 이내로 항상 제한되어 있었다. 또한 기사수도회들도 중세 말기에 이르면 상당수가 차츰 귀족들의 명예 단체로 변하게 되었다.
이렇게 중앙집권제의 틀이 잡히기 시작하고 가톨릭 교회라는 종교가 아닌 각지의 세속 군주에게 충성하는 왕립 기사단이나 귀족들이 사적으로 만든 친목 목적의 기사단의 창립이 이루어지는 한편 일반 기사들의 중앙귀족화가 진행되면서 과거에는 엄밀했었던 기사단과 기사대의 구별 자체도 점차 무의미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기사수도회들도 상기한 것처럼 귀족들의 명예 단체로 변하게 되면서 마침내 기사단과 기사대의 구별은 완전히 무의미해지게 되었다. 여러 창작물에서 나오는 기사단들이 기사들을 모아다 편성한 상비군처럼 그려지면서 실제 중세 유럽의 기사단과 기사대를 한데 뒤섞어 놓은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러한 역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근대국민국가의 탄생 이후에도 기사단이 출범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기사단'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대개는 무력집단보다는 NGO에 가깝다. 19세기 말 아프리카 등에서 개척민과 선교자 보호, 노예 무역 근절, 기독교 국가 건립 등을 목표로 몇몇 성직자와 모험가가 기존의 용병을 대체할 종교기사단을 건립하려는 시도를 하긴 했다. # 그러나 국가 외의 무력 집단을 용인할 수 없는 각 세속 정부들, 30년 전쟁의 재래를 걱정한 종교계의 냉담함[8] 등으로 실패했다. 가톨릭 언론을 비롯한 수많은 언론들이 이 새로운 기사단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했다고.
21세기에도 수많은 무장단체와 준군사조직들이 그리스도교, 십자군, 기사단의 이름과 발상을 빌렸다. 주님의 저항군(Lord's Resistance Army)이나 러시아 정교회군(Русская православная армия: Russian Orthodox Army)[9] 등등...물론 실제 기사단과는 거리가 멀고, 잔혹행위나 안 저지르면 다행이다. 냉전 직후 무기상인을 주제로 한 영화 로드 오브 워에서도 이런 무장단체들 보고 '이름들은 기가 막히게 짓는다.'고 디스할 지경.
교황청은 2012년 자신들이 인정하고 공인하는 기사단을 재확인하는 공지를 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따르면 교황청이 인정하는 기사단은 성좌 고유 기사단들과 몰타기사단(구호 기사단), 그리고 성묘기사단뿐이므로 이들만 인정하고 지원한다고 한다. 교황 기사단 참조.교황청 국무원
기사단의 지위에 관한 공지
성인이나 거룩한 장소의 이름을 딴 기사단들에 대한 성좌의 인정에 관한 문의가 많기에, 교황청 국무원은 과거에 이미 공표한 다음과 같은 성좌의 입장을 거듭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성좌는 성좌 고유 기사단들(그리스도 최고 기사단, 황금 박차 기사단, 비오 기사단, 성 대 그레고리오 기사단, 성 실베스테르 교황 기사단) 외에는, '몰타 기사단', 곧 '예루살렘과 로도스와 몰타의 성 요한 구호 기사단'과 '예루살렘 성묘 기사단'만을 인정하고 지원한다. 이와 관련하여, 어떠한 추가인정이나 개혁도 없을 예정이다.
설립시기가 중세이든 최근이든 그 밖의 모든 기사단들은 성좌의 인정을 받지 않은 것이다. 성좌는 그들의 역사적 또는 법률적 정당성, 그 목적이나 조직 구조를 보증하지 않는다.
문서들을 불법으로 발행하거나 거룩한 장소들을 부적절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발생될 수 있는 모든 의혹을 피하고자, 또 선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남용의 재발을 예방하고자, 성좌는 이러한 단체들이 발행하는 것은 회원증이든 훈장이든 모두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으며, 그들의 이른바 '수여식'을 위하여 성당이나 경당을 사용하는 것도 부적절하게 여긴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바티칸 통신(Vatican Information Service), 2012년 10월 16일자
3. 기사단 목록
[image]
- 이하의 목록은 분류에 맞춰 가나다 순으로 정리 바랍니다.
3.1. 실존 기사단
1318년에 포르투갈의 성전기사단원들이 국왕 디니스 1세의 중재로 교황의 허가를 받아 만들었다. 포르투갈 지부장이 초대 기사단장이 되었으니 성전기사단의 포르투갈 지부가 재산과 조직을 그대로 가진 채 이름만 바꿔서 재창단한 것으로, 성전기사단의 후예답게 대항해시대에 놀라운 활약을 한다. 기사단의 영지에서 나오는 돈으로 아프리카 해안의 탐험비를 충당하고, 엔리케 왕자 같은 왕족들이 기사단장을 맡고, 바스코 다 가마 같은 항해자들이 기사단원으로 있는 등 포르투갈의 황금 시대를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기사단. 1910년 혁명으로 해산되었으나 1917년 재창단, 그 뒤부턴 포르투갈의 대통령이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다.
- 드래곤 기사단
-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
- 몬테사 기사단
- 산티아고 기사단
- 성 스테파노 기사단
피렌체 공화국의 후신인 토스카나 공국에서 만든 기사단. 구호기사단과 더불어 이슬람 상선들의 악몽이었던 기사단. 레판토 해전 이후에 창설된 기사단으로 구호기사단과 달리 성직자들이 중심으로 세운 기사단은 아니었지만[10] 구호기사단 못지않게 기독교도 노예 구출을 명목으로 이슬람 선박을 약탈하고 심지어 레반트 지역에 상륙하여 약탈까지 하였다. 오죽 심했으면 콧대 높은 오스만 제국 술탄이 직접 성 스테파노 기사단의 후원자였던 토스카나 대공에게 자제를 부탁하고 이를 대가로 통상 수교를 요청했을까. 하지만 상공업이 중심이었던 공화국 시절과 달리 농업 중심이었던 토스카나 공국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성 스테파노 기사단의 기항이었던 리보니아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승리와 이슬람 교도 노예들을 묘사한 부조가 대놓고 있다. 만화 헬싱에도 동명의 기사단이 나오는데 이를 참조한 듯(아예 토스카나 군단이라고 대놓고 오마쥬하고 있다.).
1882년 미국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름을 따 발족하였으며, 현존하는 기사단 중 가장 회원이 많고(약 180만 명) 활동이 활발하다. 때문에 간혹 음모론의 표적이 되기도. 한국 지부도 2014년 창립되었고 2018년 아시아지부로 승격되었다.# 다만 진짜 기사단은 아니고 대이민 시기 카톨릭계 이주민들의 친목, 봉사 단체이다.
부르고뉴 공국의 선량공 필리프가 포르투갈의 이사벨라 공주와의 결혼을 기념해 1430년 초에 만든 기사단. 잔 다르크가 그해 5월에 콩피에뉴에서 부르고뉴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포로로 잡혔기 때문에 잔 다르크와도 전투를 벌였을 가능성도 있다. 부르고뉴-발루아 가문이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결혼으로 흡수된 이후엔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사단이 되었다. 당시에는 헬라스 지역의 이교로 배척받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황금양모라는 이름을 기사단 이름에 붙여서 논란이 되었기 때문에 필리프는 이름에서의 '양모'는 구약에서 기드온의 일화에 나온 그 양모라는 변명을 하기도 했다.
- 황금 태양 기사단
정식 명칭은 '황금 태양의 국왕 기사단'. 이름처럼 프랑스 국왕인 샤를 6세가 1410년에 만들었다. 다만 이 기사단의 존속 기간은 매우 짧았다.[11]
3.2. 가공의 기사단
4. 관련 문서
[1] 다만 근대 이후로 각종 단체가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붙인 경우는 있다. 물론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말 타고 돌격하는 그런 기사는 아니다.[2] 일반적인 기사들의 주군이 군주(황제, 왕, 대공 등)나 귀족이었다면 기사단의 주군은 각 기사단이 소속된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교황청에 직접 소속된 기사단은 교황이 주군이고 일반 가톨릭 교구에 소속된 기사단은 일반 주교가 주군인 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3] 가톨릭의 성직자와 수도자는 성품성사/수도서원 때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삼덕을 서원한다. 다만 청빈 외에 정결과 순명은 성직자와 수도자 뿐 아니라 모든 가톨릭 신자가 지켜야 하는 가르침이다. 가톨릭 신자는 부부관계를 벗어난 혼외 성행위, 자위행위, 음란물 이용 등의 성적 음행을 해서는 안 되고,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해야 한다.[4] 물론 실제 역사상의 기사수도회들도 어디까지나 사람 사는 곳이었기에 당연히 온갖 인간군상이 있었겠지만, 대중문화에서 묘사되는 식으로 보라는 듯이 대놓고 세속적 쾌락을 추구할 수는 없었다. 대놓고 세속적 쾌락을 추구하는 기사들은 기사수도회 소속이 아닌 일반 기사들이었다.[5] 뭔가 우리가 아는 기사랑 거리가 먼 것 같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제 기사는 그냥 기사에 맞는 말과 장비, 무술만 갖추었다면 그게 바로 기사다.[6] 사실 무어인들의 입장에선 좀 억울할 수도 있는 표현이고 무어인들의 후손인 현대 모로코인들에게는 조상 모독으로 느껴질 수 있는 표현이지만,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그리스도인에게 이 말은 맞는 말이었다.[7] 영국의 가터 기사단 등[8] 구호기사단마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9] 돈바스 전쟁의 친러 의용군. 그 정체는 러시아군이라는 게 정설.[10] 구호기사단의 단원들은 일단 결혼이 금지된 일종의 수사들이었다. 하지만 성 스테파노 기사단은 그런 규정이 없어서 단원들이 결혼도 할 수 있었을 뿐더러 유부남도 참가할 수 있었다고. 물론 귀족이라는 전제가 필요했다.[11] 출처: 중세의 기사들/ 에마누엘 부라생 지음/ 임호경 옮김/ 동문선 139쪽[12] 주신과 퍼블릭만을 맹종하는 광신도들.[13] 로열블러드 기사단이라고도 불리며, 소울아머유저가 아니면 입단할 수 없는 특수부대 역할의 기사단. 전단단위를 운용하며, 단독플레이로 왕국하나를 점령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 프라임 론 아가드가 창설, 교육등 형성에 힘썻다.[14] 이유는 기사단장이 악마라서...[15] 델피니아 왕국의 기사단은 델피니아의 각 요지에 위치하고, 일단은 각 영주로부터 독립된 집단이다. 다만, 완전히 독립된 집단은 아니고, 유사시에 국왕의 명령을 받아서 움직이는 역할을 맡는다. 항상 수도에서 수비를 맡는 근위병단과 비교하면 규율이 좀 더 자유로운 편이지만, 각 기사단이 위치한 지역과 지휘관에 따라 특성이 다르다.[16] 일개 용병단에서 미들랜드 국왕에 의해 백의 칭호를 받지만 단장 그리피스가 샬로트 공주와 동침한 것이 들통나서 하루 만에 반역자로 몰린다.[17] 기사단이란 호칭을 쓰지만 실질적으로는 무인 계급을 의미한다.[18] 칼라이의 기사단과 달리 이쪽은 전형적인 기사단과 비슷한 면모가 많다.[19] 전부 기사는 아니지만 기사수도회에 가까운 집단이다.[20] 본래 유서 깊은 기사단이었으나 모종의 사건으로 구성원 거의 전원이 파문당하여 해체됐다.[21] 겉보기엔 기사이지만 메카니멀이기 때문에 군대가 없다.[22] 스페이스 마린들을 특별히 기사단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지만 실제 역사의 기사단(기사수도회)에서 따온 요소가 많다. 부대 집단을 챕터(Chapter)라 하는 점, 기지를 요새 수도원(Fortress-Monastery)라고 부르는 점, Battle Brother, Brother-Sergeant, Brother-Captain 등 계급명에 수사(修士)를 뜻하는 Brother를 붙여 부르는 점 등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