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1. 통일신라의 사찰
1.1. 개요
1.2. 역사
1.2.1. 부동산 진통
1.2.2. 볼 거리
1.3. 여담
1.4. 사건 사고
1.4.1. 30대 여성 분신 자살 사건
1.5. 능침사찰 목록
1.6. 같이보기
2. 고려의 사찰
2.1. 개요
2.2. 설명
2.3. 효사관
2.4. 효사관 참배
2.4.1. 연등회
2.4.2. 봉은행향
2.5. 기타

한자 : 奉恩寺 / 로마자 : Bongeunsa
홈페이지

1. 통일신라의 사찰



1.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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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에 위치한 도심 속의 고찰(古刹). 대한불교 조계종 직영사찰이다.
본래는 수도산(修道山)에 있는 산사(山寺)였지만,[1] 강남 지역의 발달 및 도심화로 인해 현재처럼 도시 가운데 있는 모습이 되었다.
대중교통으로 이용하려면 서울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 1번 출구로 나가면 된다.[2]
현임 주지는 원명 스님이다.

1.2. 역사


서기 794년 신라 원성왕 시절에 처음으로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의 이름은 '견성사(見性寺)'였고, 위치도 선릉 근처라 지금과 달랐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성종의 능인 선릉#s-2을 지키는 '능침사찰'이 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많은 땅을 하사받았다. 이 때문에 절 이름을 '은혜를 받든다.'라는 뜻의 봉은(奉恩)으로 바꾸었다.
이후 불교를 사랑했던 문정왕후 때에 선종 수사찰이 되어, 과거 제도 중 승과 시험을 보는 곳이 되었다.[3] 이 때문에 많은 유생 안티들이 양산되었다. 봉은사는 한양과 가까운데다 승과시(僧科試) 시험장이었기 때문에,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 유생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봉은사와 승과시험을 없애야 한다는 유생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나마 능침사찰[4]이라 회암사처럼 불태워지는 사태는 없었다.[5] 하지만 승과고시 때문에 당시 공부 좀 한다는 사람들이 승려로 입산해서 관직에 오르려고 했고, 이 때문에 휴정, 유정 같은 명망 있는 승려들이 나와 임진왜란 등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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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봉은사. 지금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당시에는 봉은사 주지 청호(晴湖) 스님이 절의 재산을 털어 배를 구입, 지금의 잠실 인근 곳곳에 고립된 주민들을 구조하고 절에 임시로 수용하는 선행을 펼쳤다.[6]
이후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9년에 큰 화재를 겪었으며, 1950년 6.25 전쟁 때 전각이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이후에 재건되었다. 때문에 봉은사 건물은 판전 등 소수의 건물을 제외하면 주로 1940년대와 1980년대 전후로 재건된 것들이다.
한때 경기도 광주군(現 경기도 광주시)에 속하여 경기도 사찰로 분류되었으나, 1963년에 이 지역이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면서 경기도 사찰에서 서울특별시 사찰로 변경되었고, 후에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되면서 강남구 관할로 편입되었다.

1.2.1. 부동산 진통


강남이 개발되기 전까지 봉은사 주변은 허허벌판 논밭이었고, 한양에서는 배를 타고 가야하는 오지와 다름없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봉은사는 주변에다 말죽거리의 1만 평 논까지 합쳐 10만 평에 달하는 땅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강남이 개발되면서 갈등이 생겼다.[7]
시초는 조계사나 여타 한국 불교사찰들이 다 그랬지만, 일제강점기로부터 시작된 대처승[8]과 비구승[9]의 갈등이었다. 8.15 광복 이후 봉은사는 꾸준히 왜색 불교 정화활동을 벌여, 1965년에야 겨우 비구승이 대처승을 몰아내게 된다. 그러나 이 사이에 정부는 개발지 한가운데를 차지한 봉은사의 땅을 싸게 사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대처승과 그 가족들이 봉은사의 땅을 불법으로 파는 등 진통이 있었다.
이후로도 부유한 절[10]의 주지 임명권을 둘러싸고 많은 갈등이 터져나왔는데, 그 중 가장 심각하게 나타난 것이 1988년 이른바 ‘봉은사 사태’였다. 폭력배들까지 동원되어 절의 주지를 둘러싼 싸움이 벌어졌었다.

1.2.2. 볼 거리


사찰 입구에는 거대한 일주문이 있으며 2마리의 코끼리 석상이 문지기 역할을 하고 있다. 경내에는 법왕루, 대웅전, 북극보전, 선불당 등 법당과 1996년에 세운 미륵대불상이 있다. 사실 도심 속의 사찰이란 점에 의의가 있지, 오래된 절의 모습은 보기 힘들다.[11]
과천에서 기거하던 말년 추사 김정희가 자주 찾던 절인만큼, 대웅전과 판전의 현판은 그의 작품이다. 특히 판전 현판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어린아이의 글씨 같아 보이면서도 모든 것을 내려놓은 초월한 느낌을 주는 글씨로 알려져 있다.
사실 '''봉은사 전체가 볼 거리'''이다. 도심 속 숲으로 이루어진 봉은사는 자연을 느끼기에 좋은 곳이다. 근처 코엑스몰과 근접해 있어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1.3. 여담


  • 메가박스 코엑스점에서 영화를 보고 조금 어둑해진 저녁 시간대에 가면 엄청 낭만적이다. 절 내부는 조용하고 평안한 분위기에, 시선을 조금만 위로 올리면 초고층 아파트인 삼성동 아이파크와 인터컨티넨탈 호텔 등 코엑스의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도심의 한 발짝 뒤에서 고요한 분위기를 감상하는 느낌이 든다. 입구 바로 맞은편에 코엑스가 있고 차량도 엄청나게 많지만 신기하게도 봉은사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바깥의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 2010년 직영사찰 전환 문제로 정치권과 마찰을 빚기도 했는데 여기에 당시 주지승이었던 명진 스님이 개입되었다는 일설이 돌면서 봉은사 승려들과 신도들이 강력반발하기도 했었다. 이에 당사자인 명진 스님은 승적을 포기하고 조계종단 승적까지 탈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또 위치와 신도들의 특성상 보수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 동년 10월에는 찬양인도자학교라는 단체가 봉은사 입구에서 개신교예배[12]를 올리는 동영상이 온라인에 공개되면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후에 이들은 봉은사를 방문하여 사죄 의사를 표하였고 사찰 측에서도 이를 받아들였다. 또한 모 개신교 단체가 봉은사를 오가는 불특정 다수의 불자들을 상대로 '부처님 계신 곳 좋은 만남'이라는 라벨이 붙은 CD를 배포했는데, 정작 CD를 틀면 목사의 설교가 나오는(…) 페이크 불경 CD를 만들어 배포한 적도 있다. #
  • 이 곳을 지나는 도로를 봉은사로로 지정하였다.[13]
  • 서울 지하철 9호선 929번 정거장과 인접하기 때문에 봉은사 측에서 929번 정거장 명칭을 봉은사역(가칭)으로 지정해달라고 서울시에 요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당초 이 정거장은 주변에 코엑스, 아셈센터, 도심공항터미널이 있기 때문에 코엑스역(가칭)으로 지을려고 하였지만, 봉은사 측이 코엑스보다 더 오래된 봉은사의 역사적 가치 등을 고려하여 정거장 역명을 봉은사역으로 지정하는 게 옳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현재는 봉은사역으로 정해졌다.
  •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 절의 미래위원장을 지냈었다. (2007-2010) 시장 당선 전까지 봉은사 신도회 지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지난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도 선거 유세를 하러 봉은사를 방문하기도 했다.[14][15]
  • 래퍼 도끼가 다니는 절로 밝혀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게다가 엄청 충실한 불자라고(...)...
  • 일요일법회를 봉행하는 절 중 하나이다. 반면 음력 법회는 초하루법회, 방생대법회 등으로 적으며, 모든 법회는 법왕루에서 봉행한다. 2016년에는 혜민 스님이 일요법회를 봉행하기도 했다.
  • 수계식 중 연비 의식에서 남자는 왼팔, 여자는 오른팔에 선향을 놓는다.
  • 잠실야구장에서 제일 가까운 사찰이다 보니 큰 경기 직전 야구팬들이 봉은사에 와서 기도를 하고 가기도 한다.

1.4. 사건 사고



1.4.1. 30대 여성 분신 자살 사건


2016년 12월 29일에, 봉은사 미륵보살상 앞에서 31세 여성이 분신 자살을 하는 사고가 있었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김씨(31세 여성)가 몸에 인화성 액체를 뿌린 후 라이터로 불을 붙였고, 소방 당국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숨졌다고 한다. 김씨는 과거 과대망상 증세로 정신과 진료를 받은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발생한 인명 피해나 재산 피해는 없었다.
여담으로, 해당 관련 기사의 '''모든 기사'''가 '관음보살상' 앞에서 벌어진 사고라고 보도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 사고가 진행된 곳은 미륵보살상 앞이었다.

1.5. 능침사찰 목록




1.6. 같이보기



2. 고려의 사찰




2.1. 개요


大奉恩寺
고려왕조 개경 개성부 만월대 황성 부근, 현 경기도 개성시 태평동 부근에 위치했던 사찰. 절의 풀 네임은 '대봉은사'이다.

2.2. 설명


봉은사는 제4대 군주 광종 대성대왕이 재위 2년 차에 지은 사찰이다. 황성[16]의 남쪽에 지어졌으며 태조의 원찰로 지어졌다. 절의 명칭은 '은혜를 받드는 사찰'인데 은혜는 광종의 아버지 태조의 덕을 지칭하는 것이다.

2.3. 효사관


봉은사엔 효사관(孝思觀)이란 건물이 있는데 바로 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곳이다. 고려의 태조 진전은 여러 군데 있지만 서경의 성용전, 개경 궁궐 내의 경령전(景靈殿), 궁궐 밖의 효사관이 매우 중시되었다. 여말 공민왕이 효사관을 경명전(景命殿)으로 개칭했었다. 경명(景命)은 천명(天命)의 다른 말인데 경령전과 景자 운을 맞추고자 바꾼 듯하다.

2.4. 효사관 참배



2.4.1. 연등회


봉은사 효사관은 고려 왕실이 중시한 장소로 양대 불교 행사 중 하나인 연등회가 열리면 치황의(梔黃衣)를 입은 국왕은 효사관에 가서 태조를 참배해야 했다.
고려사 예지 상원연등회의에 따르면 국왕은 본궐 중광전[17]→ 향복문[18] → 태정문 → 승평문[19] 루트로 궁궐을 나와 봉은사 조진(祖眞)[20]으로 향한다.
중광전에서 자황포(赭黃袍)[21]로 갈아 입은 국왕은 가마를 타고 궁궐을 내려 간다. 봉은사에 도착하면 태자와 공후백(公侯伯)[22]들이 먼저 들어가 좌우로 선 채 국왕이 가마에서 내려 들어오는 것을 기다린다.
효사관에 들어간 국왕은 절을 하고 술잔을 올린다. 복잡한 제사 절차가 끝나면 다시 왔던 루트대로 다시 중광전으로 돌아간다.

2.4.2. 봉은행향


고려시대의 저서 보한집 권상엔 등석(燈夕)이란 행사가 기록되있다. 등석은 매해 2월 보름(15일)을 가리키는데, 고려국왕은 등석 전날 꼭 봉은사에 가 조성진(祖聖眞)[23]을 참배했다고 한다. 이 의례를 봉은행향(奉恩行香)이라 불렀다고 한다.
궁궐에서 봉은사까지의 길엔 병사들이 쫙 늘어서 있고 오색 천과 등불로 화려하게 치장했다고 한다. 고려국왕이 봉은사를 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승평문[24]밖에서 국왕이 흥례문[25]에 도착할 때까지 환궁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인종 공효왕 당시 척준경만월대를 불 태운 적이 있는데, 이 때 봉은행향이 중지되었다. 18년 후 재개됐는데, 인종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기념했다고 한다.

이 땅의 군신악이 / 此地君臣樂

허투루 지나버린지 18년이다. / 虛經十八年

여러 신료들 덕분에 / 幸因匡弼力

전처럼 취할 수 있겠구나! / 旣醉復如前

- 보한집 권상 中. 인종 作.


2.5. 기타


  • 봉은사의 짝은 불일사(佛日寺)라고 할 수 있다. 광종이 아버지 태조 신성왕을 위해 봉은사를, 어머니 신명순성왕태후를 위해 불일사를 세웠기 때문.

[1] 100m가 안 되는 높이의 산이다. 정상 부근에 경기고등학교가 있다.[2] 2분 거리에 봉은사가 있다.[3] 유사하게 봉선사교종 수사찰이 되어 승과를 치루었다.[4] 조선대의 대표적인 능침사찰은 봉은사 외에도 광릉봉선사가 있다. 화성의 용주사융건릉의 능침사찰로 살아남았다.[5] 조선 시대의 사찰들 가운데 이런 식으로 왕실과의 커넥션을 형성함으로써 유생들의 횡포를 피했던 사찰이 좀 있다. 대구의 파계사 같은 경우 절의 승려인 현응 스님이 숙종을 위해 숙빈 최씨의 회임을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올려 연잉군이 태어나자 기뻐하며 사찰 인근 토지 40리의 조세를 주겠다는 숙종에게 “돈은 됐고 조선 국왕의 위패를 파계사에 모시도록 허락해 주세요”라고 요청해 숙종이 이를 수락했다. 당연히 선대왕의 위패가 모셔진 사찰에서 행패를 부릴 유생은 없을 테니 말이다.[6] 당시에는 한강의 흐름이 지금과 달라 석촌호수 방향으로 흐르던 송파강이 본류였고, 현재의 본류는 신천강이란 이름의 지류였으며 잠실은 이 사이에 끼인 섬이었다.[7] 이 중에는 박정희한테 강탈당한 수도산 절반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땅에 세워진 게 바로 종로에서 넘어온 경기고등학교다.[8] 결혼을 하여 처자식을 두는 승려다. 한국에 그 전에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일제강점기에 주류가 되었다.[9] 결혼을 하지 않는 승려다. 전통 불교.[10] 봉은사는 서울 내 절에서 조계사와 더불어 시주량이 어마어마한 절로 알려져 있다. 코엑스 뒤편이라는 환상적인 입지 조건과 강남의 부유한 불자들이 엄청나게 시주를 한데다가, 부동산도 많아서 돈이 많다.[11] 한중일 삼국 막론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전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12] 라고 하기도 뭐하다. 땅밟기라고 불리는, 성경이나 오래된 전례에도 나오지 않는 개신교와 무속신앙의 혼종 짓거리를 "절이 무너져라"고 봉은사에서 하면서 뒷목 잡을 짓을 벌였다. 개신교/대한민국/사건사고/종교적 참조.[13]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교보타워사거리에서 서울종합운동장이 있는 송파구 종합운동장삼거리까지를 잇는 도로. [14] 본인도 불교였다고 한다. [15] 여담으로 이때 봉은사 일요법회를 방문해서 신도들의 의견을 들어봤는데, 한 신도의 의견이 서울 지하철 9호선 역명을 봉은사역으로 지정해달라는 것이었다.(당시 봉은사역으로 서울시지명위원회가 확정을 하였지만 개신교 단체들의 반발로 무산될뻔한 적이 있었다. ) 당시 박 시장은 흔쾌히 알겠다며 봉은사 신도들의 박수를 받았다.[16] 옛 발어참성으로 광종 당시엔 나성.[17] 만월대에서 가장 크게 활용된 편전.[18] 중광전의 대문.[19] 궁궐의 남대문이자 정문.[20] 고려사 원문 기록. 태'조' '진'전의 줄임말로 효사관을 지칭하는 것이다.[21] 황금색 곤룡포.[22] 고려시대에 고위 왕족들을 지칭하는 말. 고위왕족들은 공작, 후작, 백작 삼등작에 봉해지기 때문에 공후백으로 통칭했다.[23] 조성은 태조의 별칭이고 진은 어진을 줄인 것이다. 즉 조성진은 태조 어진을 의미한다.[24] 만월대 궁성 남대문이자 정문.[25] 고려는 천자국 예법에 따라 궁궐을 세워 황성부터 정전까지 총 5문이 있었다. 흥례문은 그 중 4번째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