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어계획
1. 소개
한국어: 복어계획((-魚計画)
일본어: 河豚計画 (ふぐけいかく) 또는 육족협화(六族協和)[1]
영어: Fugu Plan
1930년대 일본에서 추진한 '''유대인 이주 계획'''.
2. 개요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독일 및 독일 점령 지역에선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극심해졌고, 유대인들은 박해를 피해 다른 국가로 이주하려 했다.
한편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침공하여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한 이후, 만주 지역에 대한 개척을 위해 대규모의 인구 및 자본 유입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 때 유럽의 유대인들이 대거 이주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 정부 내의 일부 인사들은 만주 지역에 유대인들을 이주시킴으로서 만주 지역의 개발을 촉진하고, 유대계 외국인-특히 미국인-의 자본을 유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 것이 바로 복어계획이다.
특이한 점으로 이 계획의 입안자들은 악명 높은 음모론 위서인 시온 의정서의 내용을 믿으면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유대인 조직의 정보망 및 자금 능력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따라서 이들은 유대인들에게 만주국이라는 도피처를 제공함으로서 유대계 인사들로부터 확실한 호의 및 물질적인 지원을 약속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복어계획을 입안한 사람으로는 일본 해군대좌 이누즈카 고레시게[2] 외에도 야스에 노리히로 육군 대좌, 히구치 기이치로 육군 대좌[3] , 닛산 콘체른(닛산의 전신)의 총수인 아이카와 요시스케 등이 있다. 이들은 당시 일본 국내에서 유대인에 대한 전문가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이 외에 전부터 만주 및 중국 침략을 주장하던 관동군 내 일부 인사가 여기에 참여하였다.
계획의 명칭인 '복어'는 생선 복어에서 따온 것으로, 계획 입안자 중 한 명인 이누즈카 제독이, 연설에서 '''이 계획이 상당히 위험하긴 하지만 성공할 경우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며 이를 맛이 좋지만 맹독을 지닌 복어에 비유한 것에서 유래한다.
3. 계획의 진행
복어계획을 세운 입안자들은 동아시아 지역의 유대인 인사들과 접촉하였고, 유대인 자치구 건설을 위한 유대인 대회를 잇달아 개최했다. 하지만 복어계획은 중대한 장애물을 만나게 되었다. 1936년 독일과 방공협정(Anti-Comintern Pact)을 맺는 등 독일과 일본의 외교 관계는 점점 돈독해지고 있었고, 유대인에 대한 옹호 정책은 독일과의 외교 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있는 요인이었다.
1938년 일본 정부에서는 논의 끝에 유대인 대책 요강이라는 합의문을 만들었는데, 이는 독일과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유대인 배척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전제 하에서 내린 결론이었다. 합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합의문이 발표된 이후에도 소수이긴 하지만 유대인들을 일본 및 만주 지역으로 이주시키려는 움직임이 존재했다. 대표적인 예가 스기하라 지우네. 하지만 1940년 추축 동맹에 일본이 가입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더 이상 유럽의 유대인들을 이주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4. 복어계획의 폐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 1942년 일본은 유대인 이주에 대한 지원을 완전히 중지하고, 유대인 대책 요강을 무효화시켰다. 독일 측에선 상하이 등 일본 점령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처리'(사실상 학살을 의미)할 것을 일본 측에 건의했으나 일본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게토에 집단 거주할 것을 유대인들에게 강요했다. 일본의 고의적인 유대인 학살은 없었으나 게토의 거주 및 경제적 환경은 매우 열악해서 병으로 사망하거나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1945년 8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5. 복어계획의 한계와 의의
복어 계획의 의도는 순수하게 인도주의적인 발상이 결코 아니었으며, 나치에게 유대인들이 박해받는 처지를 이용해 유대인들을 괴뢰국인 만주국의 경영에 이용하여 일본의 국익을 도모하는 것에 가까웠다. 또한 입안자들이 시온 의정서를 믿은 나머지 유대인들의 경제적인 능력을 과대평가하였으나 당시 일본에 이주하기를 원하는 유대인들은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는 유대인 이주로 인한 경제적 혜택을 원하던 일본 국내의 지지를 얻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계획 자체의 실패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의도야 어쨌든 이 계획은 당시 나치의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에게 비록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몇 안 되는 구원책이었으며, 실제로 스기하라 지우네 등의 노력으로 유대인들이 박해를 피해 중국 및 미국 등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6. 기타
타이토의 창업자인 소련(정확히는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인 미하일 코건이 일본에서 사업을 전개하게 된 인연은 그가 하얼빈에 있다가 이 계획의 입안자중 하나인 야스에 대좌와 만나게 된 것에서 연원하고 있다. 왜 뜬금없는 타이토냐고 하겠지만 이 회사가 비디오 게임 시대 이전 원래는 코건이 일본에서 세운 무역상 회사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냉전시대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무기상이었던 아드난 카쇼기와 쌍벽을 이루는 전설적인 국제브로커였던 사울 아이젠버그(shaul eisenberg)또한 소년시절 독일에서 탈출하여 상하이를 거쳐 1941년, 도쿄로 이주하게 된 배경에 복어계획이 있는것으로 보인다. 아이젠버그는 한국의 경제발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인데 월성 원자력 본부의 캔두(CANDU)원자로를 비롯해 6,70년대 한국 정부의 차관, 각종 설비도입을 이 사람이 중개하였고 월남에 억류되어 있던 이대용 주월공사 구출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금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물론 유대인이니만큼 한 유대자본음모론을 다룬 일본 서적에서 그 역시 사악하게 서술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만주에 세워질 뻔한 이야기인데다가, 연해주와 하바로프스크 등 러시아령 만주(외만주)에도 유대인들이 거주하기도 한데다, 하바로프스크와 아무르 주 사이의 유대인 자치주도 있는 등 여러모로 유대인들이 만주 지역과도 관계도 일부분 있다보니 한국에서도 흥미로운 대상인 듯 하다. 한국의 극우 중 친이스라엘 성향과 극단적 기독교 근본주의 성향의 극우, 환빠들도 이 사례를 언급하는 경우도 있으며 더 심하게는 유대인과 한민족은 동족이었다는 사이비 주장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