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령 우간다 계획
1. 개요
British Uganda Programme
20세기 초 영국이 유대인들에게 제안한 '''아프리카 유대인 국가 수립 계획.'''
2. 전개 과정
발단은 러시아의 반유대주의에서 시작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시온 의정서 사건으로 반유대주의가 극에 달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다. 견디다 못한 유대인들은 러시아를 빠져나와 유럽 각국과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영국으로도 많은 러시아 거주 유대인들이 몰려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시 영국 식민지 장관이던 조지프 체임벌린이 시오니즘의 지도자였던 테오도르 헤르츨에게 영국으로 몰려드는 러시아 거주 유대인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영국령 우간다에 있는 마우 고원의 약 13,000제곱킬로미터의 땅을 줄 테니 그곳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1]
테오도르 헤르츨은 1903년 바젤에서 열린 시오니즘 총회에 이 문제를 안건으로 올렸고 회의에서는 이 안건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이미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진행 중이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굳이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느냐는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팔레스타인이 본질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 있는 탓에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재건하는 게 요원하다는 현실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 유대인 대표가 강력하게 반발하며 퇴장하는 일도 있었지만 결국 투표 결과 총원 295명 중 177명의 찬성으로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1904년, 시오니즘 총회는 세 명의 대표를 영국이 제안한 마우 고원으로 보내서 현지 사정을 파악하게 했다. 마우 고원은 적도 바로 아래 지점이긴 했지만 해발고도가 높은 편이라 유럽인들이 거주하기에는 온화한 기후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사자 같은 맹수들이 많고 현지 원주민인 마사이족 등이 유대인들의 이주를 반길 것인가에 대해 대표들은 의구심을 가졌다.
결국 내부 논의를 거쳐 1905년 시오니즘 총회는 이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그러나 이즈레일 장윌 같은 인물들은 '''"팔레스타인 땅이 대수냐! 어디든 유대인 국가 세우면 그만이지!"'''라고 격하게 반발하면서 아시아나 아프리카 어디든 적당한 곳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하며 '유대 영토주의 협회'를 조직하고 세계 각지에 유대인 국가 수립을 모색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윈스턴 처칠이 홀로코스트를 피해 망명한 유대인들의 피난처로 영국령 우간다를 다시 제시했지만 시오니즘 총회는 '''"팔레스타인 유대인 이주 제한 철폐가 중하지 우간다가 대수냐!"'''라면서 거부했다.
3. 실현됐다면?
'''이스라엘은 아프리카에 존재했을 것이다.''' 현재의 이스라엘보다 더 크고 강력한 국가가 되었을 가능성과 반대로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 현지인들과 싸우면서 현재의 이스라엘보다 더 상황이 나빠졌을 거라는 관측이 엇갈린다. 어쨌든 일단 이 계획이 실현됐다면 아프리카 대륙 내부의 국제관계는 자연스럽게 아프리카에 건국된 유대인 국가에 가까운 지역을 중심으로 부유한 지역과 빈곤한 지역이 갈리는 형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아니면 로디지아식 전쟁이 20년 앞당겨졌을 수도 있다.
우선 낙관론으로는 유대 자본의 적극적인 지원과 미국의 원조 하에 우간다에 만들어진 유대인 국가가 현대 무기를 갖추고 소수의 인력으로도 다수의 아프리카인들과 맞설 수 있는 역량을 갖추면서 아프리카 지역의 중심부로 급부상했을 것으로 평가한다. 또한 아프리카 지역에 국가를 만든 김에 신생 유대인 국가가 아프리카 내부 분쟁에 대한 경찰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즉, 현재 이스라엘보다 더 강력히 주변부에 수시로 기계화된 군대를 파병하여 질서를 잡았으리라는 것이다.
반대로 비관론으로는 서방의 무관심 속에 유대인들이 우간다 지역에서 제대로 된 지배 체제를 확립하지 못하고 또 다른 혼란스러운 막장 패권국가를 만들었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아프리카에 세워진 유대인 국가의 경우에는 국민소득이야 주변국들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현재의 이스라엘처럼 외부 원조를 적극 받지도 못하고 그저 아파르트헤이트 시기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수준의 국가를 유지하면서 불안정한 지위에 놓였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라도 아프리카인들의 무장 수준이 형편없기에 지배 체제는 일단 유지될 것이나 미래는 암울하다.
어느 쪽이든 핵심이 되는 것은 '''석유'''이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했던 이유는 석유의 주 생산지인 중동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2] 이스라엘이 우간다에 있었다면 미국은 석유 확보를 위해 핵심 산유국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지속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반미감정, 반서구감정도 지금보다는 훨씬 누그러져[3] 이슬람 극단주의가 발을 붙이지 못해 현재의 광신적인 이슬람 국가가 아니라 이란의 팔레비 왕조처럼 적당히 세속화된 나라들이 다수였을 수도 있다. 물론 반대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보수파들과 세속주의를 주장하는 진보파들이 피터지게 싸웠을 확률도 높다. 중동 국가에 이슬람 극단주의가 퍼지게 된 큰 이유 중 하나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왕실에서 지원하는 와하브파인데, 사우디아라비아는 건국부터가 와하브파의 교리를 근거로 했기에 이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다. 확실한 것은 지금보다는 극단주의가 훨씬 덜 퍼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확실한 것은 테러와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빈라덴이 밝힌 911테러의 목적은 1982년에 이스라엘이 레바논의 베이루트를 폭격한 사건(레바논 내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시가 재선에 실패하고 네오콘도 정권을 잡지 못하며,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없었으니 미국은 90년대의 호황을 2000년대에도 쭉 이어나갔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중동을 덜 신경쓰게 되니 중국과 러시아 견제에 집중하게 되어,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이나 조지아 전쟁도 일어나지 않고 중국도 훨씬 뒤에야 미국과 맞붙었지도 모른다. 아무튼 흥미로운 주제임에는 분명하다.
4. 기타 계획들
묘하게도 이 계획은 나치 독일에게도 영감을 줬는지 유대인들을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옮기는 계획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추진되었지만, 강력한 영국 해군의 포위망을 뚫고 마다가스카르 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계획은 폐기되었다. '''대신에 나치는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냈다.'''
이 계획의 문제점은 아프리카나 마다가스카르 섬이 그 기후로 보았을 때, 당시의 유럽에서 살던 사람은 그곳에 가서 살라고 하면 적응 못해 죽기 딱 좋은 곳이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유대인과 아프리카인을 사람 취급도 안하던 제국주의 열강들과 나치였으니 그들에게 이 계획은 '열등인종의 청소'나 다름없는 개념의 계획이었으나, 일단 이 계획은 유럽에서 흔히 보이는 "이교도"와 "사회 부적응"를 이용한 식민지 건설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니 '''만약 계획이 실현되어 유대인들이 그곳에서 살아남았더라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원주민들이 되려 소외되어 마다가스카르 및 아프리카가 팔레스타인 꼴이 났을 것이다.'''[4]
기묘하게도 일본 제국도 유대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는''' 이른바 '복어계획'이란 것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복어계획 참고. 부유한 유대인들을 만주로 이주시켜 만주를 부흥시키려던 이 계획도 원래의 목표이던 부유한 유대인은 안 오고 빈한한 소수의 유대인만 이주해오는 바람에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현재의 팔레스타인 지역 일대 대신 키프로스 섬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유대인 국가로서 세우기 좋은 지역 중 하나로 제안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유대인들도 옛날에 거주하기도 했었고, 키프로스에서 기독교를 전파했을때 이곳의 유대인들도 도와줬으며, 로마에 맞서 싸우기도 했던데다가(나중에 대다수가 쫓겨났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영국이 유대인들을 강제수용하기도 했었던 곳이기도 했었다. 유전적으로도 유대인과 이스라엘인들은 드루즈인들과 더불어 키프로스 섬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비슷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을 세운 유대인들 역시 키프로스 섬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한편 키프로스도 터키계와 그리스계의 갈등과 분쟁이 심한 곳이라 여기서 이스라엘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여기도 팔레스타인 지역처럼 분쟁에 휩싸였을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유대계대로 평범하게 살았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정확히 알 수 없다.
시나이 반도 역시 유대인 국가 건설지역으로서 제안된 적이 있었으나 이집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물론 이스라엘이 세워진 이후 여러차례의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의 침략을 받거나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1982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관계 개선을 하면서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에게 돌려주었고 대다수의 유대인 정착촌들도 폐지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여기에 이스라엘인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5] 하지만 시나이 반도 역시 분쟁 지역 중 하나이며 여기에 세웠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아랍 분쟁은 피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6]
1차 대전 중이던 1917년에는 자신을 러시아 유대인 출신 의사라 밝힌 로트슈테인이라는 사람이 영국 측에 유대인들이 영국군과 함께 오스만에 맞서 싸우는 대가로 걸프 연안의 알-하사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게 보장해줄 것을 제안했는데,[7] 이렇게 되었다면 아라비아 지역에 이스라엘이 세워졌을 것이다. 이미 해당 지역은 사우드 가문의, 사우디아라비아에 떨어진데다가, 다른 걸프 아랍인 세력들과 협상한 것도 있기에 거절했고, 그로부터 얼마 뒤,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팔레스타인 유대인국가 건설의 지지의사를 밝힌다.
소련에서는 스탈린에 의해 유대인 자치주가 만들어졌고 러시아에서도 현존한다. 한때 유대인 인구가 3만에 이르렀지만 인프라가 열악하다보니 스탈린 사후로 유대인들이 대부분 빠져나가서 현재는 거의 러시아인들만 있고 유대인은 인구의 1%밖에 안 돼서 러시아 내에서도 유대인 자치주를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많다.
미국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세웠던 '알래스카 유대인 정착촌 계획'이 있었는데 실제로 루스벨트 대통령은 2차대전 당시 나치에게 핍박받던 유대인들을 위해 알래스카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미 의회 상임위원회에까지 올라갔으나 결국 부결되었다.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이스라엘이 중동전쟁에서 패배해 망하고, 알래스카 유대인 자치구가 통과된 가상의 시대를 다룬 유대인 경찰연합이라는 소설이 있다.
5. 매체
꽤나 흥미로운 대체역사물의 소재가 될 것 같지만 이것을 다룬 대체역사물은 없다. 대신에 미국 알래스카 주에 있는 싯카라는 도시에 유대인 정착촌이 세워진다는 내용의 대체역사소설로 마이클 셰이본의 유대인 경찰연합이 있다.
6. 같이 보기
[1] 해당 지역은 우간다와 케냐에 걸쳐 있다.[2] 정확하게는 소련이 중동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을 지원했기에 반대급부로 이스라엘을 지원한 것이다.[3] 석유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갈등은 계속되었겠지만, 그것은 이권을 위한 강대국들의 싸움일 뿐이므로 이스라엘의 존재와 중동전쟁에서의 참패가 아랍인들에게 새긴 자존심의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유고슬라비아가 그랬던 것처럼 두 강대국 사이를 줄타기하며 각종 국익을 얻었을 확률이 높다.[4] 그나마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전통적으로 같은 신을 섬기는 종교를 믿었고, 둘 다 고대 페니키아인의 후손으로서 사촌지간되는 민족이라는 연결점이라도 있었지, 우간다 원주민들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이 계획이 실현됐다면,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분쟁은 우스워 보일 정도로 더한 분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5] 최근 시나이 반도에 독립된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한 적도 있다. 시나이 반도 동북부 일부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게 주고 가자와 시나이 동북부를 합쳐서 팔레스타인으로 독립하자는 주장. 서안지구를 더할 때도 있다. 사실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도 같은 아랍계이고 중동 전쟁 당시 팔레스타인 남서부의 가자지구는 이집트와 통합되어 임시정부 또는 자치정부로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집트나 이집트 시나이 반도와 같이 묶여서 나올 때도 있었다.[6] 당장 팔레스타인 내에서의 분쟁도 이스라엘이 통제 못하는데 시나이 반도는 통제하기 힘들었을 확률이 높다.[7] 유대인들의 고향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인 칼데아 지역이며, 걸프 해 연안과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 물론 알하사는 그보다 훨씬 더 남쪽에 있는 도시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