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기하라 지우네
[image]
1. 개요
일본 제국 주 리투아니아 영사관 영사로서 '''나치 독일로부터 수 천 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살린 인물'''. 욘 라베, 오스카 쉰들러와 비슷한 행보를 걸었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스기하라 지우네 생존시의 다큐멘터리 영상 1부(일본어) 2부
2. 생애
1900년 기후현 야오쓰정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에 부임한 부친을 따라 잠시 경성에 머물렀다. 이 시기 부친은 지우네에게 의사가 될 것을 권유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 시험을 봤으나 의학에 흥미가 없던 지우네는 백지를 제출하고 돌아와 1918년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영어과 예과에 입학했다.
부친의 의사에 반한 진학이었기 때문에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다가 1919년 외무성 관비유학생에 합격한 이후 대학을 중퇴하고 중국 만주 공관에서 근무했으며 독일어와 러시아어를 배워 對러시아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939년에 리투아니아로 발령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기간을 만주에서 활동했는데 '''1935년에는 만주에서 중국인들에 대한 처사에 반대하며 사퇴했다고 한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조선에서 군 생활을 하기도 했다. 최종 계급은 육군 소위. 1937년에는 핀란드 주재 일본 공사관 공사로 부임됐다.
특이한 점은 당시 외무성 엘리트 코스인 고등문관시험 출신이 아니었다는 점. 당시 일본 외무성에 스기하라만큼 러시아어를 잘 하는 인재가 없었기 때문에 요직에 보임될 수 있었다.
2.1. 의인이 되다
1939년, 주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영사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는데, 그의 임무는 소련군과 독일 국방군의 움직임을 파악하면서 소련이 독일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는지 상황을 살펴보고 자세한 정보를 일본 정부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한편 서유럽에서 리투아니아로 도망온 유대인 난민과 원래 3만명에 이르던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공동체는 위험해진 유럽 탈출을 도모하고 있었다. 리투아니아는 1940년 6월 사실상 소련령으로 편입되었고, 이는 유대인들에게는 역설적으로 소련 영토를 경유해 피난할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유대인 공동체는 이미 본국이 멸망해버린 주 리가 네덜란드 대사관과 주 카우나스 네덜란드 영사관의 협조로 아직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네덜란드령 퀴라소와 그의 속령과 수리남에 대한 입국 비자를 받아냈다.
남은 것은 명목상의 목적지로 향할 제3국의 통과 비자였다. 애초에는 팔레스타인 직행을 위해 터키 경유를 고려하였지만 주 리투아니아 터키 대사관은 통과 비자의 발급을 거부하였다. 소련은 발트 3국에 주재한 외교 공관에 대한 철수를 강요하기 시작했고, 운명의 7월 18일, 유대인들은 카우나스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일본 영사관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당초 주 카우나스 일본 영사관이 소련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던 것은 스기하라가 독일의 개전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활용했던 폴란드 정보원의 탈출을 위한 것이었고, 이 때문에 당초 스기하라는 사전에 협의된 15명의 비자 발급만이 허락되었다. 난민의 쇄도를 목도한 스기하라는 바로 본국에 전신을 보내 영사 재량 하에 통과비자의 발급 요건을 완화할 것을 요청했지만, 본국의 외무성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미 본국의 고베 등지에 유럽 피난민이 몰려와서 수용에 한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 발트 3국은 전시 전신의 우선순위에도 밀려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스기하라는 파면을 각오하고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발급한 가짜 퀴라소 비자에 덧붙여 일본 통과 비자를 '''수기로''' 발급하였다. 스기하라는 1940년 8월 31일 베를린으로 추방될 때까지 수천 장의 비자를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하루 20시간씩 발행했다. 이 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스기하라가 일련번호 2139번까지만 기재하고, 그 이후에는 기재를 포기하였기 때문이다.
스기하라는 카우나스를 떠나는 기차 안에서까지 비자를 작성했으며, 기차가 출발하기 시작하자 그때까지 작성한 본인의 서명이 담긴 서류 뭉치와 도장을 창밖으로 던져 피난민들이 스스로 비자를 완성하도록 조치했다. 당시 해당 비자는 가족 전원에게 적용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탈출한 사람들은 약 6천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 비자를 받은 유대인 난민들은 무사히 시베리아를 건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 쓰루가시를 거쳐 고베나 상하이의 유대인 공동체, 아니면 미국으로 대피한다.[2] 명백한 정부의 훈령 무시이자 불법 행위였지만 놀랍게도 당시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3] 는 이를 묵인하고 일본해기선 아마쿠사마루의 승선을 허락했고[4] , 스기하라도 파면은 면하고 나치 독일의 보호령으로 편입된 체코슬로바키아 총영사로 부임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 총영사로 부임한 스기하라는 계속 독일군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런데 하필 폴란드 망명 정부의 참모본부 장교와 협력했다가 독일로부터 간첩으로 의심받아 게슈타포의 감시까지 받게 되었다.[6] 2차 대전 막바지 무렵 그는 가족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에 진군한 소련군에게 8개월 동안 구금되었다가 일본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괘씸죄가 적용되어 스기하라는 1947년 외무성 직원의 정리해고 과정에서 면직되었다.
2.2. 전후
상술하였듯이 스기하라는 1947년 해고되었으며 이후 무역상, 번역가 등의 활동을 하며 살았다.
1969년에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후, 1985년에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야드바셈 상을 수상하고, 예루살렘에 기념 현판이 설치되는 등 ‘열방의 의인’으로 기려졌다. 정작 일본 내에서는 명예 회복이 매우 늦었는데 이스라엘의 유대인 협회가 처음 스기하라라는 성을 가진 외교관의 소식에 관해 문의했을 때 일본 정부는 당시 그 성을 가진 외교관이 3명 있었음에도 그런 사람 없다고 답변하며 시큰둥하게 넘어갔고, 이후 정체가 밝혀져 공로를 인정받았음에도 오히려 외무성을 중심으로 법을 어긴 사람이라며 비판하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거기다 일본정부와 일본 우익 단체들은 유태인 단체에서 스기하라를 찾는 것을 대놓고 방해를 하거나 스기하라를 배신자로 몰아붙이는 온갖 패악을 부려서 결국 그가 죽은 지 14년이 지난 2000년에 들어서야 공식적으로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다.
3. 기타
- 참고로 유럽에서는 그를 센포 스기하라(sempo sugihara)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지우네(chiune)의 발음을 어려워하는 유대인들에게 지우네(千畝)의 음독인 센포로 읽게 했다고 한다.
- 스기하라는 1924년에 소련 여성과 결혼했다가 1935년에 이혼했다. 당시 만주에서 근무하던 스기하라는 관동군의 정보 공작에 심하게 당했는데, 결국 소련 스파이라는 의혹을 피하기 위해 이혼한 것으로 보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전 부인은 러시아 제국 귀족 출신이라 정작 주 모스크바 일본 대사관 서기관 부임이 소련의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거부된 바 있다.
- 고등문관고시 출신은 아니었지만 본인도 커리어로 대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이 때문에 고등문관고시에 응시하려고 수 차례 귀국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 차례 반려된 끝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귀국할 수 없었고, 귀국 후에는 외무성에서 면직되는 바람에 결국 일생에서 고시는 단 한 차례도 응시하지 못했다.
-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유대인 협회들이 그의 이름을 언급하며 일본을 위한 의연금을 모금하여 기부하기도 했다.
- 메탈 밴드 사바타지(Savatage)의 정규 8집 Handful of Rain의 3번 트랙 Chance가 지우네의 일화를 소재로 사용했다.
-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주인공 야마우치 사쿠라가 존경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유는 자신의 주관을 확실히하는 모습이 솔직히 보여서 좋았다고.
4. 참조
- 오스카 쉰들러 : 나치 독일에게서 유대인을 지킨 독일인
- 욘 라베 : 일본군에게서 중국인을 지킨 독일인
- 조르조 페를라스카
- 알베르트 괴링
- 빌헬름 호젠펠트
- 니콜라스 윈턴
- 후세 다쓰지
- 허펑산
- 소다 가이치
- 라울 발렌베리
- 소사 멘데스
- 카를 루츠
- 로저 캐즈먼트
[1] 별명보다는 존칭 또는 명예 칭호에 가깝다. 이스라엘 정부에서 홀로코스트 때 유대 민족에 속하지 않으면서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구해내기 위해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수여하는 칭호이다.[2] 이후 독소전쟁 중 나치의 수중에 떨어진 리투아니아에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유대인들이 20만 명이나 희생당하게 된다.[3] 아이러니하게도 친독파 정치인에 삼국동맹을 적극 추진했으며 독일의 요구로 소련 침공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였는지 유대계 사업가들에겐 반유대주의와 삼국동맹은 무관한 일이라며 해명했다. 1946년 전범재판 도중 옥사.[4] 이 과정에서 또 하나 숨겨진 의인이 주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영사 네이 사부로(根井三郎)다. 일본 외무성은 주 카우나스 영사관과 동일하게 주 블라디보스토크 영사관에도 입국 규정을 완화할 수는 없다고 훈령을 내렸으나, 네이 영사가 '''인도적인 이유로 이 사람들을 돌려보낼 수 없다. 또한 대일본제국 관헌이 일단 발행하여 효력을 발휘하는 문건을 본국이 거부하면 다른 외교공관이 발행하는 문서에 대한 위신도 추락한다'''는 이유로 외무성을 설득했고, 외무대신이 이를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아직 삼국 동맹 조약이 체결되기 전이어서 묵인될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5] 여담으로 2차 대전 중 수많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연합국 편에서 간첩 역할을 하였다.[6] 1941년 8월 17일 만들어진 "독일 제국 내의 일본인 간첩에 관하여"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영사 스기하라가 독일의 군사 정보에 남다른 관심을 표시했다며 "폴란드와 영국에 가까운 인물"[5] 이라고 평가했다. 게슈타포는 영사관 맞은편 건물 지하에 비밀 감시소를 차리고 미행 자동차를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앞서 서술했듯이 리투아니아 체재 시절에도 스기하라는 폴란드 정부 내에 정보망을 갖고 있었다. 이외에도 스기하라는 백군 인사들과 친분이 있던 것으로 유명했고, 이 때문에 주 모스크바 일본 대사관 부임을 거절당하기도 하였다.[7] 2003년판 하얀거탑에서 주인공 자이젠 역을 맡은 배우이며 토시이에와 마츠에서 주연 마에다 토시이에를 맡아 평균 22%의 고시청률을 이끌었다. 닛케이 남배우 Top30에도 20위권에 꾸준히 드는 연기파 인기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