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궁
1. 신라 왕조의 궁궐
삼국사기 등 문헌기록에 등장하는 신라의 궁궐.
1.1. 상세
문헌기록은 없는데 유물로만 존재가 밝혀진 남궁#s-2과는 정반대로, 사서에는 북궁이라는 궁전이 있다는 게 몇 번 나오는데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지, 관련 유물은 베일에 쌓여 있다. 당연히 이름을 봐선 서라벌, 특히 정궁인 경주 월성 기준으로 북쪽 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도.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혜공왕}}}7월에는 북궁(北宮)의 정원 가운데 먼저 두개의 별이 떨어지고 또 한 개의 별이 떨어져, 세 개의 별이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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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11권 신라본기 제11 진성여왕}}}겨울 12월 을사에, 임금이 북궁(北宮)에서 돌아가셨다. 시호를 진성(眞聖)이라 하고, 황산(黃山)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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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인물 조위가 남긴 문집 매계집에서도 신라 북궁이 등장한다.
혜공왕이나 진성여왕이나 북궁 관련 기록이 경문왕계에만 나와서, 경문왕계의 거주지 혹은 경문왕가 자체를 북궁이라 한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즉, 궁(宮)이라고 거창하게 부르긴 해도 조선시대의 운현궁마냥 왕이 즉위하기 전에 살던 잠저 정도일 거라는 추측. 위의 진성여왕도 897년 6월에 왕위를 효공왕에게 물려주고 북궁으로 옮겨가 살다가 같은 해 12월에 북궁에서 죽었다는 기사다.
참고로 경주시 성동동 전랑지(사적 제88호)도 월성 정북쪽이고 축구장 4배 넓이의 부지에 건물이 정연하게 배치되었던 흔적이 있어 뭔가 크고 중요한 신라시대 건물이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는데 별궁 터일 거라는 추측도 있다. 하지만 아직 전랑지 전체에 대한 발굴조사가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어서[1] 위의 북궁과 관련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전랑지는 개발만 막고 그냥 공터로 남겨두고 있다.
혹은 경주 시가지 북쪽 용강동(경주)에 있는 경주 용강동 원지 유적(사적 제419호)도 북궁의 후보 중 하나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 곳은 1998년~1999년까지 약 2,600여평을 조사한 결과 '제2 안압지'라고 불렸을 정도로 8~9세기에 조성된 규모가 큰 인공연못 정원 유적지이다. 비교대상이던 안압지(동궁과 월지) 역시 궁궐건축이니만큼 유사한 이 곳도 진성여왕대의 북궁이거나 적어도 별궁 유적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2. 고려 왕조의 궁궐
고려 시대 본궐 북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궁궐.
고려사에선 최충헌 열전, 동국통감에선 충혜왕 때 등장한다. 최충헌 열전에선 최충헌, 최충수 형제가 당시 군주 명종을 폐위시키고 당시 태자였던 강종을 협박할 때 등장하는데 북궁(北宮)에 있던 태자와 태자비를 강제로 나오게 해 유배시켰다고 한다.
동국통감 충혜왕 조엔 충혜왕이 북궁에서 술을 먹거나, 북궁에 나와 참새를 잡거나 등 탱자탱자 놀 때 조금씩 등장한다.
그 외엔 북궁에 대해 자세한 자료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