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여왕

 



'''시호'''
'''진성대왕(眞聖大王)'''
'''별호'''
매금지존(寐錦之尊)[1]
찰니나제(刹尼那帝)
북궁공주(北宮公主)[2]
''''''
김(金)
''''''
만(曼) / 탄(坦) / 만헌(曼憲)[3]
'''부왕'''
경문왕
'''모후'''
문의왕후
'''형제'''
헌강왕, 정강왕
'''배우자'''
김위홍(金魏洪)
'''왕태자'''
김요(金嶢)(905 ~ 즉위)
'''왕자'''
김양정(金良貞)[4]
'''생몰년도'''
음력
(865년~ 868년) ~ 897년 12월 4일(27세 ~ 31세)
'''재위'''
''''''
음력
887년 7월 6일 ~ 897년 6월 (9년 11개월)
'''태상황'''
음력
897년 6월 ~ 897년 12월 4일 (5개월)
1. 개요
2. 생애
3.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4.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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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51대 국왕. 진덕여왕이 승하한 654년 이후 233년 만에 등장한 여왕으로 신라와 한반도의 3번째이자 마지막 여왕이다. 동시에 통일신라 최후의 임금[5]이기도 하다. 제48대 경문왕영화부인 김씨 사이의 2남 1녀 중 셋째이자 고명딸로 제49대 헌강왕과 제50대 정강왕의 여동생이며 제52대 효공왕의 고모. 헌강왕부터 시작한 3남매 계승의 마지막 주자로 한반도의 여왕들 중 유일하게 남매 계승을 했다.
두 오빠에게는 서자를 제외하고는 아들이 없었다. 정강왕은 왕위에 오르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병에 들었는데, 승하하기 전에 "누이동생 만이 총명하며 선덕여왕진덕여왕의 전례도 있으니 잘할 것이다."라며 후계로 지명했으나 '총명하다=좋은 군주'는 아니었다. 외모에 대해서는 오빠 정강왕이 남긴 유조에 따르면 "골격이 흡사 장부와 같다"고 적혀 있다. 어지간한 남성들 못지않게 체격이 큰 여성이었던 듯하다. 이와 같이 신라의 왕통은 왕자에게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공주에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왕자가 없는 경우에 공주나 왕서(王壻, 왕의 사위)가 계승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2대 남해 차차웅 사망 직후 아들 유리와 사위 석탈해가 왕위 계승을 두고 다투고 있는 것에서부터 신라의 왕위 계승을 보면 이러한 사실이 추측된다. 따라서 진성여왕은 정강왕 사후 왕위 계승 1순위로 즉위하였기에 그 당시 기준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즉위였지만 후대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관점에서는 여자가 왕이 된다는 것이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고 마침 나라가 무너져가는 시기가 진성여왕과 맞물렸기에 망국의 원인 중 하나를 진성여왕에게서 찾게 되었다.
진성여왕은 막장스러운 사생활로 대중들에게 부정적인 의미로 인지도가 높은 편인데, 이는 삼국사기삼국유사에 기록된 근친상간과 집단 성행위 때문. 진성여왕 대에 최치원이 작성한 『성광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 朗慧和尙 白月光塔碑)』에 의하면 "(왕의) 은혜가 바다 같이 넘쳤다"라며 성군으로 묘사가 되어 있지만 당연히 당대 왕을 대놓고 폭군으로 묘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기록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진성여왕의 재위 중에 농민 반란이 일어나는 등 신라가 분열되었기에 후대에는 대표적인 암군으로 여겨졌다. 다만 동양 전통 역사관에서 멸망한 전조의 혼란상을 평가할때 당시 재위한 군주와 몇몇 신하들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당대 정치적 혼란상을 혼자 뒤집어 썼다는 견해도 있다.[6] 진성여왕 당시에는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나고 견훤무진주를 점령한 뒤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도적이 들끓는 등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지만 모조리 진성여왕의 탓이라고는 볼 수는 없는 것. 오히려 계속 쌓인 신라 자체의 문제가 진성여왕 시대에 터져 나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듯하다.[7] 확실한 점이라면 당시 혼란스러웠던 신라의 상황을 수습해 재정비하지 못했던 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신라의 멸망이 가속화되었던 점으로 보면 그런 상황을 수습할 만한 역량은 전혀 없었다는 것.[8]

2. 생애


경문왕과 영화부인 김씨가 860년에 혼인한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865년~869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는데 19세~23세 정도의 나이에 즉위했다는 의미. 현대에는 젊고 아름다운 여왕에 대한 환상이 있는지 드라마 선덕여왕 등 일반적으로 창작물에서 신라의 여왕이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여러 정황상 즉위 시점에서는 이미 최소한 40대~50대로 중년 혹은 할머니였다. 한국사를 통틀어 젊은 여왕은 진성여왕 뿐이었다. 선덕여왕, 진덕여왕과 함께 신라의 세 여왕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각각 '선덕왕', '진덕왕'이라고 적혀 있듯이 진성여왕 역시 기록에는 여(女) 자가 빠진 '진성왕' 내지는 '진성대왕'이라고만 적혀 있다. 한국사와 세계사를 막론하고 역사상 여왕은 상당히 예외적인 사례이기 때문에 여성임을 강조하기 위해 후세에 여왕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기도 하고 선덕여왕의 경우 제37대 왕인 선덕왕 김양상과의 구분을 위해서 따로 구분을 하고 있기도 하다.[9]
삼국유사에는 진성여왕이 즉위한지 몇 년만에 진성여왕의 유모 부호부인과 부호부인의 남편 위홍 등이 실권을 잡고 정치가 어지러워졌다고 묘사하고 있다. 위홍이라는 사람의 신분은 경문왕의 동생이자 진성여왕의 삼촌이므로 신라의 왕족이다. 그런데 진성여왕은 유모 부호부인의 남편 겸 자신의 삼촌이 되는 위홍과 불륜 관계에 빠졌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임금이 평소 각간 위홍과 간통했는데 그가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봉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위홍 사후 임금이 은밀히 미소년 2~3명을 에 끌어들이니 음탕하고 문란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는 그들에게 정치를 맡겼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 그러나 삼국유사의 다른 기록에 따르면 위홍 대각간(大角干)은 왕의 남편으로 사후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봉되었는데 아무래도 이쪽이 맞는 기록으로 보인다. 간통한 상대를 왕으로 추봉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일로 진성여왕의 정식 남편이었기에 사후에 대왕으로 추봉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합리적인 일이기 때문. 근친혼은 신라 왕실에서 대를 이어 계속 행해진 풍습이라는 점과 남성 왕이 후궁을 거느리는 것이 당대에도 후대에도 일반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위의 사실만을 미루어보아 마냥 암군이라고 칭하기는 어려운 편이다. 애초에 둘이 3촌 관계인 것도 최근에 발굴된 금석문에나 나오는 거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이 둘의 관계에 대해 기술된 바가 없다.
'''한국의 군주'''
통일신라
후삼국시대
50대 정강왕 김황(신라)

'''51대 진성여왕 김만'''(신라)

52대 효공왕 김요(신라)
태봉 1대 궁예
후백제 1대 견훤
진성여왕이 즉위한 시점에서 이미 신라는 혜공왕 때를 시발점으로 해서 국력도 쇠하고 민심도 흉흉해 서서히 무너지던 망국이었다. 888년에 누군가가 정치를 비방하는 방을 써 몰래 길거리에 붙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아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

삼국유사의 진성여왕/거타지.

-

나무망국은 신라가 망한다는 뜻이며, 찰니나제는 여왕,[10]

소판과 우우삼아간은 위홍 등 여왕의 총신, 부이는 여왕의 유모를 뜻한다.

이에 왕거인(王巨仁)이라는 사람을 범인으로 붙잡았지만 그날 저녁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떨어져[11] 여왕이 두려워 그를 풀어주는 사건이 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왕거인은 감옥에서 시를 지었다고 한다.

연단[12]

의 피눈물에 무지개가 해를 뚫었고

추연[13]

이 품은 슬픔은 여름에도 비를 내리네

지금 나의 불우함 그들과 같으니

황천은 어이하여 아무 상서로움도 없는가

삼국유사 진성여왕/거타지.

그 외의 업적으로는 2년(서기 888년) 왕이 각간 위홍에게 명해 대구화상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여 책으로 엮게 하니, 그 책 이름을 삼대목이라 하였다는 것이 있는데, 이 책은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다. 연회장에서 불리는 향가의 가사가 조금씩 달라 국가 공인 '노래방 가사집(...)'을 만들려 한 것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 참고로 학습 만화 <신라 왕조 1000년>에선 진성여왕이 "내 유일한 업적인 삼대목이 전하지 않다니."라고 외치며 대성통곡 하는 장면이 있다.
진성여왕 3년(서기 889년) 국내의 여러 주군이 공물을 바치지 않아 재정이 궁핍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에 백좌강경(百座講經)[14]을 한 것 외에는 민심 수습을 위한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효녀 지은 이야기가 진성여왕 시대의 일인데, 당시에 가난을 이기지 못해 구걸하고 다니거나 부잣집의 종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구의 전성기이기도 한데, 현춘이라는 인물은 배 100여척, 병력 2,500여명을 이끌고 규슈 지역을 약탈하다 사로잡히기도 했다.[15]
889년 결국 사벌주(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났다. 진성여왕은 영기(令奇)에게 군사를 주고 토벌을 명했는데, 영기는 막상 가 보니 반란군의 규모가 커서 겁을 먹고 진군하지 못하고 정작 중앙군이 제 역할을 못할 때 지역 촌주 우연(祐連)이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에 진성여왕은 영기의 목을 베고 우연의 아들을 촌주로 삼았다. 이후 원종과 애노의 난이 진압되었는지는 확실히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아자개가 이곳을 근거지 삼아 거병하는 걸 봐선 언젠가 다른 반란군에 흡수되거나 자멸한 듯 하다. 아무튼 원종과 애노의 난은 더이상 신라 정부가 지방을 통제할 능력이 없는 것을 인증하는 사건이었고, 곧이어 전국에서 반란군이 일어나 난세가 시작된다.
5년(서기 891년) 10월 북원(北原)의 군벌 양길궁예에게 1백여 명의 기병을 맡겨 북원(北原) 동부락과 명주(溟州) 관내를 습격하는 사건이 터지고, 6년(서기 892년) 견훤이 무진주(武珍州)[16]를 점령하고 왕을 자칭하니[17] 무주 동남의 군현이 항복하여 그에게 소속되어 버렸다. 이후 8년(서기 894년) 10월에 궁예가 북원에서 하슬라[18]로 침범해오니, 그 무리가 600여명에 달하고, 궁예는 스스로 장군이라 하였다는 기록과 9년(서기 895년) 8월 궁예가 저족(猪足), 성천의 두 군을 취하고 철원(鐵圓) 등 10여 군현을 쳐서 공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직 궁예견훤후고구려후백제를 공식적으로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후삼국시대의 기틀은 진성여왕 시대에 거의 다 잡힌 것이다.
893년 견당사 김처회는 바다에 빠져 죽었고 894년 최치원을 당나라에 보내려다가 도적이 많아 길이 막혀 가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해적이 많아 황해를 건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894년 2월에 최치원이 시무(時務) 10여 조를 올리자 여왕이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 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6두품 중심의 유교적 개혁이 골자라서 신라의 정치 체제로서는 실현이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이 개혁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신라는 돌이킬수 없는 길을 걸었지만, 이미 양길견훤이 독립한 상황이니 개혁을 제대로 시도했더라도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896년에는 적고적이라는 붉은 바지로 의상을 통일한 도적단이 나라 서남쪽에서 나타나 서라벌 바로 옆 모량리까지 노략질을 하기도 했다. 나라가 망해가니 적고적 같은 도적 떼가 창궐하고 호족의 반란과 자연의 이상현상이 잦았다는 듯하다. 제법 똑똑했다고도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은 안습할 따름이다.
재위 9년(서기 895년) 10월에 큰오빠 헌강왕서자인 요(嶢)(뒷날의 효공왕)를 태자로 봉했고, 11년(서기 897년) 6월에 왕위를 넘겨주고 북쪽 궁궐(北宮)으로 거처를 옮긴 뒤 반 년 동안 태상왕으로 있다가 같은 해 12월에 사망했다. 당시 나이는 29살~33살 사이로 추정되는데, 상당히 젊은 나이에 죽었다. 이러한 사실과 당시의 당대 혼란한 정황으로 봐서 자연스러운 양위가 아니라 쿠데타나 그에 준하는 원인 때문이고 그 배후에 이후 즉위하는 신덕왕이 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 오빠, 뒤를 이은 조카가 모두 단명하였음을 고려하면 당시 의학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가족력이었을 가능성도 높은 편이다. 누대에 걸쳐 근친혼을 거듭해온 신라 왕실 특성상 유전병이 발병했었어도 이상할게 없기 때문이다.[19]
삼국사기에는 황산(黃山)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20]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화장하여 뼈를 연량(年梁)의 서훼(西卉) 또는 미황산(未黃山)에 뿌렸다고 되어 있다.

3.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한국의 고전 영화인 1969년작 천년호에서는 배우 김혜정이 연기했다. 작중에서는 주인공인 장군 원랑을 흠모해 그의 부인인 여화를 죽이려 하나, 여화가 천년 묵은 여우에 씌이게 되어 되려 목숨이 위험해진다.
상당히 음란하고 방탕한 모습으로 묘사되나, 상대등을 위시한 귀족들에게 위협당하고 신분 때문에 혼인하지 못해 외로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정준호, 김효진 주연의 2003년작 리메이크판 <천년호>에서는 김혜리[21]가 연기했는데, 여기서는 요녀의 이미지가 강하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도 나왔으며 노현희가 연기했다. 근데 골격이 흡사 장부와 같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단신인 노현희가 맡은 게 오류. 여기선 완전히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을 보여서, 정치에는 관심없고 최치원의 충언에도 심드렁하기까지 했으며 오직 향락에만 치중한다.
극중에선 그저 평범하게 살길 원하던 여인이 원치않게 옥좌에 올라, 그에 대한 환멸로 위홍에 의존하며 향략을 즐기는 것으로 묘사된다. 위홍에 대한 사랑은 거의 순애보 급이다. 위홍의 마지막 출연이 된 제7화 마지막 부분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사는 특히 압권. 물론 이미 처도 있는 숙부와 어린 조카 간의 로맨스는 비밀이었으나 나이 든 숙부 위홍이[22] 죽은 뒤 여왕 측에서 숙부가 자신의 지아비였다는 사실을 제8화에서 밝힌다.
이현세의 작품에도 나오는데, 말 그대로 변태 색녀로 나온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
一年秋七月 진성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七月 죄수사면하고 주군의 조세를 면제해 주다
一年 황룡사에 백고좌를 베풀고 설법을 듣다
一年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다
二年春二月 소량리의 돌이 저절로 움직이다
二年 삼대목을 편찬하다
二年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으로 추존하다
二年 왕이 미소년과 음란한 행위를 하다
二年 거인이 정치를 비방하는 글로 곤욕을 치르다
二年春三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二年 죄수에 대한 사면과 승려에 대한 도첩을 수여하다
二年夏五月 가뭄이 들다
三年 원종(신라)애노가 반란을 일으키다
四年春一月 햇무리가 5겹 생기다
四年春一月十五日 황룡사에서 연등 행차를 보다
五年冬十月 궁예가 북원과 명주관내를 습격하다
六年 견훤후백제를 세우다
七年 병부 시랑 김처회가 당나라에 가던 도중 익사하다
八年春二月 최치원이 시무 10여 조를 건의하다
八年冬十月 궁예가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다
九年秋八月 궁예가 10여 군현을 깨뜨리다
九年冬十月 요를 태자로 책봉하다
十年 서남쪽에 도적이 일어나다
十一年夏六月 진성왕이 태자 요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十一年冬十二月四日 진성왕이 죽다
삼국사기 11권은 문성왕부터 시작되어 진성여왕에서 끝난다.
[1]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서 발췌. 모든 신라왕을 칭하는 것일 수도 있음.[2] 봉위헌강대왕결화엄경사원문(奉爲獻康大王結華嚴經社願文) 기록.[3] 삼국유사 왕력편 기록.[4] 삼국유사, 고려사에서만 등장. 진성여왕이 김위홍과 관계를 맺은 시점은 887~888년인데 그렇다면 진성여왕이 사망할 때 약 10살이었다는 것이 된다. 이 인물의 활동시점은 후백제가 건국된 892년 이후인데, 구체적인 시점을 찾자면 퇴위 의사를 밝힌 표문을 당나라에 보내는 시점인 897년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5] 다음 왕인 효공왕부터는 후삼국 분열 후 신라군주이다.[6] 대표적으로 백제 의자왕의 타락이 있다.[7] 일단 경문왕 시절에도 잘 수습하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재난들이 있었고 헌강왕 시절에도 심상치 않은 조짐은 있었다.[8] 전대의 정강왕 때까지만 하더라도 경주에서 먼 한산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을 정도로 그나마 지방 통제력이나 여력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진성여왕 시기에 이르러는 국고가 텅 비고 적고적 같은 도적 떼가 들끓는데도 힘이 없었는지 손 놓고만 있었다. 중앙군이 겁을 먹어서 싸우지 못하자 호족이 대신 전투를 벌였을 지경. 이러한 걸 보면 진성여왕에게 그럴 힘은 물론 능력도 없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9] 같은 선덕왕이지만 서로 한자 표기법이 다르다.[10] 산스크리트 단어 크샤트리아의 음역어인 찰제리(刹帝利)를 비튼 말로 보인다.[11] 우박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왕거인이 뒤에 정치적인 이 컸거나, 아니면 진범이라는 증거를 잡지 못했다는 내용이라는 해석이 있다. 태조 왕건에서는 6화에서 도선대사가 조정의 주최로 열린 백고좌에서 법문을 구실로 신라 조정을 비판하며 천둥과 번개가 일어났을 때 갇혀있던 왕거인이 홀연히 빠져나가는 판타지스러운 각색을 넣었다.[12] 형가를 보내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연나라 왕자.[13] 연나라 소왕의 스승이며 소왕의 아들인 혜왕이 즉위하자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혔는데, 그 때가 여름이었지만 감옥에 서리가 내렸다는 전설이 있다.[14] 인왕백고좌회, 약칭 백고좌회를 의미한다. 인왕반야경을 읽으면서 국가의 번영과 안정을 기원하는 대표적인 호국불교 행사다. 주로 신라 시대에 행해졌으며, 마지막 기록은 고려 원종강화도에서 행한 것이다.[15] 현춘은 자신을 보낸 이가 신라 왕이라 주장했는데, 이때의 왕이 진성여왕이다. 현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진성여왕이 대마도를 약탈해오라 지시했단 말이 된다. 물론 어떤 지방 호족이 진성여왕의 명령이라 사칭해서 현춘을 대마도로 가게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일각에선 재정난에 시달리던 신라 조정이 반독립적인 신라구 세력을 사주해서 대마도의 물자로 재정난에서 벗어나려 한게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16] 지금의 광주광역시[17] 900년에 완산주(전라북도 전주시)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후백제를 자칭하지는 않았다.[18]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19]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니콜라이 2세의 황태자인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역시, 왕실 간의 근친혼으로 인해 모계로부터 유전된 혈우병으로 평생 고생해야 했다. 결국 귀한 고명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시베리아 출신의 괴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불렀고, 이는 결국 로마노프 황실은 물론 러시아 제국의 파멸을 불러오게 된다.[20] 삼국사기에서 황산이란 지명은 대체로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지역을 가리키기 때문에, 진성여왕릉이 양산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멸망 이후에 묻힌 경순왕을 제외한 모든 신라왕릉이 경주시 지역에 있는데 진성여왕릉이 뜬금없이 양산에 있을 가능성이 낮다는 점과, 다른 몇몇 문헌근거로 진성여왕릉이 양산에 있다는 것을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황산이란 지명이 여러 곳이었을 수도 있고.[21] 공교롭게도 태조 왕건에서는 강비를 맡았다.[22] 실제 위홍의 나이는 죽을 당시 40대 초반 정도였다. 당대의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이때 40대는 현대의 5~60대에 가깝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