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전서
四庫全書
중국 역사에서 자료와 서적들을 모아서 만든 유서(類書)이며, 역사상 최대의 총서이며, 세계사적으로도 유례없는 방대한 총서로 꼽힌다.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일은 역대 왕조마다 이뤄졌다. 당나라 때 명관료이자 학자이기도 했던 구양순의 예문유취를 비롯하여 송나라 때는 책부원귀, 태평광기, 태평어람, 문원영화 등 대규모 유서 4종(이른바 송사대서)이 나오기도 했다. 명나라 때에 이르러 영락제의 명령으로 방대한 영락대전이 편찬되었다.
청나라도 이런 전통을 이어 강희제 때 강희자전, 옹정제 때 고금도서집성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는 고금도서집성이 방대하긴 하나 '''전문을 다 싣지 않고 일부만 인용함에 아쉬움을 느끼고''' 아예 책과 자료의 전문을 통째로 싣는 총서 편찬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사고전서.
건륭제는 즉위 초반인 1741년부터 이미 이런 구상을 시작해 서적과 자료의 수집을 시작했고 1772년에는 유서를 교정하고자 각 지방관에게 자료의 전문을 수집해오도록 조서를 내렸다. 이듬해인 1773년에 모아진 자료와 서적에 해제를 붙이고 사고전서관을 설치한후 본격적인 편찬작업에 돌입했다. 그리하여 1782년에 사고전서 전체의 편찬이 완료되었다.
최종적으로 편찬완료된 사고전서는 전체를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네가지 분류형태로 분류되어 3,503부 79,377권(권 : 현재의 장/챕터)이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이 되었다. 이것을 편찬하는 데 동원된 학자들만 해도 무려 1만 4백여 명에 달했으며 필사에 동원된 인원은 4천여 명에 달할 정도로 인력동원 규모면에서도 엄청났다. 전근대 사회에서 이 정도의 전문인력을 동원하여 거대한 규모의 저작물을 완성할 수 있는 행정력을 가졌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편찬목적은 크게 몇가지로 나눌수 있을 것인데
1. 국가차원에서 소실되거나 실전될 우려가 있는 귀중한 자료들을 모아 보전한다.
2. 반청주의의 온상인 한인 학자들에게 사고전서 편찬이라는 일거리를 주고 이들을 국가적으로 관리 통제한다.
3. 반청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거나 청나라에 비판적인 사상을 담은 문헌이나 자료들을 모아 처리한다.
정도가 되겠다.
실제 사고전서는 중국역사상 수많은 문헌들을 보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사고전서의 편찬이 청대 학문을 융성케 하는 데에는 별로 역할을 하지 못했는데 소위 문자의 옥으로 불리는 강희제부터 건륭제에 이르는 시기의 광범위한 사상탄압으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사상 전개와 교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건륭제는 귀중한 자료를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국가적으로 엄청난 분량의 서적들을 수집하게 했으며 이 서적들 중 반청주의적이거나 청나라를 비판할 소지가 있다고 '''여겨진''' 서적들은 금서로 지정하여 곧바로 소각처리하였다. 즉 '''자료를 보전하는 동시에 자료를 파괴하는''' 이중적인 면모가 사고전서에 있었던것. 사고전서 편찬과정에서 목판 2800여 종이 파괴되고 책 수만 권이 소각처리되었으며 책 400여 종은 문구를 부분수정하거나 전면수정했다.
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사고전서는 귀중한 문헌인 만큼 보존을 위해 정본 7부와 부본 1부로 총 8부를 만들었다. 조선의 조선왕조실록처럼 정본 7부는 중국 각지에 분산 소장되었다.
이런 사고전서는 격동의 중국사 가운데서 이런저런 수난을 당했다.
사고전서가 편찬될 당시는 '''조선의 정조시기로''' 정조는 사고전서를 어떻게든 구해보려고 애를 썼다. 이에 매년 청나라에 보는 사신들마다 특명이 사고전서를 들여오는 것일 정도였다.
그러나 사고전서는 분량이 너무 방대한데다가 7부밖에 인쇄하지 않아서 조선이 이를 들어오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정조는 포기하지 않고, 기회가 될 때마다 들여오려고 애썼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서형수(1749-1824)나 유득공(1748-1802)의 기록들에서 정조가 사고전서를 얼마나 들여오고자 노력을 했는지 엿볼 수 있다. 서형수의 문집에 의하면 서형수가 1799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정조는 서형수에게 주자서와 더불어 사고전서의 구입 가능성을 타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서형수는 정조의 명령에 따라 청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서적을 구입해 돌아왔으나 사고전서는 들여오지 못했다. 정조의 사망 직후인 1801년에 청에 사신으로 파견된 유득공은 사고전서의 편찬과정에 깊게 관여한 학자 기윤을 만나서 주자서 구입에 대해 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기윤을 통해서 사고전서의 구입을 타진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끝내 사고전서의 도입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고금도서집성을 얻는 데 성공해 규장각에 비치하는 성과는 거둘 수 있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단재 신채호 선생은 베이징에서 머무르는 동안 역사 연구를 위해 자료 탐독이 필요했고, 후스나 천두슈같은 중국 지식인들과 접촉해 베이징대 도서관에서 자료연구를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 한국인으로선 최초로 사고전서를 열람하였다.
한국에서 사고전서를 접할 수 있게된 시점은 1980년대 대만에서 국립고궁박물원 소장본의 영인본을 내놓으면서 비로소 이루어졌다. 한국학계에서도 사고전서는 매우 중요하다. 방대한 중국의 문헌 가운데서 한국 고대사의 잃어버린 퍼즐들을 찾을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 그러나 워낙 내용이 방대한 탓에 한국에선 아직도 연구가 많이 부족하다.
정조와 당대 지식인들이 사고전서에 관심을 가진 데에는 사고전서 내에 조선 학자들의 문집이 수록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1790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기윤을 만난 서호수는 사고전서에 화담 서경덕의 화담집이 수록되었다는 보고를 정조에게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밝혀지기로는 화담집은 수록되지 않았다. 단지 사고전서총목이나 천경당서목에 서경덕의 화담집에 대한 해제와 인용이 나와있는걸로 보면 수록후보에는 올랐다가 탈락한 것으로 보인다. 서경덕 외에도 고려의 김구용, 조선의 권근, 정인지, 서거정, 이이, 임백령, 신광한 등에 대한 소개나 문집의 해제가 나와있기도 하다.
사고전서에는 한국인이 저술한 서적은 수록되지 못했으나, 대신 한국에 관련된 자료나, 서적들은 꽤 흥미로운 것들이 있다. 고려 때 송나라의 사신으로 온 서긍이 집필한 고려도경이 수록되었으며, 명나라 때 조선 사람이 단군부터 고려 공양왕대까지의 역사를 집필한 조선사략도 수록되었는데 비교적 고려말의 정세를 객관적으로 서술했다. 또한 작자를 알 수 없고, 단지 명나라 때 어떤 사람이 집필한 듯 보이는 조선지라는 책도 수록되었는데 조선의 풍속, 지리, 제도 등을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이외에도 고대사부터 조선에 이르는 한국관련 자료가 많다고 추정되나 '''너무 방대하므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중국어 위키문고에서 사고전서 전문을 입력 중인데 워낙 방대한지라 아직 입력하지 못한 부분이 더 많다.(...)중국어 위키문고 사고전서
한국인의 저술로는 거의 유일하게 조선시대 서경덕의 《화담집》이 집부(集部)의 별집존목(別集存目)에 수록되었다. 즉 내용은 싣지 않고, 해제만 기록해 놓은 셈. 내용은 링크 참고
[각주]
1. 개요
중국 역사에서 자료와 서적들을 모아서 만든 유서(類書)이며, 역사상 최대의 총서이며, 세계사적으로도 유례없는 방대한 총서로 꼽힌다.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일은 역대 왕조마다 이뤄졌다. 당나라 때 명관료이자 학자이기도 했던 구양순의 예문유취를 비롯하여 송나라 때는 책부원귀, 태평광기, 태평어람, 문원영화 등 대규모 유서 4종(이른바 송사대서)이 나오기도 했다. 명나라 때에 이르러 영락제의 명령으로 방대한 영락대전이 편찬되었다.
청나라도 이런 전통을 이어 강희제 때 강희자전, 옹정제 때 고금도서집성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는 고금도서집성이 방대하긴 하나 '''전문을 다 싣지 않고 일부만 인용함에 아쉬움을 느끼고''' 아예 책과 자료의 전문을 통째로 싣는 총서 편찬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사고전서.
건륭제는 즉위 초반인 1741년부터 이미 이런 구상을 시작해 서적과 자료의 수집을 시작했고 1772년에는 유서를 교정하고자 각 지방관에게 자료의 전문을 수집해오도록 조서를 내렸다. 이듬해인 1773년에 모아진 자료와 서적에 해제를 붙이고 사고전서관을 설치한후 본격적인 편찬작업에 돌입했다. 그리하여 1782년에 사고전서 전체의 편찬이 완료되었다.
최종적으로 편찬완료된 사고전서는 전체를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네가지 분류형태로 분류되어 3,503부 79,377권(권 : 현재의 장/챕터)이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이 되었다. 이것을 편찬하는 데 동원된 학자들만 해도 무려 1만 4백여 명에 달했으며 필사에 동원된 인원은 4천여 명에 달할 정도로 인력동원 규모면에서도 엄청났다. 전근대 사회에서 이 정도의 전문인력을 동원하여 거대한 규모의 저작물을 완성할 수 있는 행정력을 가졌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2. 편찬목적
편찬목적은 크게 몇가지로 나눌수 있을 것인데
1. 국가차원에서 소실되거나 실전될 우려가 있는 귀중한 자료들을 모아 보전한다.
2. 반청주의의 온상인 한인 학자들에게 사고전서 편찬이라는 일거리를 주고 이들을 국가적으로 관리 통제한다.
3. 반청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거나 청나라에 비판적인 사상을 담은 문헌이나 자료들을 모아 처리한다.
정도가 되겠다.
실제 사고전서는 중국역사상 수많은 문헌들을 보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사고전서의 편찬이 청대 학문을 융성케 하는 데에는 별로 역할을 하지 못했는데 소위 문자의 옥으로 불리는 강희제부터 건륭제에 이르는 시기의 광범위한 사상탄압으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사상 전개와 교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건륭제는 귀중한 자료를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국가적으로 엄청난 분량의 서적들을 수집하게 했으며 이 서적들 중 반청주의적이거나 청나라를 비판할 소지가 있다고 '''여겨진''' 서적들은 금서로 지정하여 곧바로 소각처리하였다. 즉 '''자료를 보전하는 동시에 자료를 파괴하는''' 이중적인 면모가 사고전서에 있었던것. 사고전서 편찬과정에서 목판 2800여 종이 파괴되고 책 수만 권이 소각처리되었으며 책 400여 종은 문구를 부분수정하거나 전면수정했다.
3. 판본
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사고전서는 귀중한 문헌인 만큼 보존을 위해 정본 7부와 부본 1부로 총 8부를 만들었다. 조선의 조선왕조실록처럼 정본 7부는 중국 각지에 분산 소장되었다.
- 문연각본: 베이징 자금성에 소장. 청나라 황실의 정궁에 소장한 만큼 이쪽이 원본이다.
- 문원각본: 베이징 원명원에 소장
- 문진각본: 청더의 여름행궁(피서산장)에 소장
- 문소각본: 선양의 성경궁(선양고궁)에 소장
- 문회각본: 양저우의 대관당에 소장
- 문종각본: 전장의 금산사에 소장
- 문란각본: 항저우의 성곤사 행궁에 소장
- 부본: 자금성 내 한림원에 소장
4. 사고전서의 수난사
이런 사고전서는 격동의 중국사 가운데서 이런저런 수난을 당했다.
- 전강의 문종각본은 1842년 아편전쟁때 상당수가 소실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것은 1853년 태평천국의 난 때 태평천국군이 전강을 공격하면서 완전히 파괴된다.
- 양주의 문언각본은 1854년 태평천국군이 양주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대관당이 불타면서 소실되어버렸다.
- 원명원의 문원각본은 1860년 영국,프랑스 등 서구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면서 원명원에 쳐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하는 과정에서 소실되었다.
- 항주의 문란각본은 1861년 태평천국군이 항주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장서의 대부분이 흩어졌다. 다행히 후에 항주의 유명한 장서가였던 정씨 형제가 우연히 시장에서 포장지로 쓰이던 사고전서를 발견하고 흩어진 사고전서를 다시 모으고 복원하여 복구에 성공했다.
5. 한국과 사고전서
사고전서가 편찬될 당시는 '''조선의 정조시기로''' 정조는 사고전서를 어떻게든 구해보려고 애를 썼다. 이에 매년 청나라에 보는 사신들마다 특명이 사고전서를 들여오는 것일 정도였다.
그러나 사고전서는 분량이 너무 방대한데다가 7부밖에 인쇄하지 않아서 조선이 이를 들어오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정조는 포기하지 않고, 기회가 될 때마다 들여오려고 애썼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서형수(1749-1824)나 유득공(1748-1802)의 기록들에서 정조가 사고전서를 얼마나 들여오고자 노력을 했는지 엿볼 수 있다. 서형수의 문집에 의하면 서형수가 1799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정조는 서형수에게 주자서와 더불어 사고전서의 구입 가능성을 타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서형수는 정조의 명령에 따라 청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서적을 구입해 돌아왔으나 사고전서는 들여오지 못했다. 정조의 사망 직후인 1801년에 청에 사신으로 파견된 유득공은 사고전서의 편찬과정에 깊게 관여한 학자 기윤을 만나서 주자서 구입에 대해 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기윤을 통해서 사고전서의 구입을 타진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끝내 사고전서의 도입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고금도서집성을 얻는 데 성공해 규장각에 비치하는 성과는 거둘 수 있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단재 신채호 선생은 베이징에서 머무르는 동안 역사 연구를 위해 자료 탐독이 필요했고, 후스나 천두슈같은 중국 지식인들과 접촉해 베이징대 도서관에서 자료연구를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 한국인으로선 최초로 사고전서를 열람하였다.
한국에서 사고전서를 접할 수 있게된 시점은 1980년대 대만에서 국립고궁박물원 소장본의 영인본을 내놓으면서 비로소 이루어졌다. 한국학계에서도 사고전서는 매우 중요하다. 방대한 중국의 문헌 가운데서 한국 고대사의 잃어버린 퍼즐들을 찾을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 그러나 워낙 내용이 방대한 탓에 한국에선 아직도 연구가 많이 부족하다.
정조와 당대 지식인들이 사고전서에 관심을 가진 데에는 사고전서 내에 조선 학자들의 문집이 수록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1790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기윤을 만난 서호수는 사고전서에 화담 서경덕의 화담집이 수록되었다는 보고를 정조에게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밝혀지기로는 화담집은 수록되지 않았다. 단지 사고전서총목이나 천경당서목에 서경덕의 화담집에 대한 해제와 인용이 나와있는걸로 보면 수록후보에는 올랐다가 탈락한 것으로 보인다. 서경덕 외에도 고려의 김구용, 조선의 권근, 정인지, 서거정, 이이, 임백령, 신광한 등에 대한 소개나 문집의 해제가 나와있기도 하다.
사고전서에는 한국인이 저술한 서적은 수록되지 못했으나, 대신 한국에 관련된 자료나, 서적들은 꽤 흥미로운 것들이 있다. 고려 때 송나라의 사신으로 온 서긍이 집필한 고려도경이 수록되었으며, 명나라 때 조선 사람이 단군부터 고려 공양왕대까지의 역사를 집필한 조선사략도 수록되었는데 비교적 고려말의 정세를 객관적으로 서술했다. 또한 작자를 알 수 없고, 단지 명나라 때 어떤 사람이 집필한 듯 보이는 조선지라는 책도 수록되었는데 조선의 풍속, 지리, 제도 등을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이외에도 고대사부터 조선에 이르는 한국관련 자료가 많다고 추정되나 '''너무 방대하므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6. 기타
중국어 위키문고에서 사고전서 전문을 입력 중인데 워낙 방대한지라 아직 입력하지 못한 부분이 더 많다.(...)중국어 위키문고 사고전서
한국인의 저술로는 거의 유일하게 조선시대 서경덕의 《화담집》이 집부(集部)의 별집존목(別集存目)에 수록되었다. 즉 내용은 싣지 않고, 해제만 기록해 놓은 셈. 내용은 링크 참고
7. 같이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