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의 옥

 


1. 개요
2. 배경
3. 강희-옹정제 시기
3.1. 명사집략(明史輯略) 사건(1660년)
3.2. 남산안-대명세 사건(1711년)
3.3. 사사정 사건(1726년)
3.4. 증정-대의각미록 사건(1728년)
4. 건륭제 시기
5. 종식
6. 결과
7. 기타
8. 같이보기


1. 개요


'''文字의 獄'''
서책이나 시구 등에 나온 문구나 단어를 이유로 탄압하는 공포정치의 일환. 일종의 필화 사건이다.
서양에도 있었으나, 주로 중국 왕조에서 나타났고 그 가운데 명나라의 홍무제와 청나라의 강희~가경 연간의 일이 가장 유명하다. 가끔은 군주가 아니라 권신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 짓거리를 하기도 했는데, 진회가 대표적이다. 영어로는 Literary Inquisition이라고 한다.
이 항목에서 설명하는 문자의 옥은 강희제 시기에 시작되어 옹정제 시기에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그 규모가 커져 건륭제 시기에 절정을 이루고 가경제 시기까지 이어진 청 제국의 대규모 사상탄압 사건들을 말한다.

2. 배경


근본적 원인은 당연히 청이라는 만주족, 즉, 오랑캐 국가의 중국 대륙 통일이었다. 원 멸망 이래 300년간 한족 국가 명으로 존속하던 중국인들에게 오랑캐의 지배란 수치스러웠고, 당연히 한족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당장 한족의 반발을 통제하지 못하고 100년도 못 가 무너진 원나라의 선례가 있었으니 이러한 집단반발은 당연히 청에게는 심각한 국가적 위협이었고 놔두지 못할 일이었다.
청은 이러한 반발을 대규모 학살과 탄압으로 억눌렀다. 양주나 광주, 사천 등지에서 난 명청교체기 대학살로 아무리 적게 잡아도 몇 십만 명, 최대 몇 백만 명에 근접하는 대규모 인구를 탄압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학살 및 변발 등 만주족 문화 억지 강요 등의 탄압은 원의 남송 정복 때도 없었고 몽골 제국의 화북 정벌 때에나 나올 뻔하다가 장춘진인의 만류로 나타나지 않았던 일이었다.[1] 청은 강력한 힘이 바탕인 강경책(대량학살과 변발의 강요 등)과 회유책(한족 관료의 등용과 향신층의 우대 등)을 같이 펴며 중국 전토 지배에 나섰다.
역사학자 등지성(1887~1960)이 작성한 청대문자옥간표의 통계에 따르면, 건륭 연간에 일어난 문자옥은 무려 130여 건이나 되었다고 한다. 청나라 때 일어난 문자옥이 160여 건임을 감안하면 80%에 해당한다.
그러나 비록 힘으로 억눌렀어도 사람의 마음까지는 굴종시키지 못 하는 법. 어쩔 수 없이 변발을 하고 청에 충성하는 척했으나 한족들, 특히 강남 지방에서는 여전히 청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고, 청을 피해 재야에 숨은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한족 중심의 반청사상이 나타났다. 당시 많은 한족 지식인들은 암암리에 청나라의 멸망과 명나라의 재흥을 꿈꾸었으며, 반청단체 천지회 등을 몰래 지지했다.[2] 청은 이러한 반청의 기반인 사상 그 자체를 말살한다는 대담한 정책을 세워 약 1세기에 걸친 인류 역사상 초유의 사상 탄압을 폈다.

3. 강희-옹정제 시기



3.1. 명사집략(明史輯略) 사건(1660년)


명나라는 다른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자체적으로 체계적인 역사기록을 남겼는데,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멸망하면서 숭정제 연간이 미완성인 채로 남았다. 당시 편찬을 담당했던 주국정(朱國楨)이란 신료는 미완성인 기록들을 가지고 강남으로 피난하여 살다 죽었는데, 그의 후손이 궁핍해지자 이를 지방 유력가 장정롱(莊廷鑨)에게 팔았다.
장정롱은 이 명사를 완성해 자신의 가문을 그냥 돈 좀 있는 유력가가 아니라 학식과 덕망을 갖춘 명망가로 발전시켜 명성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장정롱은 초기 작업 중에 급사하고 동생 장정월(莊廷鉞)이 이 작업을 마무리했는데, 문제는 이런 일을 하기에는 장정월이 워낙에 학식이 없었던 것. 이 때문에 장정월은 주변의 여러 학자들과 명사들을 초빙, 서문과 평론을 달고 미완인 부분을 보충했다. 그리고 이게 화근이 되었다.
장정월이 초빙한 학자와 명사들은 하나같이 학식과 명성이 드높았지만 동시에 청나라에 이를 부득부득 가는 반청주의자들이었다. 초빙 제안을 받은 이들은 이때다 싶어 의뢰받은 명사 편찬 작업에서 명나라에 대한 찬양 일색에 청나라를 깎아내리는 내용으로 가득한 내용을 적었고, 장정월은 이 책들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그저 빨리 이것들을 팔아서 명성도 올리고 돈도 벌자는 생각으로 책을 출간했다.
이렇게 출간된 책에는 청조로서는 당연히 아연실색할 내용들로 가득 찼다. 우선 청 황제들을 묘호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고[3] 청의 정통성을 부정했으며, 명과 청의 전투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명의 연호를 쓰고, 후금/청군을 반란군으로 적었으며, 항장 출신들인 상가희와 경정충을 나라 팔아먹은 도둑놈이라 비난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장정월이 지방 관아에 막대한 뇌물을 주어 문제 되는 내용을 삭제하고 출간하는 선에서 해결했으나, 결국에는 이 책은 문제가 되는 내용들을 포함한 채로 강희제에게까지 올라가고 말았다. 책을 정독한 강희제는 당연히 사태를 파악했고, 연루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이 책의 편찬 작업을 시작한 장정롱의 의도와 달리 장씨 집안은 멸족, 이미 죽은 장정롱은 부관참시를 당했고, 편찬에 관여한 학자와 명사들은 물론, 그들의 가족과 친척, 제자들까지 싸그리 다 처형당했다. 뿐만 아니라 강희제는 뇌물을 받고 책의 개정출간을 허용한 지방 관리들, 심지어 단순히 책을 인쇄한 사람과 책을 받아 시장에서 판매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처형했다. 물론 강희제는 1654년생으로 1661년에 즉위했으니 이때는 꼴랑 7살이어서 황제 본인보다는 황족들과 보정대신들의 의중이 더 강했겠지만, 탄압이 절정에 이른 후대 황제들의 경우를 보면 강희제가 성년으로 직접 처벌을 시행했어도 별다른 자비는 없었을 것이다.
대대적인 탄압이기는 했으나, 명사집략은 워낙 반청기조가 강했던 책이기에[4] 그나마 다른 필화에 비하면 이유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본격적인 문자의 옥을 시작하는 신호탄이었다.
김용녹정기 서장에 이 명사집략 사건 이야기가 소설적인 각색이 더해져 비교적 자세히 나온다. 초기의 중원문화사 판본에서는 이 부분이 누락되어 있었지만 이후에 나온 서적포 판본과 2008년판 이후 판본에서는 제대로 들어가 있다.[5]

3.2. 남산안-대명세 사건(1711년)


청 초기 산문계에서 이름 높았던 대명세(戴名世)라는 사람이 명 시절 역사와 저집을 연구하고 참고하면서 자신의 저작 남산집(南山集)을 냈는데, 그 과정에서 남명 최후의 황제 소종 주유랑의 연호인 영력(永曆)을 썼음이 드러났다.
따라서 '''남명의 연호를 사용했다 → 명나라 추종 세력이다 → 그럼 너는 반역 수괴'''라는 논리로 대명세는 처형되고, 저서들이 모두 불태워졌으며 가족들은 만주 외곽으로 유배되었다.
다만 이 역시도 명사집략의 경우처럼 참작 여지가 있는데, 동양권에서 연호란 것은 단순한 기년법이 아니라 황제국의 조건 중 하나로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것을 꼽을 정도로 중요한 요소였고 '누구의 연호를 쓴다=누구를 섬기고 따른다'는 공식이 성립했다. 당장에 한반도 역사에서도 중국에 들어선 왕조들이 자기 연호를 쓰라고 독촉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598년 간신 정응태가 조선을 명에 참소한 사건에서 신숙주해동제국기(1471년 간행)를 쓰면서 이해의 편의를 위해 일본의 연호를 그대로 기록했던 것을[6] 한 가지 빌미로 삼았을 정도로 민감한 문제였다. 이에 조선에선 왜인들의 문헌을 우선은 그대로 인용하다 보니 그리 된 것이고, 왜가 참칭한 연호에다 중국 연호를 주석 처리하여 부연 설명하다 보니 글자 크기가 그리 되었다고 해명하였다.[7]
더군다나 이 경우는 명나라도 아니고 남명의 연호를 사용한 것이 문제였다. 청나라는 남명을 공식 왕조라고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청나라는 명나라의 황제들을 그래도 선대 왕조의 군주라고 인정했지만, 남명의 황제들은 '''참칭자''' 정도로 간주했다. 실제로 남명은 명사에 기록은 되었지만, 남명의 황제들은 황제가 기록되는 본기가 아닌 보통 인물이 기록되는 열전에 실렸다. 즉, 청나라 입장에서는 명나라 연호를 쓴 것도 괘씸한데 정통성도 없는 황제의 연호를 쓴 것이 문제시되었을 것이고, 더욱이 이 시점에서 남명은 망한 지 불과 50여 년밖에 안 지났고 명나라 부흥을 기치로 내건 정씨 왕국이[8] 망한 지도 30여 년밖에 안 지났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3.3. 사사정 사건(1726년)


옹정 4년(1726), 강서성 향시의 감독관이던 사사정(査嗣庭)[9]이라는 문인이 출제한 시험문제 중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군자는 언어로 사람을 천거하지 않으며 사람으로 언어를 버리지 않는다." "산속의 좁은 길도 사람들이 계속 다니면 넓은 길이 되고 잠시라도 다니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길을 막는다." 전자는 논어에 나오는 구절이다. 단순히 사람의 말만을 듣고 그를 등용해서는 안 되며 사람의 행실이 나쁘다고 하여 그의 말을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공자의 말이다. 후자는 맹자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람의 마음도 닦지 않으면 그 착한 본성을 잃고 만다는 맹자의 주장이다. 전혀 문제될 게 없는 문구였다. 하지만 옹정제는 사사정이 공자의 말을 빗대어 조정에서 인재를 직접 천거하라는 어명에 불만을 품었고 또 맹자의 말에 음흉한 속셈을 숨겼다고 보았다. 또 사사정은 유민소지(維民所止)라는 문구를 넣었는데 시경 상송에도 나오므로[10]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유(維)자와 지(止)자가 옹정제의 연호인 옹정(雍正)에서 위의 획만 뺀 것이니 유민소지의 뜻은 황제 옹정을 참수하겠다는 의도를 담은 반역 음모를 꾸몄다고 했다. 정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견강부회였지만 사사정이 아무리 결백을 호소해도 그의 말을 들어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또 어떤 이가 사사정의 비리를 고발한 일을 빌미로 옹정제는 그의 가택을 샅샅이 수색하게 했다. 수색에서 매관매직의 내용이 담긴 서신이 발견되었고, 그가 쓴 글은 엄격한 검열을 받고 불순한 내용은 모조리 적시되었다. 결국 사사정은 '패악하고 불순한 말로 시사를 풍자하고 마음속에는 원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었다. 사사정은 체포 이후 판결이 나기 전 옹정 5년(1727)에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는데, 잠시 땅에 묻혔다가 부관참시당했다. 이때 그의 자식들 중 16살 이상인 남자는 전부 처형당하고 나머지 어린 아들들과 조카들은 유배형을 당했다.
다만 이후에도 해녕의 사씨가 지역 명문으로 계속 남았고, (무협소설가 김용의 직계조상인) 사촌동생 사승이 무사했음을 보면 직접적인 처벌은 사사정의 아들, 형제, 조카에게까지만 미친 것으로 보인다.
옹정제는 사사정을 패가망신시킨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사정은 오래 전부터 융과다에게 빌붙어 있었다. 융과다는 그를 짐에게 천거했다. 짐은 그를 내각학사에 책봉하여 조정에서 일할 수 있게 은총을 베풀었다. 그 후 그가 쓴 글을 읽어보니 허황되고 사술로 가득 차 있었으며 의심이 많았다. 그의 음흉한 속셈을 헤아릴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를 믿지 않았다.

짐은 신하를 지극한 정성으로 우대했는데도 짐의 은혜를 저버리고 악행을 저지른자가 있다. 천하의 백성들은 모두 조정의 은택을 입은 자들이다. 따라서 신하는 임금과 신하사이의 대의를 알아서 한마음으로 임금의 은혜를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딴마음을 품으먼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자이다. 어찌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송 이래로 옛날의 법도는 아득하게 멀어지고 풍습은 각박해졌으며 인심은 날로 거칠어졌다. 이에 따라 미쳐 날뛰는 무리는 종종 마음속으로 조점의 정치를 비난하며 심지어는 글을 써서 헐뜯고 비방하기도 한다. 왕경기, 사사정 같은 대역죄를 저지른 자들은 어찌 천벌을 피할 수 있겠는가.

융과다가 누군인가. 웅정제를 황제로 추대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일등공신 아닌가. 그는 옹정제의 집권 초기에 명실상부한 2인자였다. 옹정제는 겉으로는 그를 외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랐지만 속으로는 그의 세력이 날로 커지는 것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고 제거할 생각이었다. 융과다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측근부터 처단해야 했다. 결국 옹정제가 문자옥을 일으켜 사사정을 죽인 까닭은 사사정이 융과다의 측근이었기 때문이다.

3.4. 증정-대의각미록 사건(1728년)


옹정 6년(1728)에 천섬(사'''천'''과 '''섬'''서)총독 악종기(岳鍾琪)를 충동질한 '증정'이라는 인물의 반란미수 사건이 있었다.
여유량(呂留良, 1629-1683)은 명말 청초의 문인이자 사상가이다. 순치 10년(1653)에 제생(諸生, 생원)이 되었지만 명나라 망국의 한을 품고 고향 절강성 숭덕현에서 은거했다. 강희 19년(1680)에 청나라 조정은 명나라 유민을 포섭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의 산중에서 은거하고 있는 한족 지식인들을 특별히 등용하는 정책을 반포했다. 가흥 군수가 그에게 출사를 끈질기게 권유하자그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절강성 오흥현에 있는 묘산으로 들어가 강학에 열중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인품이 휼륭하고 학식이 뛰어나 명성이 동남지방에서 자자했다. 그가 지은 시문에는 망국의 한이 짙게 배였고, 은연 중에 반청복명 투쟁을 두둔했다.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를 추종한 제자들과 반청사상을 가진 유생 증정(曾靜, 1679-1735)이 그의 뜻을 기리는 활동을 했다.
증정은 반청사상가를 자처했지만 실상은 흔해빠진 백면서생으로 명망 높은 학자나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반청사상의 지주이기도 했던 여유량의 저작을 읽고 크게 감동, 여유량을 추종했고, 여유량이 이미 죽은 뒤라 그의 아들로부터 여유량의 저작 몇 권을 더 구해 읽으며 열렬한 여유량 추종자 및 반청주의자 노릇을 했다. 그는 섬서 총독 악종기가 옹정 6년(1728) 그가 북경으로 가서 옹정제를 배알 하고자 했으나 거절을 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증정은 악종기를 포섭하여 반청복명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제자 장희(張熙)를 거쳐 서신을 보내 반란을 일으키라 권유한다.
"송나라 무목왕 악비의 후예이신 천리원수께서는 지금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사옵니다. 기회를 틈타 병사를 일으켜 송나라와 명나라를 위해 복수해야 하옵니다"
그러나 섬서총독 악종기는 한인팔기 출신으로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워 황제의 신임을 얻고 만주족만 임명받던 천섬총독 자리에 올랐기에 만주 출신 귀족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던 사람이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냐면 만주귀족들이 작당해서 악종기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모함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옹정제는 그럴 리가 있겠냐며 악종기를 철썩같이 믿었으니 악종기는 당연히 옹정제한테 충성했다.
증정이 왜 하필 그런 청조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악종기를 골랐는지에 대한 이유가 가관인데, 악종기가 중국 역사상 성이 악씨인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송의 애국명장 악비의 21대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신의 조상은 한족 왕조를 위해 충성하고 끝까지 싸워 금나라 여진족 오랑캐들을 물리쳤으니 당신도 조상을 본받아 여진족 오랑캐들을 토벌하고 한족의 증흥을 이뤄달라는 소리. 당연히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고, 악종기는 일단 수긍하는 척 하여 증정의 전반적인 계획을 캐낸 뒤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옹정제는 증정과 장희를 당장 북경으로 압송했다.
옹정제는 증정을 직접 심문하면서 토론을 했고, 이 과정에서 증정을 논리로 압도해 사상 전향을 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 후 증정과 장희를 방면하고 이때 자신과 증정 사이에 오간 대화들을 기록으로 남긴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을 출간, 전국적으로 보급해 청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증정이 가지고 있던 서찰들은 모조리 압수하고, 사상개조한 증정의 진술을 토대로 여유량의 후손 및 반청사상을 가진 명망가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옹정제는 여유량을 부관참시했고 여유량의 제자 엄홍규까지 걸리자 두 집안의 직계후손 중 16세 이상을 모조리 처형, 그 이하는 노비로 만들었다. 여유량의 저작을 출판한 사람들도 반역죄로 처형당했고, 그 저작을 보유했다는 이유만으로 모조리 감옥에 끌려갔다.
이후 증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겠다는 의미로 참회록을 출간해 옹정제한테 용서받고 벼슬을 받아 잘 먹고 잘 살았으나 건륭제 원년에 이때의 일을 핑계 삼아 처형당한다. 대의각미록엔 증정이 주장하는 황실의 추문이나 궁정 암투가 많이 적혔는데, 옹정제가 반박하려고 책을 썼다가 오히려 이런 내용들이 전국으로 퍼지는 결과가 됐기 때문.#
한편 이 사건은 옹정제의 갑작스런 죽음에 관해 인기 있는 야사를 남겼다. 여사랑(呂四娘)[11]이라고 불리는 여유량의 딸 혹은 손녀가 무예를 익혀 궁녀로 잠입해 옹정제를 암살해 복수했다는 이야기다. 소설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옹정제를 다루는 작품에 높은 빈도로 등장한다. 양우생의 무협소설 강호삼여협이 이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녹정기 2부라고 개칭해서 출간했다.

4. 건륭제 시기


사실 건륭제는 처음부터 대대적으로 문자의 옥을 자행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즉위 초기에는 전대 문자옥의 죄인들의 후손을 사면하는 등, 엄격했던 부친과는 반대로 너그러운 정치를 표방하는 편이었다.[12] 그러나 건륭 15년(1750)에 이르러 손가감(孫嘉淦) 사건이 터지면서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손가감은 강희 52년(1713)에 과거를 급제하여 출사한 후 옹정, 건륭 3조에 걸쳐 요직을 역임하고 직언을 서슴치 않는 신하로 유명하다. 당시 공부상서 손가감이 썼다는 상소문 초고가 전국에 은밀히 퍼진 일이 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건륭제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른바 '다섯 가지 의혹과 열 가지 큰 잘못'이었다. 건륭제 치부를 적나라하게 나열한 글이라 당시 모두 소각되어 오늘날 그것의 전체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단편적인 자료에 의하면 건륭 12년(1747) 금천에서 사라분(莎羅奔)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는데도 건륭제가 대승을 거두었다고 허풍을 떨었고, 천섬총독 장광사(張廣泗)의 공적을 가로채고 죽였으며, 남방을 순행할 때 막대한 재원을 낭비하고 현지 백성들의 생업을 파괴했다는 비난이었다.
사실 틀린 주장은 아니었다. 금천 반란은 건륭 41년(1776)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진압했는데, 인구가 10만 명도 안되는 금천을 진압하는데[13] 60만이나 되는 대군을 투입하여 사상자가 수만 명에 달하고 은자 7천만 냥을 전비로 낭비한 까닭에[14] 백성들의 불만이 없지 않았다. 거창하게 검집에서 천하명검을 뽑아 닭 한 마리 잡은 꼴이었다.[15] 건륭 연간의 명장 장광사도 금천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지 못했다는 죄로 참수형을 당했다. 건륭제는 재위기간 동안 남방을 여섯 차례 순행했다. 그의 할아버지 강희제도 여섯 차례 순행했는데 순행목적은 주로 치수 공사를 독려하고 백성들의 생업을 보살피기 위한 것이었다. 순행할 때마다 황제의 행차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소박했으며 수행원도 꼭 필요한 인원만 수행하게 했다. 또한 강희제는 때에 따라서 미복을 입고 친히 민가에 들어가 그들의 어려운 생활을 파악하고 은혜를 베풀었다. 하지만 건륭제는 민생을 돌보는 남방순행이 아니라 황제의 위세를 마음껏 과시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래서 건륭제가 순행을 나설 때면 호화찬란한 행차가 10여 리에 이어졌으며 수행원이 무려 1만여 명이나 동원했다. 황제가 지나가는 도시마다 황제를 위한 행궁이 새로 들어서고 강을 건널 때는 수십척의 거대한 누선들이 강물을 메웠다. 지방관리들은 황제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각종 특산물을 바치고 광대와 무희를 동원하여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물론 이런 행사는 모두 현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했던가. 건륭 15년(1750)에 이르러서는 건륭제를 비난한 요서가 중원지방 17개 성에 퍼졌다. 지방관리 유생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상인, 승려들도 그것을 몰래 베껴 읽어 보았다. 같은 해 6월 중원 지방에서 멀리 떨어진 서남 지방 귀주에서 현지관리에게 발각되었다. 운귀총독 석색은 즉시 밀절로 건륭제에게 보고했지만, 건륭제는 총신 손가감이 그것을 작성할 리 없다고 확신했다. 건륭제가 손가감을 의심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손가감은 건륭제가 즉의했을 때 <삼습일폐서三習一弊書>라는 상소문을 올려 건륭제가 폐단을 바로잡고 법률을 개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 수리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능력 있고 청렴한 관리의 표본이었다. 요서 사건이 터지기 직전에는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라 건륭제에게 몇 차례 사직을 청하였지만, 건륭제는 그의 재능과 인품을 높이 평가하여 계속 중용했다. 건륭제는 손가감이 워낙 강직하고 청렴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어떤 자가 그의 명의를 도용하여 가짜 상소문을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 사건을 '위손가감주고안(僞孫嘉淦奏稿案)'이라고 부르는데 '가짜 손가감이 꾸민 상소문 사건'이라는 뜻이다.
손가감은 누명을 벗었지만 이 사건이 한창 파문을 일으길 때 사망했으므로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았던 듯하다. 건륭제는 이 요서가 자신의 과오를 지적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비밀리에 범인을 색출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연루자가 늘어나자 사건을 감출 수 없었다. 게다가 전국에 걸쳐 고발과 생포 열풍이 불었기에 요서를 몰래 읽어보거나 유통시킨 자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체포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비화되었다. 관리들은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허위로 보고하기 일쑤였고 백성들은 원한을 갚는 수단으로 악용하다보니 도대체 진범이 누구인지 알수 없었다. 급기야는 사법체계가 혼란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건륭제는 사태를 진정시켜야했고, 평지풍파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건륭 17년(1752) 12월 강서순무 악용안(鄂容安, 1714-1755)이 천송 노로생(盧魯生)이 진범이라고 상주했다. 다음해 2월 노로생은 북경으로 끌려와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요서를 베껴서 읽어본 일반 백성들은 사면했지만 지방관리들은 엄벌에 처했다.
건륭제는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청나라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는 한족 유생과 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배반하는 관리들이 아직도 전국에 산재했다고 생각했다. 또 재위 초기에 인의와 관용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언로를 열어주었기 때문에 감히 신성불가침의 황제와 조정을 비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도 생각했다.

"그 간악한 무리가 유언비어를 전파하고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악행이 풍습과 민심에 미치는 영향이 심대하므로 어쩔 수 없이 무력으로 바로 잡겠다."

앞으로 청나라와 자신의 통치에 조금이라도 불만을 품은 자들에게는 철권을 휘두르겠다는 엄포였다. 이때부터 건륭제는 유생들이 지은 시문이나 저서에 극도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건륭 18년(1753) 호남순무 범시수(范時綬)가 무과시험을 주관할 때 무주부의 생원 유진우(劉震宇)가 찾아왔다. 그는 한평생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한 70세 노인이었다. 치국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좌리만세신평신책佐理萬世治平新策>이라는 책을 범시수에게 주고 황제에게 바치기를 간청했다. 행여나 황제가 그것을 읽고 감동하면 자신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다. 범시수는 그것을 읽고 깜짝 놀랐다. 내용은 엉터리였을 뿐만 아니라 한족의 전통복장이 만주족 복장으로 바뀐 일도 감히 언급했기 때문이다. 사실 유진우는 황제의 성은을 찬양했을 뿐 청조를 비방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다만 유진우가 인용한 경전의 주석이 일부 틀리고 신분에 맞지 않는 표현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범시수는 오히려 이를 침소붕대하여 광탄으로 결론지었으며, 미치고 거짓을 늘어놓았다고 하고는 즉시 유진우를 잡아 문초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자신에게 불똥이 튈 게 분명했다. 나중에 건륭제에게 전말을 보고하자 그의 비답은 이러했다.

"그자는 학당의 생원이고 더욱이 무지몽매한 백성이 아닌 데도 감히 거짓을 늘어놓고 국가의 제도를 헐뜯었다. 마음속으로 패악하고 불순한 생각을 품고 있음이 분명하다. 당장 참수형에 처하고 서적과 판본은 모조리 불태워라."

유진우가 그토록 바라던 출사의 길이 글 하나 때문에 황천길로 바뀐 것이다.
강희제, 옹정제 시기에는 그래도 명사집략 사건이나 대명세 사건[16]처럼 청조의 지배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거나, 증정 사건처럼 분명한 반란 모의를 중심으로 탄압했기에 어느 정도 수긍 가능한 측면이 있었지만 건륭제 시기에는 그냥 일반인들이 실수로 썼거나 별다른 의미가 없이 쓴 단어 하나하나까지 확대해석해 트집을 잡으며 닥치는 대로 탄압하니 그 사례가 너무 많아 일일이 다 못 적을 지경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신건현 출신 호중조(胡中藻)라는, 내각학사를 지낸 조정 중신이자 문인이 건륭 20년(1755)에 시집 <견마생시초堅磨生詩鈔>를 내놓았는데[17], 그중 일파심장논탁청(一把心腸論濁淸, 한 줌 마음으로 흐림과 맑음을 논하고 싶구나)이라는 시문에서 '흐리고 맑음'이라는 뜻으로 탁청(濁淸)이란 문구를 쓴 것이 문제가 되었다. 본래 한시에서 사성법과 각운법에 맞추기 위해 청탁을 탁청으로 바꾸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지극히 일반적인 문법이라 할 수 있지만, 감히 국호 앞에 탁이라는 부정적 글자를 썼다는 이유로 반역혐의로 처형했다.[18] 강희자전의 문자가 너무 어렵다고 한탄했다는 이유로 반역죄에 걸려 목이 날아간 사람도 있었으며, 그보다 더 막장인 사례로는 '''순치제''' 시기 시인이 쓴 구절에 순치제보다 후대인 건륭제의 시호와 어명을 피휘하지 않았다고 그 시인의 '''현손'''이 끌려와 고문도 겪었다.[19]
거인 왕석후(王錫侯, 1713-1777)는 고향 신창현에서 17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건륭 40년(1775)에 <자관字貫>이라는 자전을 완성했다. 그가 이것을 집필한 목적은 강희제의 칙명으로 편찬한 강희자전에서 수록한 글자가 4만 7천여 자나 되었지만 글자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나열하지 않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이를테면 자관에서는 나무 목자를 풀이한 뒤 목판, 목재, 벌목 등 목자와 관련이 있는 단어를 설명했다. 또 전서를 천문, 지리, 인사, 물류 등 네가지 부류로 나누고 40권으로 편찬했는데, 강희자전보다 내용이 일목요연하고 간단한 장점이 있었다. 그런데 반평생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이 비수가 되어 자신을 찌를지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왕롱남이라는 고향 사람이 왕석후가 감히 강희자전을 비평하고 멋대로 고쳐 <자관>을 출간했다고 강서순무 해성에게 고발했다. 해성은 즉시 건륭제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고 증거물로 자관을 바쳤다. 건륭제는 그것의 서문 뒤에 수록한 범례를 보고 분노했다. 강희제, 옹정제의 시호와 자신의 이름에 들어간 글자를 다른 글자들과 나란히 나열했기 때문이었다. 봉건왕조 시대에는 군주의 시호나 이름에 들어간 글자는 절대 쓸 수 없었고, 이를 어기면 큰 불경이었다. 건륭제의 이름은 홍력(弘曆)이다. 홍력이 황제로 등극한 후에는 이미 홍(弘) 자와 력(曆) 자를 이름으로 쓴 사람은 반드시 개명해야 했다. 건륭제는 왕석후를 대역죄로 다스리게 했다. 왕석후는 참수형을 당하고 자손 6명도 사형에 처해졌으며 친족 21명은 연좌제에 걸려 처벌을 받았다. 부녀자와 미성년자들은 모두 노예로 전락했다. 한자를 익히는 자들에게 도움을 줄 목적으로 펴낸 책 때문에 왕석후 집안은 멸족을 당한 것이다.
병다진 사람인 거인 서술기(徐述夔, 1701~1763)가 병으로 사망했다. 아들 서회조는 부친이 남긴 시를 정리하여 <일주루시집一柱樓詩集>을 출간했다. 아버지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기리고 입신양명하지 못한 울분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서회조도 건륭 42년(1777)에 병사했다. 그런데 서씨 일가가 거주하는 병다진에는 남생 채가수라는 자가 있었다. 서씨와 채씨는 병다진의 토호였는데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채가수와 서회조의 아들 서석전이 토지를 거래하는 일로 심하게 다투었다. 건륭 43년(1778) 채가수는 서석전이 자신의 요구를 끝내 거절하자 <일주루시집>이 청조를 비방한 내용으로 가득하다고 관가에 고발했다. 서석전의 할아버지가 남긴 시의 불순한 내용을 들추어내어 서씨 집안을 멸족시킬 의도였다.
<일주루시집>에는 이런 시구가 있었다. "맑은 바람은 글자를 모르는데 어찌 책장을 어지럽히는가."(淸風不識字 何故亂翻書)[20] "술을 마시면서 영명한 천자를 홀연히 만나니 잠시 술병을 옆자리에 치운다네."(舉杯忽見明天子且把壺兒抛邊)[21] "내일 아침 새처럼 휠휠 날아 단번에 천궁으로 가고 싶다네."(明朝期振翮 一举去清都)[22] 아직도 이런 반역의 시는 언제든 나타날 수 있고 청 왕조의 정통성에 심각한 훼손을 끼칠 수 있다고 보았다. 건륭제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미 사망한 서술기와 서회조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 부관참시하고 수급을 저자거리에 내걸었다. 서술기의 두 손자는 할아버지의 저작과 유고를 모두 관가에 바치고 자수했는데도 그것을 은닉한 죄로 참수형을 당했다. 병다진에서 대대로 떵떵거리며 살아온 서씨 일가 가운데 16세 이상의 남자는 모조리 살해당하고 아녀자들은 모두 노예로 전락했다. 극적으로 살아 남은 자들은 성씨를 고치고 고향을 떠나 숨어 살아야 했다. 서술기의 두 제자 서수발(徐首髮)과 심성탁(沈成濯)의 이름을 합하면 수발성탁(首髮成濯)이 된다. 머리카락을 뜻하는 터럭 발(髮) 자와 필 발(發) 자는 발음이 같으므로 수발성탁은 '머리카락을 물로 씻어 깨끗해졌다.'는 뜻이라 해석했다. 건륭제는 두 사람의 이름이 청조의 변발 제도를 은근히 비난하는 의미를 담았다 하여 대역죄로 죽였다. 말도 안 되는 억지주장이었지만 누구도 감히 서슬 퍼런 황제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건륭 48년(1783) 이일(李一)이라는 자가 지은 호도사(糊塗詞)에 "하늘도 땅도 흐리멍텅하고 제왕과 장수, 재상도 흐리멍텅 하지 않은 자가 없다."(天糊涂, 地糊涂, 帝王帥相, 無非糊涂)는 구절이 있었는데, 등봉현 사람 교정영이 고발했다. 그런데 그의 시고에도 "천추의 세월동안 신하의 마음은 오직 한 왕조의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이네."(千秋臣子心, 一朝日月天)라는 시구가 있었다. 일(日)자와 월(月)자를 합하면 명나라를 뜻하는 명(明)자가 아닌가 하여 이일과 교정영 두 사람 모두 모반죄로 능지처참을 당했다. 건륭 연간에 호, 융, 이, 노, 등 오랑캐를 뜻하는 글자를 무심코 썼다가 문자옥에 연루되어 죽은 자들이 부지기수 였다. 심지어 탁장령이 펴낸 회명시집의 회명(懷鳴)의 명(鳴)자가 명(明)자와 발음이 같으므로 망한 명나라를 그리워했다는 죄로 멸문의 화를 당했다.
산서성 생원 왕이양(王爾揚)은 남의 부친의 묘지명을 지을 때 황고(皇考)라는 두 글자를 썼다. 원래 이는 돌아가신 부친을 남 앞에서 높여 부르는 말인데, 선고(先考)라고도 한다. 예법에 맞았으므로 남의 선친을 황고라고 표현해도 문제될 게 없었지만, 감히 임금 황(皇) 자를 썼다고 해서 처형을 당했다. 강소성 생원 위옥진은 선친의 행적을 기록한 글에서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사면할 사를 썼다고 해서 곤장 3백 대를 맞고 3년 동안 복역했다. 호북성 생원 정명인은 남에게 생일 축하의 글을 지어주었다. 글 가운데 '창대업'이라는 세 글자 때문에 능지처참을 당했다. 직예성 고읍현 사람 지천표(智天豹)는 병을 치료하는 의원이었는데, 청나라 황실에 잘 보여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대청천정운수大淸天定運數>라는 청나라의 만년력을 편찬했다. "주나라 천하는 8백여 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오늘날 대청의 국운은 주나라보다 훨씬 오래 갈 것이다." 청나라 황실이 영원히 번영을 누리리란 아부였다. 그런데 이 책에서 건륭 연간이 57년(1792)에 끝난다고 기록했다. 지천표는 건륭제가 빨리 죽어야 한다고 저주했다는 대역죄로 극형에 처해졌다.
이런 식으로 친청파 지식인들의 청이나 건륭제를 칭송하는 글에도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서 처형하는가 하면[23] 명백한 미치광이의 헛소리에까지 '미쳤는데도 이렇게 불손한 소리를 지껄이니, 정신이 멀쩡할 때라면 어떤 발칙할 마음을 품을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처형하였다. 이쯤 되면 아예 찬성이든 비판이든 생각 자체를 하지 말고 고분고분 황제에 순종하기만 하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막장행태의 예를 좀더 들어보자. 강소성 사람 심덕잠(沈德潛, 1673-1769)은 건륭제의 조정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원로대신이자, 궁정 문인으로 건륭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강남 출신 문인의 수장'이라 불릴 정도로 문필로 덕망이 높았기 때문에, 건륭제가 강남 순행을 떠났을 때 심덕잠을 네 번이나 불러 만났을 정도였다. 심덕잠은 무려 67세 고령에 진사로 급제하여 인생의 마지막 30년 동안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건륭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궁궐의 후원까지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시인' 건륭의 자작시를 수정해주고, 심지어 건륭제의 명의로 시를 대필해주기도 했다.
늘그막에 복이 넘쳐나자 심덕잠은 그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자신의 시집에 황제를 대신해 지었던 시는 물론 수정해준 시까지 모두 수록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실이 심덕잠 사후 10년 뒤에 밝혀지자, 자존심과 허영심이 남달리 강했던 '시인' 건륭제는 격분했다. 건륭제는 우선 심덕잠의 유족들에게 그의 작품들을 다시 읽고 싶으니 어서 집에 남아 있는 시들을 보내달라고 명했다.
건륭제는 눈에 불을 켜고 심덕잠의 시집을 읽은 끝에 <검은 모란을 읊다>라는 시에서 "바르지 않은 색이 붉은 색朱을 빼앗고, 다른 종자가 또 왕이라고 칭한다." 하는 구절을 찾아냈다. 붉을 주()자는 명나라의 황성이었으므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란 식으로 반역죄를 물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심덕잠은 무덤이 파헤쳐져 해골의 목이 베어져서 효수되고, 하사된 모든 관직과 재산이 박탈되었으며 무덤의 비문까지도 모두 깎아서 지워버렸다.
이런 사건은 그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북경 고궁박물원 문헌관에서 엮어낸 <청대문자옥당>에 의하면, 건륭제 재위기간 중 비교적 큰 문자옥 사건만도 64건이 넘었다. 그 중에서 47건은 죄인이 극형을 받았다. 산 자는 참수당하고, 죽은 자는 부관참시당했으며, 일가친족 중 15세가 넘는 남자들까지 모두 연좌되어 목이 달아났다.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고 생트집을 잡아 무고한 이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문자옥이 중국에서 고삐 풀린 말처럼 미쳐 날뛰었다.
그래서 문자옥 때문에 중국의 선비들은 공포에 질려 세상 일에서 관심을 떼고 고서만 죽어라고 파고들어야 했다. 이런 이유로 건륭제 후기부터 가경제 시대까지 고증학이 중국에서 대단히 성행했다. 선비들은 아주 오래 전의 고서에서 문장 한 구절, 글자 한 글자를 찾아낸 다음, 역시 오래 된 고서들을 두루 참고해 대단히 치밀하고 꼼꼼하게 구절과 글자의 음과 뜻을 점검하는 일로 소일했다.
고증학이 유행하다 보니 이런 일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어느 날 절강순무 완원의 제자 한 명이 북경으로 항했다. 그러다 북경의 교외인 통주에서 간식거리로 떡을 하나 샀는데, 떡 뒷면에 마치 글자 같은 무늬가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그 제자는 그 떡을 종이에 탁본해 완원에게 부치면서 이렇게 썼다.

"고서의 명문이니 부디 스승님께서 고증을 해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떡 탁본 하나를 놓고 절강성 제일의 선비 여러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난상토론이 벌어지는 촌극 끝에, 결국 절강성 순무 완원이 총대를 메고 결론을 내려야 했다. 완원은 제자가 보내준 탁본이 <선화국보>라는 책에 등장했다고 아주 자신 있는 어조의 답장을 보냈다. 답장을 받은 제자로서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었다. 이처럼 현실과는 동떨어진 글장난이 당시의 중국에서는 중요한 학문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24]
강희제와 옹정제 시기의 문자옥은 일부 억지사례에도 불구하고 실제 반청복명사상에 기반한 사건을 청황조의 존립과 정통성 확보를 위해 당연히 처벌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건륭제 시기에는 그냥 황권 강화를 이유로 조금만 빌미가 보여도 그걸 트집잡아 다 죽이는 탄압이었다는 것. 건륭제의 피해자들은 반청복명과는 거리가 먼 일반 순수학자나 시인이 대다수였다. 애시당초 건륭 연간은 명이 멸망하고 1세기나 지난 뒤라 반청복명 세력이 대규모로 있기도 힘든 때였다. 그냥 정권의 무자비하기 짝이 없는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라고 보아야 더 합당할 것이다.
특히 사고전서 편찬 때문에 건륭제 시기 문자의 옥은 극에 달했다. 건륭제는 사고전서 편찬을 위해 전국의 모든 서책과 기록을 긁어모으라 지시하고 그 가운데 '''청조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이거나 불리한 기록은 모조리 불태웠다.''' 단순히 당대의 서책와 기록만이 아니라 명 말엽의 기록들도 그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명 말기 장수들이 여진족과 후금/청을 상대로 하면서 이민족/오랑캐/반란군이라 쓴 표현이 있으면 모조리 없애 버렸다. 명 말기 명의 장수가 명의 황제에게 하는 보고이니 당연히 청군을 반란군이라 표현했는데 그걸 없애버렸다. 간혹 당대의 기록에 그런 말이 보이면 즉시 저자는 끌려가서 숙청...
결국 탄압이 이처럼 가혹하고 온갖 트집을 잡아대니 청나라에서 정상적인 문학 창작 활동이나 학문 연구가 발전할 리가 없었다. 당대 지식인층은 아예 교우 목적의 단순한 서신조차 보내기를 꺼렸고, 설사 서신을 주고받더라도 읽고 나서 곧바로 불태우는 지경이었다. 서신의 내용이 정말로 불순해서가 아니라 '''어디서 어느 글자 갖고 어떻게 트집 잡힐지 몰라서였다'''. 실제로 청나라에 갔던 조선 사신들이 당대의 문인들과 교류할 때 필담으로 교류를 했는데, 이들도 대화가 끝나고 곧장 쓴 종이를 태워버렸다고 한다.

5. 종식


1782년, 하남에서 축만청이라는 백성이 자신의 사당에 참람한 내용의 문구를 적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명백한 무고이긴 했지만 황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지방관은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비슷한 상황에서 기존에도 이렇게 했었고 그 때마다 황제는 포상이나 칭찬을 했으니 지극히 당연한 처사였다. 하지만 건륭제는 '척 봐도 무고 사건이다. 백성이 무식한 부분은 있지만 그걸 대역죄라고까지 할 필요는 없다. 이런 식으로 트집을 잡으면 천하에 피해갈 자가 있겠는가? 이런 간사한 고발로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고 그릇된 풍기가 형성되게 하지 말라.'고 해당 지방관을 훈계하였다. 이때부터 문자의 옥이 슬슬 뜸해졌다. 황제가 온건 노선으로 전향했다는 신호인 것이다.
그리고 1785년에 건륭제는 한 사건을 심사하면서 '전겸익이나 여유량 같은 불순분자들은 엄하게 처벌하는 게 당연하지만, 고의가 없이 문장에서 조금 실수한 정도라면 짐도 굳이 추궁할 마음이 없다.'고 지시를 내렸다. 그 이후, 드디어 1790년을 마지막으로 건륭제 치세에서 더 이상 문자의 옥이 없었다.
이는 건륭제가 슬슬 나이를 먹어 기력이 쇠해지면서 문자의 옥에 신경쓸 여유가 없어서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소기의 목적인 반청사상 제거도 슬슬 달성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그리고 가경제 시절부터 대대적으로 전대의 잘못 처벌한 사건들을 대대적으로 바로잡고 더이상 일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사실상 종식된 것이다.

6. 결과


강희제, 옹정제 시기의 대규모 탄압으로 화남 지방에 기반한 반청복명세력의 사상적 기반은 거의 뿌리째 뽑혔다. 그리고 뒤이은 건륭제의 탄압으로 얼마 안 남은 복명사상가들과 수많은 저작저술들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문자의 옥은 한족과 만주족을 안 가렸기에[25] 서로 황제나 반대파에게 무슨 트집을 잡혀 역적으로 몰릴 수 있다 보니 무조건 몸을 숙이고 조심하면서 황제의 독재권력은 매우 막강해졌다.
그러나 '한족들의 마음을 굴종시키겠다.'는 청조의 의지는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제 아무리 많은 사상자들을 탄압하고 숙청하고 서책을 불태워도 한족들은 마음 속으로 멸만흥한의 꿈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겉으로만 청조에 충성했다.[26] 이는 건륭제 말기 백련교도의 난을 시작으로 태평천국 운동, 신해혁명으로 이어졌고, 청이 멸망하면서 당연히 상당수의 만주족이 보복으로 갈려나갔다.
한편, 문자의 옥은 명대 중기 이후 나타난 자유로운 학문 연구 환경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당연하겠지만 자유로이 연구하고 토론하면 꼬투리 잡아 죽일텐데 누가 연구에 나설까? 그 결과, 청대의 지식인들은 트집잡힐 염려가 거의 없는 머나먼 과거의 기록이나 유물이 대상인 고증학에 빠져들었다. 당시 청나라 학문의 막장화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있다. 흔히 사문난적 운운하지만, 조선의 학문적 분위기[27]는 최소한 청나라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심지어 이후 숙종-영조 시절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세계 역대 왕조들 어디를 둘러봐도 특정 계층에 대한 탄압이나 숙청을 심하게 한 사례야 많지만 청대 문자의 옥처럼 자국의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통째로 초토화시킨 검열 사례는 없었다. 심지어 바다 건너 일본 에도 막부카쿠레키리시탄에 대한 종교적 탄압이나 천황 추종 사상에 대한 탄압같은 것은 종종 있었지만 동인도 회사 등을 통한 서양 문물 교류를 끊임없이 가졌고, 조선통신사 등을 통해 조선의 문물도 받아들였다. 이는 장기적으로 메이지 유신청일전쟁을 통해 일본이 청나라의 국력을 단순간에 꺾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아시아가 유럽에 뒤쳐진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로 이 사건을 꼽는 학자들도 있다.[28] 현대인들이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중세시기 서양은 종교의 영향 때문에 학문을 탄압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반대였다. 식자층은 교회와 권력에 존경을 받았으며, 기독교와 전혀 관련없는 라틴어그리스어 고문 연구가 활발했었고, 르네상스 시대에 동방으로부터 희귀사본이 전수되어서 이전의 연구보다 활성화된 것일 뿐이다. 교회의 영향을 받은 수도사나 스콜라 철학자들도 학문의 자유를 누렸다.
생각이 마음에 안든다고 죽이던 종교 전쟁의 시기에서도 한참 벗어나[29] 상당히 높은 학문적 자유를 누렸다. 보수 교회 앞에서 무신론을 외쳐도 별 일 없는 사회의 학자들과, 증조할아버지가 쓴 편지에 글자 하나 잘못 썼다고 후손이 몰살당할 수 있는 사회. 인구나 경제력은 비슷했다고 해도 어느 쪽이 더 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지는 자명하다.[30]
어떤 의미로는 먼 옛날 진나라 시절에 벌어진 '''분서갱유'''에 뒤이은, 중국 정부의 주도로 행해진 반달리즘의 계보를 잇는다고 해도 좋을 사건. 그리고 몇백 년 뒤에 '''또다시 이 사태는 반복된다.''' 거기서 몇십 년 뒤인 21세기에도 시진핑의 지휘 하에 진행 중이다. 이를 보면 역사는 정말 신기하다고 할 수 있는데, 중국 대륙에 자리잡은 국가는 언제나 민족 문제로 크고 작은 탄압을 벌여왔고 그중에선 동시대 다른 지구촌에선 볼 수 없는 세계구급 스케일의 탄압도 주기적으로 나왔다는 것. 그 역사를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과거에는 중국의 문화학문적 쇠퇴가 동양 세계 전체의 쇠퇴를 불러왔다면 현대사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대한민국은 중국의 공산주의 삽질로 반사이득을 보아 경제를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었다. 물론 그것만이 대한민국이 발전한 이유는 아니지만, 적어도 옛 상국이었던 중국을 (좋은 의미로) 능가하는 국가가 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7. 기타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오사카 전투의 명목상의 발단은 호고지에 걸릴 종에 새긴 문구의 내용이었기 때문[31] 물론 말이 이렇다는 거고 실제로는 그냥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문제가 된 문구는 고쳐지지 않았다(...).

8. 같이보기


[1] 다만, 청의 문화 강요 정책은 기본적으로 복식이나 머리모양 등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풍속' 부분에 집중되고 일반적인 생산 기반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며 학살 역시 양주 등 청의 지배에 대한 저항의 구심점이던 특정 도시를 대상으로 그나마 제한적으로 행해진 데 비해 칭기즈 칸 치세의 몽골 제국이 시행하려던 문화 강요는 농경지와 도시를 파괴하고 화북 전체를 유목지화한다거나, 특정 민족집단 전체를 학살하는 등 제한 없는 대규모로 시행되는 것을 전제로 했음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즉, 몽골 제국이 시행하려던 탄압정책은 애초에 시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기에 시행될 수 없었던 측면이 강했던 데 비해, 청의 탄압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하여 2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중국 전체에 대한 지배력의 기반이 되어주었다는 것.[2] 김용의 소설인 서검은구록, 녹정기 등이 이 시대를 잘 반영하였다.[3] 피휘 항목 참조, 현대 한국에서도 부모님 이름을 그냥 부르지 않고 무슨 자, 무슨 무슨 자 하면서 높이는 버릇 등에도 남아있다. 유교 사회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예의이며 과거에는 잘못 말한 한두 글자 때문에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이름으로 왕과 황제를 불러도 되는 건 오로지 그 왕조가 이미 망했을 때 뿐이다. 청나라가 한족 왕조 못지않게 피휘 문제에 민감했다는 건 그만큼 청나라에서 만주족 고유의 전통과 몽골족으로부터 유입된 티베트 불교 못지않게 한족으로부터 유입된 유교 또한 매우 중시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유교를 천대한 몽골족의 원나라가 기록 문화에 관심이 적었던 관계로 피휘 문제에 둔감하여 한족 왕조나 청나라와 달리 문자의 옥이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다.[4] 더욱이 이 당시만 해도 남명도 완전히 죽지는 않았으며 정씨 왕국도 있었다. 즉 시기상 민감한 사안일 수 밖에 없었다.[5] 물론 모두 해적판이다. 정식 번역판은 김영사에서 2020년 이후 출간 예정이다.[6] 이것도 명나라 연호를 안 쓴 것도 아니고 일본 연호와 같이 썼는데, 일본 연호를 크게 쓰고 중국 연호를 작게 썼음을 문제로 삼았다.[7] 또 거기에 이른바 연호(年號)를 크게 쓰고 두 줄로 쓴 일은 더욱 변명할 것이 못 됩니다. 대개 이 책은 단지 그 나라에서 기록한 것에다 주(註)를 첨가한 것이기 때문에 그 나라에서 참칭(僭稱)한 연호 아래에다 천조와 연호를 두 줄로 주(註)하여 '일본이 참칭한 어느 해가 천조의 건원(建元) 몇 년'이라고 표시한 것이니, 이를테면 '가길(嘉吉) 원년은 즉 정통(正統) 6년이다.' 한 것입니다. 크게 쓴 것은 본기(本紀)이고, 두 줄로 쓴 것은 첨가한 주인데 '즉(卽)'이란 말을 첨가한 것을 보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합니다. 《춘추(春秋)》는 노(魯)나라 역사를 인하여 지은 것이기 때문에 노의 원년(元年)을 크게 쓰고 아래에 두 줄로 '주 평왕(周平王) 몇 년'이라 주하였는데, 역시 이를 가지고 주나라를 높이는 뜻을 의심하겠습니까. 더구나 그 나라 왕(王)과 관백(關白)에 대해 모두 '사(死)'라 썼으니, 존봉(尊奉)하는 자가 과연 그러하겠습니까. (중략) 만약 소방이 일본의 연호를 받들었다면 서문(序文) 끝에 천조의 성화(成化) 기년(紀年)을 썼겠습니까.[8] 정씨 왕국의 건국자인 정성공의 경우 남명의 2대 황제를 옹립하기도 했고 그 황제로부터 주씨 성을 하사받기도 했다. 비록 정성공 사후에는 반청복명 기조는 크게 약화되었지만 명목상으로는 내걸어져 있었다.[9] 유명한 무협작가 김용의 조상이다. 김용(金庸)은 필명이고 본명은 사량용(查良鏞)이다. 김용 본인도 사사정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하긴 했는데 직계는 아니고 김용 직계 조상인 사승(査昇)의 사촌 형이다.[10] 詩云, 邦畿千里, '''維民所止'''. (시경에 이르되 나라의 도읍 사방천리는 '''백성들이 멈추어 사는 곳이니라.''') 상송 현조편에 나온 것으로 사서 중 하나인 대학에서도 재인용해 유명한 문구다.[11] '여사낭'이라고 읽기도 한다.[12] 다만 건륭제 본인에게 자뻑 기질이 있었고 니오후루 허션의 부정부패를 방관했으며 훗날 저지르게 되는 문자의 옥으로 인한 피해자 중에도 부패한 관리보다 억울한 피해자가 훨씬 많았음을 감안하면, 건륭제 초기에 훗날과 같은 심각한 문자의 옥이 없었던 것도 당시의 건륭제가 착했다기보다는 그냥 아버지인 옹정제와 달리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엄격히 다스리는 데 관심이 없어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건륭제가 진정으로 남의 비판을 받아들일 줄 아는 성격이었다면 허션의 부정부패를 방관하지도, 문자의 옥으로 억울한 피해자들을 양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옹정제 때의 문자의 옥 피해자들은 건륭제 때의 문자의 옥 피해자들에 비해 억울한 피해자가 훨씬 적었고 오히려 진짜 자업자득으로 피해를 본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을 복권시킨다는 건 결국 청나라 사회가 부정부패에 관대해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13] 당시 금천의 인구는 7만이었다.[14] 이는 당시 전투의 지휘를 맡은 청나라 장군들이 일부러 더 많은 전비를 챙겨 사복을 채우기 위해 조정에 계속 전비를 더 달라고 요청을 한 탓이었다. 그래서 일부 연구자들은 건륭제 때 벌어진 이러한 부정부패로 인해 청나라에 망조의 기운이 들었다고 보기도 한다.[15] 다만 처음에는 대군을 보내지 않고 소수의 병력으로 정복했으나 금천의 원주민들인 장족과 티베트인들이 청에 적대적이었고 그들이 합심하여 청의 지배를 거부하며 게릴라전으로 저항했기에 이 반란이 무려 30년이나 갔다. 그러다보니 사상자가 많이 나오고 피해도 커서 건륭제도 나중에는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하고 유럽에서 들여온 대포로 무자비한 포격과 초토화 전술을 써서야 금천을 완벽하게 굴복시킬수 있었다. 그나마 장족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저항하여 멸족된 준가르와 달리 청에 항복하고 복속한터라 멸족을 피할수 있었다.[16] 칭제건원에서 보듯 연호의 제정은 대표적인 정통황제의 상징과도 같아서 명나라 참칭황제의 연호를 쓴다는 건 청의 지배를 대놓고 부정하는 일이다. 조선의 성리학자들도 완전히 같은 이유로 영력 연호를 썼다.[17] 여기서 초(鈔)란 한자는 '간추린 문집'이란 뜻이다. 즉 시집의 이름은 '견마생시'인 것이다.[18] 그 외에도 일세일월무(一世日月無, 이 세상에 해와 달이 없다.)라는 시문은 일()과 월()을 합치면 명()이 되므로 명나라가 멸망한 것을 슬퍼한다는 것이란 혐의도 씌워졌다.[19] 다만 이 건은 당대의 관념으로는 시비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청나라 이전에도 후대 제왕의 피휘를 위해 후손이 선대의 글을 고치는 일도 있었기 때문. 그냥 보고 넘어가는 때도 있었지만 피휘를 엄히 지키자면 충분히 따질 수 있었다.[20] 서술기가 독서를 하는데 자꾸 바람이 불어 책장이 넘어가는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건륭제는 청풍불식자(淸風不識字)를 '청나라 사람들은 글자도 모르는 야만족'이라고 비난한 것으로 생각했다.[21] 술을 마시다가 홀연히 영명한 천자를 만나 감읍하여 잠시 술병을 치우고 천자를 배알 한다는 뜻이다. 천자에 대한 일펀 단심을 표현했지만 건륭제는 명천자(明天子)는 명나라 천자이며 호아(壺兒)는 호아(胡兒) 즉 오랑캐와 발음이 같으므로 서술기가 망한 명나라 군주를 흠모하면서 자신을 오랑캐로 비난했다고 분노했다.[22] 사대부들이 속세를 떠나 이상향으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건륭제는 이것을 언젠가는 명조가 부활하여 일거에 청조의 도성을 쓸어버리겠다는 뜻으로 해석했다.[23] 전국시대 상앙도 비슷하게 자신의 신법을 칭송하는 사람까지 처벌하여 아예 평가 자체를 근절시킨 일이 있다.[24] 왕중추 저 <중국사 재발견> 中[25] 이 점에서 문자의 옥은 청나라의 제살 깎아먹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문자의 옥으로 반청 성향 한족들만이 아니라, 청나라의 지배민족이자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큰 원동력인 다른 만주족까지도 대거 희생당했기 때문이다.[26] 이 시기 청나라에 사신으로 온 조선인들의 복색을 보고 한족 지식인들이 '이것이 선왕의 유풍'이라며 탄식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27] 예송논쟁 당시 송시열은 국왕의 면전에서 효종은 적통이 아니라고 했으며, 이익은 대놓고 우왕신씨설을 디스했다. 소위 사문난적 드립 역시 이것으로 제도권의 제재가 가해진 일은 없다.[28] 마르셀 그라네(Marcel Granet) 같은 학자는 아예 정설로 보았다. 그라네 본인은 북경에서 만주족 관료들과도 친분을 쌓았던 사례였음에도 청나라가 멸망하자, 문자의 옥으로 인한 폐해를 저술하는데 아무런 가감을 두지 않았다.[29] 연표를 보지 않으면 30년 전쟁 등이 중세에 있었으리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이미 오르간 건 등을 사용하던 근세 초기에 벌어진 전쟁이다. 오히려 유럽 쪽 수도원들은 내부적으로 중세에 적립한 지식 체계들이 근세의 종교 전쟁 시기에 상당수 훼손되었다고 기억하는 곳이 적지 않다.[30] 물론, 중국에서 쓰는 글자는 한자였기에 이리저리 해석할 여지가 많았다는 데서 차이가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도 킹 제임스 성경편찬 당시 오탈자를 낸(자세한 건 간음할지어다 참조) 식자공에게 내려진 처벌이 300파운드의 벌금이 전부였다. 청과 비교하면 이건 차라리 자비로운 수준이다.(이 당시 300파운드가 현재 6000만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벌금이지만 글자 하나 잘못 넣었다고 이놈의 목을 쳐라로 흘러가는 분위기보다는 낫다.) 게다가 그쪽의 경우, 그 오탈자로 인해서 전 유럽에게 망신을 당했기 때문에 처벌의 필요성도 명확히 있었다.[31] 새겨질 문구는 '國'''家'''安'''康''', 君'''臣豊'''樂 子孫繁昌'로 뜻을 해석하면 '국가는 평안하고 군신은 즐겁고 자손은 번창하라!' 라는 좋은 뜻이 담긴 문구였는데 도쿠가와가 저기 볼트체로 한 한자들을 들어 이에야스의 이름을 쪼개어 넣고 도요토미 성을 거꾸로 넣었다고 주장하며 이는 도쿠가와 가를 저주하고 도요토미 가의 부흥을 기원했다고 해석했다. 일단 이 말은 반은 맞았기는 한게 이걸 새긴 승려는 전자는 부정하고 후자는 인정했기 때문.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억지인 건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