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키 다카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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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농민 출신 정치인.
1949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홋카이도 시베츠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농민으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농민의 처지에 분노해 1971년부터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1987년, 38세의 나이로 홋카이도 농민연맹 청년부 서기장직에 올랐고 일본사회당에서 영입 제의를 받게 된다. 1987년 4월 홋카이도 도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다만 1990년까지 청년부 서기장직은 계속 유임하였다.
이후 도의원을 5번 연임하였다. 1996년 사회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탈당 후 민주당에 입당한다. 그러던 2005년 사사키 히데노리 전 의원[3] 에게서 홋카이도 제6구에 출마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 소솟으로 홋카이도 6구에 출마했다. 선거 결과 가네다 히데유키 자민당 후보에게 불과 2000여표차로 앞서면서 중의원 입성에 성공한다. 2009년에는 민주당 압승 바람을 타고 5만표가 넘는 큰 표차로 자민당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에서 농림수산성 정무관에 임명되었고 간 내각에서 유임되었다. 2012년 노다 요시히코 내각에서 농림수산성 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지지율 대폭락으로 인해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이마즈 히로시 자민당 후보에게 14.0%p라는 큰 표차로 패하고 만다. 2013년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비례대표구 참의원에 출마하지만, 입후보자 20명중 19등(...)이라는 처참한 득표율로 낙선했다.
2014년 총선에서는 다행히 이마즈 의원을 3000여표차로 꺾고 부활에 성공했다. 이마즈 의원은 석패 비례로 부활했다. 2016년 민진당 대표 선거에서 렌호를 지지했고, 렌호가 대표에 당선된 이후 민진당 조직위원장직에 올랐다. 2017년 민진당 대표 선거에서는 에다노 유키오를 지지했다.
민진당과 희망의 당이 합당하려는 시도가 있자 이에 불복해 입헌민주당을 창당했다. 입헌민주당 창당 직후 에다노 유키오 대표에 의해 부대표로 지명되었다. 2017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55% 가량을 얻어, 이전 선거에 비해 매우 여유로운 표차로 4선에 성공했다.[4] 2018년, 입헌민주당 조직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일본 공산당과 협력해 농민 대투쟁을 벌이기도 했고, 사회당 출신이기도 한 만큼 입헌민주당 소속 인물 중에서도 진보 성향이 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계파로는 간 나오토 등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기도 하는 등 중도적인 색체를 보이기도 한다. 계파적으로는 간 그룹(나라의 모습 연구회)과 생추어리에 소속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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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농민 출신 정치인.
2. 생애
1949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홋카이도 시베츠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농민으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농민의 처지에 분노해 1971년부터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1987년, 38세의 나이로 홋카이도 농민연맹 청년부 서기장직에 올랐고 일본사회당에서 영입 제의를 받게 된다. 1987년 4월 홋카이도 도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다만 1990년까지 청년부 서기장직은 계속 유임하였다.
이후 도의원을 5번 연임하였다. 1996년 사회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탈당 후 민주당에 입당한다. 그러던 2005년 사사키 히데노리 전 의원[3] 에게서 홋카이도 제6구에 출마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 소솟으로 홋카이도 6구에 출마했다. 선거 결과 가네다 히데유키 자민당 후보에게 불과 2000여표차로 앞서면서 중의원 입성에 성공한다. 2009년에는 민주당 압승 바람을 타고 5만표가 넘는 큰 표차로 자민당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에서 농림수산성 정무관에 임명되었고 간 내각에서 유임되었다. 2012년 노다 요시히코 내각에서 농림수산성 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지지율 대폭락으로 인해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이마즈 히로시 자민당 후보에게 14.0%p라는 큰 표차로 패하고 만다. 2013년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비례대표구 참의원에 출마하지만, 입후보자 20명중 19등(...)이라는 처참한 득표율로 낙선했다.
2014년 총선에서는 다행히 이마즈 의원을 3000여표차로 꺾고 부활에 성공했다. 이마즈 의원은 석패 비례로 부활했다. 2016년 민진당 대표 선거에서 렌호를 지지했고, 렌호가 대표에 당선된 이후 민진당 조직위원장직에 올랐다. 2017년 민진당 대표 선거에서는 에다노 유키오를 지지했다.
민진당과 희망의 당이 합당하려는 시도가 있자 이에 불복해 입헌민주당을 창당했다. 입헌민주당 창당 직후 에다노 유키오 대표에 의해 부대표로 지명되었다. 2017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55% 가량을 얻어, 이전 선거에 비해 매우 여유로운 표차로 4선에 성공했다.[4] 2018년, 입헌민주당 조직위원장에 임명되었다.
3. 정치 성향
젊은 시절에는 일본 공산당과 협력해 농민 대투쟁을 벌이기도 했고, 사회당 출신이기도 한 만큼 입헌민주당 소속 인물 중에서도 진보 성향이 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계파로는 간 나오토 등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기도 하는 등 중도적인 색체를 보이기도 한다. 계파적으로는 간 그룹(나라의 모습 연구회)과 생추어리에 소속되어있다.
4. 논란
- 2005년 그의 선거 캠프 관리자중 한명이 선거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미성년자에게 선거 유세를 시키고 보수를 줬다는 혐의였는데, 사사키 다카히로 의원 본인이 저지른 범죄는 아니라 정치 커리어에 큰 타격은 없었다고 한다.
5. 소속 정당
6. 여담
- 취미는 일본식 춤인 일무(日舞)라고 한다.
- 자식 3명이 모두 아들인 아들 부자다.
- 존경하는 인물은 작가 다케쿠마 노부타카(竹熊宣孝)와 사학자 기무라 쇼자부로(木村尚三郎)를 꼽았다.[5] .
7. 둘러보기
[1] 재학 인원수가 적어 결국 2008년 폐교되었고, 2011년 철거되어 현재는 없는 학교다.[2] 집안 사정이 어려워 대학 등록금을 낼 형편이 안돼서 고등학교 교육만 받고 바로 농민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최종 학력은 고졸이다.[3] 성은 같지만 친족은 아니다.[4] 그도 그럴것이 박빙으로 이겼던 2005년과 2014년 총선 당시에는 공산당 후보가 8%~10% 가량을 들고갔던 반면, 2017년 총선 때에는 야권 단일화가 잘되어 자민당 후보와 1:1 매치로 붙었다.[5] 특이하게도 사사키 의원은 진보 쪽에 속하는데, 기무라 쇼자부로는 정치적으로는 온건보수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