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안나

 



'''멕시코 제8대 대통령
Santa Anna'''
[image]
'''임기'''
1833년 5월 17일 ~ 1833년 7월 4일
'''국적'''
멕시코
'''출생일'''
1794년 2월 21일
'''출생지'''
누에바에스파냐 베라크루스 할라파
'''사망일'''
1876년 6월 21일
'''사망지'''
멕시코시티
안토니오 로페스 데산타 안나[1]
Antonio López de Santa Anna
멕시코의 정치가이며 대통령, 장군. 생몰연도 1794~1876.
1. 성장기
2. 군 생활
3. 쿠데타의 시대
4. 권력의 정점에서
5. 텍사스 혁명
6. 구원, 독재, 그리고 망명
8. 말년
9. 평가
10. 기타
11. 개인생활


1. 성장기


산타 안나는 아직 멕시코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시절인 1794년 2월 21일, 누에바에스파냐(Nueva España)의 베라크루스(Veracruz) 할랄파(Xalapa)에서 출생했다. 산타 안나의 부모는 스페인 정착민으로 크리오요 (Criollo) 신분이었다. 프랑스어로 크레올이라고 불리는 크리오요는 순수한 스페인인으로, 본토가 아닌 식민지 출신 스페인인들을 칭하는 용어다. 당연히 식민지에서는 귀족 신분이며, 가족이 부유했기 때문에 산타 안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6세가 되자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간부 후보생으로 군대에 입대했다.

2. 군 생활


미겔 이달고 이코스티야(Miguel Hidalgo y Costilla) 신부는 1810년에 멕시코 독립 운동을 일으켰고, 이 때 산타 안나는 식민지 스페인군에 가담해 독립운동을 진압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다음해인 1811년에는 왼쪽 팔(혹은 손)에 화살을 맞고 부상을 입었고, 1813년에는 텍사스에 종군했다. 산타 안나는 고속 진급하여 1812년 2월에는 소위, 그 해 말에는 중위로 진급했다.
멕시코 독립전쟁이 팽팽한 대치 상태였던 때에는 베라크루스 근처에 유민들을 위한 마을을 건립하기도 했으며, 도박에 열중하며 시간을 보냈다.
1816년 대위로 진급하여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진압하고, 질서 유지를 위한 군사 작전을 여러 번 실시했다. 1821년에는 해방자(El Libertador) 아구스틴 데이투르비데 (Agustín de Iturbide)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스페인군을 몰아내는 데 가담해 중요한 항구인 베라크루즈에서 스페인군을 격퇴하는 공을 세워 장군의 지위를 획득했다. 산타 안나는 이 지위를 이용해 대농장을 조성하고 도박에 열중했다.

3. 쿠데타의 시대


산타 안나는 인기가 없고, 군대의 지원이 필요했던 이투르비데를 지지하는 데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보통 부유하고 권력이 있는 쪽의 편에 섰지만 지금 당장의 문제는 승리할 법한 쪽에 서는 것이었다. 산타 안나는 편을 바꾸는 데 아무 거리낌도 없었다.
1822년, 그는 이투르비데를 실각시키기 위한 군 지도자들의 캠프에 갔고, 같은 해 12월에는 카사 마타 계획(Plan of Casa Mata) 이라는 멕시코의 군주제 철폐 및 공화국 성립을 골자로 한 계획에 서명하고, 1823년에 황제를 자칭한지 2년이 된 이투르비데가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멕시코 제1연방공화국이 세워지고 같이 계획에 서명했던 과달루페 빅토리아(Guadalupe Victoria)가 초대 대통령으로 등극했다. 이로서 산타 안나는 다른 지도자들에게 지지를 얻게 되었지만, 기회주의 처신으로 편을 바꾼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1824년에는 유카탄 주지사로 임명되었고, 쿠바 침입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그럴만한 지원도, 자금도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828년에는 쿠데타에 가담하여 과달루페 빅토리아를 실각시켰다. 쿠데타에 같이 참여했던 비센테 게레로(Vicente Guerrero)가 대통령의 자리를 쥐었다. 1829년에 스페인이 멕시코를 다시 점령하기 위해 2,600명의 병력을 파견하자 산타 안나가 더 적은 병력을 동원해 스페인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산타 안나는 멕시코 대중에게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별명인 '서쪽의 나폴레옹'이 생긴 것도 이 때 즈음이다.
1829년 12월, 또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부통령인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Anastasio Bustamante)가 게레로 대통령을 사형시키고 대통령으로 등극했다. 1832년, 이에 반발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군은 격퇴되었으나, 산타 안나는 반란군의 제의를 받아 반란군에 가담했고, 2차례의 전투가 더 치뤄진 후 협정이 체결되어 부스타만테는 추방되고 반란군이 대통령으로 세우려했던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 (Manuel Gómez Pedraza)가 대통령이 되었다.

4. 권력의 정점에서


페드라사 대통령은 멕시코 의회를 소집하여, 1833년 1월 산타 안나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부통령으로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Valentín Gómez Farías)를 지명하고 멕시코의 국정운영을 거의 그에게 일임했다. 그러나 파리아스는 자유주의자였고, 당시 멕시코에서 특권계층이었던 가톨릭 교회와 군대의 특권을 줄이는 개혁을 시행하면서, 이에 우려를 느낀 보수주의자들이 산타 안나에게 기대기 시작했다.
산타 안나는 이들의 요청에 따라, 파리아스 부통령의 행정을 비난하며 가톨릭, 중앙집권적인 보수주의 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파리아스 부통령과 그 지지자들은 모두 미국으로 도망쳤다. 독립한 해에 제정된 헌법은 7법(Siete Leyes)으로 교체되어,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산타 안나는 군대의 지원을 받는 독재자로 등극했다.
당연하게도 후에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하고 미국에 합병된 지역인 코아우일라 이 테하스(Coahuila y Tejas), 산 루이스 포토시(San Luis Potosí), 두랑고(Durango) 등 여러 주에서 직접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며 별도의 주 정부를 구성해 이에 맞섰다. 이 때 리오 그란데 공화국, 유카탄 공화국, 텍사스 공화국이 등장했으나, 텍사스만이 산타 안나의 진압 시도를 물리치고 독립을 유지했다. 이러한 반란은 산타 안나가 행한 패배한 적들에게 행한 보복이 더욱 부채질했다.
하지만 적어도 멕시코 내부에서는 산타 안나를 능가하는 군사지도자가 없었던지라 반란을 일으킨 주들은 하나씩 진압당하고 있었다. 당시 가장 부유하고 보급이 잘 되는 주였던 사카테카스(Zacatecas)의 민병대는 영국제 브라운 베스(Brown Bess) 머스킷과 61구경 베이커 (Baker)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산타 안나의 진압군에게 1835년에 진압되었고, 그 다음 대상은 텍사스였다.

5. 텍사스 혁명


멕시코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든 다른 주 정부들처럼, 텍사스에서도 1835년 말에 반란을 일으켜, 1836년에는 독립을 선언했다. 같은 해 3월 6일 알라모에서 전투가 벌어져 187~250명의 텍사스 방어군이 죽고, 3월 27일에는 골리아드 학살(Goliad massacre)이 발생해 342명 이상의 텍사스 군과 그 지휘관인 제임스 워커 패닌(James Walker Fannin)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알라모 전투로 인해 샘 휴스턴(Sam Houston) 장군이 시간을 벌었고, 4월 21일 산 하신토(San Jacinto) 전투에서 산타 안나 군을 격파하고 그 다음 날에 산타 안나를 포로로 붙잡았다. 산타 안나는 용기병 사병의 복장을 입고 늪에 숨어있다가 잡혔다.
텍사스 공화국 대통령 대행인 데이비드 G. 버넷(David G. Burnet)과 산타 안나는 벨라스코 협정을 조인하여 텍사스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 그 조건으로 산타 안나는 베라크루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산타 안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 멕시코시티에서는 새로 정부가 구성되었으므로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6. 구원, 독재, 그리고 망명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1837년 앤드류 잭슨 대통령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베라크루스에 있는 자신의 농장으로 은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838년, 산타 안나는 텍사스에서 겪은 뼈 아픈 손실을 회복할 기회를 잡았다. 당시 멕시코는 프랑스에게 재정적 보상을 할 것을 요구받고 있었으나 이를 거절했고, 프랑스에서는 멕시코에 군을 파견한 상태였다. 멕시코 정부에서는 산타 안나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프랑스군을 막도록 했으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후퇴하던 중 산타 안나는 오른쪽 다리에 포탄을 맞고 무릎 아래를 절단해야만 했다. 이 때 의사가 절단수술을 잘못해서 뼛조각이 2cm 정도 남았고, 평생동안 통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결국 프랑스의 요구에 멕시코가 굴복하긴 했지만, 산타 안나는 조국을 위해 다리를 바친 영웅으로 칭송받았고, 이 사건을 이용해 정치계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다친 오른쪽 다리에는 유명한 코르크 의족을 달고 다녔는데, 이는 미국-멕시코 전쟁 때 미군의 손에 들어가 일리노이주 군사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멕시코 정부에서는 반환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잘린 다리는 특수한 처리를 거쳐서 방부처리한 다음에 산타 안나가 집권할 때 대성당에다가 축복을 받으며 안치했다가, 산타 안나가 쫒겨나면 거칠게 끌어내려져서 거리에 나뒹구는 수모를 받았다고 하는데, 문제는 산타 안나가 집권했다가 쫒겨나는 것을 반복하는 통에 나중에 가면 대성당에 안치된 다리가 과연 자기 것이 맞는지 본인도 모를 지경이었다고 한다. 사실 그런 물건이 거리에 나뒹굴게 되면 부서져서 사라지지 그대로 남아있겠는가......
부스타만테의 대통령 통치가 재앙으로 드러나자, 지지자들은 산타 안나에게 대통령 직을 맡을 것을 제안했고 산타 안나는 5번째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당시 멕시코 정부의 상황은 그야말로 막장이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국고는 텅 비었고 국민들은 불만에 가득찼다. 거기다가 호세 우레아(José Urrea)와 호세 안토니오 멕시아(José Antonio Mexía) 장군이 반란군을 이끌고 멕시코 시티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다. 산타 안나는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들을 모두 무찔렀다.
이 시기의 산타 안나의 통치는 첫 시기보다 훨씬 더 독재적이었다. 산타 안나에게 반대하는 신문은 폐간되고 반체제 인사들은 수감되었다. 1842년에는 텍사스 원정군을 파견했으나,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텍사스 주민들이 미국과 합병하는 게 더 이익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재정 확보를 위해 증세를 감행했으나 이는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여러 주 정부에서 중앙정부와 관계를 끊었다. 유카탄 주와 라레도(Laredo) 주는 독립을 선언해 공화국을 건립했다. 이로 인해 산타 안나는 권좌에서 내려왔고 도망치던 중 베라크루스 주 시코(Xico)에서 원주민 집단에게 사로잡혔다. 마침 사로잡힌 순간 근처 마을의 교회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산타 안나를 잡은 원주민들은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정부 당국에 산타 안나를 맡겼다. 약 4개월 간 페로테(Perote) 성에 갇혀 있던 산타 안나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쿠바로 영구 추방되었다.

7. 미국-멕시코 전쟁


1846년 미국은 멕시코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 때 산타 안나는 멕시코 정부에 서한을 보내 대통령 직에는 야심이 없으며, 그저 자신의 군사 경험을 바탕으로 외국의 침입을 막고 싶다는 뜻을 알렸다. 한편으로 산타 안나는 미국측 대표단과 비밀리에 자신을 미 함대의 봉쇄를 통과하게 해주면 모든 분쟁 지역을 적절한 가격에 팔겠다는 거래를 한 상태였다. 물론 그가 멕시코로 귀환하자 두 약속은 모두 휴지조각이 되었고, 미군을 막으려는 시도를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수도인 멕시코 시티가 스콧 장군이 이끄는 미군에게 함락되는 수모를 맛봤다.

8. 말년


1851년 자메이카 킹스턴으로 망명했다가 2년 뒤, 콜롬비아 투바코(Turbaco)로 거취를 옮겼다. 1853년 4월에는 정부를 다시 장악한 보수주의자들이 그를 불러들여 멕시코로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정부 자금을 횡령하고 미국에게 땅을 더 파는 등(가즈덴 구입)의 실정으로 보수층조차도 등을 돌렸고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Juárez)와 이냐시오 코몬포르트(Ignacio Comonfort)가 이끄는 자유주의자들이 1855년 산타 안나를 축출했다. 궐석으로 반역죄 재판이 진행되었고, 그의 부패 참상이 밝혀지며 재산은 모두 압수되었다.
이후 쿠바, 미국, 콜롬비아, 세인트 토마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874년 일반 사면을 받고 멕시코로 돌아왔으나 1876년에 조용히 사망했다. 그래도 고국에 돌아온 다음에는 액수가 적지만 연금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연금의 대부분을 집에 찾아오는 거지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어서 의외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9. 평가


"한 때 멕시코였던 수수께끼"(the enigma who once was Mexico)라는 평가가 있다. 1821년 멕시코가 독립한 이후 1844년까지의 멕시코 역사는 산타 안나의 성공과 실패와 그 흐름을 같이 했다. 나폴레옹이 활약하던 시대의 프랑스 역사에서 나폴레옹을 빼놓을 수 없듯이 초기 멕시코와 산타 안나의 관계도 똑같다.
산타 안나는 여러모로 결점이 많았다. 앞서 언급한 주옥같은 단점에다가 도박 중독까지 빠졌다. 특히 투계(닭싸움)를 좋아했다고 한다. 멕시코의 불행은 이 인물이 당대 멕시코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산타 안나보다 더 현명한 자들은 군사적으로 무능한데다가 군중을 움직일 힘이 없었고, 산타 안나보다 상상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이는 없었다. 리더십이 뛰어나면 인격이 개판이고 인격이 현명하면 무능했는데 산타 안나는 전자였다. 인격과 리더십을 둘 다 갖춘 사람이 이 당시의 멕시코에는 없었다.
산타 안나의 가장 큰 문제는 (자주 편을 바꾸는 등 도덕적인 문제는 빼더라도) 그가 놀라운 경력을 밟으며 맡게 될 자리에 책임을 질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군인이었지만 정규 군사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간부 후보생 시절에 견습으로 배운 게 전부였다. 이렇게 준비가 안 된 인물이 '미국을 제외한' 전투에서는 이기거나 지더라도 정치적으로 승리하는 등의 이득을 본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물론 미국에게 져서 그 많은 영토를 날려먹었지만......
종합하자면 현실이 가상을 능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의 일대기를 제3자의 눈으로 보면 그야말로 재미가 있을 정도다. 나름대로 잘 사는 집안의 자식이 그 당시에도 좋은 평판을 못 듣던 멕시코군에 입대해서 제대로 된 교육도 못받은 상태에서 싸움마다 이겨서 승승장구한 끝에 대통령이 되고, 그걸 5회나 해먹는데다가 중간중간 쫒겨났다가 권토중래하고, 수많은 약속을 하고 그걸 안지키고, 싸움을 잘 하는 것 같은데 미국에게 발려버리고, 나중에는 고국으로 돌아와서 조용히 죽었다는 내용만 무미건조하게 늘어놓아도 참 파란만장한 인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산타 안나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지기 힘들다는 평가가 있는데, 그 자체로도 영화같은 인생을 살아서 가필하기 힘들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덕분에 미국에서 만드는 알라모 같은 미국뽕 영화에서 악역으로 나오는 게 대부분이다.

10. 기타


재미있게도 의 발명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작 자신은 아무 이득도 못 봤다. 1869년, 74살이 된 산타 안나는 뉴욕의 스테튼 섬에서 살고 있었고 치클을 대량으로 가져왔다. 이 때 그의 비서로 일했던 미국인이 토머스 애덤스(Thomas Adams)였으며, 산타 안나에게서 치클 1톤을 받아 치클로 고무를 대체하기 위해 여러가지 실험을 했지만, 모두 실패하자 치클에 설탕을 첨가해 만든 게 껌의 조상인 치클릿이 되었다. 게다가 치클릿을 만들게 된 계기도 산타 안나가 입이 심심해서 치클을 씹고 있던 것을 본 후였다. 그래서 이 양반은 최초로 껌을 씹은 사람이 되었다.

11. 개인생활


나폴레옹 유물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으며 서부의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4명의 자식을 두었고, 두 번째 부인과는 자식이 없었다. 그리고 재혼했을 때 산타 안나는 50살, 두번째 부인은 15살이었다. 이 결혼은 멕시코 국민들의 지지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는데, 첫번째 부인이 죽고 나서 6개월만에 재혼을 했기 때문이다.
여러 여인들이 산타 안나의 사생아를 낳았다고 주장했는데, 자신의 유언장에서는 4명을 명시했고, 전기 작가들은 3명을 더 찾아서 사생아는 총 7명이다.
[1] 외래어 표기법영어를 제외한 로망스어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