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로시 죄르지
1. 개요
헝가리의 前 축구선수이자 축구감독으로 페렌츠바로시 TC의 원클럽맨이자 신체와 지능을 한 번에 타고난 축구 영웅. 매직 마자르의 첫번째 전성기를 이끈 선수이다.
2. 생애[4]
2.1. 초기 선수 생활. 1934년 월드컵까지
부다페스트에서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난 샤로시는 원래 법학을 공부하였던 인텔리였다. 동생인 벨라와 함께 축구에도 재능을 보였던 샤로시는 페렌츠바로시의 유스팀에 있었지만 어렸을 때에는 그저 취미로만 축구를 즐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15세부터 본격적으로 축구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곧 재능이 만개했다. 처음 팀에 들어갔을 때에는 센터 하프로 축구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의 볼 컨트롤이 특출난 것을 간파한 감독은 그의 포지션을 인사이드 포워드로 바꿔 더 공격적인 역할을 주문했고,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곧이어 이듬해에 18세의 나이로 대표팀에도 소집되었으니 그의 가능성은 실로 대단했다 말할 수 있다.[5]
21살의 나이에 헝가리 대표팀 소속으로 첫 월드컵 무대를 밟은 샤로시는 첫 경기였던 이집트와의 경기에서는 나서지 못했다. 뒤이은 8강전의 상대는 오스트리아였고 샤로시는 이 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분더팀이라 불리며 유럽 최고의 공격수 마티아스 신델라를 필두로 한 유럽 최강팀이었고 샤로시는 후반 15분에 얻은 페널티 킥을 성공시켜 2:1로 따라붙는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3분 후에 마르코슈 임레가 퇴장당했고 헝가리는 결국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패하고 말았다.
2.2. 1938년 월드컵
샤로시의 기량은 더욱 물이 올랐다. 특히 1935-36 시즌에는 36골로 헝가리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는데 당시 경기당 1.5골의 대단한 페이스를 보였다. 포지션을 변경한 이래로 샤로시는 소속팀에서 시즌마다 최소한 22골 이상은 넣어주었는데 대표팀의 간판으로 활약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1937년 중유럽 컵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를 8:3으로 대파했는데 당시 유럽 최고의 수문장 중 한 명이었던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를 상대로 7골을 터뜨리는 괴력을 과시했다.
리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1936년부터 대표팀의 주장이 된 샤로시는 주장으로 프랑스 월드컵에 갔다. 그리고 대표팀에 새로 들어온 후배 젱겔러 줄러와 함께 호흡을 맞춰가며 상대편의 골문을 하나하나 뚫어갔다.
첫 경기 네덜란드령 동인도전에서는 6:0으로 이기는데 선봉 역할을 하면서 세계 축구팬들에게 헝가리 축구의 실력을 실감케 해주었고 샤로시는 이 경기에서 2골을 넣었다. 두 번째 경기인 8강전에서 스위스를 상대로 샤로시는 한 골을 넣어 2대0 승리를 이끌어냈다. 다음 4강전의 상대는 스웨덴. 스웨덴에 선제골을 내주어 불안하게 출발한 헝가리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웨덴의 자책골이 터졌고 뒤이은 헝가리 공격수들의 가둬놓고 패는 수준의 경기력으로 5:1의 낙승을 거두었다. 결승전의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 특히 이탈리아에는 주세페 메아차라는 대형 공격수가 있어서 샤로시와의 자존심 대결 또한 볼만했다. 샤로시는 한 골을 넣었고 서보 골키퍼가 사력을 다해 방어했지만 헝가리의 수비력보다 이탈리아의 공격력이 한 수 위였다. 결국 헝가리는 이탈리아에게 2:4로 패해 문턱에서 우승이 좌절되었다. 대회 내내 5골을 넣어 헝가리의 공격을 이끈 그에게는 브론즈 볼이 수여되었다.
2.3. 은퇴
이듬해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헝가리도 그 여파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사로시는 페렌츠바로시에서 계속 남아서 활약하였다. 축구 선수로서 활동하면서도 계속 법학을 공부하던 사로시는 1943년에 결국 법학 박사 학위를 따내었다. 사로시의 가장 유명한 별명인 닥터(박사님)는 여기에서 생긴 것이다.
하지만 사로시가 박사 학위를 딴 1943년 이후 사로시의 골퍼레이드는 거의 멈추었고 1946년 사로시는 31골을 집어넣음으로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6]
2.4. 감독 생활
사로시가 은퇴하던 1948년, 헝가리는 공산화되었고 사로시는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주로 이탈리아 클럽을 맡았다.
처음 맡은 클럽은 SSC 바리였고, 바리에서의 2년 이후 루케세에서는 시즌 도중에 경질당하기도 했다. 뒤이어 유벤투스 FC의 감독이 된 샤로시는 우승을 차지하였고 이 때가 샤로시의 감독 생활 중 하이라이트였다. 이후의 감독 생활에서는 강등을 이유로 경질당하고 시즌 도중에 땜빵으로 들어왔다 시즌을 마치지도 못하고 경질당하는 등 부침이 많았고, 샤로시는 1963년 스위스의 루가노를 끝으로 공식적인 감독 생활을 접었다.
이후 제노바에서 여생을 보내다 헝가리의 공산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눈으로 본 사로시는 1993년에 8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다재다능함과 기술로 무장한 공격수. 181cm로 키가 크기도 했지만 기술이 좋아서 볼을 쉽게 빼앗기지 않았으며 공격과 수비 포지션을 모두 높은 레벨로 소화할 수 있는 당시에도 상당히 유니크한 선수였다. 감독으로서는 어린 선수들을 발굴하는 데에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페렌츠바로시에서는 5회의 우승을 포함해 18년의 클럽 커리어를 통틀어 351골을 넣는 높은 득점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FIFA 월드컵에서도 처음으로 헝가리 축구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 선수로 아직도 42골로 헝가리 대표팀 내 역대 득점 랭킹에서 5위에 올라있다. 이를 증명하듯 IFFHS에서 뽑은 20세기 100인의 랭킹에서 89위에 랭크되었고 2차 대전 이전 유럽 축구계를 대표하는 공격수 중 한 명이다.
4. 수상
4.1. 클럽[7]
- 넴제티 바이녹사그 I 우승 5회: 1931-32, 1933-34, 1937-38, 1939-40, 1940-41
- 마자르 쿠파 우승 5회: 1932–33, 1934–35, 1941–42, 1942–43, 1943–44
- 미트로파 컵 우승 1회: 1937
- 넴제티 바이녹사그 I 준우승 5회: 1934–35, 1936–37, 1938–39, 1943–44, 1945
- 마자르 쿠파 준우승 2회: 1930-31, 1931-32
- 미트로파 컵 준우승 3회: 1935, 1938, 1939
4.2. 국가대표
4.3. 개인
4.3.1. 클럽
- 넴제티 바이녹사그 I 득점왕 3회: 1935-36, 1939-40, 1940-41
- 미트로파 컵 득점왕 3회: 1935, 1937, 1940
4.3.2. 국가대표
4.4. 감독
[1] 헝가리의 주 민족인 마자르족은 동양에서 왔기 때문에 사람의 이름을 쓸 때 서양식 배치인 이름과 성의 순서가 아닌 동양식 배치인 성과 이름의 순서를 사용한다. 따라서 헝가리식 이름은 샤로시 죄르지(Sárosi György)가 된다.[2] 출처: 월드풋볼레전드, 11v11, 위키피디아[3] 샤로시는 페렌츠바로시 TC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클럽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4] 출처: 월드풋볼레전드, 11v11, 위키피디아[5] 동시대에 샤로시와 함께 유럽 최고 레벨의 공격수로 평가받는 주세페 메아차나 마티아스 신델라등보다 샤로시의 국가대표팀 데뷔가 더 빨랐다.[6] 페렌츠 데아크가 66골을 넣은 시즌이 바로 이때로 전 시즌 득점왕이 36골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골 인플레이션이 있었던 시즌이다. 득점 10위가 15골 언저리였던 지난 시즌에 비해 같은 10위가 30골이 넘어갈 정도로 골이 두 배는 더 들어갔다.[7] 샤로시는 페렌츠바로시 TC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클럽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