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심체요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image]
'''이름'''
한국어
『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
영어
The second volume of "Anthology of Great Buddhist Priests' Zen Teachings"]
프랑스어
Second volume de l'"Anthologie des enseignements zen des grands prêtres bouddhistes"
'''국가'''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시
'''위치'''
프랑스 파리
'''소장·관리'''
프랑스 국립도서관
'''등재 유형'''
기록유산
'''등재 연도'''
2001년
'''제작 시기'''
1377년
1. 개요
2. 직지의 역사
3. 한계
4. 기타
5.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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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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直指心體要節Jikji Simche Yojeol
고려시대 청주목(淸州牧)에 있었던 사찰 흥덕사(興德寺)[1]에서 만들어진 인쇄물로, 정확한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이름이 길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직지' 또는 '직지심체요절'로 축약해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일부에서는 '직지심경'이라 부르기도 하나, 직지는 불경이 아닌 요절이므로 엄밀히 직지심경은 잘못된 표현이다.
직지심체요절은 공식적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2]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의 승려 백운 화상이 중국에서 가져온 요절을 재구성하여 엮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본은 1372년 제작이 시작되어 1377년에 간행되었다. 이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간행한 금속활자본 성경보다 78년 더 앞선다.''' 기록에 의하면 직지 이전에도 1234년 인종 시기의 '고금상정예문(상정고금예문)', 1239년 고종 시기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3]' 같은 금속활자 인쇄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안타깝게도 소실되어 현대에 전해지지 않기에 인류에게 남아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 이 직지이다.
직지는 각 상권, 하권의 2권으로 나뉘어 있는데 현재 프랑스에 있는 원본은 하권에 해당하며, 상권은 한때 현상금까지 내걸고 찾는 물건이었으나 결국 실종되어 현재는 그 행방이 묘연하다. 단, 이는 최초본의 상권이 실종되었다는 뜻으로, 직지라는 책의 텍스트 자체는 인쇄물의 특성상 오늘날에도 잘 남아 있다. 이후 간행된 목판본 직지는 완본이 제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청주고인쇄박물관의 주도 하에 그 내용을 바탕으로 금속활자본 직지 하권의 글자체와 판형을 본따서 상권 내용의 디지털 복원이 이루어졌고, 이후 실물활자를 전통방식 그대로 다시 만들어 상권을 복원할 계획이다.
직지는 1900 파리 엑스포 한국관에 소개되기도 했으나 당시에는 서양 중심의 세계관은 접어두더라도 오리엔트(근동) 지역에서 워낙 유물 유입이 빈번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직지의 가치가 발견된 것은 1972년, 외규장각 조선왕실의궤를 찾아 헤매던 재불 역사학자이자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 박병선 박사에 의해서였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지하실 구석에서 먼지에 싸여 있는 직지를 찾아냈다고 한다. 발견 당시 학계에서는 직지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성서보다 더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말을 믿지 않고 무시했기 때문에, 결국 박병선 박사는 혼자서 연구를 시작했고, 한국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기어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임을 입증해낸다. 이로써 그녀는 '''직지대모'''로 불리게 된다.

2. 직지의 역사


1377년 고려 흥덕사[4]에서 고승이었던 백운경한이 쓴 책을 금속활자로 뜬 것이다. 그 후 행방은 알수가 없다가 구한말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구한말 당시 주한프랑스공사이자 고서적 수집광이기도 했던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5]가 '''길거리에서 구입하여''' 여러 단계를 거쳐 국립도서관으로 보내진 것인데 1967년부터 13년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일하던 박병선 박사가 외규장각 문서와 함께 발견하였으며 또한 박병선 박사에 의해 직지심체요절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부에서 직지심체요절이 병인양요프랑스군이 외규장각을 약탈하면서 이를 가져갔다고 말하기도 하나 이건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다. 직지심체요절은 외규장각에 있지도 않았고, 외규장각과 직지심체요절이 프랑스로 가게 된 바에는 하등 관계가 없다. 위에서 밝혔다시피 직지는 프랑스인이 합법적으로 구매해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보내진 것이지만, 외규장각 문서는 프랑스군이 약탈한 것이기 때문이다. 약탈과 구매는 엄연히 다르다.[6][7]
다만, 당시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김영삼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직지 및 외규장각 의궤를 포함한 고서적들을 반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약속한 것은 사실이며, 실제로 의궤는 반환받았지만 직지는 반환받는 데 실패했는데, 이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들이 주도한 직지 반환 반대 시위 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정치계에서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프랑스에서 직지를 반환받기 위한 법안을 마련 중이다.#

3. 한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문서이지만, 문자 그대로 오래됐을 뿐, 인쇄술과 사회에 미친 파급력 등을 보자면 '''큰 가치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우선 직지를 찍어낸 활자는 주조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글자획의 굵기와 가늘기가 일정하지 않고, 어떤 글자는 기울어져 있고, 각 열이 곧지 못하고, 삐뚤빼뚤하고, 어떤 글자는 희미한데다가, 획수의 일부가 제대로 찍히지 않았으며, 어떤 데는 윗열의 글자와 아랫열의 글자의 획이 맞물려 있는 등 조잡한 오류가 많다.[8]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조잡했던 것에는 직지가 지방의 중소사찰에서 찍어낸 활자본인 것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인쇄기술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점도 있다. 이러한 인쇄기술 상 문제는 조정에서 직접 주조해 낸 계미자와 경자자로 찍어낸 먼 훗날 조선 초기 인쇄본에서도 계속 드러난다. 하물며 고려 말~조선 초의 금속활자본들은 활판에 밀랍을 깔고 활자를 심는 조판형태 자체의 한계로 인해, 몇 번만 인쇄하다 보면 조판 전체가 흔들리는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하루 인쇄작업량도 많지 않았고, 목판과 비교해서 그다지 낫다고 볼 수 없는 방식이었다. 이는 조선 세종 재위 중에 갑인자가 주조되기 이전까지는 해결되지 않았던 고려 금속활자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본격적인 인쇄술의 시작을 1450년경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로 보고 있다.
따라서 최초라는 것은 최고(最古)는 될 수 있어도 최고(最高)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이 적합하다.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종이인 한지는 흡습성이 너무 높아 프레스를 활용한 대량인쇄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며[9],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특별한 먹(잉크)이 개발된 것도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활판과 종이를 조여줄 기술인 프레스 기술의 부재로, 금속 활자를 이용하면 오히려 효율이 떨어진다는 큰 문제점이 있었다. 반면 서양의 금속 활자 활판은 프레스 기술의 완성으로 수백장을 인쇄해도 멀쩡했다. 이러한 문제는 갑인자 주조 이후 어느 정도 해결되기는 했지만, 당대의 기술 부족으로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 인쇄가 보편화되지 않았다.
또한 알파벳과 온갖 문장부호, 특수문자 등을 포함해서 약 60자 정도만 주조하면 되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에 비해 한국의 금속 활자는 한자를 주조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실제 조선시대의 초기 금속활자 인쇄는 ‘인쇄본을 작성 → 인쇄본의 글자들을 그대로 활자로 주조 → 조판 → 인쇄’라는 과정을 거쳤는데, 이는 목판 인쇄보다 효율이 떨어지는 방식이었다.[10] 활자 인쇄라는 것은 수많은 활자를 미리 주조해두고, 필요한 것만 가져다 조판해서 인쇄한다는 데 장점이 있는 방식인데, 위와 같은 방식이어서는 이러한 활자 인쇄의 장점을 전혀 살릴 수 없었다. 대신 초주갑인자부터 한글 활자가 만들어 사용되고,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민간의 활자 제조가 활발해지면서 실록을 편찬하는 데 민간의 활자를 구입하였고 필요한 양을 나라에서 추가로 만들어 이용하기도 했다. 참조
결정적으로 이러한 금속활자 기술은 '''한국의 전근대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맹점'''이 있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기가 발명된 후 약 50여 년간 유럽 전역에서는 2천만권 이상의 책이 인쇄되었고, 1500년대 초반 50여 년간에는 독일에서만 6천만권 이상의 책이 인쇄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는 당대 유럽의 지성 세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 사회에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종교개혁 등과 같은 급진적인 사상적 발전을 이끌어낸 배경이 되었다. 반면 한국에서 금속활자로는 하나의 책에 대해 적게는 10부, 많아야 80부 정도의 책을 인쇄하는데 그쳤으니 큰 반향을 이끌어 내었다고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에 대해 《조선의 뒷골목 풍경》의 저자인 강명관은 '최초임은 인정하나, 당시 기술의 한계를 명확히 직시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라 말했다.[11]

4. 기타


  • 충청북도 청주시에 가면 '직지'라는 글자가 시내 이곳저곳에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버스정류장이나 전봇대마다 'JIKJI'라고 써놨다. 구 이름 중 하나도 직지를 만든 흥덕사에서 이름을 따 흥덕구고 흥덕사지 부근 청주시 주요도로 이름도 직지대로이다. 가로수길 타고 가경동으로 들어오면 '직지의 고장 청주'라는 비석이 있으며 청주IC에도 광고판에 같은 내용이 써있다.
  •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한국 고서적을 조사한 결과 1377년 간행된 '직지심체요절'보다 7년 앞선 1370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책인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檀經) 단행본이 확인되기도 했다. 다만 해당 고서는 목판복이다.
  • 직지심체요절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기념하고 세계기록유산 사업을 진흥하기 위해 '유네스코 직지상'(UNESCO/Jikji Memory of the World Prize)이 2004년 제정되었다. 2005년부터 2년마다 세계기록유산 보존·활용에 공헌한 개인/단체에게 시상하고 있으며, 상금과 비용은 청주시에서 부담하고 있다.##
  • 중국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직지심체요절' 이전의 금속활자본을 찾으려 눈에 불을 키고 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으로 수많은 유물들이 소실된 탓에 고려보다 더 빨리 금속활자를 제작했다는 증거를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1103년 발행된 '불설관무량수불경'(佛說觀無量壽佛經)을 금속활자본으로 주장했으나 금속활자가 아니라 찰흙활자가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1341∼1345년 사이에 인쇄된 어시책(御試策)이 금속활자본이라 주장했으나 일본 정가당(靜嘉堂) 문고에 소장된 어시책의 원본을 확인한 결과 1341년 편찬된 목판본으로 확인됐다.

5. 같이보기



[1] 오늘날에는 폐사되었다.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흥덕사지로서, 옆에 고인쇄박물관이 있다.[2] 2010년대에 발견된 활자 증도가자가 직지보다 138년 앞선 1239년의 유물로 더 앞선 시대의 금속활자 인쇄의 증거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2015년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검사 결과 증도가자는 위작으로 밝혀졌다.[3] 현재 남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후대에 목판으로 재간행된 목판본으로 알려져 있으나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공인본(보물 제758-2호)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으로 판명되어 달라질 수 있다.# 2015년 진위논란이 일었던 증도가자는 '활자'고, 이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적어도 과거에는 실제로 존재했을 그 금속활자로 인쇄한 '문서'이므로 증도가자 유물의 진위 논란과 직접적 관련은 없다. 이 문서는 일단 최소한 가짜는 아니고 이미 심사를 거쳐 대한민국의 보물 758호로 지정되어있다. 다만 기존에는 목판본으로서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는데 직지보다 앞선 금속활자본으로 결론날 경우 그 가치가 더욱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4]충북 청주시 흥덕구[5] 그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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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9급 공무원 시험과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도 이 점을 노리고 문제가 출제된 바 있다. 둘 다 약탈과 관련된 문항을 고르면 틀리는 함정문제였다. [7] 비슷한 예로 몽유도원도가 있다. 몽유도원도는 현재 일본에 있는데, 일본이 일제 강점기 때 빼앗아 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경술국치 이전인 19세기부터 일본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일본인 수집가가 구매한 것으로 추정된다.[8] 박문열,『고인쇄출판문화사론』, 피아이, 1999. 참조[9] 글자를 종이에 제대로 인쇄하려면 종이를 활판에 압착해야 하는데, 한지는 그렇게 하면 잉크를 너무 많이 먹는 문제가 있었다.[10] 인쇄를 할 때마다 주조를 새로 해야하니 비용도 어마어마하게 들었다고 한다.[11] 이는 조선의 서적 출판이 주로 왕권이 중심이 된 국가 주도의 사업이자 지배층들에 국한되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농사직설과 같은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서적도 일부 출간되었지만, 이 역시 국가에서 농업 생산력의 향상이라는 국가의 목적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민간 차원에서의 지식의 발전과 보급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자산어보 같은 사례는 매우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