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4세

 


[image]
'''Karl IV'''
'''가문'''
룩셈부르크 가문
'''생몰년도'''
1316년 5월 14일 ~ 1378년 11월 29일
'''출생지'''
보헤미아 왕국 프라하
'''사망지'''
보헤미아 왕국 프라하
재위
기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355년 ~ 1378년 11월 29일
'''독일 국왕''' (로마왕)
1346년 7월 11일 ~ 1378년 11월 29일
'''이탈리아 왕국 국왕'''
1355년 ~ 1378년 11월 29일
'''보헤미아 왕국 국왕'''
1346년 8월 26일 ~ 1378년 11월 29일
1. 개요
2. 생애
2.1. 전반기
2.2. 로마왕과 통치
2.3. 황제와 금인칙서
3. 대중문화에서


1. 개요


독일어: Karl IV. (카를 4세)
체코어: Karel IV. (카렐 4세)
이탈리아어: Carlo IV (카를로 4세)
라틴어: Carolus IV (카롤루스 4세)
신성 로마 제국황제이며 보헤미아 왕국. 체코어로 카렐 4세로 부른다.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과는 달리 다소 이색적으로 보헤미아 왕국을 기반으로 했던 황제. 당시 유럽의 가장 강력한 가문 중 하나였던 룩셈부르크 왕가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로 평가받는다.
카를 4세는 체코의 군주로서 체코인들에게 매우 높이 평가받는다. 오늘날 체코의 아버지, 체코의 정신적 지주라 불린다. 2012년 체코 사람들로부터 가장 위대한 체코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반면 보헤미아를 제외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그의 치세는 긍정적이진 않았는데, 카를 4세는 금인칙서를 반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인칙서로 인해 선제후들이 사실한 독립한 군주와 같은 권한을 가지게 되면서 황권이 사실상 약화되어 명목상의 신성 로마 제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독일인들보다 체코인들에게 더 좋은 평을 듣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셈이다.[1]

2. 생애



2.1. 전반기


크레시 전투(1346)에서 사망한 보헤미아 왕, 룩셈부르크 백작인 보헤미아의 요한(얀)의 아들이다. 카를은 프랑스로 보내져 교육을 받았으며[2] 5가지 외국어[3]를 읽고 쓸 줄 알았는데 그 실력이 매우 유창했다. 1331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가해 경험을 쌓았다.
1333년에 그는 아버지가 자주 자리를 비우고 시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에[4] 보헤미아의 왕권을 실질적으로 대리통치하게 되었다. 1334년에는 모라비아의 변경백이 되었다. 모라비아의 변경백은 카를이 왕세자로서 반드시 가져야 하는 타이틀이었다. 2년 뒤에는 원래 모라비아의 변경백이었던 요한 하인리히를 대신하여 티롤의 통치권을 맡게 되었다. 곧 이 나라에 대한 소유를 확실히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2.2. 로마왕과 통치


황제 루드비히 4세에 대항해 카를의 아버지와 교황 클레멘스 6세 간에 맺어진 동맹으로 말미암아 1346년 카를은 렌스에서 선제후들에 의해 로마의 대립왕으로 선택되었다. 그는 1347년 사전에 클레멘스 6세에게 광대한 양보를 하는 굴욕적인 약속을 했다. 넓은 영토를 소유하기 위해 교황의 지위를 확정하고, 클레멘스 6세에 대항하는 루드비히의 행동을 취소시키며 이탈리아의 일에 상관하지 않고 교회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카를 4세는 처음에 독일에서 매우 약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선출권을 위해 갚아야 할 빚이 있었기 때문에 일부에게 사제왕이라고 조소적으로 불렸다. 많은 주교들과 태반의 제국 도시들은 루드비히 4세에게 충성을 다했다. 설상가상으로 백년전쟁에서 이기지 못할 자를 지지해서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아버지와 아버지의 많은 기사들을 잃고 카를 자신도 상처를 입은 채로 패주했다.
독일에서 내전을 방지했지만 루드비히 4세가 곰을 사냥하던 중에 뇌일혈로 쓰러져 1347년 10월에 죽었다. 1349년 1월 비텔스바흐의 일당들은 군터 폰 슈바르츠부르크를 안전하게 독일왕에 선출하려고 시도했다.[5] 그러나 군터는 지지자가 거의 없었으며 몇 달 뒤에 슬퍼하는 사람없이 쓸쓸하게 죽었다. 그후에 카를은 제위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지 않았다.
카를 4세는 처음에 세력 기반을 안전하게 다지려고 했다. 보헤미아는 전염병에 훼손되지 않은 상태였다. 프라하가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그는 프랑스 파리를 모델로 재건축하여 프라하 안에 신도시를 지었다.[6] 1348년에 자신의 이름을 따 중부 유럽의 첫 대학교인 프라하의 카를 대학을 세웠다. 이곳은 관료들과 법률가들의 훈련장이 되었으며 곧 중부 유럽의 지식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카를은 반대자들의 어려움을 잘 활용해서 1349년 7월 아헨에서 다시 왕위에 올라 신성 로마 제국의 확실한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라인 강 지방과 슈바벤 사람들의 마을에 선물을 주고 약속했으며 합스부르크 가와 친분을 다지기 위해 결혼 동맹을 맺었다. 바이에른의 공작 루돌프 2세와는 1348년에 그의 딸 안나와 결혼해 결속을 다졌다.
1350년 카를 4세는 프라하에서 로마의 호민관 콜라 디 리엔조의 방문을 받았다. 콜라 디 리엔조는 카를에게 시인 페트라르카와 플랑드르의 시민들이 있는 이탈리아에 가도록 설득했다. 이 애원을 무시한 카를은 그를 감옥에 가두었고, 죄수로서 취급해 아비뇽의 클레멘스 6세에게 보냈다. 프라하 밖에서 카를은 보헤미아 왕국의 영토를 넓히려고 시도했다.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슐레지엔, 상 팔츠, 프랑켄의 영지를 손에 넣었다. 이 지역은 라인 지방에 있는 룩셈부르크 가의 영지, 그리고 보헤미아와 연결되어 뉴 보헤미아를 구성했다. 그러나 보헤미아는 이런 카를 4세의 모험을 지원하지 않았다. 그는 1355년 보헤미아의 법률을 성문화하려고 했을 때 급격한 저항에 부딪쳤다. 이후 카를은 중앙 집권 정책을 축소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2.3. 황제와 금인칙서


1354년에 카를 4세는 군대 없이 알프스를 통과해 1355년 1월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대성당에서 롬바르디아 철왕관을 받았으며, 4월에는 로마에서 황제로 등극했다. 카를의 유일한 목적은 황제의 자리를 평화롭게 받는 것이었으며, 교황 클레멘스 6세와 이전에 한 약속에 따라서 로마인들의 소원에도 단지 몇 개의 도시만을 가졌다. 사실상 이탈리아에 있는 모든 제국의 것을 상실하고, 카를 4세는 많은 재산을 잔뜩 싵고 알프스를 건넜다. 이에 대해 페트라르카는 경멸하는 언어를 썼다. 카를은 돌아와서 제국의 내치에 신경썼으며, 페스트로 인한 피해를 복구했다. 그리고 1356년에 독일 왕을 선출하는 방법을 규정한 금인칙서를 발표하게 된다.
모라비아를 형제인 요한 하인리히에게 주었으며, 룩셈부르크벤체슬라스에게 주었다. 카를 4세는 그의 영토를 안정시키는 데에 온 힘을 다했으며, 보헤미아 왕국을 강하게 만들었다. 이것을 위하여 1353년 라인의 상 팔츠 부분을 구입했으며, 1367년에 하 루사티아를 보헤미아에 합병했고 독일 각지의 많은 사유지들을 샀다. 1363년 상 바이에른공작이며 티롤의 백작인 마인하르트 3세가 죽자, 루드비히 4세의 아들들이 상 바이에른을 요구했으며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4세는 티롤을 요구했다. 카를 4세는 만약에 이 가문이 멸문되면 룩셈부르크 가가 이 영지들을 차지하는 조건으로 요구를 승낙했다. 같은 시기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을 아들 벤체슬라스에게 주었다. 1365년에 카를은 아비뇽의 교황 우르바노 5세를 만나 로마로 가는 것을 호위했으며, 부르고뉴의 왕이 되었다.
1368년에 이탈리아로 가 비테르보에서 교황 우르바노 6세를 접견하고 1369년에 다시 제국으로 귀환했다. 말년에 카를 4세는 벤체슬라스가 1376년 안전하게 로마 왕위를 물려받아 독일의 일에 거의 신경쓰지 않았으며 1378년에 슈바벤 인들과 평화 교섭을 했다. 그리고 3명의 아들들에게 영토를 배분한 이후 카를 4세는 통풍에 걸려 1378년 11월 프라하에서 사망했으며, 역시 프라하에 매장되었다.

3. 대중문화에서


징기스칸 4에서는 정전지 순으로 74/54/72에 적성 BCCE이다. 그나마 이게임에서 정, 지가 70대 이상이면 그정도면 준먼치킨이다. 다만 전투력이 매우 낮아서 문제. 게다가 도시는 쾰른 하나만 있고, 가끔식 영국이나 프랑스, 폴란드, 헝가리가 쳐들어 온다. 안습.
킹덤 컴 딜리버런스 에서 이미 승하한 후에 아들 벤체슬라스가 왕위를 이어받은 상태로 작중 배경설명으로 등장한다. 체코 개발사인 워호스 스튜디오에서 만든 게임으로 대한민국으로 본다면 세종대왕급의 극찬을 받는다. 이후 단명해서 치세가 길지 않았던 문종,예종,단종을 제외하면 벤체슬라스세조(조선),지기스문트,연산군,선조의 경우 확 꺾였던 것도 비슷하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도 등장하며 1337년 시나리오에서 만나볼 수 있다. 역사대로 보헤미아 왕 요한의 아들로 모라비아 공작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그의 이름이 wenzel(벤첼/바츨라프)로 되어 있으며 이는 그가 이후에 카를로 개명하기 때문이다.

[1] 비슷하면서도 정반대인 케이스에 해당하는 또다른 독일어권 군주로는 하노버 선제후영국 국왕을 겸했던 조지 1세(게오르크 1세)가 대표적인데, 이쪽은 반대로 독일인(특히 하노버 주민들)들에게 평가가 좋은 반면 영국인들에게는 평가가 나쁘다.[2] 본래 이름은 그의 외조부 바츨라프(벤체슬라우스) 2세의 이름을 따 바츨라프였으나, 고모부 프랑스의 샤를 4세를 동경하여 샤를/카를로 개명하였다. 이는 그가 어린 시절 고모인 룩셈부르크의 마리를 따라 샤를 4세의 궁정에서 생활했던 것이 크다.[3] 체코어,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4] 그래서 아버지 얀은 장님왕 얀, 영어로는 John the Blind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었다.[5] 신성로마제국 황제 후보자는 대개 독일왕으로 선출되고, 그 후 로마왕,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다시 선출되는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재위중인 황제가 후계자의 앞길을 다져주기 위해서 독일왕이나 로마왕으로 선출되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6] 중세 서유럽에서는 고정된 수도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당시 일반적인 도시의 생산력으로는 군주와 가족들, 그를 보좌하는 귀족들과 그 가족들, 그 아래의 수많은 시종들과 군인들까지 먹여살리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군주가 영지의 여기저기를 순회하며 머무르는 팔츠 제도가 발달한 맥락도 이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