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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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초기 생애
3. 무신정변 이후
4. 평가
5. 대중문화에서


1. 개요


石隣
? ~ 1187년.
고려 중기의 무인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무신정변의 2진급 인물 중 한 명이다. 출신조차 불분명한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난세 속에 금군의 병졸로 들어가 공을 세워 마침내 상장군직에까지 올라간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이자, 무도하고 탐욕스러운 성품 탓에 역적이 되어 순식간에 몰락한, 무신정권의 혼란상을 여실히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2. 초기 생애


앞서 서술했던 것처럼 출신이 꽤 불분명한데, 크게 고려사의 기록과 충주 석씨 족보, 충주 석씨 일파의 구전전승의 세 가지 가설로 나눠진다. 고려사에 의하면 성도 없던 완전한 천출로, 창고 옆에 살면서 쌀을 주워서 생계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예비용 군량미로 살아갔다고 하니 아마 진짜 쌀 낟알을 주워모았다기보다는 쌀을 가마니 단위로 빼돌리거나 훔쳐 살아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충주 석씨 계축보에 의하면 본래 북송 출신으로, 석린은 윗대의 석씨 조상 석주[2]으로부터 25대손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석보용으로 북송의 대사마, 대장군을 두루 역임했다고 한다. 그런데 북송에는 대사마가 없었고, 대장군은 명예직이었다. 어쨌든 북송과 금의 전쟁 탓에 고려로 넘어왔다고 한다. 문중에서는 24대에 약 700년간의 시간차가 맞아떨어지는데다 무위군은 옛 흉노갈족의 영역이므로 오호십육국시대후조를 건국한 노예 출신의 황제 석륵의 후손이라고 추정하는 모양. 이 기록을 신뢰한다면 석륵과 석린은 조상과 후손이 둘다 역사에 남을 출세길을 탄 케이스가 되는 재미있는 우연이 생기며, 또한 같은 중국계 성주 석씨와의 연관성이 생기는 셈이다.
또 충주 석씨 일파의 구전전승[3]에 의하면 몰락한 신라 왕손으로, 신라 석씨 가문이 김씨, 박씨에게 치이고 무너지자 방계 가문 중 하나가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시대가 흘러 다시 고려로 넘어왔는데, 이때 성씨의 글자를 돌 석자로 바꾸어 들어왔다고도 한다. 위에 서술된 가문 족보의 서술과 비슷한 듯 다른 셈. 이 때문에 훗날 석린의 후손 일부가 옛 석자로 다시 성씨를 바꾸고 월성 석씨로 돌아가려 했으나 월성 석씨 가문에서 그 이야기를 어떻게 믿냐고 반대했다고. 실제로 해당 일파는 공식적으로는 충주 석씨로 인정되지만 스스로를 월성 석씨로 소개한다.
여하튼 장성하여 군에 입대했다가 금군에 선발되었는데, 금군은 국왕 친위대로써 이곳에 특채될 정도면 상당히 강한 무력을 갖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또 후의 행적으로 봤을 때 이때 금군 중에서도 최고 근위대인 견룡군 출신으로 추정된다. 1170년 무신정변이의방으로 대표되는 하급 장교 파벌과 정중부로 대표되는 고급 장성 파벌이 손을 잡아 문신을 대학살하는데, 이 때 견룡군의 대장 지위인 견룡행수 직에 있던 이의방이 문신 학살에 금군을 동원하자 석린이 선봉에 서서 많은 문신을 죽였다. 이 때 같은 반열에서 함께 했던 인물들이 이의민, 조원정 등이다. 이 공로로 낭장[4] 직위에 임명되었다.

3. 무신정변 이후


1174년에 서경에서 조위총을 일으키자 동로가발병마부사 두경승의 휘하에 편제되어 큰 공을 세웠는데, 1177년에 처치사 이경백이 두경승과 합이 안 맞았던 나머지 군사 작전에서 잦은 실패가 있자 조정에서 아예 이경백을 파면하고 두경승을 처치사에 올린 다음 석린을 지서북로병마사[5] 에 임명해 두경승과 합을 맞추게 하는 등 일선에서 뛰어난 전공을 이어갔다. 덕분에 단숨에 상장군[6]직을 받았다. 또한 이전에 받았던 지서북로병마사보다 한 단계 높은 동서북면병마사[7]까지 역임하게 된다. 또 이때 예성부원군의 작위를 받는데, 이때 받은 영지가 충주 지역이었으므로 그 후손들이 충주 석씨를 칭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파격 승진 때문이었는지 석린의 방종이 시작되는데 1186년, 지역 향리에게 은 20근의 뇌물을 받고 서해도안찰사 강용유에게 청탁을 했는데, 강용유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석린은 분노하여 명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안찰사 강용유의 파면을 직접 요구했는데, 당연히 석린의 잘못인만큼 파면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석린은 돌발 행동을 하고 마는데, 어전에서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마구 휘두르면서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겠다!" 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왕 앞에서 바닥에 허리띠를 집어던지고 등을 돌려 뛰쳐나갔던 것.'''
명종은 환관을 보내어 석린을 달래려 했지만 여전히 그는 뿔이 나 있었는데, 병부상서 양익경을 보내 다시 달랬는데, 얼마나 화가 나있었는지 병부상서가 소매를 붙잡고 간곡히 부탁하고 나서야 석린의 화를 간신히 달랠 수 있었다. 곧 석린이 다시 어전에 들어오자, 명종이 친히 부드러운 말로 달래고 술을 권하여 단둘이 술자리를 가지고, 그 후 강용유를 파면시킴으로써 간신히 갈등을 봉합할 수 있었다. 물론 명종은 곧 명을 번복해 강용유를 복직시켰고, 석린은 다시 삐져 출근을 거부했다. 사람을 보내어 달래려 했으나 거드름을 피우면서 배째라식으로 나왔는데, 나라 안의 사람들이 모두 왕의 나약함에 상심하고 석린의 횡포에 분노했다고 한다.
석린은 이의방이 알아봐주고 출세시켜준 인재로써, 일찍이 조정 내에서 이의방 파벌이었고 1174년에 이의방이 정균에게 살해당해 정중부 정권이 들어섰음에도 조원정 등과 함께 이의방 파벌을 버리지 않고 같이 행동했다. 이의방이 없었어도 파벌의 장수들인 두경승, 이의민, 석린 등이 죄다 인간흉기들이었던데다 이미 다들 전공을 세워 고위직에 있었으므로 영향력이 컸기 때문. 덕분에 경대승 정권 때도 별 탈이 없었다.[8]
그런데 1187년에, 당시 이 파벌에 리더 역할을 하던 조원정이 중서문하성의 공해전[9]의 수입을 해먹으려다 들통나서 황실의 신임을 받는 문극겸[10], 두경승[11]은 물론 자신과 한 때 한 솥 밥을 먹었던 최세보[12], 문장필과 이지명 등에게 단체로 탄핵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로 조원정은 추밀원부사에서 해임된 뒤 좌천 형식으로 내려간 공부상서 직책에서도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관직을 그만두는 것.)하는 형태로 잘리는 등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끝장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궁지에 몰린 조원정은 이의방 파벌 무관들과 힘을 모아 반역을 꾸미는데, 이 사건이 바로 조원정의 난이다. 반란의 기승전결에 대해선 조원정 항목 참조. 그리고 대다수의 무관들이 발을 뺐던 이 허술한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주동자로 뽑힌 이가 바로 석린이었다. 결국 석린은 조원정과 함께 조리돌림당한 뒤 처형당하는 실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4. 평가


무신정변 때 많던 인생역전의 주인공 중 하나. 창고에서 나라의 쌀이나 빼돌려서 풀칠하는 천출에서 자신의 적성을 찾아 군에 갔고, 그곳에서 난세를 만나 출세하게 되었고 본인도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는 척준경 이후에 괴물들이 우글거리던 고려 군부의 인물로써 개인의 용력이 출중했고 조위총의 난에서 관직 재조정까지 받으면서 군공을 올려 자신의 후견인 이의방이 죽은 후에도 낭중에서 상장군까지 뛰어올라간 것을 보면 자신의 무력과 군사적 재능은 확실히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인성. 어전에서 허리띠를 집어던지며 왕의 면전에서 성질을 부리는 것은 왕조 시대엔 역사에 쓰일만한 권신도 감히 못하는 짓이다. 게다가 뭔가 큰 뜻이 있어 이를 관철시키려 성질을 부린 것도 아니고 뇌물받고 부정행위를 저지르다 마음대로 안되자 이런 패악질을 부린 것. 어찌나 악명이 높았는지 고려사에선 온 나라 사람들이 석린에게 분노했다는 서술까지 있다.
다만 실제로 마냥 패악질을 부리다 역적질까지 하게 된 한심한 인간으로 치부하기엔 다른 관점에서의 분석이 필요한데, 우선은 석린은 이의방 파벌 출신들이 대부분 그렇듯 찢어지듯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이었다. 이 사람들한텐 저런 치부행위가 별 것 아니었다. 그래서 경대승이나 두경승이 역사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특별하니까. 그리고 보통 유교 국가에서 대역죄인으로 분류되면 그 자손까지 악명을 뒤집어쓰고 출세길이 완전히 막히는데 비해 석린의 후손은 망하기는 커녕 석린의 사망 이후로도 고려에서 꾸준히 고관을 맡아왔고 고려 말에도 이성계와 혼인 관계가 엮일 만큼 세가 살아있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석린에 대해 사료를 남긴 이들은 정변 때 석린에게 호되게 당했고, 결국 석린 제거에 큰 기여를 한 인물들은 당장 문극겸을 위시로 한 문인 세력과 석린과 파벌이 다른 무장들이었다. 조원정의 난의 경과를 보면 무신들간의 알력 다툼에 가까웠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고려사가 참조한 고려 시대의 역사서가 석린의 행적을 과하게 곡해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렇듯 이중적이고 복잡한 인물로써, 무신 정변기의 무장들 중 하급장교 출신의 무관들 중 가장 뚜렷한 출세와 몰락의 인생곡선을 보여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5. 대중문화에서


2003년 KBS의 대하사극 무인시대에서 배우 장순국이 연기했다.[13] 해당 드라마에선, 보현원에서 이소응과의 수박 경기를 갖도록 강요받은 젊은 무관을 석린이라 표현했다. 결국 실제 역사와 같이 이소응은 석린에게 수박을 지고 한뢰에게 뺨을 맞으며, 이것이 무신정변의 동기 중 하나가 된다. 그 후로는 고려사의 기록을 충실히 반영하여 위의 서술과 거의 비슷한 행적을 보인다. 같은 이의방 파벌 출신 이영진과 세트메뉴처럼 다니며 약방의 감초같은 조연을 맡는데, 조원정의 난 후 이영진의 집으로 도망쳐온 석린을 이영진이 자신의 목숨을 위해 조정에 팔아넘기고, 그 죄책감에 시달리다 석린이 처형당한 얼마 뒤 죽는 장면은 난세의 무신정권을 잘 보여주는 장면으로 평가받는다.

[1] 충주홍주석씨 대동종친회 사이트에 실려있는 상상 초상화.[2] 중국 무위군 사람이라고 한다. 무위군은 현재의 간쑤 성 지역이다.[3] 충주 석씨 자인면 집성촌[4] 고려시대엔 정6품직으로, 응양군을 제외한 나머지 중앙군의 중하급 지휘관 역할을 하던 관직이다.[5] 고려의 종3품직 임시 관직으로, 전쟁으로 인한 특수 상황 때 지정된 지역의 군권과 행정권을 총괄하는 현대의 계엄사령관과 비슷한 관직이다. 석린은 지서북로병마사로, 서북로 즉 서경을 위시로 한 고려 북계(현재의 평안도)지역의 계엄권을 쥐게 된 것이다.[6] 고려의 군사조직 2군 6위의 지휘관으로, 각 조직마다 하나씩 8명이 배치되며 이 중 2군 중 하나인 응양군의 상장군이 반주라 하여 고려 군부의 대표자가 된다. 석린이 어느 조직의 상장군에 배치됐는지는 기록이 없다. 다만 무신정변 시기엔 관직 인플레이션이 좀 끼어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7] 고려 정3품직으로, 고려의 군사 행정 구역인 북계(평안도 지역, 북방 방어)와 동계(함경도 동부-강원도 동부, 왜적 방어)의 군권을 모두 쥐게 되는 막강한 관직으로 원래는 문하시중 등 최고급 문신이 겸직하는 관직이다.[8] 이 때 같이 이의방의 밑에서 구르던 이의민의종 살해 죄를 추궁받아 경주로 도망치듯 낙향해야 했다.[9] 중서문하성은 고려의 중앙 행정 관청이고, 공해전은 관청의 운용비를 걷는 국유지다.[10] 문익점의 조상이다. 현재 모든 남평 문씨의 시조[11] 이의방 파벌 출신이나, 이 파벌에서 무척 드문 청백리로 군사에 능통하고 인덕이 뛰어났고, 무신정변 당시 자신의 부대에 약탈과 경거망동을 금지하는 등 좋은 행보로 고려사에서도 대다수의 이 시기 무신들과 달리 반역 열전이 아닌 제신 열전에 실린 뛰어난 인물.[12] 이의방 밑의 행동대장 출신 중 하나.[13] 전전작인 태조 왕건에서 왕건의 호위장인 장 수장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