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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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현대 유니콘스 소속의 야구선수. 現 고양 히어로즈 감독.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상당히 파란만장한 아마추어 시절을 보냈다.
백운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또래 친구들과 공터에서 연식공으로 야구하는 게 다였던 설종진은 우연히 참가한 야구부 공개 테스트에서 감독님의 눈에 띄게 된다. 설종진 역시 야구부 유니폼을 보고 야구가 하고 싶어졌고, 작은 형이 농구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던 부모님을 설득해 정식 야구부원이 될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폐암으로 갑작스레 돌아가시면서 야구를 그만둘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학교에서 “6학년까지만 야구하라”고 설득했고, 다른 학부모들이 야구부 회비를 모아 보태주며 도움을 준 덕분에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이후 설종진의 사정을 전해들은 신일중에서도 설종진의 야구부 회비를 면제해 줬다고.
신일고에 진학한 후 전국 대회에서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설종진은 선수 인생 제 2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청룡기가 끝난 뒤 계속 기침이 나오고 감기약을 먹었는데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이었다.
다행히 학교 측의 배려로 학교에도 가지 않고 푹 쉬며 재활한 덕에 이듬해 3월에 다시 정밀 검사를 받은 결과 괜찮다는 진단을 받았고, 다시 야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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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결핵으로 1, 2학년을 허송세월로 보내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했던 설종진은 3학년인 1991년, 웨이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감독실을 밀어버리고(...) 웨이트 트레이닝장을 설치한 한동화 감독과 신일중에서 '46연승의 전설'을 세운 양승호 코치, 프로야구 역사상 시즌 최다승인 30승(1983년)으로 유명한 장명부 인스트럭터의 지도에 힘입어 강혁, 조성민 등과 함께 팀의 봉황기, 황금사자기 우승을 이끌어 연이어 MVP를 수상하며 고교야구 최대어로 급부상하게 된다. 이때의 활약으로 '설까치'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178cm, 74kg의 날렵한 몸에, 밀고 당기고를 자유자재로 하는 좌타자였던 설종진은 폭넓은 외야수비와 천부적인 야구 센스가 돋보였으며, 심지어는 3루 수비도 무난히 봤을 정도였다.(다시 말하지만 좌투다.) 당시 고교 최고 에이스였던 휘문고 임선동이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타자”로 설종진을 꼽을 정도였다. 비단 실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신일고 야구부, 한·미·일 고교야구대회에서 대표팀 주장을 맡으며 ‘준비된 리더십’끼지 선보였으니, 많은 대학 팀과 프로팀이 설종진을 주목한 건 당연한 이치였다. 프로 스카우트 가운덴 투수로서의 설종진의 가능성에 주목한 이도 있었다.
이렇듯 그는 ‘프로에서도 당장 통할 초고교급 선수’로 인정받았고, 이미 3학년 때 여러 프로팀과 대학팀들의 구애를 받았다. 하지만 다른 신일고 야구부원들 다수를 중앙대에 입학시킨다는 조건으로 중앙대에 가기로 가계약한 상태였기 때문에,[3] 설종진은 이러한 제의들을 모두 뿌리치고 중앙대에 진학하게 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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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시절의 설종진.
설종진의 중앙대 입학이 결정됐을 때, 꽤 많은 야구전문가가 ‘대학무대에서의 설종진은 과연 어떤 활약을 펼칠까’ 궁금해했다. 그도 그럴 게 92학번 야수 가운데에서는 설종진이 가장 빛나는 별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래에서 후술할 사건으로 인해, 스포츠신문에서 그의 이름을 찾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설종진이 1학년이었던 1992년의 어느 여름 날이었다. 당시에 설종진을 포함한 1, 2학년 야구부원들은 학교 운동장의 잡초를 제거하고 있었는데, 비닐봉지에 담아 버리면 그만일 것을 누가 "태워버리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야구부원들은 휘발유를 뿌리면 잔디가 더 잘 탈 것 같아 휘발유통을 가져와서 잔디 위에 뿌렸는데, 타라는 잔디는 안 타고 정작 잔디 옆에 놓아둔 휘발유 통으로 불길이 옮겨붙고 말았다.
휘발유통에 옮겨붙은 불길은 점점 거세져서 가만히 두면 폭발할 것 같았고, 설종진은 ‘휘발유 통을 쓰러트리면 기름이 흘러내려 폭발을 막을 수 있겠다’싶어 휘발유 통을 발로 찼다. 그런데 설종진이 발로 찬 휘발유 통은 쓰러지려다가 균형을 잡고서 다시 서버렸고, 하고 휘발유 통이 제자리로 설 때, '''통 안에 든 불기름이 설종진의 다리로 튀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화상을 입어 병원에 찾아갔는데 “살이 타버려서 수술을 몇 번 해야 하며, 수술을 받으면 결국 야구를 못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2회에 거친 대대적인 수술이 끝난 뒤의 설종진의 몸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2차 수술까지 마치고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을 느끼고서는 ‘아, 여기서 야구는 끝이구나’ 싶었다고. 하지만 야구에 미련이 남았던 설종진은 화상 환자들이 입는 스타킹을 구해 입으면서까지 계속 운동을 했고, 4학년 때에는 몸 상태도 많이 호전되고 경기 감각도 많이 끌어올려 홈런을 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인 끝에 199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태평양 돌핀스에 2차 2순위 지명을 받아 1억 1천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하게 된다.
2.2. 프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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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니콘스 현역 시절의 설종진.[5]
하지만 아마추어 시절만큼의 명성을 떨치지 못했다. 중앙대 시절에 부상을 극복하고 다시 경기를 뛰었을 때에도 예전만큼의 기량을 보여 주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부상 후유증 때문인지 조금만 빨리 뛰어도 다리에 자꾸 쥐가 나고 말았고, 러닝이 안 되니까 순발력이 떨어졌다. 배트 스피드도 나오지 않고, 수비 범위도 확 줄어들었다. 김재박 감독이 “설종진이 1군에서 뛰려면 기습번트도 댈 줄 알아야 한다”고 얘기해 매 경기마다 두 타석씩 좌우로 번트를 대던 도중, 손가락에 공을 맞아 부상으로 반년 동안 허송세월로 보내기도 하였다.
프로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하며 조금씩 잊혀진 선수가 되어 가던 설종진은 1997년에 투수로 전향하게 된다. 스프링캠프에서 외야 송구훈련을 하던 도중 설종진의 레이저 송구를 인상깊게 지켜본 신언호 코치가 투수 전향을 제안했고, 설종진 역시 투수로 재기할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해 이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비운의 야구천재' 설종진 재기…다리화상 딛고 투수 변신 성공
하지만 최고 구속이 140km/h도 넘지 못했던 설종진은 많은 기회를 받지 못했고, 장기영, 노환수 등 좌완 투수들이 입단하면서 조용히 선수 생활을 정리하게 되었다.
3. 프런트, 지도자 경력
2001 시즌 종료 후 은퇴한 설종진은 원래는 친구랑 사업을 하려고 했으나, 당시 현대 2군 매니저였던 염경엽에게 매니저를 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경험이 없는데요”라고 했더니, 염경엽이 “누군 처음부터 경험 있어서 매니저 하냐”고 했다고... 생계를 위해서라도 일을 해야 했고, 어쨌거나 야구와 관련된 일이니까 자신에게 있어 최상의 직업이라고 생각한 설종진은 염경엽의 제안을 승낙했고, 이후 키움 히어로즈가 된 2019년까지 프런트로 재직하였다.
2017년에 3군 투수코치로 선임되었다. 공홈의 소개에 따르면 운영2팀 팀장도 겸임하고 있다고 한다. 이후 2019년 다시 운영2팀 팀장만을 맡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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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고양 히어로즈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1년만에 현장에 복귀하였다. 앞서 전임 감독 장정석의 계약 연장이 무산된 후, 그와 비슷한 경력 때문에 키움 히어로즈 팬들 사이에서 설종진이 차기 감독 후보라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키움 히어로즈 차기 감독으로 내정되었다는 기사가 떴다.키움 새 사령탑에 설종진 2군 감독 내정 다만 이 후 김치현 키움 단장은 아직 신임 감독이 정해진게 없다고 언급을 하였다. # 최종적으로 홍원기가 선임되었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 한국야구위원회 기록실에 표기되는 리그 TOP 10위 이내 기록은 순위가 등재.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입상 성적.
5. 관련 문서
[1] 후술하겠지만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군 투수코치와 운영2팀 팀장을 겸업하였다.[2] 이 때 하루종일 집에만 있는 게 심심하다 못해 짜증이 나 여름방학 때 모교인 백운초교로 놀러 갔는데, 감독님이 “운동삼아서 애들이나 가르치라”라고 해서 초등학교 야구부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전국대회를 앞두고 감독님이 부친상을 당하는 바람에 17세의 나이에 감독 대행을 맡게 됐다. 그리고 17세의 소년이 이끄는 초등학교 야구부는 4강까지 진출(...).[3] 에이스 조성민과 주전 포수 김지훈은 고려대로, 외야수 박연수는 원광대로 진학했다.[4] 당시 OB 베어스의 운영 팀장이었던 구경백 現 일구회 사무총장이 만 원짜리 지폐로 정확히 '''5천만원'''이 들어있는 007 가방을 들고 설종진의 집에 찾아가자 설종진의 어머니가 중앙대 감독과 상의해 봐야겠다며 중앙대 최주현 감독을 불렀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온 최주현 감독이 구 팀장에게 "지금 뭐하는 거야!"라고 소리를 지르고서는 다른 대학, 프로팀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설종진을 경기도 포천에 있는 한적한 시골집으로 도피시켰다(...).[5] 등번호는 40번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