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호
1. 소개
지도자 및 행정가로서는 前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자 기업인, 그리고 파주 챌린저스 감독 등을 역임하였다. 한때는 인품과 능력이 훌륭한 코치, 감독으로 평가받았으나, '''뇌물을 받아먹고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그 동안의 좋던 이미지를 모두 말아먹었다.
비리 사건과는 별개로 롯데의 팬들한테서는 성기영, 제리 로이스터 등과 더불어서 이미지가 굉장히 좋은 지도자 중 하나이다.[3] 또한 롯데 감독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성적을 잘 냈음은 물론 승률도 좋고, 또한 후임들과는 다르게 포스트시즌에도 개근할 정도로 능력은 확실히 있었던 감독이었기 때문에 그리워하는 팬들도 많다.
2. 선수 경력
데뷔는 실업야구에서 했다. 프로선수로서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해태 타이거즈에서, 1986년부터는 OB 베어스에서 뛰었다. 주로 백업 2루수, 3루수로 활약했고 한대화 트레이드[5] 때 OB로 이적하여 김성근 감독 밑에서 1년을 뛰었다. 통산 타격 기록은 4시즌 동안 195경기 출장, 467 타석에서 타율 0.223, 홈런 4, 타점 41, OPS 0.585.
선수시절 자랑할만한 경력은 해태 타이거즈의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4번타자를 '''한 달동안''' 맡은 것과[6] 1983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대타로 나와 결정적인 2타점 2루타를 때려낸 정도? 파랑새존에 대하여 언급할 때 나왔던 이야기.
전 롯데 자이언츠 수석코치인 박영태와 맞먹을 정도로 수비실력도 안 좋았는데 195경기에 출장하는 동안 실책을 18개 저질러서 경기당 평균실책수가 0.092.[7] 게다가 프로야구 첫 번째 끝내기 실책의 주인공이다.(...)[8] 공격도 안 되고 수비도 안 되고... 프로 경력을 실력 없는 무명 선수로 마쳤다. 김응룡 감독의 욕을 실컷 얻어먹기도 했다고 한다.
3. 지도자 시절
3.1. 신일중학교 야구부 감독
신일중학교 야구부 감독[12] 당시 1988년부터 1990년까지 46연승을 올리면서 유능한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이 당시 제자들이 김재현과 조인성 등인데, 이 당시 조인성에게 앉아쏴를 가르쳤다고 한다.[13]
3.2. 두산 코치 시절
신일중 감독으로서 보여준 게 있던지라, 1991년부터 3년간 OB에서 전력분석요원과 스카우트로 일했다. 스카우트로 일하면서 마음껏 역량을 발휘했다. 류택현 대신 유지현 지명을 주장하고, 신일고 제자 김재현의 프로 직행을 추천한 일화가 유명하다. 이때 발탁한 선수들이 심정수, 진필중 등이 있다.[14] 이후 1995년부터 코치가 되어, 두산 베어스에서 수석코치와 수비코치를 지냈다. 이 당시 일화로는 타이론 우즈가 병살타를 치고 덕아웃에 들어와서 배트와 글러브를 집어던지며 화풀이를 하자, 의자를 우즈에게 집어던지면서 이른바 참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2003 시즌이 끝나고 선동열 감독 영입설로 인하여 김인식 감독이 사퇴하자[15] 김경문 당시 배터리 코치와 함께 두산의 새 감독 최종 후보에 올랐으나, 감독직은 최종적으로 김경문 감독에게 돌아갔다. 당시로서는 양승호 감독의 선임을 예상하는 의견이 좀 더 많았고, 김경문은 땜빵 감독이라는 이미지가 팽배했다.
2005년 3월 전지훈련장에서 김경문 감독과 의견 충돌을 일으켜 수석코치에서 해임되고 2군 수비코치로 2005 시즌을 보냈다.[16] 어찌보면, 말 잘못해서 잘린 셈.
3.3. LG 감독대행, 고려대 감독 시절
2006년부터는 수석코치로서 LG 트윈스 유니폼을 입었고, 2006년 6월 이순철 감독의 사임 이후에 감독대행을 역임했다. 2007년부터는 고려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재임했다.
김재박이 LG 감독으로 부임한 후 2군 감독으로 선임됐으나 고려대 감독을 맡기로 해 LG를 떠났을 때는 아쉬워한 LG 팬들도 많았다. 이 시기까지는 양승호의 평가가 꽤 좋았다.
2006년 LG 감독대행 기간에는 이순철의 행각에 질린 LG 팬들에게 무난한 감독으로서 인정받았다. 전임 감독들이 선수들에게 취했던 태도와는 다르게 괜찮은 인화를 보여주었고, 선수 육성 면에서도 감독대행이라는 신분 하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평. 사실 김재박 감독 선임 전에 LG 감독 후보로 고려되기도 했고, 박종훈 감독 선임 때도 후보로 검토되었었다. 다만, 두 번 다 후보군에 올랐다 정도지 높은 순위는 아니었다.
고려대 감독으로서도 인품이 후덕하고 주변이 깨끗하다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 선수들의 구타를 없애고, 수업을 꼬박꼬박 듣게 했다. 그가 오기 전에 고려대 야구부의 구타가 얼마나 심각했냐면, 이상훈은 선배의 구타가 무서워 자주 숙소를 이탈해 도망갔을 정도였으며, 박진만 역시 구타가 무서워서 고려대에 합격하고도 진학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또한 구타로 인한 부상 때문에 선수 생활을 접은 경우도 있고, 구타로 인해 '''자살'''한 야구부 새내기도 있었고 한다.[17] 이런 악습을 철폐했으니 많은 사람들이 인품을 높이 평가했다.
굳이 문제점을 들자면 거의 매 경기 이어진 출첵 야구를 들 수 있겠지만, 이는 고려대 투수층이 두터웠던 덕분에 오히려 각 투수들의 누적 투구수 자체는 적게 운영되는 결과를 낳았다. 고려대는 양승호 감독 재임 아래 특정 투수가 60이닝 이상 소화한 바가 없었고, 각 투수들이 40~50이닝 정도를 고르게 소화하며 경험이 풍부한 고학번 투수들과 상대적으로 어린 저학년 투수들 모두에게 고르게 공을 던질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였다. 고학번의 프로 지명을 대비하면서도 저학번의 성장에 기여하는 방향의 운영을 했던 것이다. 프로라면 확실한 에이스 하나에 의존하여서라도 승리를 챙기는 데 주력하는 것이 옳겠지만 학생 야구는 교육이다. 오히려 학생 야구에서 성적에만 목매는 게 이상하다. 특정 에이스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칠 정도로 높은 상당수 대학야구 지도자와는 분명 달랐던 모습. 거기다 출첵야구가 어디 한두 군데 이야기는 아니다.
프로선수, 구단 프런트, 중-고-대 감독, 프로 코치, 프로 감독대행을 거치면서 어디에서도 안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고려대 감독 당시 억대에 달하는 금품을 받고 부정입시에 협력한 것 때문에 위의 좋은 평가는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선수들의 인생을 가를지도 모르는 대학 입시에서 부정을 저질렀단 것은 야구 지도자로서도, 나아가 인간으로서도 상당히 비겁한 짓이기 때문이다. 롯데 팬들은 양승호를 빨리 보내버린 롯데 프런트를 찬양했다. 만일 양승호가 사임하지 않고 계속 감독직에 있었다면 롯데 자이언츠의 2013년은 LG 트윈스의 2012년과 맞먹는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한편, 양승호의 죄가 분명하기는 하지만, 비단 양승호만의 잘못은 아니고 원래 대학 야구팀 감독이라는 자리 자체가 워낙 꼬인 악습이 많았다. 특히 명문대로 알려진 연고대는 더더욱 그랬고. 같이 구속된 정진호 전 연세대학교 감독도 마찬가지다. 한대화도 동국대학교 감독 시절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그 쪽 사정을 아는 사람 이야기로는 이 당시까지 명문대 대학감독 거친 사람 중에 구속 안 될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2014년 롯데 팬들의 반응은 180도 달라져, '''이 감독 대신 김시진이 복역해야 한다'''[18] 라는 소리가 나왔다.
일단 양승호가 고려대 감독을 하던 시기는 고려대 야구부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감독일 때의 학생들은 08[19] ~14년 드래프트 자원이었는데, 먼저 양승호가 감독을 하기 전에 이미 입학한 2007년 기준 2~4학년들의 기록이다.
이 다음 양승호가 4년 동안 감독을 하면서 뽑은 선수들의 기록들이다.
양승호가 마지막으로 뽑은 학생인 10학번 이후인 고려대 학생 중 김주한을 제외하면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는 없으며, 이전에는 육성선수까지 합치면 대부분 프로를 밟아보기라도 했는데 가장 최근인 14학번과 군필 12학번의 경우 이승헌 한 명을 제외하면 육성선수조차 되지 못했다.[21]
3.4. 롯데 자이언츠 감독 선임
2010년 시즌을 끝으로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해임되자 차기 롯데 자이언츠 감독에 대해 무수한 인물이 하마평에 오르내렸다. '20년 동안 우승하지 못한 것'이 로이스터의 해임 사유였기에 감독으로서의 우승 경력이 있는 인물들인 김재박, 김인식을 비롯하여 당시 계약 기간이 남아있던 김경문 두산 감독[22] 의 이름까지 거론되었지만, 막상 구단 수뇌부에서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사람은 프로 감독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양승호 고려대 감독와 이만수 SK 와이번스 수석코치였다. 이후 아무도 예상치 못한 양승호 고려대 감독이 2010년 10월 21일,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기간은 3년, 계약금은 2억원에 연봉 2억원이었다.
이로서 2011년 프로야구에 베어스 출신 감독이 6명[23] 에 고려대 출신 감독이 3명[24] 이 되었다. 이 두 집합 중 어느 한 쪽에도 발담그고 있지 않은 감독은 넥센 히어로즈의 김시진과 삼성 라이온즈의 류중일 뿐인데, 이 둘은 공교롭게도 한양대학교 - 삼성 라이온즈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에 SK 와이번스 감독이 된 '''이만수'''도 포함. 그래서 한양대 - 삼성 출신 감독은 2012년 기준으로 총 3명이 되었다.
롯데의 공식적인 양승호 선임 사유는 '젊고 패기에 찬 구단을 이끌어 나갈 새 사령탑으로 양감독이 적임자라고 판단했다!'이다. 하지만 이는 로이스터를 해임할 당시의 사유였던 '''우승'''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행보라는 점에서 의아함을 낳고 있다. 사실은 연봉이 싸다.(...) 롯데 구단은 과거부터 흑자 구단이면서 필요한 곳에 돈 안쓰다가 말아먹는 일이 많았고, 이번 인사도 '로이스터 감독이 6억을 받는데[25] 1/3 가격으로 처리할 수 있어서'라는 말이 신빙성을 얻고 있으며 양승호 본인이 인품이 좋다는 이미지는 있지만 성적을 잘 뽑아낸 실적이 아직까지는 없어 여론은 그냥 로이스터에게 돈 주기 싫어서 뽑았다는 쪽으로 점점 굳어가고 있다.(...)
2010년 10월 22일 취임식을 했는데... '스몰야구도 시도하겠다.'[26] , '로이스터는 선수들과 대화가 부족했다.', '전력분석 아직 잘 모르겠다.', '카림 가르시아만한 타자 많다.'[27] 같은 발언들을 폭풍처럼 쏟아내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크보의 흔한 용병타자는 2011년동안 72경기에 출전, 18홈런 61타점을 기록했다.
3.4.1. 감독 성향
시즌 시작 전, 그리고 시즌 개막 후 4, 5월을 거치면서 나오는 가장 확실한 면모는 '욕을 먹으면 고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즌 개막 이후 고원준 혹사, 홍성흔 외야수 및 전준우 3루수 기용, 빠른 선발 강판 등 전혀 롯데에 대한 이해 없이 그냥 자기가 아마추어에서 하던 방식을 고집하면서 언론플레이까지 하다가 욕을 먹고 청문회 위기까지 간 이후 어느 정도 2010시즌 롯데의 모습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욕 먹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피드백이 확실하다. 이 부분에서는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투수 운용에 대해서는 임기 초에 엄청난 혹사로 인해 말이 많았다. KBO에서도 2000년 이후에는 거의 사라진, 중무리 투수 운용으로 대표되는 80년대 투수 잡아먹으며 연명하던 감독들의 마인드를 그대로 가져왔다. 한박자 빠른 투수 교체를 하고 있으나 승리조 불펜 투수들을 상당히 자주 등판시키고 있으며 크게 이기고 있는 경기에도 필승조를 투입해 논란이 일고 있다. 그리고 이 필승조들은 그 후유증으로 5월달에 퍼져버리면서 회복하지 못했다. 특히, 고원준과 임경완의 잦은 등판은 비상식적인 수준의 혹사였다. 게다가 불펜뿐만 아니라 선발 투수진도 4월 시즌 개막부터 5선발이 아닌 '''4선발 체제'''로 돌리고 있다. KBO에서도 KIA, 삼성 등 여름을 대비하여 가끔 6선발 로테이션을 돌리는 팀도 있는 와중에... 심지어 컨디션이 좋은 브라이언 코리를 원래 로테이션에서 하루 앞당겨(4일 쉬고 등판) 4월 7일 삼성전에 등판시킬 것이라고까지 했다. 다행히 4월 7일 삼성전은 우천으로 취소. 4월에는 고원준을 혹사시켰으며, 8개 구단 팬들의 여론이 워낙 나빠지자 5월에는 외국인 브라이언 코리를 혹사시키고 있다. 그리고 코리가 퍼지자 목표를 이재곤으로 바꿔서 불펜 등판 이틀 후 선발 등판을 시키고 있다. 그러다가 이재곤이 부진에 빠지자 이제는 진명호를 굴리고 있다. 특히 불펜의 경우, 시즌 시작 전에 전임감독을 향해 승리조와 추격조의 구분이 없었다며 디스해놓고는 정작 자기 자신은 불펜진에서 승리조, 추격조 구분 안 하고 오히려 선발까지 불펜진으로 땡겨쓰는 막장 행각을 벌이고 있다. 그래놓고는 투수들이 안 좋다고 징징 짜면서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선수 디스까지 하는 위대한 막장성을 선보이고 있다.
다만 위에 나열한 악평은 시즌 초에 갈피 못 잡았을 때 의 이야기고, 갖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듯한 2011년 말에는 혹사의 강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초보감독의 한계인지 투수 운용은 여전히 미숙한 면이 있었다. 2012년에도 김성배, 이명우, 최대성과 같은 필승계투조를 많이 굴리는 등 완전히 나아지지는 않았다. 거론된 이 세 명의 투수는 양승호 감독 재임 기간 동안에 3일 연투, 혹은 심지어 4일 연투도 몇 차례 기록된 적이 있다.[28]
작전 면에서는 2011년 초에 번트를 너무 자주 댔고 히트 앤 런, 런 앤 히트 등의 작전을 너무 자주 거는 편이다. 롯데의 팀 공격력이 강하기 때문에 작전을 자주 걸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작전 구사가 많다는 의견이 중론. 2011년과 별 차이 없었던 2010년 롯데 타선에 대해서 김성근 감독이 '그 정도의 타선이면 굳이 작전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나마 2011년 후반에는 작전성공률이 높아지면서 악평이 어느 정도 사그라들긴 했다. 다만 양승호의 작전 타이밍을 잡는 능력과는 별개로 롯데에 작전야구의 혼합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알게 모르게 수용되는 형세이다. 이게 다 4년째 포스트시즌에서 지지부진한 탓. 2012년 들어 이대호가 빠지고 나서부터는 밀어치기와 희생 야구를 강조했는데, 덕분에 팀 희생타가 리그 2위에 달할 정도로 많아졌으나 정작 타율에 비해 득점이 최하위권에 머무르며 그리 좋은 결과는 얻지 못했다.
사실상 롯데 재임 2년간 꾸준히 지속되고 지적받은 단점은 양떼 야구로 대표되는 불펜진 혹사 뿐이다. 이외의 대부분의 단점을 스스로 고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필승조 굴리기 자체도 부임 초기의 고원준/코리 혹사에 비하면 혹사라 부르기 미안한 수준.[29] 성장형 감독이 실존함을 잘 보여주던 인물이다. 특히 후임 감독인 김시진이 그보다 더 심한 롱릴리프 조지기와 좌우놀이로 2년간 최강 불펜진을 완전히 태워먹었기에 양승호 감독이 더더욱 미화되는 경향이 있다. 똑같이 혹사를 했다면 만년 5,6위 감독보다는 2년간, 그것도 2년차에는 '''4번타자가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에이스는 군대 가고 거기에다 밀어 때리는 타격코치의 저주까지 서린 팀'''을 추스려 4강 보내준 감독이 훨씬 낫기 때문. 롯데 자이언츠 프런트의 만행이 드러나면서 김시진 감독에 대한 새로운 동정론이 부상했지만, 이와 별도로 대다수 롯데 팬들은 김시진보다 양승호 감독이 뛰어난 감독이라는 데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2012 시즌 직후에는 시즌 막판의 대붕괴와 입시비리가 드러나면서 이 정도로 평가받지는 못했지만, 이후 후임 감독이 2년 연속 이와는 비교가 안되는 DTD를 시전하며 투수진의 뿌리까지 뽑아서(...) 사실상 2014 시즌 이후 제리 로이스터 전 감독과 함께 재평가 대열에 합류했고 주가가 엄청나게 올랐다.
3.4.2. 2011 시즌
정식 프로 감독 데뷔 시즌으로 초기에는 프로 감독 자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호구 소리를 들었으나, 이후 자신의 과실을 깨닫고 고쳐 나가며 팀이 상승세를 타게 되었고, 마침내 정규시즌 2위라는 과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일명 '''성장형 감독'''.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당시 이만수가 감독을 맡고 있었던 SK 와이번스에게 패배하여 최종 순위는 3위가 되었다.
양승호/2011년 참조.
3.4.3. 2012 시즌
시범경기는 봄데가 아닌 꼴데로 마감하였으나, 시즌 초부터 상승세를 타며 페넌트레이스 단독 1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후 들쭉날쭉한 성적으로 팬들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으나, 6월경 다시 상승세를 타며 상위권에 안착, 7월 초에 단독 1위를 하고 이후로도 꾸준히 4강권을 유지하면서 무난한 평가를 받았으나, 9월 들어 갑자기 팀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다시 욕을 먹기도 했다.
9월 14일 기아와의 더블헤더를 시작으로 10월 2일 드디어 승리를 얻기까지의 이 기간동안 14경기에서 1승 1무 12패 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 시기 이전까지 2위를 유지하던 당시 순위가 이 시기의 부진 덕에 4위로 급추락하며 준플레이오프 진출조차 아주 위험해졌다. 또한 로이스터 감독 부임 이후부터 굳어져가던 '여름 이후 치고 나가던' 팀 체질이 다시 뒤틀리기 시작한 시기로도 볼 수 있다.
이런 급작스런 부진에는, 시즌 초부터 계속 이어진 불펜투수들의 잦은 등판 지시가 하나의 원인이고, 부상 선수들이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이 시기에 우르르 출몰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후반기 막바지 주전들의 줄부상은 코칭 스태프들의 선수 관리에 큰 문제점이 있다는 방증. 이 시기 팀 타선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시즌 내내 이대호 없이도 근근히 한 경기 서너점씩은 내주던 팀 타자들이 후반기들어 전염병 돌듯 침묵하는 기간이 늘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팀득점이 2점 내기도 굉장히 버거웠을 만큼 대침묵. 이는 팀의 투수진들에게 더 큰 부담을 주게 되었는데, 안 그래도 시즌 초부터 양감독의 잦은 출첵 등판 지시로 개고생하던 이명우, 최대성, 김성배 등 불펜 투수들에게 더 큰 심리적 압박감을 주게 되었다. 선발들도 이를 아는지라 최소 실점으로 막아야하는 부담감에 같이 힘겨워했다. 이에 투수진마저 이 시기 전후로 퍼지기 시작하며 팀이 급격한 하향세를 타게 되어 순위가 2위에서 3위로, 3위에서 4위로... 추락하게 된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롯데는 정규 시즌 4위를 겨우 기록하며 5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진작에 순위를 고정짓고 타 팀 전력을 탐색하면서 포스트시즌을 준비해야할 10월 시즌 막바지까지 4강 싸움을 벌이게 되면서, 선수들의 체력 및 부상 관리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이것이 포스트 시즌 중도 탈락의 원인 중의 하나로 꼽힌다.
준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를 3승 1패로 꺾고 13년만에 상위 시즌인 플레이오프로 진출했으나, 작년에 이어 '''또''' 이만수의 SK 와이번스와의 접전 끝에 2승 3패로 패배하면서 최종 순위 4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팀이 13년만에 가을야구 시리즈 하나를 가져간 것은 인정할 만한 실적이라 할 수 있겠다.
양승호/2012년 참조.
10월 24일, 구단과의 만남에서 최종사의를 표명했고 구단이 10월 30일에 이를 수용하며 언론 보도를 탔다. 2011년 초반을 제외한다면 덕장의 면모를 꽤 보여주었고, 전력 대비 괜찮은 성적을 냈기에 많은 팬들이 현장 복귀를 바랐다. '''하지만 입시 비리로 인해 사실상 없던 일이 되었다'''.
4. 입시 비리
2012년 12월 13일, 고려대학교 야구부 감독 재임시절 입시 비리로 금품을 받은 정황이 포착되어 정진호와 더불어 긴급 체포되었다. 검찰에 따르면 2007~2010년 학부모와 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들에게 뇌물을 받고 고려대에 입학시켜 달라는 청탁을 들어주었는데, 받은 돈이 '''억대'''에 달한다고 한다. 검찰에서는 체포 이후 구속영장까지 신청할 예정이라고. # 만약 유임[30] 이 되었다면, 롯데는 시즌 중에 현역감독이 체포당하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맞을 뻔했다.
당시 롯갤에서는 연말에 프런트에 떡을 조공하자며 기부금 모으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나, 돈을 모으니 마니 불발 될 듯하다가 양감독 체포 이후 떡에다가 '''☆★축 양승호감독 경질 ☆★'''(...)#을 새겨서 떡을 돌리자는 여론이 대세가 되었다. # 그리고 다시 2012 초보 야구 감독들의 신년운세가 주목받았다. #
선수단은 당연히 멘붕 상태. 실제로 시즌 중에 검찰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프런트는 몰랐다는 기사를 냈지만,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모른다는 입장을 발표한 그 기사에서도 '''짐작'''은 하고 있다는 어투. 프런트와 양승호 감독간의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012년 후반기 이후 사이가 급격히 악화된 것 또한 이 때문이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12월 21일 부로 검찰에 구속 기소 되었다. 첫 재판에서 공소사실에 대해 인정하였다고 한다.# 2013년 4월 11일, 치질로 인한 병보석 석방이 허가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수감 생활 중 건강 악화로 병보석 허가.
2013년 6월 18일, 징역 2년이 구형됐다. 7월 4일 징역 1년 3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하겠다고 하였다.
2013년 11월 29일, 항소심 결과 원심과 같은 징역 1년 3개월에 벌금 1억 원이 확정되었다. 보석이 취소되어 재수감되었다.
2014년 3월 13일, 대법원은 징역 1년 3개월과 벌금 1억 원을 확정지었다. 1차 구속 4개월과 법정구속에서 확정까지 3개월을 구치소에서 보내고 이후 5개월 가량을 더 복역하다가 같은 해 8월 출소했다.
'''그렇게 양승호 전 감독은 입시비리로 인해 범죄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올스타전에서 김응용 한화 전감독 감사패 전달식에 참석했다.
연예인 야구단 감독으로 있었으며, 또한 리틀 야구단 인스트럭터도 겸한다고 했다. 그리고 본인이 말하길 그 받은 돈 수억 원을 쓰지 않고 모두, 전지 훈련비로 썼다고 한다. ##
하지만 양승호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마치 배임죄가 횡령죄보다 가벼운 듯 얘기하지만, 횡령과 배임은 그 범죄의 주체가 재물보관자인가 타인사무처리자인가에 차이가 있고 그 객체가 재물인가 재산상의 이익인가에 차이가 있을 뿐 '''처벌과 형량은 똑같은''' 범죄다. 또 양승호 감독은 단순한 배임죄도 아니고 '''배임수재죄'''이다. 2심 판결에 따르면 '''1억 원 중 "일부"를 야구부 운영과 관련해 사용한 것으로 보이고'''라고 하여 일부가 야구부 운영에 사용되어 그 부분이 유리한 양형요소로 판단된 건 사실이지만 "전부" 쓰였다는 주장과는 차이가 있다.
애시당초 대법원에서 1년 3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될 정도의 범죄를 저질렀는데 '내가 정말 나쁜 행동을 한건가'라고 억울해 할 수 있는건지 생각해봐야 한다. 2심 재판부는 1년 3개월의 형을 선고하면서 “특히 피고인은 스포츠계와 교육계를 위해 일하는 일종의 공인으로서 그에 합당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타에 귀감이 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의무와 기대를 저버린 채 공정성이 중시되는 교육현장에서 공무원의 뇌물수수에 버금가는 비리를 저지른 것으로 사안이 중하다”라고 밝혔다. 또한, “나아가 피고인은 당심에 이르러 '''종전의 반성하던 태도를 번복하고 자신의 잘못을 전혀 뉘우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5. 이후
2016년에 들어서는 지인이 운영하는 항공 물류회사 직원으로 취직하여 제 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야구에 대한 끈은 절대 놓지 않으며 야구로 봉사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2016년 11월 파주에서 창단 예정인 독립구단의 감독으로 내정되어# 같은 해 11월 28일, 한국 3번째 독립야구단인 파주 챌린저스가 창단되면서 감독직에 임명되었다. 보수는 없으며 재능기부를 할 것이라고 한다.
2018년 11월 6일, 스포츠 에이전트사 대표가 됐다는 기사가 나왔다. 1호 계약은 전준우, 신본기. 하지만 어떻게 유소년 선수들의 입시 비리를 저지른 사람이 에이전트사를 운영할 수 있냐면서 안 좋은 말들만 많이 나오는 상황이다.
2019년, 롯데가 새로운 감독을 찾을 때 제일 먼저 연락한 사람이 양승호였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이 거절한 후 롯데는 양상문으로 선회. 그리고 그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019시즌 이후 양승호와 계약을 맺은 선수들의 FA협상이 최악으로 치닫으며 에이전트로의 능력이 있긴 한가에 대한 말이 나오고 있다.[31]
한선태, 송윤준, 김동진 등 10명의 선수들을 KBO 리그로 진출시켰으며, 2020년 계약 만료로 파주 챌린저스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고양시 클럽야구 총괄단장을 맡게 되었다.
6. 별명
6.1. 롯데 감독 시절 별명
2011년 초중반까지는 비꼬거나 부정적인 별명이 주류였지만 팀이 상승세를 보이면서 긍정적인 별명도 나오기 시작했고, 2011년 시즌 종료 이후엔 과거의 부정적인 별명들은 그대로 묻히게 되었다. 그러다 2012년 팀이 부진해지자 다시 일부 부활했으며, 팀 성적이 나쁘지 않을때도 팬들을 마치 폭도처럼 몰아붙이는 데 반감을 가진 일부 팬들은 부정적인 별명을 부르곤 한다.
- 소통왕: 양승호 감독이 제리 로이스터 감독처럼 선수들과 소통을 더 많이 한다고 언론에서 붙인 별명. 물론 팬들은 기자들하고만 소통한다며 조롱하는 의미로 부른다. 8월 이후 팬들이 바라던 모습을 보여주며 팬들과도 소통한다는 진정한 소통왕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 야메떼: 일본말 맞다. 그리고 그 의미 그대로 '그만둬!', '그만해!'의 의미. 야신, , 등 다른 감독들의 별명과 맞추다 보니 자연스럽게 야메떼가 됐다.참조 비슷한 의미의 다른 별명으로는 야매, 야호가 있다.
- 양백정: 양승호 + 백정. 투수를 혹사시켜 잡는다는 뜻으로 생긴 별명.
- 양쇼부: 양승호 + 쇼부(일본어로 승부). 2011년 08월 28일 경기에서 5회 말 번트 시프트로 무사 2루에서 3루로 가는 주자를 잡고, 6회 초 더블 스틸, 8회 초 황재균의 기습적인 홈 도루를 시도하여 유발한 포일로 득점하는 작전을 보여주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감독 인터뷰에서 '5회에 쇼부...아니 승부를 봤다'라고 한 것이 입에 짝짝 달라붙는다는 이유로 붙었다.
- 양승호구: 양승호 + 호구. 양승호의 별명 중에 제일 널리 알려진 별명이다. 여담으로 네이버를 포함한 일부 포털 사이트에서는 봇을 돌리는지 호구라는 단어만 들어가면 리플이건 게시글이건 자동으로 삭제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각종 수학기호를 사용해서 9를 만들기도 하고 한자나 특문 등을 사용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 양승호굳, 양승호감, 양승호쾌: 2011년 8월 당시 팀이 상승기류를 타고 있어서 붙여진 별명.
- 양승호날두: 양승호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양승호랑이: 양승호 + 호랑이. 양승호의 호자가 범 호(虎)자인것을 생각하면 어떤의미로는 잘 어울리는 별명이다.
- 양승호불호: 양승호굳과 양승호구 사이에서 적절히 줄타기를 하는 너무나 적절한 별명.
- 양승호카게: 직구와 조크볼에서 유래했다. 복장은 3대 호카게.
- 양승홈리스: 선수들에게 방을 내주고 노숙자행...
- 양올감: 양승호 올해까지 감독의 준말.
- 양원균: 능력있는 전임 감독이 물러나고 무능한 후임이 온 상황이라며 붙은 별명. 그리고 로이스터에게는 로순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 양일단: 경기 후 승장 인터뷰에서 모든 대답을 '음~ 일단은...'으로 시작하는 버릇에서 비롯된 별명.
- 양크로맨서: 다 죽어가거나 죽어있는 상대팀의 투수들을 부활시킨다고 해서 붙은 별명. 샤다라빠도 자기 블로그에 연재 중인 꼴데툰에서 죽은 투수도 살려내는 명의라고 대차게 깠다.#
- 양호로: 양승호 + 호로XX. XX는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변할 수 있으므로 알아서 채우자.
- 운장: 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따른다는 데서 온 별명. 7월쯤부터 슬슬 나오기 시작하다 8월로 들어와 박종훈과 김광수가 연달아 삽질을 거듭하면서 비난이 줄어든 데다 8월 18일 김성근 해고 사태로 3위까지 노려볼 수 있게 되어서, 천운이 따르는 운장 양승호.
- 제갈양승호: 제갈량 + 양승호.
- 태양승호: 태양 + 양승호
- 호로로: 양승호 + 뽀로로
- 호요미: 양승호 + 귀요미. 한 혀갤러가 붙인 별명.
- 제갈양승호날두: 제갈량 + 양승호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양승호헤호헤호 박~기남 호헤호헤호: 양승호와 박기남 응원가의 절묘한 조화
6.2. 입시 비리로 인해 구속된 이후 생긴 별명
- 양승호구속[32] : 입시비리 문제로 체포.
- 양승호주머니: 뇌물. 당연히 뇌물을 받아서 호주머니에 넣는다는 뜻의 말장난이다.
- 양승호의호식: 뇌물 받은 돈으로 잘먹고 잘살았다는 이유로...
- 양승호감옥: 긍정적인 별명이었던 '양승호감'에 '감옥'을 합쳐서 부정적인 의미로 만든 별명이다.
- 양치질: 수감생활 중 치질 악화로 석방(...)[33]
- 양레기: 양승호 쓰레기.
- 감옥님: 감동님의 변형.
- 갓옥님: 갓 + 감옥님. 김시진 - 이종운이 롯데를 말아먹던 시기에 양승호 재평가론이 제기되며 나온 말이다.
- 옥중감독: 2014 시즌 끝나고 4강에 못 간 SK, 두산, 롯데, KIA, 한화가 감독을 교체하면서 불타는 감독 시장이 열렸는데, 이때 양승호 전 감독을 복귀시키자는 떡밥이 나오자 다들 옥중감독의 교도소 매직으로 4강을 외쳤다(...)
7. 여담
8. 관련 문서
[1] 헌데, 포털에는 서울특별시 출신으로 나온다. 이는 아마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것이 와전되어 기록된 듯 하다.[2] 1978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 준우승#[3] 단, 이는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는데, 팬덤에서 양승호의 범죄 행위 자체를 실드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범죄는 고려대 감독 시절에 저지른 거지 롯데 감독 때 행한 게 절대로 아니다.[4] 선수 시절을 통틀어 성적이 변변치 못했다. 가장 성적이 좋았던 시즌 성적이 2010 시즌 불사조라면서 까이던 박영태 전 롯데 수석코치보다 못하다.[5] 한대화 ↔ 황기선·양승호[6] 당시 해태를 말하려면 '소수정예'라는 말을 빼놓을 수 없을 정도. 선수층은 얇아도 주전의 수준은 무시무시했다. 당시 김성한, 김봉연, 김종모의 성적을 보면... 실제로 양승호가 이들보다 더 잘한 건 아니고 김응룡 감독이 선수들을 자극하기 위해 잠시 넣은 것이다.[7] 단, 내야수였으니 실책 수가 많은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8] 1983년 8월 3일 경기였는데, 이 경기는 1984년 연감의 명경기에 소개되기도 했다.[9] 시즌 도중 자진사퇴한 이순철 감독대행[10] 플레이오프 敗[11] 플레이오프 敗[12] 공식적으로는 감독이 아니었다.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대한야구협회는 프로야구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갔던 사람들은 아마야구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지 못하게 막았었기 때문이다. 이 제약이 철폐된 1997년까지 프로 출신 인사들은 다른 명목으로 은밀히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13] 다만, 이는 조인성이 비만이였던지라 어쩔 수 없는 감이 있었다. 그래도 프로에서 성공했으니, 잘 됐다고 볼 수가 있다.[14] 진필중 문서에 잘 나와 있지만, 눈치 작전으로 스카웃 경쟁에서 승리한다.[15] 하지만 결국 선동열 감독 영입이 무산되었는데, 이는 선동열 감독이 감독 취임 조건으로 확실한 투자를 요구했기 때문이다.[16] 김경문 감독의 강훈련에 코치진들이 없는 자리에서 강한 불만을 표하자 달랜다고 예전에 같이 겪었던 일들, 즉, 뒷담화를 했다가 김경문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김경문이 따로 양승호를 불러서 같이 일 못하겠다고 하고 프런트에 자신이냐 양승호냐 둘중에 양자택일하라고 압박했다 한다. 김경문 감독은 대표적인 맹장형 감독이고, 절대 권위에 조금이라도 어긋하는 행동은 용서하지 않는다. 이 내용은 박동희가 일요신문에 기고했던 내용.[17] 2003년 드래프트에서 SK 와이번스에 지명받고 고려대에 진학한 구본원. 입학식 전에 야구부 숙소에 들어갔다가 입학식도 못 가고 자살했다.[18] 비슷한 사례로 '''롯데가 국가라면 백골퍼는 국가보안법에 의해 사형'''이라는 말이 있다. 다만, 2014 시즌 후 진실이 드러나면서 복역해야 하는 인물은 김시진에서 최하진 롯데 사장으로 바뀌었다.[19] 사실 08~10년 드래프트까지의 학생들은 양승호가 직접 뽑은 것은 아니라 좀 애매하긴 하다.[20] 08학번 12명 중 윤석, 강윤중을 뺀 10명이 프로 진출에 성공했고, 6명이나 드래프트되었다. 2018년 기준 4명이 현역이다.[21] 고려대 야구부 14학번은 유급한 임양섭을 제외하면 전원 졸업. 김규남같이 독립 리그로 진출한 사례도 있긴 하다.[22] 리그에선 우승한 적 없지만 올림픽에선 있으니까...[23] 김성근(OB감독 출신), 김경문(OB선수 출신), 한대화(OB선수 출신), 박종훈(OB선수 출신), 조범현(OB선수 출신), 양승호(OB선수 출신).[24] 김경문(두산), 박종훈(LG), 양승호(롯데). 2010시즌이 끝나고 해임되지 않았으면 선동열 역시 여기에 들었겠지만 짤린 덕분에...[25] 사실 로이스터 몸값은 3억 6천만원선. 리그 중간 정도 밖에 안된다. 6억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건 재계약 당시 사이닝 보너스가 3억 추가되었는데 연봉과 보너스를 합치면 7억 정도를 받게 되어서인 듯. 물론 통역비나 기타 부가비용이 들어가면 4억원선이 되긴 한다. http://sportopic.com/367 정확한 연봉액수에 대해 나온다.[26] 정확히는 스몰야구만 하겠다는 것이 아닌 선이 굵으면서 스몰야구도 하겠다는 것으로 기사 내용으로 보면 롯데에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27] 가르시아의 경우는 좀 미묘해서 통산 성적을 보면 높지만 연도별 성적을 따지면 해가 갈수록 낮아지는 성향을 보인다.[28] 사실 프로야구 초창기나 지금이나 혹사라는 굴레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감독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29] 그러나 2년차에도 김성배, 이명우를 중심으로 김사율, 강영식, 최대성 등 불펜진에 가해진 부하는 상당했다. 문제는 김사율을 제외한 선수들은 후임인 김시진이 더 확실하게 조졌다는 것(...)[30] 3년 계약이었기 때문에 그의 임기는 2013시즌까지였다.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사퇴했던 것이다.[31] 전준우는 양승호 측에서 손아섭, 민병헌 등과 비교하며 80억 등의 언플만 해대고 협상에 전혀 진전이 없어 결국 결별하고 본인이 직접 협상에 임해 계약을 완료했으며, 고효준, 손승락은 입장 차이가 너무 커 사실상 결별 수순에 들어갔다. 결국 손승락은 양승호와의 연락두절인 채로 지내다 은퇴를 선언했다.[32] 물론 이것은 기존 별명이었던 양승호구#s-4와 구속을 한데 합친 것이다.[33] 물론 원래 있던 단어인 양치질이라는 기존 단어를 응용하여 '양'승호와 '치질'을 합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