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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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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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2년 8월 24일부터 10월까지 위그노 전쟁 중이었던 프랑스 파리에서 가톨릭 세력이 개신교 신자였던 위그노인(Huguenot)들에게 행한 대학살. 생바르텔레미 축일의 학살(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로도 불린다. 학살이 시작된 8월 24일 밤이 가톨릭에서 예수의 12사도였던 바르톨로메오의 축일이었기 때문에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라 부른다.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증거가 확실한 인물은 콜리니 암살의 장본인인 기즈 공작 앙리, 자신의 일기에 콜리니 암살 계획을 적은 앙주 공작 앙리, 그리고 가톨릭 진영의 실세들인 느베르 공작과 레츠 백작, 마지막으로 기즈 공작의 어머니인 느무르 공작부인 안 데스테였다. 이외의 인물들의 연루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2. 전개
2.1. 콜리니 저격 사건
사건의 발단은 발루아의 마르그리트 공주와 나바르의 앙리(앙리 4세)간의 정략 혼인에서 시작되었다. 발루아 왕조의 실권자였던 왕후 카트린은 가톨릭과 위그노 간의 화평을 위해서 위그노(프랑스 내 개신교인) 진영의 중심이었던 나바르 여왕 잔 달브레의 아들인 앙리와 자신의 막내딸을 혼인시키기로 했다. 이 혼인에는 만약 발루아 왕조에 왕위 계승자가 없을 경우 나바르에 왕위 계승권이 넘어가기 때문에 마르그리트를 통해서 모계로라도 발루아의 혈통을 계승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2]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위그노 진영의 지도자인 가스파르 드콜리니였다.
콜리니는 몽모랑시 가문 사람이었고,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자질로 젊었을 때부터 주목받던 인물이었다. 그는 한때 카트린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으나, 신교로 개종하고 발루아 가문에 공공연하게 반기를 든 이후 그들의 우정은 깨지고 말았다. 아무튼 샤를 9세는 명석하고 매력적인 콜리니에게 호감을 느꼈고 콜리니의 영향으로 위그노 쪽으로 개종할 듯한 기미를 보였다. 게다가 콜리니는 샤를 9세에게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플랑드르 쳐들어가서 스페인 발라버리는게 어때요?"'''라고 제안했고 샤를 9세는 '''"그거 좋네"'''라고 한 것도 문제였다.[3] 카트린으로선 위그노도 골치 아픈 마당에 당시 최강국이라 할수 있는 스페인과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콜리니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파리로 진격해오는 위그노들을 막고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생 제르맹 앙 레 성에서 전격적인 평화협정을 맺고 처음으로 이뤄졌던 행사가 바로 나바르의 앙리의 정략결혼이었다. 3차 전쟁이 휴전으로 끝났고 승리자였던 콜리니도 결혼식에 초청받았고, 그 결혼식에서 흉탄이 콜리니에게 날아든다. 그러나 총탄은 비껴가 콜리니의 왼팔을 꿰뚫는데 그쳤다. 범인은 그대로 말을 타고 달아나 기즈 가문의 저택 근처에서 종적을 감췄다. 외과수술을 받아 손가락을 자르는 등의 치료를 받은 콜리니의 저택에 카트린과 함께 찾아간 샤를 9세는 눈물을 흘리며 반드시 진상을 밝히겠다고 약속했다.
2.2. 왕명으로 시작된 피의 숙청
이 이후, 간신히 평화를 되찾았던 가톨릭 세력과 위그노 세력간의 알력다툼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위그노 세력의 귀족들이 카트린이 점심식사를 하는 도중 쳐들어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파리의 가톨릭 신자들은 위그노들의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여기에는 카트린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강경 가톨릭 세력의 중심이었던 기즈 가문의 기즈 공과 야심가인 동생 앙리가 가세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기즈 공은 콜리니와 루이 드콩데[4] 의 사주로 의해서 아버지가 암살당한 원한이 있었다. 그래서 기즈 공은 '''"이번 기회에 아버지의 원수도 척결하고 눈에 거슬리는 위그노들을 싹 쓸어버리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기즈 공 때문에 목표는 콜리니 한 명에서 파리의 모든 신교도 대학살로 바뀌었다.
8월 24일, 결국 샤를 9세는 콜리니와 위그노 지도자들을 숙청하라는 명을 내리고[5] 기즈 공은 자신의 병력을 동원해 콜리니의 저택을 들이쳐 그를 살해했다. 가톨릭을 믿는 파리 시민들이 이에 호응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위그노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국왕의 스위스 근위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날 밤에는 프랑스 전국에 걸쳐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위그노인 수천 명이 가톨릭인들에게 학살당했다. 또한 수많은 여자들이 강간당한 후 잔인하게 살해당했으며 어린아이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가톨릭 교도들 역시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와중, 얼마 전에 어머니가 사망하여 나바르 왕으로 등극한 새신랑 부르봉 가문의 앙리는 부인인 마르고의 비호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를 비롯해 왕의 근친인 콩데 공작도 간신히 살아남았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학살에 대해 보고받고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느님을 찬양했다고 하며 바티칸에서도 대대적으로 축포가 터졌다고 한다. 교황은 또한 조르조 바사리에게 지시해 대학살에 대한 프레스코화로 장식하도록 했다. 정확한 위치는 살라 레지아(Sala Regia) 홀로, 바티칸 사도 궁전 내에 있다. 옆에는 레판토 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바사리가 그린 그림도 있다. 이 홀은 교황을 알현하는 등의 공식 행사 때만 열리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겐 공개하지 않고 있다. 교황은 이 학살의 날을 축하하여 ‘하느님께 찬미’란 뜻의 성가인 ‘떼 데움’(Te Deum)을 부를 것을 명했고 특별 감사 미사까지 집전하였으며,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이 날을 축제일과 희년으로 정하고 모두가 이것을 지켰고 기념주화도 제작하였다.
다만 이 학살을 거리에서 구경만 하던 이들이 있었다. 피에 미친 사람들이 "너희들도 위그노냐?" 라고 하자 그들은 불쾌하듯이 "우린 사형집행인이다." 라는 말을 했다. 사람들이 사형집행인이라면 같이 죽여야지 왜 구경만 하냐고 묻자 그들은 "'''재판으로 사형 선고가 내려진 것도 아닌 사람들을 길거리에서 마구 죽이는데 이게 사형인가? 이건 그냥 학살이다! 우린 학살자가 아니다! 법이 허락하지 않은 살인은 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곤 가던 길을 갔다는 일화도 있다.[6]
2.3. 사건 이후
샤를 9세는 결핵에 걸려 서자만을 남긴 채 사망했고 그 뒤를 이어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던 왕제 앙리가 앙리 3세로서 프랑스 왕위를 계승했다. 앙리 3세는 총신들과 어울려 사치 향락을 즐겼고, 점차 인망을 잃어갔다. 그 사이 가톨릭 민중들에게 신망을 얻던 가톨릭 진영의 기둥인 기즈 공과는 갈등을 빚다 결국 암살해 버렸다.[7] 그리고 나중엔 앙리 3세 또한 기즈 공의 암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파리 시를 앙리 4세의 위그노 군대와 함께 포위하다 광신적인 가톨릭 수도자에게 암살당하여 발루아 왕조는 정말로 어이없이 몰락해 버렸다.
위그노들은 이 학살에 분노하여 다시 결집해 발루아 왕조 타도를 외치며 앙리 나바르를 중심으로 결집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네덜란드의 신교도들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일으켰다. 프랑스 정부는 진압에 나섰으나 위그노 반군이 워낙 필사적으로 저항해서 진압이 쉽지 않았고 아예 내전이 프랑스 전역으로 확대되어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위그노의 반란은 앙리 4세가 개종하고 나라를 통일하면서 낭트칙령을 내려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자 마무리된다.
칼뱅파들은 이 사건에 충격을 받고 전제군주정에 심각한 회의를 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칼뱅의 후계자인 테오도르 베즈는 이 사건을 계기로 더 극단적인 칼뱅주의로 기울어졌다.
3. 주도한 세력은 있을까?
현재는 종교적 긴장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기즈 공과 앙주 공작이 주도한 콜리니 암살 사건이라는 계기를 통해 도화선이 터져 가톨릭 교도들의 광기를 불러온 나비효과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3.1. 후보 1 : 카트린
이 학살 사건 이후 배후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다. 20세기가 되기까지 약 3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카트린이 자신의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학살을 주도했다는 것이 전통적인 시각이었다. 실제로 카트린의 죽음 이후 학살에 관여했던 여러 인물들이 한 목소리로 배후에 카트린이 있다고 지목했다. 그러나 20세기 초부터는 사학자들 사이에서 카트린 주범설은 크게 고려되지 않는다. 그녀가 연루되었다는 증거가 발견된 것이 없었으며, 해당 증언을 한 모든 인물들이 학살 당사자들이었기에 크게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인기 없는 외국인이었던데다가 당시에는 이미 사망한 카트린에게 학살에 대한 모든 혐의를 덮어씌우는 것이 책임을 회피하는 데에 제격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카트린이 섭정 기간 내내 추진한 종교 화합책의 결실이 나바르의 앙리와 막내딸 마르고의 결혼이었다. 카트린의 입장에서 가장 큰 이익은 가톨릭과 위그노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트린이 자신의 정책에 정반대되는 학살을 자행하고, 이로 인해 분노한 원수들을 만들어냈으며, 프랑스 국민들 상당수에게 발루아 왕조에 대한 적개심을 심게 만들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더 극단적으로는 나바르의 앙리와 마르고의 결혼 자체가 콜리니 암살과 학살을 위한 연극이었다는 말도 있으나 이 또한 말이 안되는 것으로, 앙리와 마르고의 결혼이 카트린의 정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성공이 될 터였는데 그녀 스스로 이 성공을 물거품으로 만들어야 할 당위성이 없다.
결과적으로 봐도 학살 사건 이후 카트린의 입지는 눈에 띄게 좁아졌다. 왕실에 대한 충성을 잃어버린 것은 물론이며, 가톨릭 쪽 권력은 기즈 가문에게 잠식당했고 위그노에 대한 영향력도 사위 앙리를 볼모로 잡고 있어 가까스로 유지된 것일 뿐 앙리가 카트린의 궁정을 떠나자마자 기껏 구축했던 위그노와의 동맹도 붕괴하고 말았다. 이렇게 보았을 때, 카트린같은 노련한 정치인이 학살이라는 최악의 악수를 두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다만 주범이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카트린의 책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카트린이 콜리니 암살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정황은 충분하며 이를 도왔거나 최소한 무시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카트린의 정책은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과 위그노 간의 상호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그녀가 학살에는 무관하더라도 간접적으로 이 사건에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언젠가 충돌할 것이 분명한, 화해할 수 없는 두 세력을 억지로 왕실의 권위로 누르고 있다가 오히려 더 큰 참사를 불러일으킨 셈이다.
3.2. 후보 2 : 스페인 제국
이외에는 배후로 스페인을 지목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실제로 콜리니는 그만큼 유능한 제독이었으며, 제3차 위그노 전쟁이 한창일 때 위그노 측에 전향하여 지휘를 맡음으로써 불리했던 전세를 뒤엎고 위그노군을 이끌고 파리까지 진격해왔을 정도로 전략전술에 뛰어난 인물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콜리니는 같은 신교파였던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자는 주장까지 해왔다. 스페인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 수도 있는 중요인물로 떠오른 것이다. 물론 스페인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카트린에게도 콜리니는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4. 가톨릭의 사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7년 8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에 가톨릭교회가 개입됐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가톨릭은 이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 @
5. 창작물에서
- 자코모 마이어베어의 오페라 위그노 교도는 이 사건을 토대로 한 가톨릭 신자인 발렌틴과 위그노 라울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 영화 여왕 마고는 이 학살 때 발루아의 마르그리트가 학살로 부상을 입은 라 몰느를 구해주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 1966년 2월, 닥터 후에서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스토리인
가 방영되었다.
6. 관련 항목
[1] #출처 1 #출처 2[2] 샤를 9세는 유약했고 후에 앙리 3세가 되는 앙주 공은 사치만 즐기는 데다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여서 그럴 만했다. 이런 아들들이 후사를 볼 가망이 없자 카트린으로선 모계로라도 자신의 자손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그리트와 앙리 4세 사이에 아이가 없어 카트린느의 후손은 단절된다. 대신 카트린느의 먼 친척인 마리 드메디시스의 아들이 루이 13세로서 왕위를 이어간다.[3] 그래도 내심 불안했는지 네덜란드 총독 알바 공에게 위그노들의 플랑드르 공격 계획을 알렸다고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국왕이 이중플레이를 구사하면서 위그노들을 통제하려 했다고 보기도 한다.[4] 부르봉 가문의 가장으로 앙리의 숙부였다. 당시에는 이미 전투 과정에서 사망.[5] 당시까지는 국왕의 권위가 어느 정도 유지되어 기즈 공작도 스스로 그 정도의 일을 벌이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기즈 공의 위세가 왕을 능가하는 것은 앙리 3세 후기, 파리의 가톨릭들의 지지를 업은 뒤의 일이다. 단,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일의 배후에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있었음을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배후로 바티칸이 떠올랐다. 이에 대해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미 사죄를 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가톨릭 교회가 그러한 학살을 옹호하고 정당화했다는 것에 대한 사과이지 주도했다는 것은 아니여서 아베총리스러운 사과라는 분석도 있다. 이 문제로 가톨릭 보수파들이 격분하기도 했다.[6] 출처: 기류 마사오 <사랑과 잔혹의 세계사>[7] 사실 기즈 공이 왕위에 야심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기즈 가는 샤를마뉴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서프랑크 왕국의 단절 후 로베르의 카페 왕가가 왕위를 찬탈했다고 주장하고, 샤를마뉴의 후손인 자신들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