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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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내에 있는 교황이 거주하는 관저이다. 흔히 바티칸 궁전 또는 교황궁으로 불리기도 한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봤을 때 성 베드로 대성당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들의 집합체로 거대한 홀이나 귀빈실, 사실, 부속 성당 등 전체 방의 갯수가 약 1,400개나 되는 대규모 궁전이다. 지금은 대부분이 바티칸 미술관과 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1984년 '바티칸'의 일부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니는 중요성 때문에 가까운 곳에 교황이 거처할 관저의 필요성은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하지만 당초 성 베드로 대성당은 성 베드로의 무덤이 묻힌 "넓은 묘지 교회", 흡사 추도시설과 비슷한 용도로 기능하는 것이 중시되었으며, 인근에는 성직자들과 고위 관료들이 머물기 위한 수도원과 가옥으로 세워졌다. 그리고 4세기에는 교황이 실제 기거할 거처로 로마 동쪽 끝에 라테라노 궁전이 세워졌다.
바티칸에 성 베드로 대성당과 붙어있는 주택의 건설은 5세기에 와서야 교황 심마코(498-514)에 의해 시작되었다. 라우렌시오 이교(501년부터 506년) 사태가 일어난 와중에도 심마코는 공사를 계속 강행하여 대성당 옆에 주교관저(episcopia)를 완공하였다. 그 뒤에 상당한 시간이 지난 781년에는 카롤루스 대제의 지원으로 대성당의 주랑현관과 바티칸 언덕 사이에 있는 구역에 건물이 보충되면서 "카루리 궁전"(Palatium Caruli)이라는 이름의 궁전(palatium)으로 발전하였다. 교황 레오 3세(795-816)와 그레고리오 4세(827-844) 또한 추가로 건물을 지어 올렸다. 9세기에는 교황 레오 4세(847-855)가 사라센 등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과 건물 단지를 주변을 에워싸는 성벽과 망루를 축조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이때 이후로 대성당과 인근 지역이 "레오의 도시"라고 불리며 사실상 독립된 구역으로 인식되었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1145-1153)는 최종적으로 "도시"의 구성 부분인 새 궁전(palatium novum)을 세웠는데, 이 궁전은 심마코가 세운 주교관저의 한 부분을 증축한 것이었다.
이때까지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교황들은 대부분 라테라노 궁전에 머물렀으며, 사도 궁전은 로마를 방문하는 외국의 사절을 접대할 때나 사용하였다. 하지만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는 재위 말엽에 로마의 정치 파벌들 간의 다툼이 격렬해지자 할 수 없이 레오의 도시로 옮겨갔다. 그는 행정기능과 성직자들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에우제니오 3세가 지은 궁전을 확장한 동시에 레오 4세가 축조한 성벽의 제2망루를 높여 방어력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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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의 도시
이후로 바티칸의 건축 사업은 교황 니콜라오 3세(1277-1280) 시대까지 잠시 휴면기에 들어갔다. 니콜라오 3세는 선출된 지 1년 후에 궁전 건물을 추가로 건축하고 바티칸에 계속 머물기로 결정하였다. 궁전은 인노첸시오 3세가 높인 제2망루와 연결되면서 사실상 레오의 도시 내 요새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곡물 저장고와 물탱크도 갖추게 되었다. 오늘날의 Cortile del Pappagallo의 위치 인근에는 네 모서리 기둥이 있는 작은 탑들이 조성되었다. 니콜라오 3세는 3년이라는 짧은 재위를 했기 때문에 palatium novum 공사를 마무리 짓지 못했지만, 성 베드로 대성당의 북쪽 면 작은 언덕 위에 있는 거처(Mons Saccorum)를 요새화하였다. 니콜라오 3세는 또한 교황궁의 북쪽에 포도밭을 사들였는데, 이 포도밭은 나중에 교황 인노첸시오 8세에 의해 벨베데레 안뜰이 들어서게 된다.
1377년 아비뇽 유수가 끝나고 그레고리오 11세가 아비뇽에서 돌아오면서 이후 교황들의 정식 거처가 되었다.
이후 15세기 니콜라오 5세의 재위기에 들어와 증축·개축되기 시작하면서 대부분 당시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조각·회화의 거장들이 모두 다 참가하였다. 1477년 식스토 4세 때 조반니 드 돌치를 설계자로 한 시스티나 경당을 건설하고, 또 바티칸 도서관을 확충하였다. 이어 알렉산데르 6세 때 보르자 탑을 세웠으며, 율리오 2세 때에는 브라만테가 벨베데레 안뜰과 다마소 안뜰 등의 부분을 형성하고, 동시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등이 궁전 전체를 장식하였다. 저 유명한 아테네 학당도 율리오 2세의 명령을 받은 라파엘로가 교황의 집무실로 사용될 4개의 방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하면서 완성된 작품이다. 1590년 교황 식스토 5세는 도메니코 폰타나에게 궁전 주요 건물의 개축을 맡겼다.
17세기에도 증축공사가 계속되었으며, 특히 1659년 베르니니가 만든, 성 베드로 대성당과 사도 궁전을 연결하는 계단 '스칼라 레지아'가 유명하다. 회화관은 비오 6세가 창설하였지만, 현재의 건물은 1932년 비오 11세 때 건립되었다.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때 일어난 교황 암살 기도 사건으로 교황청 당국은 저격수로부터 교황을 보호하기 위해 교황 전용 테라스와 창문 앞 강단에 방탄 유리를 설치하였다.
2013년, 현직 교황인 프란치스코는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에도 사도 궁전에 거하지 않고 다른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교황청 내부의 산타 마르타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에 창건 500년만에 교황이 거주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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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티칸 내에 있는 교황이 거주하는 관저이다. 흔히 바티칸 궁전 또는 교황궁으로 불리기도 한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봤을 때 성 베드로 대성당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들의 집합체로 거대한 홀이나 귀빈실, 사실, 부속 성당 등 전체 방의 갯수가 약 1,400개나 되는 대규모 궁전이다. 지금은 대부분이 바티칸 미술관과 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1984년 '바티칸'의 일부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2. 역사
2.1. 고대~중세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니는 중요성 때문에 가까운 곳에 교황이 거처할 관저의 필요성은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하지만 당초 성 베드로 대성당은 성 베드로의 무덤이 묻힌 "넓은 묘지 교회", 흡사 추도시설과 비슷한 용도로 기능하는 것이 중시되었으며, 인근에는 성직자들과 고위 관료들이 머물기 위한 수도원과 가옥으로 세워졌다. 그리고 4세기에는 교황이 실제 기거할 거처로 로마 동쪽 끝에 라테라노 궁전이 세워졌다.
바티칸에 성 베드로 대성당과 붙어있는 주택의 건설은 5세기에 와서야 교황 심마코(498-514)에 의해 시작되었다. 라우렌시오 이교(501년부터 506년) 사태가 일어난 와중에도 심마코는 공사를 계속 강행하여 대성당 옆에 주교관저(episcopia)를 완공하였다. 그 뒤에 상당한 시간이 지난 781년에는 카롤루스 대제의 지원으로 대성당의 주랑현관과 바티칸 언덕 사이에 있는 구역에 건물이 보충되면서 "카루리 궁전"(Palatium Caruli)이라는 이름의 궁전(palatium)으로 발전하였다. 교황 레오 3세(795-816)와 그레고리오 4세(827-844) 또한 추가로 건물을 지어 올렸다. 9세기에는 교황 레오 4세(847-855)가 사라센 등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과 건물 단지를 주변을 에워싸는 성벽과 망루를 축조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이때 이후로 대성당과 인근 지역이 "레오의 도시"라고 불리며 사실상 독립된 구역으로 인식되었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1145-1153)는 최종적으로 "도시"의 구성 부분인 새 궁전(palatium novum)을 세웠는데, 이 궁전은 심마코가 세운 주교관저의 한 부분을 증축한 것이었다.
이때까지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교황들은 대부분 라테라노 궁전에 머물렀으며, 사도 궁전은 로마를 방문하는 외국의 사절을 접대할 때나 사용하였다. 하지만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는 재위 말엽에 로마의 정치 파벌들 간의 다툼이 격렬해지자 할 수 없이 레오의 도시로 옮겨갔다. 그는 행정기능과 성직자들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에우제니오 3세가 지은 궁전을 확장한 동시에 레오 4세가 축조한 성벽의 제2망루를 높여 방어력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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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의 도시
이후로 바티칸의 건축 사업은 교황 니콜라오 3세(1277-1280) 시대까지 잠시 휴면기에 들어갔다. 니콜라오 3세는 선출된 지 1년 후에 궁전 건물을 추가로 건축하고 바티칸에 계속 머물기로 결정하였다. 궁전은 인노첸시오 3세가 높인 제2망루와 연결되면서 사실상 레오의 도시 내 요새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곡물 저장고와 물탱크도 갖추게 되었다. 오늘날의 Cortile del Pappagallo의 위치 인근에는 네 모서리 기둥이 있는 작은 탑들이 조성되었다. 니콜라오 3세는 3년이라는 짧은 재위를 했기 때문에 palatium novum 공사를 마무리 짓지 못했지만, 성 베드로 대성당의 북쪽 면 작은 언덕 위에 있는 거처(Mons Saccorum)를 요새화하였다. 니콜라오 3세는 또한 교황궁의 북쪽에 포도밭을 사들였는데, 이 포도밭은 나중에 교황 인노첸시오 8세에 의해 벨베데레 안뜰이 들어서게 된다.
1377년 아비뇽 유수가 끝나고 그레고리오 11세가 아비뇽에서 돌아오면서 이후 교황들의 정식 거처가 되었다.
2.2. 르네상스~근대
이후 15세기 니콜라오 5세의 재위기에 들어와 증축·개축되기 시작하면서 대부분 당시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조각·회화의 거장들이 모두 다 참가하였다. 1477년 식스토 4세 때 조반니 드 돌치를 설계자로 한 시스티나 경당을 건설하고, 또 바티칸 도서관을 확충하였다. 이어 알렉산데르 6세 때 보르자 탑을 세웠으며, 율리오 2세 때에는 브라만테가 벨베데레 안뜰과 다마소 안뜰 등의 부분을 형성하고, 동시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등이 궁전 전체를 장식하였다. 저 유명한 아테네 학당도 율리오 2세의 명령을 받은 라파엘로가 교황의 집무실로 사용될 4개의 방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하면서 완성된 작품이다. 1590년 교황 식스토 5세는 도메니코 폰타나에게 궁전 주요 건물의 개축을 맡겼다.
17세기에도 증축공사가 계속되었으며, 특히 1659년 베르니니가 만든, 성 베드로 대성당과 사도 궁전을 연결하는 계단 '스칼라 레지아'가 유명하다. 회화관은 비오 6세가 창설하였지만, 현재의 건물은 1932년 비오 11세 때 건립되었다.
2.3. 현대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때 일어난 교황 암살 기도 사건으로 교황청 당국은 저격수로부터 교황을 보호하기 위해 교황 전용 테라스와 창문 앞 강단에 방탄 유리를 설치하였다.
2013년, 현직 교황인 프란치스코는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에도 사도 궁전에 거하지 않고 다른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교황청 내부의 산타 마르타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에 창건 500년만에 교황이 거주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