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근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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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기[1]
라틴어: Custodes Helvetici
이탈리아어: Guardia Svizzera
독일어: Päpstliche Schweizergarde
에스페란토: Svisa Gvar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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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근위대에 입대했음을 선서하는 스위스 근위대원. 손가락 3개를 들어올리는 손짓은 기독교삼위일체를 의미한다.

나는 교황 성하와 장차 그분을 합법적으로 계승할 후임자들을 정직하고 명예롭게 섬길 것이며, 이를 위해서 온몸을 바쳐 나 자신을 바칠 것이며, 필요하다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엄숙하게 맹세한다. 나는 이와 같은 맹세를 사도좌 공석 기간 중에는 거룩한 추기경단의 추기경들에게 엄숙하게 맹세한다. 더 나아가, 나는 지휘관을 비롯한 선임들에게 존경과 충성과 순종을 맹세한다. 아울러 자신의 직분에 걸맞은 품위 유지에 수반되는 모든 요구사항을 준수할 것을 맹세한다. 나 (이름)는 방금 낭독된 모든 사항을 성실하고 충실하게 지킬 것을 맹세한다! 하느님께서 나를 보우하실 것이며, 그분의 성인들께서 나를 도우실 것이다!

'''바티칸 근위대 입단 선서식'''

1. 개요
2. 수뇌부
3. 역사
4. 현재
5. 계급
6. 바티칸 헌병대와의 차이
7. 여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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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을 경호하는 부대. 흔히 용병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스위스19세기부터 용병업을 불법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용병이 아닌 경찰에 가까우며 실제로 이탈리아 법규에서도 이들은 치안 경찰로 분류된다. 하지만 여전히 바티칸 내에서는 바티칸 헌병대와 함께 군대로 간주하고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화려한 의상과 갑옷, 냉병기 때문에 단순한 의장대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행사나 사열에서의 옷만 저런 것이지 이들은 교황을 경호한다는 타이틀에 걸맞게 철저하게 훈련된 부대다. 실제 경호 임무도 당연히 수행하며, 사격 훈련이나 경호원 전술 및 호신술 교육을 받고 있다. 물론 각종 개인화기 역시 구비하고 있으며, 매년 사격대회에 나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2. 수뇌부


통수권자
지휘관
부지휘관
종군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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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크리스토프 그라프 대령[2]
필리프 모라드 중령
토마스 비트너
소령
대위 1
대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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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메르가
키릴 두루츠
아드리안 암보르드

3. 역사


예로부터 스위스 용병은 유럽 전역에 명성이 자자했는데 평범한 용병들과는 달리 어느 나라로 파견되든 무조건 그 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우는 것으로 충성심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서로 전쟁 시기가 올 때마다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곤 했는데 '''이 스위스 용병단이 서로 적대관계로 만난 적도 있고 심지어 아들과 아버지가 적대관계로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약을 지켜야 하는 스위스 용병대의 특성 때문에 결국 이들은 전장에서 마주치면 서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걸 감수하는 것이 용병의 임무였기에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일은 없었다.[3]
이렇게 충성심이 높은 이유는 스위스의 경제와 자신의 가족의 생활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지금과 달리 당시 스위스는 농사짓거나 목축을 하기에는 너무 땅이 거칠었기에 경제의 대부분이 용병 고용에서 나왔는데 고용주에게 신뢰를 잃을 경우 더 이상 용병업을 하기 힘들어 지게 되고, 그럼 그들의 가족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용병 요청을 처음부터 주정부 차원에서 거절한다면 모를까, 일단 고용이 결정되면 계약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충성을 다했다.
바티칸의 스위스 근위대의 경우 교황 식스토 4세스위스 연방과 동맹을 맺어 스위스 근위병 영입의 길을 열었다가 1503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스위스 정부에 근위병 200명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어 3년 뒤인 1506년 1월 22일 첫 근위병 150명이 로마에 도착했다. 이날은 교황청 근위대 창설 기념일이기도 하다. 율리오 2세는 그들에게 '교회 자유의 수호자'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이후 교황청 근위대는 우여곡절의 역사를 겪었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는 소위 사코 디 로마 전투가 벌어진다. 당시 교황령은 수많은 동맹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지원군은 오지 않거나, 오다 깨지거나, 도망쳤고, 스위스 근위대 500명과 오합지졸 시민군 4500여명만이 로마의 성벽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는 스위스 근위대에게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남겠다는 맹세를 지켜야 한다면서 교황의 권고를 거부했다. 그리고 5월 6일, 성벽이 뚫리고 근위대는 189명만 남았지만 이들은 도시를 약탈하며 끝없이 밀려오는 신성로마제국 용병대에 맞서 '스위스 근위병의 저항' 이라는 이름이 붙은 마지막 전투를 치렀다. 교황이 피신할 시간을 벌기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 계단에서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싸워 근위병 189명 중 147명이 전사한 것이다.[4] 이에 감복한 교황청은 이들을 무한히 신뢰하게 되어 교황 바오로 3세 이후[5] 교황청은 오직 스위스 근위대만 고용하도록 못을 박았고 이 전통이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스위스 용병 항목 참조.

4. 현재


현재 교황청근위대이며 세계에서 가장 작고 가장 오래된 군대이다. 그래서 바티칸에서 만큼은 정식명칭이 스위스 용병대에서 '교황청 근위대'(Pontificia Cohors Helvetica)로 명명된다.
교황청 근위병은 현재 135명이다. 근위병이 되려면 자격이 제법 까다롭다. 먼저 결혼하지 않은 스위스 남자 가톨릭 신자여야 하고 스위스군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어야 한다. 나이는 19~30세 사이이며 고졸 이상 학력을 갖고 있어야 하며 도덕적,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물론 키가 174cm 이상, 신체적으로 매우 건강한 자여야 한다.
새 근위병을 뽑으면 스위스 근위병의 저항 기념일인 매년 5월 6일 교황에게 충성 서약식을 갖고 현장에 배치한다. 서약식을 할 때 언어는 근위대 신병이 살던 스위스 지역의 언어에 따라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중에서 고를 수 있다. 평소에 근무할 때는 독일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이하는 현대의 스위스 용병의 모습.
  • 병사와 부사관은 미혼이어야 한다.
  • 범죄경력이 없고 최종학력이 고등학교 이상이어야 하며 운동능력이 뛰어나고 스위스군의 기초군사교육을 수료해야 한다.
  • 30세 미만의 성인이며 신장은 174cm 이상이어야 한다.
  • 2010년 시점에서 병력은 약 100여명.
  • 장비는 스위스제인 SG550이나 SIG P226을 사용하지만 검술이나 미늘창의 사용법도 교육받는다.
  • 독실한 가톨릭교도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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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 바흐만(Dhani Bachmann)
하지만 사실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인재는 적기 때문에 2000년 이후로는 비유럽계의 스위스인도 받고 있다. 2003년에는 인도계 스위스인 다니 바흐만이 최초로 비유럽계로 스위스 근위대에 입대하였다.
군종 신부 역할을 하는 군종 사제도 별도로 보직되는데, 장교 신분이 아닌 그냥 민간인 사제이다. 러시아군 등 일부 국가에선 이처럼 성직자군종장교 대신 일종의 군무원 혹은 문관 신분으로 군에서 근무토록 한다.
르네상스 분위기가 물씬 나는 현대의 제복은 흔히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디자인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910년 지휘관이었던 쥘 르퐁(Jules Repond)이라는 사람이 '''르네상스 분위기를 내보려고''' 저렇게 디자인하였다고 한다. 실제 르네상스 시대의 제복은 '''스커트'''였다. 이 제복은 대외적으로 노출되는 바티칸 내 근무나 행사 시에 착용하고, 군사 훈련을 받거나 당직 외 근무 등을 할 때는 편의상 이탈리아 육군이 지원해 준 전투복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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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는 SIG SG550, 뒤에는 의장용 볼트액션 소총이 보인다.
근세 시대에서 튀어나온듯한 모습과는 달리 근위대답게 현대화된 무장을 병행하고 있다. 근위대의 제식소총은 스위스제 SG552이며, 그 이외에 H&K MP5 등의 기관단총 혹은 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다. 위 사진과 같은 전통 복장을 입을 때에도 안에 방탄조끼는 꼭 착용한다고 한다. 관광하면서 근위병들을 자세히 보면, 저런 알록달록한 중세풍 의상을 하고 등 뒤에 최신식 디지털 액정 화면이 있는 무전기를 차고 있는 심히 묘한 광경도 볼 수 있다. 교황이 어디 나갈 때는 저런 중세풍 복장의 근위대원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현대식 정장 차림의 경호원들이 붙어 다니는데, 스위스 근위대가 옷만 갈아입은 것이다.
경호를 중점적으로 하기에 근위대 출신자들은 세계 각지의 경호업체들로부터 인기가 매우 높다고 한다. 헬리콥터 같은 장비는 모두 이탈리아 정부에게 의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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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에 입국하며 근위병에게 경례하는 독일 국방군 육군 병사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이 이탈리아에 진주할 때에,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이후 바티칸과 나치 독일간 사이가 몹시 나빠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 현대화기로 무장한 근위대가 한때 나치 독일군과 대치하려고 했었는데, 당시 교황 비오 12세가, '만약 나치 군대와 무력충돌이 일어나면 근위병들은 다 죽는다'는 생각에 현대화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그러자 독일 육군 '''기갑사단'''이 전차까지 동원해 바티칸을 포위한 가운데, 그 앞으로 ''''''을 든 근위병들이 경계근무를 섰다. 실제로 히틀러는 홧김에 교황청을 공격해서 교황을 포로로 잡거나 사살할 준비를 하라고 소리질렀지만, 모든 측근과 참모들이 만류했고, 스스로 진정한 뒤에 실익이 없을 뿐더러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을 적으로 돌려버리는'''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실제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위의 사코 디 로마와 함께 스위스 근위대의 용맹함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인 건 확실하다.

5. 계급


규모가 100명 수준인데 계급 체계는 10단계이다. 장교는 소위(Leutnant), 중위(Oberleutnant), 대위(Hauptmann), 소령(Major), 중령(Oberstleutnant), 대령(Oberst)이 있으며 부사관(Sergeant)이 2단계, (Corporal)이 2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6. 바티칸 헌병대와의 차이


스위스 근위대는 교황 직속으로 친위대 성격이 강하며, 교황 개인의 안전이 유일한 목적이다. 실제로 교황의 신변 경호와 목적 달성을 위해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임무들[6]만 수행하고 있다.
그 외에 바티칸 영토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치안 유지 활동은 바티칸 헌병대의 몫이다. 공공질서 유지, 주요 시설 경비, 범죄 예방 및 수사, 대테러 작전, 이탈리아와의 국경 통제 등은 스위스 근위대의 임무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헌병대의 소관이다. 스위스 근위대는 교황에 직접적인 위험이 닥치지 않는 한 해당 업무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7. 여담


  • 전통에 따라 아직 교황청 근위병 가운데 여자는 한 명도 없다. 2009년 여성 대원을 받아들이는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소식이 나오고 있지만 정작 여성 지원자가 없어(...) 아직까지 남성만 있다.
  •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에서는 네임드급 적을 제외한 일반 적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레벨레이션에서 등장한 예니체리보다는 약하다. 사실 어쌔신 크리드 2의 시대 배경 당시에는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그 시대에는 실제로도 예니체리니의 활약상이 스위스 용병대보다 훨씬 뛰어났다. 즉 적절한 역사 고증.


[1] 우측 하단은 스위스 근위대를 설립한 교황 율리오 2세의 문장, 좌측 상단은 현직 교황(프란치스코)의 문장, 가운데는 현직 지휘관(크리스토프 그라프 대령)의 문장이다.[2] 35대 지휘관[3] 실제로 유럽 내 왕위계승전쟁에 참전한 형제가 서로 다른 용병단의 용병으로 마주쳐서 서로 싸운 사례가 있다고 한다. 형은 적당히 싸우다가 물러날 생각이었지만, 동생이 자기 임무에 너무 충실한 바람에 결국 죽일 수밖에 없었다.[4] 살아남은 42명은 피신하는 교황을 성 베드로 대성당부터 산탄젤로 성까지 호위한 병사들이다. 대성당에 남은 근위대는 전원 전사하였다.[5]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에게 무조건적으로 기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고, 근위대 역시 카를 5세의 요구로 독일인 용병으로 갈아치워야 했다. 스위스 근위대의 전통은 클레멘스 7세의 다음 교황인 바오로 3세부터 시작되었다.[6] 사도 궁전 경비, 교황과 밀접한 고위 성직자 경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