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기도서

 

聖公會祈禱書
Book of Common Prayer

1. 개요
2. 역사
3. 내용
4. 관련 문서


1. 개요


성공회기도서는 성공회에서 성체성사(감사성찬례)를 비롯한 성사와 다른 예식들을 집전할 때 사용하는 책이다. 신자 누구나 기독교의 전례(liturgy)와 성사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며, 성공회의 전례는 성공회 기도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전에는 성공회 공동기도문(公同祈禱文)[1] 혹은 공동기도서(公同祈禱書)라고도 했지만, 2004년 개정되면서 이제는 '''성공회 기도서'''(聖公會祈禱書)가 공식 명칭이다. 연로한 신자들은 공동기도문/공도문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쓰는데 일반적으로 공동기도문/공도문이라는 단어도 편하게 통용된다.
일반적으로 대한성공회 교인들이 감사성찬례(感謝聖餐禮)를 드릴 때, 성경, 성가집, 주보와 함께 이 공동기도문을 앞에 둔다. 기도서에서 감사성찬례 예식문이 수록된 부분만 따로 발췌한 소책자를 회중석에 비치하는 본당도 있다.
영국에서는 1662년판에도 Crown Copyright가 걸려 있다.

2. 역사


1549년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가 최초의 공동기도문을 집필했다. 당시 크랜머 대주교는 잉글랜드인 신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라틴어[2]대신 일상 언어인 영어감사성찬례를 드릴 수 있도록 영문 공동기도문을 작성했는데, 복잡하고[3] 라틴어로 써서 이해하기 어려운 기존 예식서를 대체하려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었다.
잉글랜드는 국교가 성공회라서, 잉글랜드 성공회가 공도문을 개정하려면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1662년에 개정한 공도문이 여러 가지로 시대에 뒤떨어져서, 1928년에 개정안을 냈지만 하원에서 부결되어 잉글랜드에서는 아직도 1662년 공도문이 유일한 합법적인 공도문이다. 1965년부터 새 예식서가 나올 때까지 대한성공회에서 써 온 공도문도 이 1662년의 영국 공도문을 기초해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대한성공회는 다른 여러 나라의 성공회처럼 1662년 영국 공도문의 구애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기도서를 만들어서 쓰게 되었다. 한국어로 만들어진 완전한 공도문은 1965년 8월 15일에 대한성공회 전국 의회 의장 이천환 주교가 발행한 것이다. 1965년판 기도서가 발행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이 책 이상의 완성도를 지닌 기도서는 나온 적이 없다.
대한성공회 공동기도문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 1908년 공도문
본문 링크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아마도 하나의 책으로 나온 것으로 최초의 것으로 보인다. 이 공도문의 특징은 1662년 영국 공도문을 번역했으나 축성경만은 1549년 것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1637년 스코틀랜드 기도서의 영향을 받은 1928년의 미국 공도문이 전례적으로 상당한 찬사를 받으며 등장했는데, 이미 대한성공회에서는 미국 공도문과 같은 내용의 기도서를 이때부터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만도는 후송(지금의 특도 자리)에 영국 여왕을 위한 기도 대신 대한제국 황제와 황실을 위한 기도가 있고 미사에도 당일 본기도 전에 황제와 백성을 위한 기도가 들어 있다.
또한 송가 가사까지 포함된 아주 단순한 양식의 조만도가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성경이 귀하던 그 시절 독서가 없이 조만도를 드리기 위한 배려라고 보인다.
조만도는 성구, 죄의 고백, 주의 기도로 시작하고, 성경은 2과를 보며, 송가는 조도에서 찬송천주송가와 사가리아 송가(즈가리야 송가)를 사용했다.
오주성체보혈지례(성찬례 혹은 성제례라고도 불린다고 표시되어 있다)는 私誦(성호경과 준비기도, 사제를 위한 기도) 후에 주의 기도, 정심축문, 십계명, 계명요약과 기리에 3번과 계응과 축문, 황제와 백성을 위한 기도로 시작하고 나머지 부분은 1662년과 같다.
특이한 점은 현재 보관된 공도문이 훼손되어 있어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니케아 신경 대신 사도신경만이 수록되어 있는 것 같은데 이 부분을 대체해서 붙인 것을 보면 실제로 사용은 니케아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 1912년 공도문
조만도 시작 시 성언이나 특도 등 사제가 하는 기도는 인쇄하지 않고 제목만 표기되고 있으며 공도문 표지에 임시 통용이라는 문구가 들어있어서 그때의 시대적 상황에 따른 고려가 보이고 있다.
식민지 치하라서 황제를 위한 기도가 생략되고 단지 국민을 위한 기도만 있는 것 외에는 동일한 양식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조만도 주기도 후의 계응에 그때까지도 지금의 "주여, 우리나라를 구원하소서"가 "우리 황제를 구원하소서"로 되어 있는 점이다. 그 시대의 교회의 고민을 볼 수가 있는 대목이다.
  • 1939년 공도문
1939년 공도문에 따른 대한성공회 미사 예문과 영역 대조 (1962)
65년 기도서의 전신으로 이전 기도서와 달리 미사와 조만도 및 많은 예식이 1662년 공도문보다 더욱 전통적인 구조와 형태를 띄게 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조만도에 聖言이나 죄의 고백이 생략되고 성호경, 주의 기도, 성모송[4]으로 시작하며 축문 후 인사와 계응 다음에 별세기원송이 추가되었다.
조도에 독서가 하나로 되고 찬송천주송가가 부록으로 생략된다. 이는 당시 영국의 많은 성공회 성당이 주일 예배를 조도로 갈음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성무일과를 단지 주중의 예배 양식으로 확실히 격하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사실 옥스포드 운동이라고 하는 전례 부흥 운동이 한번 인 뒤에는 영국에서도 주일 성찬례 대신에 조도만 드리는 성당은 대폭 줄어들었다.
미사는 당시 잉글랜드교회가 사용하던 앵글로 가톨릭 미사를 번역해 사용했다. 이 예문은 종교개혁 이전에 영국에서 쓰던 라틴어 미사를 1549년, 1662년 공도문과 접목한 것으로 천주교 미사와 비슷한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공도문의 모든 내용이 함께 들어있는 그런 예식이다. 처음부터 대한성공회는 전례적 의식을 지켰지만 이때부터 공도문 상에서도 더욱 확고한 앵글로 가톨릭 정신을 반영하게 된다. 아마도 이 시절부터 영국에서 일기 시작한 천주교회와의 일치 운동과 전례 신학의 부흥이 대한성공회에 더욱 반영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경문 안에서지만 미사라는 용어가 보이며 공식적인 용어는 성체성사라고 되어 있었다.
  • 1965년 공도문
조만도는 시작시 성호경, 주기도, 성모송에 대한 언급이 사라지므로 더 단순화되었으며, 미사는 39년과 거의 비슷하지만, 사제의 사사기도가 경문으로 편집되었고, 대도문[5]이 사제 혼자서 드리는 방식이 아닌, 사제 또는 독경사가 기도를 인도하면서 회중 또한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로 응답할 수 있도록 바뀌었으며[6], 종래 사제의 영성체 후 회중의 고죄문과 사죄문이 진행되는 순서에서 고죄문과 사죄문 후 사제 영성체 및 회중 영성체가 이루어지는 순서로 바뀌었다. 또한 1939년 미사에서는 미사 후 마지막 복음[7]이 있었지만, 1965년 공도문에서는 삭제되었다. 당시 수시 예식으로 편집된 기타예식과 시편 등을 모두 함께 수록함으로서 최초의 완전한 공도문 형태가 된다. 이때부터 미사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기도서에서 쓰기 시작하고 있다.
19세기 들어서면서 개신교에서도 전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전례 복귀 운동이 일어나면서 1979년 미국 공도문이 비록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1965년 공도문 유형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면 세계성공회공동체에서는 가장 빠르게 보편적 예전을 수용한 기도서라고 평가할 수가 있겠다. 적어도 한국공도문의 역사에서 본다면 최초로 완전한 공도문이다. 그 문장의 엄숙함과 작품성도 높은 대한성공회의 표준적인 예식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2016년 5월과 10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서울주교좌성당에서 1965년 공도문에 따른 감사성찬례가 봉헌된 적이 있다. 전례 연구 차원에서의 일이었다.
  • 1973년 시험미사예문
단순화를 꾀하여 기리에로 시작하고 독서에 구약이 포함되고 신경은 니케아 신경사도신경이 수록되었으며, 신자들의 기도는 82년 1양식, 죄의 고백은 82년 권중문과 65년 고백문으로 구성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로마 예식과 같은 양식이다.
성찬기도는 로마 예식 축성경을 1양식으로, 1549년 축성경이 2양식으로, 아직 출처를 확인하지 못했으나 한국 정교회의 축성경이 3양식으로 편집되고 끝영광송 전 전구 부분에 세례 견진자나 혼인 또는 별세미사를 위한 기도를 선택적으로 추가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예식문을 너무 쉽게, 나름대로 우리 상황에 맞게 구조를 편집하려는 시도가 보이기 시작하며 이때의 작업에 대한 기록들이 전혀 남지 않아 있지 않다.
구미의 예전작업이 변화가 있는 곳마다 모든 작업의 근거와 출처, 신학적 배경 등을 밝히며 신중하게 진행되는데 반해 우리는 그 인적자원의 결여로 몇몇 사람들의 토론과 합의을 위주로 하는 공도문 작업이 진행된 것 같다. 또한 다른 나라들이 수정판을 내놓은 후부터 치밀하게 공도문 작업을 진행해 나가는 것을 보면 우리는 전문가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공도문 작업을 너무 쉽게 파격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1982년 미사예문
73년 예문을 보완해서 재편집되고 의회와 주교원의 인가를 받은 최초의 새예문으로, 정심경으로 시작하며 사도신경은 생략되고, 대도문 양식이 3양식으로늘어나고, 십계명과 죄의 고백이 80년 영국공도문을 번역 사용했으며 축성경 제정사를 "행하시오" 문장을 "행하라"로 수정했다. 이때의 재미있는 현상 중에 하나로 성체성사에 대한 신학적인 대립이 결국 제정사 본문에 반영되었는데 성체축성에서는 "기념"을 보혈축성에서는 "기억"이라는 단어를 쓴 희한한 문장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65년 미사에 비해 너무 단순화된 것이 거부 반응을 부르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 간결성과 단순한 구조로 모든 교회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조만도, 시편 등의 작업은 속히 이루어 지지가 않아서 미사를 제외한 모든 예식은 65년 공도문을 사용하다가 94년 새편집 공도문에서 독서본문을 삭제하고 미사는 82년 미사예문으로 대체해서 출판했다. 이 와중에 조만도의 주기도문만을 미사에 있는 현대문으로 바꾸는 바람에 73년 예문에서 쓰이고 일상기도서에서 주교의 인준으로 수록되었던 73년 미사예문의 사도신경은 잊혀지게 되었다.
  • 1992년 의안공도문
82년 미사예문의 후속으로 조만도와 공동번역성경의 시편을 정리한 성시 전편 등이 마련되고 있었지만 그 진도가 너무 늦었다. 결국 공도문 개정의 요구가 거세지면서 1992년 79년 미국 공도문을 번역하고 앞의 조만도와 시편을 수록한 성공회 대전교구 윤환 주교의 의안공도문이 전국 의회에 제출되었다. 그러나 그 수고에 비해서 다듬어지지 못한 거친 문장과 미국공도문을 그대로 번역했다는 거부감으로 결국 의회는 이를 시험용으로 쓰는 것을 부결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수정작업을 하기로 의회가 결의했으나 대전교구 윤환 주교의 불참으로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를 못했다.
후에 이재정 신부를 포함한 새 공도문 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전면적으로 새로운 양상으로 99년 시험예문이 나왔다.
  • 1999년 시험공도문
우여곡절 끝에 99년 공도문이 나와서 의회에서 2년 동안 시험 예식으로 써보기로 했으나 역시 상당한 거부를 불러왔다. 첫 번째 이유는 너무 새로운 문체와 형식 그리고 신학적으로 파격적인 진보성으로 인한 거부감이고 2번째는 한 교단의 가장 중요한 신학과 예배를 결정하는 공도문이라고 보기에는 그 문체나 구성이 정리되지 못하고 미완성인 채로 올라 온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복음'을 평신도가 읽고 주교의 별도의 관면 없이 평신도가 설교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개신교의 요소들을 많이 가져왔으나 그만큼 반발을 불러왔다.[8]
최소한 82년 예문은 65년에 비해 파격적인 단순성으로 나름대로 새로운 계층을 위해 기여한 바가 많았지만 99년 기도서는 이런 실제적인 그리고 필요한 변화를 주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을 더 주고 있지 않은지 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공도문이란 말 그대로 교회의 모든 공동체가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함께 쓸 수 있는 기도서가 되는 것 이것이 그 어떤 당위성보다 우선되기 때문이다.'''
  • 2004년 성공회 기도서
현재 대한성공회는 2004년 개정된 '성공회 기도서'와 감사성찬례예식만 발췌한 '성공회 기도서-감사성찬례'를 사용한다. 개정된 성공회 기도서에서는 1965년판 성공회 공도문과는 달리 성사를 7개에서 2개(세례성사, 성체성사)로 구분하고 있으며, 1965년판 성공회 공도문에서는 성사로 인정받은 5개 성사(혼배성사, 견진성사, 고해성사, 조병성사, 서품성사)는 모두 성사적 예식으로 구분해 놓았다.
또한 우리말 문체도 이해하기 쉽도록 바뀌었으며, '천주'라는 호칭도 공동번역성서의 번역에 따라 '하느님'으로 바꾸었다. 성공회가 종교개혁 이전부터 지켜온 전통적인 축일 이외에 교파를 초월해, 디트리히 본회퍼처럼 기독교 역사 발전에 공헌한 이들을 기리는 기념일을 설정했으며, 예배에 사용되는 표준 성서는 1994년 부분 수정판 성공회 공도문의 미사 예문과 마찬가지로 공동번역성서를 사용한다.
  • 2018년 성공회 기도서
2004년 기도서의 최종 수정판. 명백한 오류만을 고친다는 지침에 따라서 수정된 기도서이다.
몇가지 용어들이 변경되었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문장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로 다듬어졌다. 성서정과라는 용어는 전례독서라는 용어로 변경되었으며, 감사성찬례에서 영성체 전 초대송의 응송이 '주여, 주님을 내 안에 모시기를 감당치 못하오니,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가 '주여, 주님을 제 안에 모시기를 감당치 못하오니,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로 바뀌었다. [9]
성사예식부분에서 기존의 (혼배예식, 견진예식, 고해예식, 조병예식, 서품예식) 에서 예식을 삭제하고, 성사로 모두 통일하였다.

3. 내용


공동기도문은 나라마다, 관구마다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처음에 서문이 있다. 대한성공회의 서문은 세계 성공회와 대한성공회와의 관계, 성공회의 기본 신학적 입장, 교회를 다스리는 기구와 규칙, 성공회의 예식 등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 다음 교회의 월력,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총도문, 성찬식, 세례와 견진, 고백, 혼배, 병자 심방과 같은 성사에 준하는 것, 장례 절차가 실려 있고, 성시 전편과 성직 서품식 예문이 들어 있다.
영국을 위시한 몇몇 성공회 관구공동기도문에는 39개 신조가 실려 있다. 그러나 캐나다 성공회나 미국 성공회에서는 역사적 참고 문헌으로 부록처럼 실려 있을 따름이다.
대한성공회의 2004년 성공회 기도서의 내용 및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발간사

1. 서문

1. 내용별 주요 지침

1. 교회력(교회력/월별 축일)

1. 본기도(주일 본기도/축일 본기도/특별 기원 본기도)

1. 특별절기 예식[주의 봉헌일 양초 축복 예식/사순절 첫날 재의 예식/고난주일 성지 축복 및 순행 예식/성 목요일(성찬제정) 예식/성 금요일(주의 수난) 예식/부활밤 예식]

1. 성무일과(아침기도/낮기도/저녁기도/밤기도/간략한 기도 예식/성무일과 송가)

1. 간구기도와 감사기도(간구기도/감사기도/여러 가지 연도)

1. 감사성찬례(감사성찬례 1형식/감사성찬례 2형식/성찬례 특정문/십계명)

1. 세례

1. 성사예식[견진성사/고해성사/혼배성사/조병성사/성직서품 성사(부제서품/사제서품/주교서품/교구장 승좌식)]

1. 사목예식{상장예식[임종기도/위령연도/입관기도/별세기도/장례성찬례/고별예식(발인예식)/매장예식/화장예식/비신자 장례예식]/성당축성예식/여러 가지 축복예식}

1. 전례독서[주일 감사성찬례 전례독서/주간 감사성찬례 전례독서/성무일과 전례독서(주요축일)]

1. 시편

1. 신앙의 개요

1. 부록(관할 사제 취임식/교회위원 취임식/출산감사예식/추도예식/성물축복기도/주요 기도문)

2018년 1월 25일에 발행된 수정판 1쇄의 목차에 따른 표기. 다만, 성직서품성사 중 '교구장 승좌식'이 목차에서는 '교주장 승좌식'으로 잘못 표기되었기에 여기에서는 올바른 표기를 채택한다.

4. 관련 문서



[1] 흔히 줄여서 공도문(公禱文)이라 부른다. 영어 표현 'Book of Common Prayer'의 직역.[2] 이때 서방교회의 전례 언어는 라틴어였으며 따라서 미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라틴어로 진행됐고 심지어 미사에서 부르는 성가도 전부 가사가 라틴어였다.[3] 당시 서방교회(구교)의 예문이 규정하는 미사 중 사제의 동작은 지나치게 번잡하고 세세했다. 심지어 회중을 바라볼 때 사제의 시선 처리마저 규정하고 있었다.[4] 공도문에 공식적으로 성모송이 언급되는 것은 대한성공회의 당시 전통적 경향을 알게 한다[5] 1939년 공도서에서는 '위 성교회 기도문'. 현재 감사성찬례의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에 대응한다. [6] 반면 당시 천주교 미사에서는 사제의 중보기도가 회중들에게 들리면 기도문이 속화(속되게 됨)한다고 보아서 사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혼자 중보기도를 바쳤다.[7] 미사 후 사제가 요한의 복음서 1장 1절부터 14절까지 읽는다.[8] 사실 개신교에서도 설교는 목회자의 특권이고, 불가피한 상황에서나 장로 같은 평신도 직분자가 설교를 하며 그마저도 목사가 기존에 작성해 놓은 원고를 그대로 읽어야 한다. 그만큼 이러한 변화는 개신교의 관점에서 보아도 대단히 파격적이고 진보적이었다.[9] 한편 한국 천주교에서는 '제가 곧 나으리이다'가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로 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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