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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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나라의 제6대 황제. 이름은 완안마달갈(完顔麻達葛)로 중국식으로는 완안경(完顔璟)이다. 아버지는 세종의 아들이자 황태자인 완안윤공(完顔允恭)[1] 으로, 선종은 장종의 서형(庶兄)에 해당된다. 아버지는 세종의 황태자였으나 요절하였기 때문에 손자였던 그가 조부의 지명을 받아 황태손이 되었다. 1189년 세종이 사망하자 뒤를 이었다.
2. 몽골, 금, 그리고 남송
칭기즈 칸이 젊은 시절 케레이트의 옹 칸과 함께 장종의 신하로서 타타르와 싸운 적이 있었다. 이에 장종은 용병의 대가를 지불하였고 중국식 칭호를 내려주었다. 금나라가 북쪽의 타타르 등의 침입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금나라는 약체화되었다고 본 남송의 권신 한탁주는 남송의 비원인 금나라 타도를 성공시킨다면 권력을 확고부동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북벌을 감행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실제 금나라는 곤란한 상황이었으나, 그 이상으로 남송군의 약체화가 현저하였던 것이다. 1207년 금나라는 조기 화평을 희망하고,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하자, 이것을 들은 예부시랑(문부 대신) 사미원에 의해 한탁주는 살해되었고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금나라로 보내지는 것으로 화의를 맺었다. 한탁주의 머리는 수도 중도 대흥부(中都大興府, 지금의 베이징)에 걸렸고 장종은 종묘에 나가 다시 한 번 승리를 조상에게 고했다.
3. 장종의 치세
장종 때 금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삼황오제와 은나라, 주나라, 한나라, 당나라의 역대 군주 17명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이것은 금나라가 중원의 한족 왕조들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금나라의 중국화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금나라가 조금만 더 오래갔더라면 남북조 시대의 북위 등 선비족 왕조들처럼 완전하게 한족에 동화되었을지도 모른다.
세종 때부터 이어진 금의 전성기는 장종의 치세까지도 지속되었다. 장종은 서화(書畵)를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고 수금체(瘦金體)등 서예에 매우 능한 문예인이었다. 금나라의 제도 정비도 장종때 완성되었고 문화도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급속한 한화로 인하여 사치 풍조가 만연해졌고 '''정복 왕조 주제에 무(武)를 천시하는 풍조가 생겼다.'''[2] 장종 재위 후반에 몽골이 준동하기 시작했고 황하의 제방이 3번이나 터졌다.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하여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재정난이 가중되었다. 장종이 승하한 후 전성기는 끝나고 몽골이 침입하면서 결국 멸망테크를 타게 된다...
원래 금나라 완안씨 황실에는 황후로 맞이할 수 잇는 가문들이 정해져 있었고, 이 가문들 이외 출신 여성들은 황후가 될 수 없었다. 도단(徒單), 당괄(唐括), 포찰(浦察), 나나(拏懶), 복산(僕散), 흘석렬(紇石烈), 오림답(烏林答), 오고론(烏古論), 배만(裴滿)씨 등 여진 귀족 가문 여성들이 황후가 되었는데 장종은 한족인 이사아(李師兒)를 사랑했다. 심지어 이사아는 평범한 여성이 아니라 죄인의 자식이었다. 금나라에는 전쟁 포로, 혹은 죄인의 자식을 황실의 노비로 삼게 했는데 이사아가 바로 그 케이스. 워낙 아름다운 데다가 다재다능하고 총명하기까지 한 이사아에게 홀딱 반한 장종은 마침 황후가 일찍 죽어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이사아를 황후로 책봉하고 싶어했으나 대신들이 완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황후 책봉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래서 장종은 이사아를 황후 다음 가는 귀비인 원비(元妃)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 장종은 이사아를 황후로 못 들였던 것이 한스러웠는지 그 후 후대 황제들은 민간에서 황후를 들일 것을 명하는 칙조를 내렸고 금선종은 역시 한족인 왕운, 왕예 자매를 궁중에 불러들여 그중 왕예를 황후로 책봉했다.
비록 이사아는 황후가 되지 못했지만 장종의 사랑을 바탕으로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사아의 가족들 역시 그 덕에 벼락 출세를 했고 큰 권세를 누리게 되었으며 이사아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뇌물을 바쳤다.
이사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장종 말엽을 기점으로 뇌물 수수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등 국정이 쇠퇴하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4. 후사
장종에게는 6명의 황자가 있었지만 모두 요절하여 태자가 없었고 사후 숙부 위소왕이 뒤를 이었다. 사실은 후궁 가씨의 뱃속에 장종의 유복자가 있었으나... 이사아를 싫어했던 위소왕은 '''"임신하지도 않은 가씨가 이사아 측의 꼬드김으로 임신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으며 가씨의 뱃속에 들어있는 태아는 장종의 자식이 아니다. 이 모든 게 이사아의 음모다!"'''라고 개드립을 치는 바람에 가씨와 이사아가 피살되어 그대로 복중에서 죽었다. 아마 위소왕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통성에 해가 갈까봐 그랬던 것 같다.
5. 기타
특이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화장품 만들기였다. 자신이 만든 화장품을 여인들에게 바르게 했다고 한다. 장종 본인이 만든 화장품의 질은 매우 좋았다고 한다.
장종의 아들 중 한 명이 고려로 건너와서 승려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송광사의 9대 국사인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장종의 아들이라는 이야기이다. 출처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1에서 등장하는데 능력치는 그닥 좋지 않다. 그런데 장종의 배우자로 있는 기국 공주는 위소왕의 딸로 사실 그의 사촌 동생이다.
6. 둘러보기
[1] 현종(顯宗)으로 추존되었다.[2] 세종 대정 7년에 남송의 사신을 맞이하는 연회를 열었을 때 활쏘기 경연을 했는데 남송 사신이 쏜 화살은 과녁에 50발이나 맞았는데 사신을 호위하는 금인들의 화살은 7발만 명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