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진컴퓨터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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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옛 컴퓨터 전문유통업체.
90년대 중후반 중고딩 컴덕후들의 전당이'''었'''던 컴퓨터 전문매장. 아직도 주로 가던 세진컴퓨터랜드 매장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다. 한창 잘 나가던 때는 세진 때문에 동네 컴퓨터 매장들도 값을 내려파는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잘 나갔다. 그 정도로 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컴퓨터를 팔았다. 저렴한 가격을 어필하기 위해 자주 바겐세일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온갖 명목으로 '세일기간'이 1년 내내 끊이지 않게 되어 업계에 돌풍을 일으켰으며 이 덕분에 '세진돌풍'이라는 별명이 사용되기도 했다.
존속 당시 인터넷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sejin.co.kr'이었고, 노조는 민주노총 공공연맹 소속으로서 1997년부터 3년간 존속했다.
2. 역사
2.1. 화려했던 전성기
1991년에 한상수 창업주가 부산 서면 지하상가에서 조그만 컴퓨터 매장을 차린 게 본사의 뿌리며, 1992년에 주식회사로 법인화한 후 서울까지 진출해 선경 COMPLAZA(선경유통), 삼성테크, 마니유통 등 기존 경쟁 체인들을 제치고 폭발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전국적인 컴퓨터 전문매장이 되었으며, 무서운 기세로 매장을 확장해 나갔다. 이는 훗날 카페베네와 빽다방, 메가커피 등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확장과 맞먹는 속도였는데, 카페베네나 메가커피가 프랜차이즈형 카페인 데 반해 세진컴퓨터랜드는 '''컴퓨터를 파는 곳'''이었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공격적이고 무모한 확장이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마케팅도 상당히 공격적이었는데 당시 일했던 직원의 말에 따르면 매일 퇴근 후에는 10톤 탑차에 전단지를 가득 싣고 북한 삐라 뿌리듯이 전단지를 뿌려대고 매장 주변 아파트, 전봇대 등에 전단지를 붙이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마케팅이 지방에는 먹혀서 지방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기록했다. 처음에는 다른 회사의 컴퓨터 및 주변기기, 소프트웨어 판매만 했으나 나중에는 자체 브랜드PC 판매도 했다.[3]
지점 하나하나가 상당히 컸는데 오직 PC와 그 관련제품만 팔았다. 가전제품 양판점인 하이마트나 전자랜드 정도 되는 매장에서 컴퓨터만 판매한다면 비슷한 규모일 듯.
오늘날에는 지방에서도 인터넷으로 간단히 가격을 비교하며 카드로 택배주문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이었고 지방에서 용산제 컴퓨터를 구입하려면 용산의 매장 전화번호를 구해서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한 다음 은행에 가서 무통장입금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비교적 용산 수준에 가까운 저렴한 가격에 매장에서 실물을 보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지방 소비자들에게 대단한 이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용산에 비해 훨씬 더 훌륭한 쇼핑경험을 제공했다. 서비스 수준에 있어서는 재래시장과 대형마트 정도의 차이가 있었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친절 교육을 받은 직원들이 단정한 복장을 입고[4] 접객을 했다.
- 호객행위를 하지 않았다. 용산처럼 협박이나 욕설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 깔끔한 매장에 누구나 집어볼 수 있도록 각종 물건이 진열되어 있었다.
- 지금의 가전용품 매장처럼 컴퓨터를 직접 사용할 수 있게 되어있었으며 대형 화면으로 게임도 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심지어 프린트, 복사, 스캐너, 팩스까지 무료료 쓸 수 있었다.
- 정찰제였기 때문에 누구나 바가지 걱정없이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5]
- 결제는 나갈 때 일괄로 한 번만 하면 됐다.
- 무료 컴퓨터 교실을 상시적으로 운영했다.[6]
- 정품 윈도우를 설치했다.
- 컴퓨터 구입 고객에게 평생 무상 A/S를 제공했다. A/S 직원도 단정한 복장을 갖추고 지금 기준에서도 아주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역이 멀더라도 상관없이 직원이 찾아가 무상 A/S를 해주었다. 심지어 도서지방이면 직원이 배를 타고, 산간지방은 산을 타고 올라가서 무상 A/S를 해주었다!
- 1996~1997년 경에는 홍보 차원에서 세진컴퓨터랜드에서 구입한 컴퓨터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산 컴퓨터를 들고 와도 무상 수리를 해준다는 지금기준으로 봐도 파격적인 마케팅을 하기도 하였다. #
2016년 지금 봐도 세진컴퓨터랜드는 시대를 앞서나간 감이 있는데, 동네에 세진컴퓨터랜드가 들어서면 몇 층짜리 건물 전체가 세진컴퓨터에 시설도 매우 깔끔하고 한층은 PC게임으로 가득찼다든지 깔끔한 정찰제에 친절한 직원들, 산뜻한 최신 인테리어를 갖춘 시설과 배치 등 당시 인터넷도 없던 어린 아이들에게 최신 컴퓨터와 게임을 눈 앞에서 구경할 수 있는 세진컴퓨터랜드는 천국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당시 아이들에겐 용산 전자상가에나 가야 최신문물을 접할 수 있던 시절인데, 용산은 멀고 복잡하고 용팔이들의 호객행위로 인해 쾌적한 구경이 힘들었던 반면, 세진컴퓨터랜드는 서울과 지방 동네 곳곳에 세워졌기에 아이들이 학원 끝나고 가볍게 들러서 구경하기도 좋고, 호객행위도 없고 딱히 구경한다고 눈치를 주거나 하지도 않았기에 편안히 구경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참고로 그 당시엔 PC가 없는 아이들도 많았고 PC가 워낙 고가였던 시절이라 200만원 정도로(대기업 제품 기준으로 200만 원 수준이었다 용산이나 기타조립식컴퓨터는 100만 원 전후로 가능했다. 당시 서울 목동 27평 아파트 전세가 5000만 원) 많은 아이들에게 PC자체가 그림의 떡이라서 친구네 집에서나 할 수 있던 아이들도 많던 시절인데, 눈 앞에서 최신PC와 최신 PC게임들을 구경하는 그때의 심정이란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엿보는 듯한 느낌이 나기도 했을 것이다. 세진컴퓨터랜드의 전성기가 불과 몇년이었을 뿐인데 지금까지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당시 나름대로 유명했던 자체 브랜드로는 고급형으로 세종대왕 시리즈와 보급형으로 진돗개 시리즈가 있었다. 팔려간 진돗개가 진도의 옛 주인에게 돌아왔다는 실화를 내용으로 한 CF가 유명하다.[7] 국민PC가 등장하고서는 제조업체로 선정되어 그쪽에 집중하였으나, 이후 대기업들의 PC가격 인하로 국민PC의 설 자리가 없어지자 덩달아 큰 타격을 입었다.[8] 광고모델로는 진돗개와 강호동이 있었다. 또 '''"세종대왕은 문맹 없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세진은 컴맹 없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광고 캠페인도 있었다.
참고로 해당 광고의 나레이션은 성우 장세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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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강호동의 모습(…)
2.2. 무리한 확장, 그리고 파산
너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만 하다가 어느 날 흔적도 없이 파산하고 말았는데, 직접적인 원인은 끝없이 매출이 성장하지 않으면 망하는 '''차입경영'''에 있었다. 외상으로 물건을 들여 싸게 팔고 그 매출액을 기반으로 다시 물건을 외상으로 들여오는 '''물건이 잘 팔리지 않으면 즉각 부도가 나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과다한 광고비를 집행하였고 이것이 외상과 함께 누적 적자를 가중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PC를 팔아 남는 이익금을 제조사에게는 일체 지급하지 않았고 전부를 매장수 확대와 마케팅에 사용한 것도 그 이유였다.
1995년 1차로 부도위기를 겪은 뒤 지분의 51%를 당시 대우그룹의 컴퓨터관련 사업을 담당하던 대우통신에게 넘겨 대기업의 후광을 빌어 경영했고,[10] 뒤이어 1996년에 한 사장은 자회사로 통신판매업체 '세진홈마트', 광고기획사 '세진애드컴'까지 각각 세워 그룹으로 도약하려 했지만 하는 사업마다 다 안 됐고, 세진마트와 세진택배, 세진25시 등 유통계열사 설립도 구상했으나 전부 무산됐다. 경영악화가 만성화되던 1997년 2월, 대우통신에게 완전 매각되어 회생할 뻔했다.[11] 반면 한상수 전 대표는 생산법인 세진컴퓨터를 맡았다.
그러나 1999년 대우그룹 해체 과정에서 대우통신을 통한 자금조달과 경영지원이 불가능해진 것이 결정타가 되어 2000년 5월에는 컴퓨터교실 사업을 코네스(현 더블유에프엠)[12] 에 팔고, 7월 1차 부도 후 9월에 법원으로부터 파산선고를 받아 2009년에 법인까지 소멸됐다.
파산 당시 세진컴퓨터랜드의 자산은 780억 원에 불과하였으나 부채는 무려 4,800억 원에 달했다. 4,800억 원 중 대우통신의 몫이 4,000억 원 이상이었는데(...), 대우통신도 대우그룹 해체에서 비롯된 청산과정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세진컴퓨터랜드는 망하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주거래은행이었던 한빛은행(현 우리은행)의 여신은 전체의 1%도 되지 않는 30억 원, 말하자면 대부분의 부채가 외상값(...)이었다는 것이다.
망하기 전에 직영매장을 정리하고 프랜차이즈화 하는 것으로 경영방침을 전환했는데[13] , 파산 시점에 직영점 52개를 포함해 258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서술된 내용보다도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2.3. 독재식 직원 관리
한상수 사장[14] 은 전형적인 자수성가/카리스마형 리더였다고 하며 한국의 경영자들이 흔히 오는 정주영병[15] 이 심했었다고 한다. 그런 부류의 창업자들이 거의 그런 기질들이 많았던지라 한상수 사장도 그 중 하나였던 덕분에 빠른 사세 확장이 가능했지만 결국 그 독단에 발목을 잡히게 되었다.# 이외에도 다혈질로서 아래 서술된 직원 폭행사건 등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 해당 사례는 1995년 8월 19일 PC통신 천리안 '나도 한마디' 게시판에 <세진컴퓨터 공화국의 직원탄압 현장 고발>이란 게시글이 실려 네티즌들 사이에 파문을 일으켰으며, 이 글은 동월 23일 하이텔에도 파급됐다. 당시 대학 3학년생인 온모 씨가 두 통신망에서 각각의 아이디를 써서 세진 퇴사자의 편지를 인용하며 애인을 대신해 증언한 것이다.
시사저널 기사 링크를 보면 현재의 누리꾼(네티즌)이라는 말 대신 통신인이라는 말이 쓰여 시대(PC통신 시절)를 느낄 수 있다. 직원을 군대식으로 관리해서 물의를 일으켰으며[16] , 실력주의를 말하며 오로지 나이, 년차에 관계없이 능력으로 평가하겠다라며 신입사원 교육 2주차인 사람에게 대리로 승진을 시켜주는 한편 부산지점의 과장은 전화 받는 목소리가 작다면서 즉각 서울로 올라오라고 명령을 내린 뒤 부랴부랴 올라온 사람을 그 자리에서 일반사원으로 강등시키는 등 막장행보를 보여왔다.[17]
이러한 군대식으로 사람을 관리해 입사한 사람 중 절반 이상이 교육 과정인 한달 안에 세진을 떠났다.한상수 사장 인터뷰 기사 상기했듯 이러한 군대식 관리로 서비스 부분에서는 매우 우수했으나 근무 환경은 당연히 최악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원이나 점장들 역시 단결투쟁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1997년 2월부터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한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한 사장 사퇴 이후 군대식 문화가 사그러지고 프랜차이즈 점이 많아지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나마 한 사장 시절 나름대로 자랑거리던 우수한 서비스가 오히려 사퇴 이후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1995년 당시 시사저널 기사[18] 를 보면 다음과 같은 사례가 나온다.[19]
- 울산점 오픈을 하루 앞둔 날, 서울 잠실점[20] 에서 울산으로 파견 근무를 나가 있던 광고디자인과 여직원 김모 양이 한상수 사장에게 폭행을 당했다. 개막 준비로 어수선한 매장에서 한 사장은 스티커 작업이 소홀하다는 이유로 “남녀를 동등하게 대해 주겠다”며 여직원을 주먹으로 때렸다. 여직원이 뒤돌아서서 울자 한 사장은 다시 우는 것을 트집잡아 때렸다. 폭행을 당한 여직원은 그날로 사표를 썼다.[21][22]
- 7월 어느 날 서울 잠실점에 근무하던 경리과 여직원 이모 양은 사적인 통화를 한다고 큰 꾸지람을 당했다. 그날 저녁 석회 시간에 전 직원 앞에서 다시 인격적 모욕을 당한 여직원은 울면서 계단을 내려가다 넘어져 앞니가 모두 부러진 채 병원에 실려갔다. 한 사장은 다음 날 그 여직원을 해고 조치했다.[23]
- 7월 한 달간 전 직원 휴무 금지 조처가 내려졌다. 직원들이 피곤과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에서 8월 20일 일요일 근무를 하는 도중 갑작스런 방송이 나왔는데, 그 내용은 다음 날 대구에서 단합대회가 있으니 전 직원은 대구역 앞에 새벽 5시 30분까지 집결하라는 방송이었다. 사전 예고가 전혀 없는 갑작스런 일정이었다. 청바지와 운동화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직원들에게 일괄 구입 지시가 내려졌고, 서울 잠실점의 경우 근무가 끝난 밤 10시에 대기해 둔 버스를 타고 전 직원이 대구로 이동했다. 전국 각지 5개 점에서 모인 직원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잔 상태에서 10km 구보를 했다.
- 단합대회를 떠나기 직전 전격적인 임금 인상 조처가 발표됐다. 전직원의 임금 제도를 연봉제로 바꾸고 신입 평사원의 연봉을 1천 8백만 원으로 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지만 곧 이 발표는 하루 만에 번복되었다.[24]
3. 파산 이후
파산 뒤 한상수 전 사장은 상표권 개인 명의 등록으로 인한 업무상 배임혐의 등으로 검찰에 입건됐고, 이후 근황은 불명이다.[25] 본사가 입주했던 염창빌딩도 2001년 음반사 도레미미디어에 팔려[26] 세진컴퓨터랜드의 흔적조차도 없고, 단지 경영학 입문, 마케팅 관련 교재에 대표적인 경영 실패 사례로 그 흔적을 남겼다. 안습.
세진전자와는 이름 때문에 같은 계열사로 혼동하기 쉬우나 절대 관계없는 회사이다.
당시 만들어냈던 자체 브랜드 PC의 경우 케이스가 경이로운 내구성을 자랑하기 때문에[27] 가끔 컴덕들이 진돗개 케이스를 찾아다니기도 한다. 사실 내구성이라면 세종대왕[28] 이 甲 대우를 받지만 이쪽은 너무 옛날 제품이라 ATX가 아닌 AT규격 때문에 현시점에서 써먹긴 힘들다. 그 외에 세종대왕 98이나 세종대왕 2000, 진돗개 2000도 ATX 규격이지만 이쪽은 진돗개 보다도 구하기가 훨씬 어렵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117-3번지에는 세진컴퓨터랜드가 아직 존재하는데 구 세진컴퓨터랜드 프랜차이즈점으로 회사가 망한 이후에도 업체 이름을 바꾸지 않고 현재까지 사용 중인 듯하다. 네이버 지도 거리뷰 다음 지도 로드뷰 2016년 4월 현재 네이버 지도에는 '''디지털세진컴퓨터랜드'''라고 나오며, 간판에는 '세진컴퓨터' 달랑 써있으나, 문에는 '''DSEJIN'''이라고 쓰여있다. 익숙한 SEJIN의 CI지만, 자세히 보면 '''D'''가 하나 더붙어있다.(...) 저 가게만 보면 'D'가 뭐지라고 의아할 수 있는데 네이버 지도에 나온 검색결과를 보면 디지털을 의미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저 근처에 실제 세진컴퓨터랜드 매장이 있었다. 거리 사진에서 오산 방향으로 올라가다 왼쪽에 요양병원이라고 쓰여 있는 건물이 예전 세진컴퓨터랜드 매장 건물이다. 또한 위 사진 속 간판에 쓰인 것과 같은 CI를 쓰는 세진컴퓨터 안계점이 경북 의성군 안계면 용기리에 있다. 네이버 지도 거리뷰 여긴 우리가 아는 SEJIN의 CI와 완전히 동일하지만, 구 세진컴퓨터와 관련은 없다. 어쩌면 사장 이름이 '세진'일 수도? 참고로 '''현주몰'''이란 곳에서 구 현주컴퓨터의 로고를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는데, 대표이사 이름이 '''박현주'''다.(...)
세진컴퓨터랜드는 짧고 굵은 인생의 표본이었는데, 전성기는 90년대 중후반으로 불과 몇년에 불과했으나, 그때 워낙 폭발적인 열풍을 불러일으켰던지라 망한 지 20년 가까이 다 되가는 지금도 세진컴퓨터를 자처하는 곳들도 있고, 컴덕들이 진돗개 케이스를 찾아다닌다든지 하는 거 보면 한국 컴퓨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단한 기업은 기업인 셈.
'''2017년'''에 아직 작동하는 세진컴퓨터가 발굴되기도 했다.[29]
과거의 세진컴퓨터랜드 매장 건물들은 2021년 현재도 남아있는 곳이 상당수 된다. 물론 상가나 병원 등 다른 용도로 바뀌었지만.
4. 역대 대표이사
- 한상수 (1992~1997)
- 이군희 (1997~1999)
- 변재주 (1999~2000)
5. 자회사 목록
- 세진홈마트: 통신판매 업체로, 1997년 부도 후 폐업됨.
- 세진애드컴: 인하우스 광고기획사로, 1998년 청산됨.
- 세진컴퓨터: PC 생산업체로, 2000년 청산됨.
6. 관련 자료
[1] 파산 후 등기상 주소로 보이며, 파산 전 최종 주소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공항대로 659(염창동)이었다.[2] CI 모양을 자세히 보면 후기형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96년 이전까지는 구 CI(우측 하단 참조)를 사용.[3] 하지만 서울에 매장을 개설한 1995년을 기준으로 매출의 절반 이상을 대우통신의 제품이 차지했었고, 1차 부도 위기를 겪은 1995년 11월 기사를 뒤적거려보면 업계 종사자들은 좀 커다란 대우통신 대리점으로 생각하기도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1997년 대우통신이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대우통신의 제품비중이 더 커졌다. 대우통신은 PC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삼성, LG, 삼보 같은 다른 PC제조사들과는 달리 대리점 유통망이 전무했기 때문에 때문에 전국적인 유통망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독 관대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1993년에 삼성, LG, 삼보는 외상거래가 일정기간 지속되자 대금지급이 될 때까지 일시적으로 거래를 끊기도 했었다. 그때 다른 제조사들과 함께 거래를 끊었다면 (세진은 그때 망했겠지만) 대우그룹은 1조 원 정도의 손실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4] 지점장을 제외하고 전 직원이 하늘색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5] 부품 구성에 사기를 치지도 않았다. 용산에서는 90년대에도 CPU에 적힌 모델넘버를 바꿔서 속이는 등 성능이 낮은 제품을 상위 제품이라 속여 부당이득을 챙기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6] 1990년대 중반 당시에는 도스가 현역으로 뛰던 상황이라 컴퓨터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사람은 사용할 수 없었고 일단 컴퓨터 사기 전에 컴퓨터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하던 시대였기에 컴퓨터 학원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등 대호황인 시대에 이러한 정책은 고객과 세진 둘 다에게 이득이었다. 고객은 공짜로 컴퓨터를 배운 다음 겸사겸사 세진에서 사고.[7] 1994년도 이 실화가 TV에 방영되며 화제를 모았었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얀마음 백구라는 애니메이션도 나왔다.[8] 사실 국민PC 제조업체들은 이곳을 포함한 대다수가 망하여 현재까지 남아있는 업체는 주연테크 정도뿐이다.[9] 정확히는 1996년에 방영되었으며 이 광고 이후 이듬해에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로 일가족과 함께 사망했다.[10] 보유지분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이때부터 1997년 초까지는 한상수 사장이 계속 경영했고, 대우통신이 지급 보증을 서는 등 아낌없이 경영 지원에 임했다.[11] 한상수 사장의 지분 49%를 대우통신 임원들이 분산 매수해 공정거래법상 계열사가 아닌 것처럼 위장하기도 했다.[12] 인터넷 교육사이트 '에듀박스' 운영사다.[13] 프랜차이즈점의 서비스는 직영점보다 나빴다. 정책상 AS는 무상인데도 요금을 청구한다든지, 방문설치기사의 친절도가 떨어진다든지 하는 등으로 평판을 깎아먹는 데 크게 일조했다.[14] 1959년 경상북도 문경군(현 문경시) 출생. 문창고등학교에 재학하였으나 1977년 3학년 때 중퇴하였으며 광부 등 여러 일을 전전하며 생활하였고 대우통신의 영업사원으로 있었다.[15] 직원들을 무슨 군대마냥 군기를 심하게 잡으면서 독단적이고 즉흥적으로 결단을 내려버리고 정주영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는 것을 흔히 정주영병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정주영병에 걸린사람으로 STX 강덕수 회장을 꼽을 수 있다. 정주영을 상징하는 명대사 "이봐, 책임자. 해봤어?"[16] 실제로 공군 중령 출신을 임원으로 앉혔다.#[17] 결국 이 과장은 처자식이 있었음에도 눈물을 흘리며 퇴사를 했다.[18] 원본은 전술했듯 PC통신 게시글 <세진컴퓨터 공화국의 직원탄압 현장 고발>이다.[19] 물론 아래의 사례와 같은 행위는 강요죄에 해당되며 바로 아래에 후술할 여직원 폭행사건의 경우와 같은 행위가 있을 경우 해임을 넘어서는 형사처벌까지 이어질 수 있다.[20] 석촌역 7번 출구 앞에 위치. 2020년 현재 건물 자체는 남아있으며 우리은행 지점으로 사용중이다.[21] 물론 이러한 경우는 지금 시대에 벌어졌다간 빼도박도 못하고 고소당할 것이고 형법 제324조에 의하여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해당된다. 심지어 언론에까지 대대적으로 알려져 'XX그룹 회장 갑질 사건' 같은 식으로 크게 조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 시절까지는 아무리 PC통신이나 언론에 나온다 해도 "맞을 짓해서 맞았겠지" 같은 이상한 상식이 통용될만큼 직원 폭행이 별다른 흠이 안 되는 시대였다.[22] 이 때문에 광고디자인실에 근무했던 5명의 직원들도 한 사장의 만행에 더 이상 참다 못한 나머지 집단 사퇴했는데, 문제는 회사측이 폭행을 부정했으며 김경중 당시 이사가 대표이사가 때린 건 아니라 어깨를 세게 흔든 것이라며 적반하장의 행태를 보였다는 것.[23] 당시 세진은 노조도 없었을뿐더러, 노조가 있었다 해도 지금처럼 노조원을 대리해 강력한 투쟁을 벌이거나 회사에 압박을 넣기도 어려웠다. 노조활동을 '노사분규'라고 부르며 '지들 배 불리려고 월급 올려달라 데모질이나 하는 것들'이란 시각이 건재했던 시절이다.[24] 이 때 사장이 했던 말이 "월급을 올려줘도 고마워 할 줄 모른다."였다. 지금으로 치면 약 4000만 원으로 전자제품 판매업종 중에 압도적으로 높은 연봉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는 4년제 대학생들이 세후 월급 100만 원을 받아봤으면 좋겠다고 할 때였고. 이미 당시 세진은 업계 최고 수준의 급여를 지급하고 있기도 했지만. 사실상 똥깨훈련인 단합대회에서 그나마 위안이 될 말을 한 뒤 바로 번복하는 짓은 졸렬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긴 하다.[25] 2019년경 이후 인터넷상에서 김해에서 국밥집 사장으로 변신했다는 소문이 돌지만, 언론이나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취재를 하지 않고 제보도 들어오지 않아 불명이다.[26] 이에 따라 건물명도 도레미빌딩이 됐다. 해당 건물은 시키면 한다! 약간 위험한 방송의 주 촬영지이기도 하였다.[27] 탈크를 섞은 플라스틱을 사용했다. 자동차 범퍼 등 외장재에 범퍼로 쓰이는 재질이다.[28] 컴퓨터에 시계가 달려있었다. [image][29] 범용이 아니라 실험/분석장비와 연결된 컴퓨터의 경우 구형 H/W 및 S/W 호환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쓰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