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Korean Air Flight 801
1. 개요
1997년 8월 6일 오전 1시 43분경(현지 시각) 서울 김포국제공항발 대한항공 801편, 테일넘버 HL7468이 미국령 괌의 안토니오 B. 원 팻 국제공항으로의 접근 중 추락, 승객 254명 중 228명이 사망한 사고이다. 희생자와 관련해선 아래 내용 참고.
이 사고는 대한항공 창립 사상 사망사고 2위를 기록하였으며(1위는 007편), 더불어 대한민국의 단일 항공기 사고 2위다. 세계 항공사고 순위로는 공동 22위(다른 한 사고는 AF447)이며, 또한 '''보잉 747-300의 유일한 대형 사고이다.'''
이 사고로 인해 안전 기준이 미달되어 대한항공은 본래 가입하려 했던 항공동맹인 스타얼라이언스로부터 가입을 거절당하고 만다.[3] 하지만 2000년에 델타항공, 에어 프랑스, 아에로멕시코와 함께 스카이팀을 새로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사고의 배경과 진행 과정
1997년 8월 6일 새벽 1시 쯤, 서울을 떠나서 괌으로 가던 대한항공 801편[4] 이 괌 아가나 공항에 착륙 직전 공항 바로 앞의 언덕인 니미츠 힐(Nimitz hill)[5] 밀림 지대에 추락하여 탑승객 254명 가운데 228명이 사망하고 26명이 살아 남은 당시 역사상 최악의 참사가 벌어졌다.
플심으로 재현한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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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기 조종실에는 박용철 비행기 기장, 송경호 부기장, 남석훈 항공기관사 등 3명의 조종 승무원이 탑승하고 있었다. 박용철 기장은 대한민국 공군 조종장교 출신으로, 1987년 공군 소령으로 예편 후 대한항공에 입사하여 1992년 기장으로 승격, 1995년부터 보잉 747을 조종하기 시작했으며, 1997년 5월에는 비행안전 부문에서 대한항공 사장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송경호 부기장은 1994년에, 남석훈 항공기관사는 1980년에 각각 공군 중령 예편 후 대한항공에 입사하여 근무해왔다.
당시 조종실에서는 이 사고의 주요한 원인이 되는 두가지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첫번째는 괌 공항의 비행기 유도 무선표지소, 즉 VOR[6] 이 다른 공항들의 것은 보통 활주로 끝에 있는 것과 달리 3마일(약 5km) 정도 떨어져 있다는 사실,[7] 두번째는 괌 공항 계기착륙장치의 활공각 유도 장치인 글라이드 슬롭이 고장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종사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는데, HL7468에 비치되어 있던 차트는 구식이었기에, 1997년 사고 당시보다 착륙 고도가 낮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고 발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충돌 30여 분 전, 박용철 기장의 착륙 브리핑이 있었다. 이 대화에서 박용철 기장은 괌 공항의 글라이드 슬롭이 고장났다는 사실을 명확히 언급하였다.
충돌 29분 전, 4만 1천 피트(12,946.8m) 상공에 있던 비행기는 2,600피트(792.5m)로 하강하기 시작한다.
충돌 22분 전 갑자기 비구름이 나타나 10마일(18.52km) 정도 우회하기로 한다.
충돌 11분 전, 비구름에서 벗어난 801편은 괌 공항 6번 활주로로 내려가겠다고 관제탑에 보고한다.
충돌 9분 전, 착륙을 위해 괌 공항 계기착륙장치와 VOR을 맞춘다. 로컬라이저란 계기착륙장치에서 발사하는 무선으로써, 이것을 수신하면 착륙 비행기의 항로와 활주로의 중앙선을 일직선상에 맞출 수 있다. 당시 괌 공항에서는 착륙 시의 강하고도를 보여주는 글라이드 슬롭은 작동하지 않고 있었으나 로컬라이저는 작동하고 있었다. 사고기는 90도로 좌회전하여 로컬라이저 무선을 포착한 다음 고도 2,600피트(792.5m)를 유지하며 비행하고 있었다.
충돌 3분 전, 괌 관제소는 "대한항공 801편, 활주로 6번 왼쪽으로 계기착륙방식의 접근을 허가한다. 글라이드 슬로프는 사용할 수 없다"고 하여 착륙지시를 내리면서 글라이드 슬롭이 고장나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그런데 이 직후 조종실에서는 "글라이드 슬롭이 돼요?" "글라이드 슬롭 되나 보라구" 등등의 이상한 대화가 오고가기 시작한다. 글라이드 슬롭 전파송신소는 고장이 나있더라도 비행기 계기판에는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잘못된 신호가 나타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라디오 같은 전자제품에 의한 전파간섭이나 비행기 외부에서 방출된 전파로 인한 오작동을 일으킬 수가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항공기 내에서는 휴대전화나 통신기능이 있는 무선기기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다. 나중의 우리나라 건설교통부 조사팀의 보고에 의하면, 만약 괌 공항의 글라이드 슬롭 송신 시설이 120헤르츠의 전파를 발사하였더라면 801편의 수신기에 허위 신호가 나타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여간 블랙박스에 남겨진 대화를 보면 해당 기체 계기판에 어떠한 글라이드 슬롭과 관련한 신호가 나타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충돌 2분 전, 801편은 고도 1천4백피트(426.7m)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괌 공항의 시각비행 착륙규칙에 따르면 해당 위치에서는 2천피트(609.6m) 아래로 내려가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801편은 그 최저고도보다 6백 피트(182.9m)나 아래로 내려가버린 것이다. 사고기 조종사들이 이러한 심각한 실수를 한데 대해서는 여러가지 원인이 제시되었는데, 조종사 특히 박용철 기장의 피로[8] , 구름과 비가 내려서 바깥 상황이 보이지 않는 악천후, 고장나 있는 글라이드 슬롭에 신경을 쓰느라 정작 착륙절차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던 점,[9]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이 되어서 '''괌 공항 활주로 3마일 앞에 있는 VOR을 다른 공항처럼 활주로 바로 끝에 있다고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받고 있다.[10] 즉 하강 기준점인 VOR이 괌 공항 3마일(5km)이나 앞에 있는데도 이를 공항 활주로 끝에 있다고 순간 착각하고 VOR을 향하여 사고기를 강하시키고 있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런데 그 VOR은 괌 공항과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활주로보다 훨씬 높은 고도(니미츠힐)에 위치해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사고기 조종사들이 니미츠힐 바로 위 몇십미터를 아슬아슬하게 날면서도 괌 공항에 착륙 직전이라고 착각한 것이 충분히 설명된다. 최종 사고조사보고서에서도 이러한 점을 나열하여 사고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다.
추락지점은 VOR 바로 근처임을 알 수 있다. 조종사들이 VOR을 활주로 끝이라고 착각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충돌 1분 40초 전, 관제탑은 801편에게 착륙을 허가한다.
충돌 1분 20초 전, 기장은 착륙전 최저고도를 560피트(170.7m)로 세트하라고 지시한다. 즉 이 고도까지 내려가도 활주로가 육안 확인되지 않으면 착륙을 포기하고 복행(고어라운드)해야 한다. 이 최저고도 560피트는 대한항공 801편 추락사고를 설명하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충돌 40초 전, 기장은 또다시 "글라이드 슬롭 안되나?"라고 말하여 계속 글라이드 슬롭에 신경을 쓰고 있음을 보여 준다.
3. 사고 직전 상황과 조종실 음성기록
미니멈 경보가 나온 것은 불과 '''충돌 12초 전''' 이었다. 이때 사고기의 해발고도는 840피트(256.0m)였으나, 니미츠힐 바로 위를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지면과의 차이는 불과 304피트, 약 92.7m였다. 이 경고음이 나왔을 때 조종실에서는 어둠과 악천후로 활주로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보이지 않을 수 밖에 없다. 활주로와는 5km도 넘게 떨어져 있었으니까. 미니멈 경보가 나오고 원칙대로 조종사들이 복행을 시도했으면 너무나 당연하지만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GPWS(지상접근경보장치) 문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미니멈 경보는 착륙결심 최저고도를 알려주는 것이다. '''여기서 활주로가 보이지 않는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으면 무조건, 그 즉시 복행(고어라운드)해야 한다.''' 그런데 사고기 기장과 부기장은 미니멈 경보가 나왔음에도 즉각적으로 기체를 상승시키지 않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조종사들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최저고도를 해발 560피트(격차고도 304피트)로 미리 고정시켜 놓고 있었다. 그런데 계기판이 가르키는 현재의 해발고도는 840피트, 최저고도보다 280피트(85.3m)나 높은 것으로 나오니 안심했을 것이다. "560피트(170.7m)까지는 마음 놓고 내려가도 안전하다"는 일종의 선입견 내지는 착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560피트(170.7m)라는 최저고도는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3.3마일(6,111.6m) 떨어진 VOR 상공까지 1,400피트(426.7m) 이상의 고도로 접근한 뒤 VOR을 넘어서서 활주로로 강하하는 구간의 최저고도이다. 즉 기장을 비롯한 조종사들은 최종 접근 경로의 한 구간을 통째로 머리속에서 생략해버린 채 "무조건 560피트(170.7m)까지는 내려가도 된다"는 집단적인 착각을 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기체는 활주로가 아니라 활주로에서 3마일이나 앞에 있는 VOR을 향해 거의 일직선으로 내려꽂히듯 하강하고 있었고, 그 VOR은 평지가 아니라 니미츠힐 꼭대기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니 해발고도와는 다르게 미니멈 경보가 당연히 나올수 밖에.
다시 한번 강조해두지만 바로 위 표의 조종실 대화 내용은 '미니멈 경보'가 나온 이후의 대화이다. 즉 미니멈 경보가 나왔음에도 무려 6~7초 가량을 더 하강한 것이다. 이때 부기장이 기장을 무시하고 자기 앞에 있는 조종간을 잡아 당겼어야 했다는 지적이 있다. 부기장이 두 번이나 "착륙 포기"를 건의했음에도 기장은 바로 응하지 않았다. 민항기 조종사들은 기장이 명백하게 잘못하고 있다고 판단될 때에는 부기장이 독단으로라도 조종권을 인수하여 위기를 모면하도록 교육받는다. 하지만 801편에서는 이런 절차가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게 되어 사고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는 대한항공 조종실 내의 권위주의적인 분위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하단에서 후술.
801편의 왼쪽 날개 밑에 달린 랜딩 기어가 먼저 언덕의 나무를 살짝 건드린 뒤 도로 곁에 있는 송유관을 치면서 도로를 건너가다가, 왼쪽 날개 바깥쪽의 1번 엔진이 언덕 비탈과 충돌했다. 엔진은 떨어져 나갔고 비행기 동체는 언덕의 비탈을 기어 올라가면서 조종실이 있는 기수를 시작으로 부러지기 시작했다. 기수는 언덕의 꼭대기를 넘어 아래로 내려 꽂듯이 쳐 박혔다. 사고기는 충돌 직전에 기장이 기수를 치켜올린 것 때문에 충돌 2초 후에는 기수가 상향 8도로 치켜져 있었다. 결국 하강을 멈추고 막 상승하려는 찰나에 나무와 송유관을 친 것인데, 나중의 분석에 따르면 '''3m만 여유가 있었더라도''' 아슬아슬하게 충돌을 면하고 상승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한편, 747기가 치고 지나간 송유관의 커다란 파편이 소방차 및 구급차가 사고지점으로 향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도로를 가로막게 되었고, 이는 사고 대응을 더더욱 지연시키는 큰 원인이 되었다. 차량 진입이 불가능해 구조대원들이 소형 응급대응 킷만을 들고 걸어서 이동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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괌 공항에 착륙하는 비행기의 시점에서 바라본 니미츠힐 추락 현장. 저 멀리 평지에 보이는 하얀 줄 같은 곳이 괌 공항이다. 그리고 사진 우상방에 하얀 평지와 그 가운데 기둥 같은게 서있는 게 보이는데, 그게 바로 괌 공항의 VOR이다. 왜 사고가 발생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사진이며, 사고 당시 시정이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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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실과 1등석이 있는 기수(機首) 부분은 동체가 분리되어 뒤집어진 채 발견되었다. 기수의 코 부분은 충돌 시의 충격으로 조종실 안쪽으로 밀려들어가 있었다. 생존자 가운데 8명은 1등석, 10명은 뒷좌석, 13명은 3개의 의자열(列) 가운데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생존자들은 비행기가 동강날 때 의자와 함께 바깥으로 튕겨 나갔든지 기체 안에서 자력(自力)으로 안전띠를 풀고 화염과 쏟아진 짐 덩어리들 사이를 뚫고 바깥으로 탈출한 이들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충돌 직후의 승객실은 산소 마스크가 내려와 있었고, 머리 위에 있는 짐칸에서 물건들이 쏟아져 바닥에 쌓여 있었으며, 공사장처럼 어지러웠고 붉은 화염과 열기가 덮쳐 왔다.
한편, 164명이 탑승한 아시아나항공의 OZ262편도(기체는 보잉 767) 사고기와 비슷하게 5일 오후 9시 김포공항을 떠나 괌으로 향했으나, 이 비행기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 때문에 801편의 복편에 탑승하려던 승객들과 승무원 그리고 마중을 위해 801편의 탑승객을 아가나 국제공항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는 아시아나항공 262편이 도착했음에도 대한항공 801편은 소식이 없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또한 아래의 ATC 기록과 같이 관제사들은 레이더에서 사라지고 두 관제사가 모두 통신이 안 되는 것을 보아 사고로 단정지었다.
이 직후 관제사들의 신고에 공항소방대와 괌 911구조대가 추락현장으로 출동했지만 801편이 치면서 넘어트린 거대한 송유관이 현장으로 향하는 유일한 도로를 막아버리는 바람에 사고현장에 도착하는데만 무려 1시간이 걸렷다. 이 때문에 이들은 기체밖에 자력으로 빠져나와있던 일부 생존자들을 제외하고는 얼마 안 돼서 시신들을 수습해야했다.
3.1. 당시 날씨 관련 문제
당시 기사에 따르면 괌 교민들은 이번 참사가 악천후를 무시한 채 대한항공 측의 무리한 운항으로 야기된 인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교민들은 "사고가 난 새벽에 괌에는 억수같은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며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사고 여객기가 부산 상공에서부터 천둥번개가 치는 악천후를 통과하면서 기체가 심각하게 흔들리는 등 정상적인 운항이 힘든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중간에 기내식 서비스를 하다가 기체가 심하게 흔들려 식사서비스를 중단했다고 한다.
이 비행기의 전 또는 전전 편으로 한국으로 돌아온 여행객들의 증언에는 자신들의 비행기도 운항 중 매우 불안정했으며 (엄청난 높이로 비행기가 급하강, 상승을 반복해서 식판이 날아다니고 서있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고 함) 날씨가 좋지 않았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당시 괌 인근 기상이 매우 불안정했다는 것은 명확하다.
3.2. FAA의 과실
NTSB는 조종사 과실 말고도 FAA의 과실 또한 존재한다고 결론냈다.
괌 안토니오 B. 원 팻 국제공항의 구조는 약간 특이했는데, 보통 활주로 바로 앞에 DME와 ILS유도장치를 설치한 다른공항들과 달리 DME가 공항 활주로에서 무려 5km나 떨어져 있는 공항이었다. 그런데 이런 특이한 공항에 ILS가 고장났음에도 '''3개월'''이나 방치해뒀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기에 대부분의 미국 공항들에는 최저안전고도 경보시스템(MSAW)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MSAW는 원래는 항공기가 정상고도 이하로 지상에 접근할 때 추락 위험을 경고함으로써 사고를 예방해주는 안전장치로 공항 관제소 레이더에 설치해 두고 만약 항공기가 접근하는 도중 과하게 하강하면 관제사와 조종사들에게 경고를 해주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FAA는 특이하게 유독 괌에만 MSAW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게 했다. FAA는 괌의 MSAW가 오류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자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하거나 장비를 교체하는게 아닌 다른 해결방법을 썼는데, 공항에 접근할 때는 전혀 필요 없을 정도로 먼 '''바다 위 80km'''에서만 이 서비스를 제공했다. 당연히 괌에 착륙하는 여객기들은 80km 공역 안쪽으로 지나는 순간부터 경고를 들을 수 없었다. 즉, 안전보다 편의를 앞서서한 조치가 801편에 경고할 기회중 하나를 없애버리고 말았다. 이후 괌의 MSAW도 다른 공항들과 같은 FAA 규격대로 고쳐졌다.
3.3. 조종실의 서열 관련 문제
사건 후 '''조종석에 탑승한 3명의 조종 승무원들 모두 공군 조종장교 출신'''으로 밝혀졌다. 참고로 박용철 기장은 1975년 공군 간부후보생학교에 입교한 조종간부 출신이다.[15] '''다시 말해 기장이 공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부기장과 항공기관사가 공군사관학교 직속 선후배 사이'''였다. 혹자는 기장과 부기장이 공군사관학교 선후배 사이여서 마치 기장이 강압적으로 부기장을 짓눌렀다고 견해를 비춘다. 하지만 기장은 간부후보생학교 출신이므로 이는 잘못된 것이다. 실제 공군 조종장교는 공사 출신과 비공사 출신끼리 파벌을 나누고 있다. 이 파벌은 항공사에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보통 비공사 선배-공사 후배 관계의 경우 군대 짬밥 정도만 존중해주고 대부분 서로 터치하지 않는다.
박용철 기장은 1987년에 공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송경호 부기장의 경우 공군사관학교 26기 출신으로 1994년 공군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그리고 남석훈 항공기관사 역시 공군사관학교 11기 출신으로 1979년 공군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지만 한국 사회는 서열에 따른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그런데 상명하복이 몸에 배인 군인 출신끼리 모인 집단에서 조종석을 구성하고 있다보니 '''감히''' 선배님이 모는 비행기의 조종대를 잡을 수 없는 분위기로 자연스레 굳어졌을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고정익 민항기 조종사의 대다수는 공군사관학교에서 조종특기를 부여받은 후 '''10여 년 의무복무'''[16] 를 했던 이들이다. 이 정도면 진급이 빠른 조종특기의 경우 대충 소령 말 ~ 중령 초는 되어야 전역할 수 있다. 참고로 중령이면 비행대대장 보직을 맡는다. 그리고 이렇게 의무복무를 마친 뒤에 민항사에 지원했거나 공군 학군단을 거친 케이스다. 그리고 군 내에서는 사관학교 기수를 대단히 중요하게 따지며, '''이는 전역 후 예비역 관련 행사 등에서도 습관처럼 적용된다.''' 즉, 전역하고도 사관학교 선배에게 같은 민간인으로서 대하지 않고 철저히 후배가 선배의 말에 따라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은 조종 승무원들의 군 출신 서열만 놓고 보자면 '''셋 중에 항공기관사인 남석훈이 가장 선배'''였고, 연령대로나 입사시기나 비행시간도 나머지 둘보다 훨씬 많았지만, 조종실에서의 직급만 놓고 보자면 항공기관사가 '''세 사람 중에 가장 하위 서열'''에 있었던 것이었다. 남석훈 항공기관사 입장에서는 박용철 기장이 군에서나 항공사에서나 짬밥으로는 후배이긴 해도 사관학교 직속후배가 아니다 보니 실질적으로 선후배간의 강력한 상하관계라고 보기도 어렵고, 조종석에서의 직급은 오히려 자신보다 두 단계 가까이 높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사실상 방관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실제 블랙박스에 기록된 기장과 항공기관사 사이의 칵핏 대화 내용을 살펴보면 남석훈 쪽에서 혼잣말로 편하게 말을 놓는 경우가 간혹 있긴 해도 기장과는 대체로 상호 존칭으로 대화를 주고 받고 있다. 항공기관사는 조종석 내에서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기장에게 존중을 표하는 것이고, 기장은 항공기관사가 자신보다 하위 직급이긴 해도 입사시기와 비행경력이 많아서 짬밥 대우를 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사실 기록된 대화 내용이나 뉘앙스를 분석해 보면 현역으로 군복무를 해본 사람들은 익히 알 만한 중대장과 행정보급관, 조금 높게 잡으면 대대장과 주임원사가 대화하는 미묘한 느낌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남석훈 항공기관사의 이런 애매모호한 위치'''는, 사고 당시 박용철 기장이 조종실 내 분위기를 강압적으로 몰고 가거나 나머지 승무원들에게 불평하는 부분이 사실상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송경호 부기장이 박용철 기장의 행동에 적극 개입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계기'''로 분석될 수 있다. 셋 중에 나이도 제일 많고 같은 사관학교 15년 대선배인 항공기관사조차도 기장에게 저렇게 존중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셋 중에 나이[17] 로나 군 짬밥으로나 가장 막내였고, 항공사 경력도 가장 신참이었던 부기장으로서는 기장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가 더더욱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 이들 중 누군가가 조종실의 분위기를 딱히 나쁘게 몰아간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권위주의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던 조종실에서 군 출신 구성원들로 성립된 짬밥 및 파벌 서열과 조종실 내에서의 직급 서열이 뒤섞이며 엉망이 되어 이들 간에 명확한 서열 기준이 없어지면서 빠른 의사결정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고, 결국 조종 승무원들은 1분 1초가 아쉬운 긴급 상황에서 멘붕과 망설임으로 시간을 지체하다가 참사를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을 마지막 골든 타임을 놓치게 된다. '''어찌보면 당시에 송경호 부기장이 박용철 기장에게 착륙 포기를 구두로만 수 차례 건의한 것은 그 당시 조종실 분위기 속에서 나름 최대한 자신의 의사표현을 한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만약 그가 구두 건의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여 조종권을 스스로 인수했다면, 당시 조종실 분위기를 감안해 볼 때 선배의 권한을 멋대로 가로챈 버릇 없는 후배로 낙인 찍힐 것이 기정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3.3.1. 아웃라이어의 인용과 사람들의 오해
이 사고의 조사 보고서와 대부분의 분석 결과에 따라, 이 사고는 '''권위주의적 문화'''에 젖어든 조종 승무원의 사회적 처신을 위한 망설임 하나가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지게 되는 인과관계는 결국 조종실 승무원들 간의 권위주의적 문화가 정상적인 CRM(Crew Resource Management)을 방해하고 항공 안전을 위협하는 악폐습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라는 내용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상황에 대해 맬컴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의 책 '아웃라이어(Outlier)'에서 언급되어있다.
해당 책은 문화적 유산이 개인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한다는 내용으로, 한국의 상명하복식 군대 문화의 폐해로 제시했다. 그런데 책에서는 조종사들의 대화 내용을 삭제해 어거지로 이어 맞추고, 이것을 언어적/문화적 문제라는 말도 안되는 내용을 제시했다. 여기에다가 한국인들의 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모습도 보인다. 또한, 글라이드 슬롭 고장 문제를 간단한 일로 치부하고 넘어간 것을 보면, 작가 자신도 제대로 알고 쓰지 못 한것 같다. 이 책에는 아비앙카 항공 52편 추락 사고가 이 사고와 연관지어 나오는데, 어떻게든 둘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 끼워맞추려는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비전문가인 글래드웰의 글은 걸러 읽을 필요가 있다.[18]
3.4. 피해를 부채질한 요소들
항공기 좌석들의 잘못된 설계도 희생자들을 늘리는 역할을 했다. 항공기들에 쓰이는 좌석은 좌석 하단부에 길고 굵은 봉이 가로로 지나가는 구조인데, 추락하면서 이 봉에 다리가 부닺치면서 대부분의 승객들이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다. 한 뉴질랜드인 승객은 곧 착륙할 것으로 생각해 비행중 벗었던 신발을 다시 신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가 우연히 충격방지자세가 만들어져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다리부상을 피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이 붙은 기체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처음 추락했을 때에는 기체 안에서 여러 나라 언어로 들리는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리다가 불길이 점점 커지면서 그 소리들은 사라져갔다고 증언했다. 한 11살 일본인 생존자는 체구가 작아 다리를 부상당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결국 기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19]
다른 문제점은 당시 면세 주류의 적재 방식이었다. 당시에는 면세품을 기내 오버헤드빈에 보관했는데, 당시 801편의 오버헤드빈에는 최소 462리터나 되는 면세주들이 있었다. 여기에 산소공급장치들의 산소가 결합되어 더 활발하게 불을 옮겼다.
이후 위에서 언급한 뉴질랜드인 탑승자에 의해 공론화가 되고 그의 고국인 뉴질랜드 민간항공국은 기내 면세주류 적재에 대한 위험성을 인정했지만 아직까지도 관련 규정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20]
4.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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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사고 6일 째인 1997년 8월 11일 아침 괌 현지 유가족들이 퍼시픽 스타 호텔 2층 그랜드 볼 룸에서 전날 밤 설치된 영정을 보며 또 한 번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참고로 괌 퍼시픽 스타 호텔은 현재도 운영 중이다.
사고 당일 보도된 생존자는 29명이다. 원래 현장에서 구조된 인원은 31명이었으나 2명이 이송 도중 사망했기 때문. 이후 추가로 병원에서 중상자 3명이 사망하여 최종 생존자는 26명이다.
휴가철인 8월, 그것도 대표적 휴양지인 괌으로 가는 항공기에서 벌어진 대형 참사였기 때문에, 가족 단위로 탑승한 경우가 많아서 일가족 전원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았다.
이 사고로 비행기를 타지 않았던 사위를 제외한 장인과 그 일가족 및 직계 비속까지 전원 사망하여, 장인의 형제들과 사위가 1천 억 원대 유산의 상속권을 두고 3심까지 가는 소송을 벌인 끝에 사위가 승소한 재판이 있기도 했다. 법대생들이 법공부하다가 ''''동시사망시 대습상속''''의 유명한 판례로서 접한다. 상속 관련이지만 소유권 이전 등기 말소 건으로 분류되는 사건번호 97가합91172(1998년 4월 3일 서울지방법원에서 판결), 98나21825(1999년 2월 11일 서울고등법원에서 판결), 99다13157(2001년 3월 9일 대법원 판결), 이 세 판결이 바로 그 판례에 해당한다. 한양대 의대 교수인 사위는 그렇게 받은 회사와 부동산을 매각했다. 매각금액은 대략 2천억대로 추정. 그 회사가 인천제일상호신용금고인데, 에이스저축은행으로 이름이 바뀌어 김학헌이라는 사람에게 넘어갔다. 원광인바이로텍 등 폐기물 처리업체를 경영하던 인천 지역 유지였던 그는 동우몽베르CC(컨트리클럽, 골프장이다)와 에이스저축은행 등을 인수하며 사업을 확장했지만 에이스저축은행이 2011년 저축은행 사태가 터지면서 검찰 수사를 받자 자살했다. 현재는 하나저축은행에 자산이 인수되었다.
그 외에도 운명의 장난 같은 기구한 사연들도 많았다. 당시 대한항공 박완순 괌 지점장은 이 사고로 아내와 초등학교 6학년생이던 아들 박수진[21] 을 잃고, 당시 대치중학교 2학년이던 딸만 살아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슬픔을 뒤로 한 채 밤새도록 사고 수습에 전념해야 했으며, 애써 침착함을 보이며 유족(박완순 자신도 유족이었음에도)에게 죄송하다는 인터뷰를 하다 끝내 울음을 터트려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22] 참고로 박완순 지점장은 이후 대한항공 홍보 팀장, 서비스아카데미 원장 등을 거쳐 지금은 대한항공에서 퇴사하고 인성교육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또 1983년 옛 소련 전투기 미사일에 격추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으로 승무원이었던 남편을 잃은 한 재미교포는, 이 사고로 어린 조카와 여동생도 잃어 대한항공과 원치 않은 악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또한 성우 장세준 - 정경애[23] 부부가 두 아들인 장성민(장남), 장재민(차남)과 함께 이 사고로 모두 목숨을 잃었기에 성우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등, 항공사고사 이외의 측면으로도 이슈가 되기도 했다. 아내인 정경애는 당시 SBS에서 방영하던 마법기사 레이어스의 윈디(호우오우지 후) 역할에 캐스팅된 상태였는데, 방송심의 때문에 방영이 연기된 동안 가족 여행을 떠났다가 일가족이 모두 사망하는 변을 당했기 때문에 마법기사 레이어스의 방영이 연기되지 않았다면 이들 부부가 자녀와 함께 희생되지 않았을 것이란 이야기도 있었다.[24] 정경애 성우는 사후 한국방송대상 여자성우상을 추서받았다.
서울대학교병원 레지던트 2명도 희생자 목록에 있었는데 이들은 바쁜 와중에 겨우 짬을 내 휴가를 가던 중 이 사고로 사망하였다. 두 사람 모두 여성이었고 이들은 평소에도 친한 친구사이였다고 하며 치료방사선과(현재는 방사선종양학과로 이름이 바뀜), 흉부외과를 수련 중 이었다고 한다.
언론계도 유능한 인재를 하나 잃었는데, 1973년 KBS 공채 1기 기자로 입사한 24년차 베테랑인 홍성현 KBS 보도국장[25] 이 일가족 5명과 휴가를 위해 비행기를 탔다가 홍 국장의 아내와 차녀를 제외한 일가족 3명(본인 포함)이 변을 당했다.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한국방송기자클럽은 1998년부터 '홍성현 언론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사고 당시 광주광역시 동구를 지역 기반으로 하던 국회의원이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신기하 의원(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도 이 사고로 별세했다. 신기하 의원도 위의 성우 장세준, 정경애 부부처럼 부인 김정숙 여사 및 그의 지역구였던 광주 동구의 국민회의 지구당 소속 사람들과 함께 괌 여행을 떠났던 터였다. 만약 이 사고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제 16대 대통령이 노무현이 아니라 신기하였을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최측근이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사고 당시 93세였던 그의 어머니가 다른 식구들이 사고 소식을 알리지 않았음에도 방 안에 있던 TV로 사실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았고, 식음을 전폐하다 사고 49일 뒤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 게다가 신한국당 당원들이 사고현장에서 기념촬영을 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특히 괌 현지에서 발생한 사고이기 때문에, 현지 장례 풍습에 따라 시신을 방부처리하고 온전한 형태로 메이크업까지 마치는 조건 하에서의 사망 인정 및 시신 인도 절차를 고수하는 괌 주정부 측 정책 탓에 시신 인도가 상당히 늦어졌고, 이에 대해 유족들이 항의하여 방부처리 및 염습하는 자원 봉사자들이 추가로 투입되었으나, 사고 당시 화재 등으로 인해 시신들의 상태가 온전치 못하기에 시신 처리 과정이 간단치 않아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과중한 업무로 인해 방부처리 자원봉사를 하던 현지인이 과로사하는 일도 있었다.
자원봉사자 중에는 국내에서도 대형사고 때마다 현장에 출동, 구조작업을 벌였던 '점박이' 탤런트 정동남(당시 47세)이 있었는데, 그는 친한 선배의 아들을 잃었다며 사고 발생 다음날 새벽 현지에 도착,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등 자원봉사 활동을 벌여오다가 NTSB(美연방교통안전위원회) 측의 발굴작업 지연에 따른 유가족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유가족들이 직접 시신을 찾겠다고 나서자 자진해서 11일 부터 현장에서 시신발굴작업을 도왔다고 한다.
발굴 작업이 지지부진하다는 소식을 들은 삼성그룹 3119 구조대원 2명도 13일 오후 유압 절단기 등을 갖고 나타나 눈길을 끌었는데 3119 구조대 자문위원이기도 한 정동남의 요청으로 오게 된 한경우(당시 30세)와 최진국(당시 30세)등 2명은 유족들에게 "시신발굴 작업이 늦어져 유족들이 애를 태운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며 "여건만 허락되면 더 많은 동료들을 불러오겠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정동남은 "한 경우 등이 가져온 유압 절단기와 전개기(스프레더) 등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도 사용됐던 것으로 시신발굴에 꼭 필요한 장비"라며 "미군들이 발굴작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더라도 강행할 것"이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 사고로 가족을 잃고 우울증에 시달리던 30대 여성이 새 삶을 살고싶은 생각에 남의 신상을 도용했다가 구속되는 영화 화차와 같은 사건도 있었다.
유가족 대표 위원장이었던 사람은 대한항공으로부터 돈을 받고 구속되었다가 훗날 대한항공 086편 이륙지연 사건 이후 조현아 부사장의 편의를 봐주다가 또 구속되었다.
전술한 언론 보도에서 생존자는 29명으로 집계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언론자료를 뒤져보면 생존자 집계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어 32명->30명->29명이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상자 중에서 상태가 위중한 사람[26] 5명은 미국 본토 텍사스 샌안토니오 브룩 미 육군병원(Brooke Army Medical Center)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이 중 2명이 9월을 넘기지 못하고 치료를 받던 도중 사망했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생존자는 26명이 되었다.
그 뒤 같은 병원에서 한 달을 넘게 버티던 여성 생존자 한 명이 10월 10일에 사망하여 실질적인 생존자는 '''25명'''이다. 다만, 사고 발생 이후 30일이 지나서 사망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사망자로 기록되지 않는다.
5. 사고 이후
사건은 한국 시간으로 밤 시간대에 발생하였다. 한국시각 새벽에 최초로 미국 ABC[27] , CNN 등지에 다루어졌고, 이 방송을 본 PC통신 유저들이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으로 소식을 전파했다. 당시엔 YTN, MBN 빼고 TV가 24시간 방송할 때도 아니었고 인터넷도 전화비 때문에 야간정액제[28] 와 코넷 없이는 배우고 조심하면서 써야하던 시대였다. PC통신 유저들에 의해 국내에 최초로 알려져서 아침 방송이 시작할 때는 어느 정도 사건 전파가 되어 있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특이한 경우라 언론 등에서도 PC통신의 위력에 대해 많이 다루어졌다.
사고 원인에 대해 괌 주정부는 조종사 과실로 단정지으며 자신들의 시설 미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이에 분노한 대한항공은 사고 며칠 후 서울 - 괌 노선의 운항을 전면 중단하였다. 관광산업에 타격을 받을 것을 우려했던 괌 측에서는 주지사가 직접 한국에 찾아와 대한항공과 유족에게 위로의 뜻을 전하기도 했으나, 사고 원인에 대해서는 조종사 과실이라는 기존의 의견을 고수했다.
이로 인해 중앙일보 시사만화에선 코쟁이 미국인들이 이 사고는 죄다 대한민국 탓이라고 실실거리는 걸로 깐 바 있으며, 당시 국내 방송사들도 괌 측 잘못이 크다며 자칫하면 다른 여객기도 위험하다고 보도했는데, 싱가포르 및 다른 여객기들도 괌 공항에 착륙할 때 아슬아슬한 현장이라고 보도하였다. 이를 두고 괌 공항 측은 불쾌한 반응을 보이긴 했으나 별다른 반론을 하지 못했다.
이 당시 보도에서 유가족의 오열을 그대로 방송에 보여준 한국 언론사들과 달리, 미국 쪽 언론사들은 유가족들의 반응과 관련한 영상은 거의 내보내지 않았다. 이를 두고 국내에서는 "미국측이 사고를 축소하려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미국 언론업계는 원래 이런 대형 사고에서 '지나친 감정 표현이 담긴 자극적인 보도'는 제한하는 편이다. 시청자나 구독자들이 유가족의 감정에 휩쓸려 사건의 진상을 냉정하게 따지지 못하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사실, 통곡하며 슬퍼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놔두며 피해자들이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고 카메라를 들이대며 그들을 '감정을 가진 인간'이 아닌 '기삿거리'나 '찍기 좋은 그림'으로 취급하는 것 자체가 매우 큰 실례다.'''[29]
비록 끔찍한 사고였지만 대한항공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 사고의 큰 충격이 안전 문제를 곱씹어볼 기회가 된 것인지, 이 사고 이후로 2019년 10월 기준으로 대한항공에서 여객기 관련 사망 사고는 발생하지 않고 있으며, 화물기 사고까지 고려한다 해도 1999년에 발생한 6316편(MD-11F)과 8509편(747-2B5F) 화물기 추락사고를 마지막으로 2000년대부터는 대한항공에서는 인명사고가 발생하지 않고 있다. 이후로 대한항공은 비행기 안전을 관리하는 부서에 외국인 임원을 적극 채용한다고 한다. 아시아나항공도 2013년 샌프란시스코 추락사고 이후 안전부서에 전일본공수 출신의 일본인 임원을 채용했다. 원래 두 회사 교류가 잦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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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4일 후인 8월 10일, 이해구, 조진형, 박세환 의원을 비롯한 당시 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괌 현지에 도착해 '''사고기 잔해 앞에서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는 짓'''을 저지른 것이 한겨레 기자를 통해 알려지면서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30] 참다못한 조선일보마저 이건 도저히 옹호해줄 수 없는지 함께 비판할 정도였다.[31]
사고기인 HL7468기체는 보잉에서 제작한 747-3B5 기종으로 대한항공에서 1984년 12월 12일에 인도하였고, 사고 당시 기령은 약 13년 정도로 약간 구형 기종에 속했다. 사고 원인이 불명확했기에 조종사 과실 외에도 기체결함, 정비불량 등의 원인 추정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경쟁사인 아시아나항공은 사고기가 기령이 오래된 구형 기종임을 암묵적으로 디스하는 ''''아시아나는 새 비행기로 모십니다''''라는 마케팅을 펼치기도 했다. 실제 당시 아시아나항공은 신생 항공사였고, 대한항공은 구형 보잉 747-200, A300 등의 오래된 기종들의 비중이 꽤 되었기 때문에 평균기령에 있어서 대한항공보다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기에 아시아나의 국내 항공시장 점유율 성장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아시아나항공의 '새 비행기 마케팅'에 굴욕적인 패배감을 맛본 대한항공은 2000년대부터 최신예 기종들을 적극 도입, 오늘날에는 대한항공이 아시아나보다 평균기령이 낮은 실정이며 2000년대부턴 아시아나항공에서 새 비행기 마케팅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HL7468의 기종인 B747-3B5는 사고기 포함 총3대(HL7468,HL7469,HL7470)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중 후기도입분이자(HL7470은 1988년도입) 콤비기였던 HL7470은 2001년에 화물기로 개조되고 형제기인 HL7469는 화물기 개조없이 2005년까지 운항하다가 오리엔트 타이 항공으로 매각되어 넘버가 HS-UTL로 바뀌고 2016년 9월(!!!)에서야 퇴역했다. 무려 31년(!!!)을 굴린 것. 해당 항공기 사진
대한항공에서는 사고 이후 괌 노선을 운항하지 않다가 2001년에 복항했다. 그러나 801편은 영구결번되어 복항 후에는 한동안 805편으로 운항하다가 2008년에 대양주 편명을 100번대로 갈아엎으면서[32] 현재는 111편으로 운항하고 있다.[33] 헌데 2015년 하계까지 운항 기종은 사고 기종의 후속 모델인 B747-4B5이였다(...)[34] 2015년 동계부터는 B747-4B5의 노후화로 인해 A330-323을 2회 운항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35] 대한항공의 자회사 진에어 또한 괌 노선을 운영 중이다.
이 사고가 있은지 한 달도 안 되어 베트남 항공 815편 추락 사고가 또 발생해서 21명의 한국인 승객들이 사망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5.1. 항공 사고 수사대 방영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제작하는 항공 사고 수사대의 시즌 4에서도 다루어졌다. 재연 퀄리티가 나쁘지는 않았으나 비상 착륙 공로패에 적힌 기장의 이름이 '''박영철'''로 잘못 표기되는 등의 오류가 있었고, 그래픽 재현에 사용된 항공기 모델도 보잉 747-400 기종을 사용하여 윙렛이 보이는 등 고증이 좋지 않았다. 기종의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747-400 기종부터 아날로그 패널에서 디지털 패널(Glass Cockpit)을 적용해 항공기관사가 탑승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고기는 보잉 747-300 기종으로 실제 사고 당시 항공기관사가 탑승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배우 캐스팅의 문제였는지 몰라도 실제 기장이었던 박용철과 외모가 전혀 딴판인 배우를 섭외하여 말이 많았다. 해당 배우가 중국계 배우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 이 배우는 Paul Sun-Hyung Lee(한국명 : 이선형)라는 이름의 한국계 캐나다인 배우로 2019년 현재 한국 TV CHOSUN에서도 방영 중인 캐나다 시트콤 김씨네 편의점에서 주연급인 아빠 김사장 역할로 널리 알려져 있다. 따지고 보면 NGC도 대충 아시아계 배우들로 넣지 않고 나름 신경 써서 한국계 배우를 캐스팅한 것인데, 박용철 기장의 외모 조사를 못했거나 이를 그냥 지나친 것일 뿐이다.
실제 박용철 기장은 일반적인 긴 머리의 헤어스타일에 수염을 기르지 않았고 뚱뚱한 체구도 아니지만, 재연 배우는 완전 대머리에 콧수염도 기르고 체구도 뚱뚱한 점 등 완전 다른 인물에 가깝다. 이 점을 지적받았는지 추후 시즌에 다뤄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에서의 기장 재연 배우는 실제 기장이었던 천병인 기장과 이질적이지 않았다. 참고로 이 재연 배우는 항공사고 수사대의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편과 대한항공 8509편 추락 사고에서도 각각 교관 조종사와 기장으로 출연한 바 있다.
반면 부조종사인 송경호와 항공기관사 남석훈을 맡은 배우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는데, 이들의 경우 실제 인물과 외모상 크게 차이점이 없었고, 특히 부조종사를 맡은 Silver Kim이라는 배우는 ''''수고하십시오''''라는 짧은 대사 속에서 명료하고 자연스러운 네이티브 수준의 한국어 발음을 보여준 덕분에 한국 시청자들에게 한국계 배우임을 강제 인증 당하기도 했다.
기장의 소지품 중 벤조디아제핀계 약물이 있었는데, 기장이 이 약물을 복용한 탓에 상황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 사고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의혹도 다루어졌다. 실제로 벤조디아제핀은 음주와 함께 운전 등 기계 조작시 사고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부검 결과 기장은 약물을 복용하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6. 관련 문서
6.1. 유사사고
-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 1989년
- 대한항공 8509편 추락 사고: 1999년(화물기)
- 테네리페 참사: 1977년에 일어난 항공사상 최악의 인명피해(583명 사망)이며, 상부의 징계와 불이익에 민감해진 기장이 권위주의로 부기장과 관제탑을 묵살하고 이륙을 강행해 벌어진 어처구니 없는 참사다.
- 버겐에어 301편 추락 사고: 1996년 비행기가 실속하고 있음에도 부기장과 교대조종사가 기장이 조종간을 잡기만을 기다려 일어났다.
- 아시아나항공 214편 추락 사고: 2013년 (조종사들이 자동 조종 시스템에 잘 숙달되지 못해 일어난 사고)
- 대한항공 2115편 활주로 이탈 사고: 같은 괌에서 터졌으며 이쪽은 대참사는 면했다.
- 터키항공 6491편 추락 사고: 똑같이 잘못된 글라이드 슬로프 신호를 포착하고 최저고도를 어기며 하강하다가 민가에 추락했다.
-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 비슷하게 이 사고도 억지로 착륙시도하다 추락했다.
[1] 실제와 다를 수 있다.[2] 추후에 1인 추가 사망, 그러나 사고 1달이 지난 1997년 10월 10일 사망하여 공식 사망자로는 집계되지 않는다.[3] 연속적인 사고를 냈으나 이 사고가 결정타가 된 셈이다.[4] 원래는 B747-300 대신 A300-600R이 운항할 예정이었으나 성수기로 탑승객이 많아 B747-300을 투입하였고 운항 승무원도 바뀌었다.[5] 미합중국 해군 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이름을 딴 지명이다. 태평양 전쟁 중 미 해군이 태평양함대사령부를 괌으로 잠시 이전시켰다가 종전 후 해군기지 일부만 남기고 도로 하와이로 돌아갔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국내에선 유난히 한 일에 비해 아는 사람이 적은 니미츠 제독을 소개할 때, 이 사고를 언급하며 "그 항공기가 추락한 언덕의 이름이 이 제독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 설명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도 해당 언덕의 바위 등은 사고의 흔적이 남아있는 듯. 잘 보면 나무의 뿌리 뽑힌 흔적 등이 있다.[6] 고주파 전방위 무선표지소. 공항에서 비행기들의 착륙을 유도하는 것으로, 바다의 등대와 비슷한 면이 있다.[7] 조종사들의 브리핑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괌 공항의 VOR은 다른 공항과 같이 활주로 평지에 있는 게 아니라 니미츠힐 즉 산꼭대기 가까이에 있다. 바로 이 점이 후술하는 바와 같이 조종사들의 착각과 더불어 사고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8] 블랙박스 대화 중에 "어. 정말로 졸려서"라는 대화가 남아있다.[9] 관제소가 글라이드 슬롭 고장을 선언했으면, 그 어떠한 신호가 잡히더라도 그것을 무시하고 관제소 지시에 따라야 하는게 원칙이다. 그러나 조종사들은 전술한 것처럼 글라이드 슬롭이 되는지에 대해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다.[10] 특히 항공사고 분석으로도 명성을 날린 조갑제 기자가 과거 월간조선 특집기사에서 이를 언급하였다.[11] 글라이드 슬롭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엔 최저 560피트(170.7m)로 하게 되어 있다. 이 고도까지 내려가서도 활주로가 보이지 않으면 착륙을 포기하고 상승해야 한다. 이 고도를 최저고도로 설정했다는 것은 기장이 활공각 유도장치가 고장난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다.[12] 이때 801편의 고도는 해발 약 1,100피트(335.3m)였으나, 지면으로부터는 불과 150m(492피트) 밖에 떨어지지 않아 충돌방지장치가 다시 경보를 한 것이다.[13] 비행기가 착지한 뒤 자동적으로 브레이크가 작동하도록 하는 장치.[14] 브레이크를 최저 단계에 놓아 활주로에서 길게 미끄러진 뒤 멈추도록 조작 지시. 활주로에 닿기 직전이라고 착각하고 있다.[15] 많은 사람들이 공군 조종장교는 모두 공군사관학교 출신이라 생각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공군 조종장교는 공군 ROTC와 조종장학생을 통해 또 뽑는다.[16] 대한민국 해군 항공병과 장교는 의무복무 10년이며, 2016년 현재 공사의 조종장교 의무복무는 15년이다. 조종장학생, ROTC는 13년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8년이었다. 이는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고기의 조종사들은 의무복무 8년 혹은 그 이하로 추정된다.[17] 남석훈 기관사 1940년 생. 박용철 기장 1951년 생, 송경호 부기장 1956년 생.[18] 여담이지만 해당 책에서 대중심리학 이론을 쉽게 풀이하여 설명하여서 미국 등지에서 일반인에게는 인기는 있지만 불쏘시개나 다름없는 퀄리티를 자랑한다.[19] 이 소녀를 한국 방송사들이 사고 직후 인터뷰를 했는데, 당시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21세기에 와서는 해외에서도 어머니를 잃은 소녀에게 당시 참상을 묻는 기레기짓을 했다며 욕을 먹고 있다.[20] 다만 델타항공등 몇몇항공사들이 이 사고이후 아예 기내면세품 판매를 접었다.[21] 이 비행기로 사망하기 전까지 다녔던 서울 서초초등학교 측은 당시 여름방학 중이었으나, 사고 이후 박 군의 동창이었던 당시 6학년 학생들을 학교에 비상소집하여 추모식을 가졌다. 영구차가 학교 운동장을 천천히 돌고 떠났었다.[22] 여담으로 저 사건을 취재한 기자는 김재철이다. 반면 KBS 취재 당시엔 소현정 기자가 맡았다.[23] 정경애는 이 날이 바로 자신의 '''생일'''이었으며, 1997 한국방송대상 여자성우상 후보로 오른 상태였다.[24] 만약 방송심의가 정상적으로 진행되어 녹음 및 방영 일정이 예정대로 잡혔더라면, 정경애가 스케줄 때문에 가족 여행을 안 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당시의 성우팬 및 애니메이션 시청자들은 방송위원회에 분노의 화살을 돌렸다. 실제로 당시 PC통신의 애니메이션 관련 게시판이 완전 들끓었으며 방송위에 분노를 표시하는 글이 여럿 올라왔다. 물론 방송위의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지만, 당시의 방송심의 자체가 사실상 트집잡기에 가까웠고 이로 인해 방영 일정이 지연된 결과 장세준 - 정경애 부부가 괌으로 여행을 떠나 사망한 만큼 고인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던 당시 대중들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다.[25] 1994년경에 <뉴스초점> 진행을 맡았다.[26] 주로 화상의 정도가 심한 사람들.[27] AFN에서 뉴스를 공급한다.[28] 동년 4월 1일 시행.[29] 한국의 ''''일부 몰지각한 언론인들''''은 이런 행태를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까지 고치지 못하였다. 실제로 해당 참사 유가족이 '그들에게 저희는 '''피를 흘리는 원숭이'''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피를 철철 흘리며 아파하고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원숭이. 그들이 저희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고, 그냥 구경거리 같았다.''' 상처투성이로 아무 준비가 안 된 채, 벌거벗겨진 채, 기자들에게 이용당했다.'고 표현한 적도 있다. 이런 추악한 행태는 한국 대중들의 '''언론인 혐오 정서'''로 이어지게 되었다.[30] 더군다나 당시 '''제1야당이던 새정치국민회의의 신기하 의원이 이 사고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명백한 고인드립이다.[31] 정치인들의 기념사진 습성은 계속되어 세월호 사고에서도 일부 국회의원의 인증샷이 논란이 되었다.[32] 이렇게 된 데는 이 사고보다는 중국 노선의 확장(중국 노선이 2000년대부터 800번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이 가장 큰 이유였다.[33] 이와 동시에 출발 시간도 바뀌었다. KE805편 당시에는 인천에서 20시 10분에 출발했으나 KE111편 현재는 19시 30분에 출발한다.[34] 2007년에는 보잉 777-200ER이였다.[35] 특히 저가항공사들이 오전에 출발하는데 반해 대한항공은 이때와 같은 저녁 출발편만 있어서 선택의 폭이 좁았다. 증편된 항공편은 오전에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