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봄
1. 개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당 제1서기 알렉산데르 둡체크에 의해 시작된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 운동.
2. 배경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제국주의와 파시즘이라는 원투펀치를 맞은 유럽의 시민들은 이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도피처로서의 오아시스를 갈구하게 되는데 소련의 역사적인 반파시즘 투쟁의 승리를 통해 확산된 공산주의도 이 중 하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실상 소련의 영향권에 편입된 중부유럽의 소국인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또한 이의 예외가 아니었다. 1946년 열린 체코슬로바키아 의원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신속하게 이 작은 나라의 적화를 진행시킬 프로젝트를 계획 및 진행하는데, 그 프로젝트에는 비공산계열인 야당 탄압계획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공산당은 신생독립국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과 음모의 책임을 야당인사들에게 떠넘기는 방식으로 이들을 탄압하였는데, 이에 반발하여 1948년 2월 국민사회당, 인민당, 민주당 등 야당 인사들이 공산당의 야당인사피소에 대한 조사위원회 구성을 요구하게 된다.
당연히 공산당은 이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6인의 공화국 경찰간부를 모두 공산당 계통 인사로 갈아채워 이에 맞선다. 의회의 다수파와는 달리 공산당 계통이 아니었던 공화국 대통령인 베네시와 그의 행정부는 의회에게 야당의 요구를 수용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의회는 이를 일축한다. 야당인사들은 최후통첩으로 행정부의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의원 전원이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나 공산당은 되려 얼씨구나하고 일방적으로 정부위기상황 선포&프라하 및 주요도시에서 대규모 파업투쟁을 일으키는 등 실력행사를 통하여 야당의원 사퇴를 끝까지 거부하던 행정부를 "설득"시켜 일당독재 체제를 본격적으로 형성하게 되는데, 이 사건을 2월정변, 혹은 '프라하의 쿠데타'라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승리는 곧 대규모 숙청을 암시하였고, 머지않아 20만명에 달하는 비공산계열 시민들이 직장을 잃어버린다. 당연히 이러한 시민들도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념과는 관계없이 공산당에 입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머지않아 공산당 내부에서도 숙청이 이루어지는데,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탓에 다음의 숙청타겟은 티토주의자 혹은 반스탈린주의자들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무질서, 그리고 비효율적인 공산주의적 통제경제가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냄에 따라 한때 번영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는 급속도로 휴지통에 꼬나박히게 된다.
1956년 소련에서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이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인 뒤에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는 스탈린주의자인 안토닌 노보트니 정권의 보수정책이 계속되었다. 1960년대의 정체된 경제에 대해 국민들의 불만이 높았으며, 체코 지역에 비해서 자치권을 제한받던 슬로바키아 민족의 감정도 악화되었다. 60년대에 이르면 공급부족상태가 만연하게 되며 그에 비례하여 지하경제는 호황을 누리게 되는데, 이러한 경제난 속에 국민들은 점차 공산당 정부에 등을 돌려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연이은 실패에 의해 정부의 권위가 실추된 그 틈새로부터 정부비판여론이 다시금 쇄도하기 시작하는데, 지식인과 문학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숙청작업과 경제계획 비판에 대해 일단의 당 관료들조차 수긍하게 되자 공산당은 결국 수정주의의 길에 접어들 수 밖에 없게 되었다. 1965년 공산당 정부는 '신경제모델'을 채택하는데, 이 모델은 정부의 경제개입제한, 그리고 시장경제의 원리 도입을 그 골자로 하였다. 이러한 수정주의의 바람을 타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자유주의의 방향으로 선회하려고 하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반동'스러운 행동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던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였던 레오니드 브레즈네프가 1967년 12월에 프라하를 방문하여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였던 노보트니[2] 와 동시에 다른 유망인물들 또한 대면하였는데 그는 이 과정에서 만난 알렉산데르 둡체크(이하 둡체크)에게 유독 호감을 표시하였다. 둡체크는 소련에서 태어나고 자란 엔지니어 출신으로 정치계에 입문하여 급성장한 인물이었다. 결국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68년 1월 총회에서 노보트니가 당 제1서기를 사임하고 개혁파인 둡체크가 그 자리를 맡았다.
그러나 브레즈네프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둡체크는 오히려 한 술 더떠서 보다 더 급진적인 자유주의 개혁을 밀어붙인다. 당해 3월부터 개혁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는데, 개혁운동과 함께 과거의 실패에 대한 비판운동과 반성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다. 이는 정부의 언론검열제도가 폐기된데 기인하며 '''언론·집회·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자유가 회복된만큼 시민사회도 재활성화되었다. 과거 정치적인 문제로 숙청된 인사들도 사회에 활발하게 복귀하여 사회활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공산당 내부에도 인사교체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국가 주요 요직에 개혁파를 임명했으며 4월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체코슬라비아 공산당은 권력독점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경제 수정주의와 민주주의를 도입하게 되는데, 이른바 '프라하의 봄'이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개혁안에 대해 바르샤바 동맹은 즉각 반발하였으며 5월에 모스크바에서 둡체크를 배제한채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한편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바르샤바 조약기구군 합동훈련을 개최함으로서 일련의 무력시위를 벌이는등 가시적인 채찍을 함께 활용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안보상의 위협을 느낀 둡체크를 비롯한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인사들은 소련과의 독대에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코메콘에서의 책임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라는 거듭맹세를 하였으나 이와는 별개로 소련측의 개혁프로그램 포기요구는 거부하였다.
3. 전개
3.1. 소련의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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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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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을 위해 투입된 T-10M 전차.[3] 프라하 민중들한테 낙서를 당한 것 빼고는 별 일 없이 귀환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은 이 상황을 그냥 방치하지 않았다. 그대로 내버려둘 경우 체코슬로바키아 하나의 민주화로 끝날 게 아니라 공산권 전체로 파급될 것이 분명한 데다[4] 서방 국가들이 개입할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이다. 다만 1956년 헝가리 혁명 진압 때처럼 전쟁 상황으로 가면 동유럽의 여론도 나빠지는 건 물론 서방에서 가만 있지 않을 게 분명했으므로 제압은 하되, 인명피해는 최소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그나마 희생이 최소화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브레즈네프는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에게 서신을 보내 미국정부가 얄타와 포츠담에서의 조약을 준수할 의도가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으며 미국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소련측에 의한 반자유주의적 압력이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화답을 보냈다.[5] 미소의 유럽 분점체제의 유지의사가 미국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한 소련은 4개월 만인 1968년 8월 20일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앞세우고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5개국의 '''약 20만 대군'''을 이끌고 체코슬로바키아에 개입했다. 이게 얼마나 큰 규모인가 하면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인구가 1,000만명 정도였다. 이런 대군을 투입한 이유는 헝가리나 동독의 봉기로 인해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하면서 서방의 비난을 받은 것으로 인해 또 다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봉기가 장기화되면 서방이 이번에는 정말 개입할 수도 있다고 판단, 사전에 정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6]
스페츠나츠들이 An-8 수송기를 타고 주요 공항과 방송국들을 점거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의 유명한 민주화 인사들을 감금했고 저항하는 자는 살해당했다. 그리고 점거된 공항에 모스크바로부터 날아온 100여기의 An-12 수송기들이 소련 공수사단 소속 수천명의 병력들과 경전차 및 장갑차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발판삼아서 공산군 기갑사단과 차량화소총사단들이 주요 시설들을 점거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국제사회에 바르샤바 조약기구군의 부당한 침입을 호소하였으나 그 어떤 나라도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7]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군과 국민들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당부했고 정치 보복을 지나치게 하지 않는 조건으로 순순히 투항했으며. 결국 둡체크를 비롯한 개혁파 지도자들은 소련으로 연행되었다.[8] 이로써 프라하의 봄은 끝나고 1969년 4월 당 제1서기가 된 구스타우 후사크에 의해 사태가 수습되었다. 투입되었던 폴란드군(3만명의 병력과 2000여대의 차량, 750대의 전차, 592대의 장갑차)과 헝가리군은 1968년 10월 31일에 철군했지만 소련군은 계속 주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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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팔라흐와 자이츠가 분신했던 장소에 설치된 추모 십자가, 두 번째는 얀 팔라흐의 사진
당시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철저하게 장악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둡체크로 대표되는 개혁파 지도자들이 유혈사태를 우려해 소련군에 맞서지 말 것을 적극적으로 당부하면서 헝가리 혁명과 같은 무장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분노한 시민들은 조약기구 군을 상대로 시위를 벌였고, 많은 젊은이들이 소련 침공에 반대했으며, 그 중에는 분신을 한 청년들도 소수나마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얀 팔라흐(Jan Palach)과 얀 자이츠(Jan Zajíc)으로, 프라하의 중심가인 바츨라프 대로 광장에 그들을 기리는 동판과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진압군 파견국 중 하나인 폴란드에서도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 출신인 리샤르드 시비에츠(Ryszard Siwiec)가 59세의 나이로 바르샤바에서 분신자살했다.
당시 68혁명의 영향이 전 세계로 퍼진 상황인데다 사회주의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 변혁운동이 되어 반스탈린, 반권위주의 운동이어서 기존 좌파 정치세력이 소련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길 꺼린 것과는 달리 68혁명 당시의 신좌파[9] 들은 동유럽 내 민주화 세력에게 호감과 연대감정을 표현했다.
그 뒤 구스타우 후사크가 정권을 잡아 소위 '''정상화(''normalizace'')'''[10] 를 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했음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바다.
'프라하의 봄'이란 체코 필하모니 결성 50주년을 기념하여 1946년부터 5월마다 열린 프라하의 음악제의 이름이다. 체코사태 당시 한 외신기자가 '프라하의 봄은 과연 언제 올 것인가?'라고 타전한 이후 이 '봄'이라는 단어는 부다페스트의 봄, 바르샤바의 봄, 그리고 최근의 아랍의 봄 등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자유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단어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4. 여러 가지 이야기
- 당시 같은 시기에 중국-소련 국경분쟁이 벌어졌으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자칫하면 핵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중국 전면 침공은 보류하고, 일단 자기 일부터 챙기자면서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선택했다.
- 프라하의 봄이 좌절된 이후 둡체크는 위에서 말한 대로 잠시동안 소련에 연행되었지만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심을 감안한 소련의 안배로 에밀 자토펙 등 다른 개혁파 인물들과 달리 험한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자토펙 등도 사형당하거나 잔혹한 처우를 받은 사람은 없고, 대부분 징역 좀 살다가 풀려났다. 둡체크는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온 뒤 슬로바키아 산림청에서 잠시 근무했고, 벨벳 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88년에는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을 방문하기도 했다. 하여튼 생각보다 별 탈 없이 조용하게 지낸 덕에 벨벳 혁명 때 빠르게 복권되고 군중들 앞에서 다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다만 민주화가 되고 얼마 가지 않은 1992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 체코를 빛낸 아이스하키 선수인 야로미르 야그르(Jaromír Jágr)의 등번호는 68번인데, 이는 프라하의 봄을 기리기 위함이다. 야로미르의 조부는 둡체크 서기장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바가 있었고, 그 결과로 프라하의 봄이 끝난 뒤 쿤데라의 소설들은 체코에서 거의 대부분이 금서로 지정되었다. 프랑스로 이주한 후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 때를 배경으로 쓰여진 걸작 소설이다.
- 세계적인 육상선수 에밀 자토펙도 프라하의 봄에 가담했다가 숙청되었고, 벨벳 혁명으로 복권된다. 둡체크가 민주화 얼마 후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과 달리 그는 20세기 말. 80대 직전까지 장수했다.
- 체코가 소련의 압제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달성한 1990년에는 최초로 프라하의 봄 축제가 개막되었는데, 전야제 행사로 "프라하의 봄 콘서트"가 열렸다. 이 콘서트의 피날레에서 체코가 낳은 명 지휘자인 라파엘 쿠벨릭이 42년 간의 망명생활 끝에 76세의 나이로 고국으로 돌아와 체코 관현악단을 이끌고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중 저 유명한 블타바(몰다우)를 연주할 때 지휘자, 연주자, 관객 할 것 없이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영상
-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도입부에 이 사건이 언급된다. 작가가 프라하의 고서점에서 중세 수사인 아드소의 수기를 구했지만 프라하에 갑자기 소련군이 진주하는 바람에 급히 몸을 피해 오스트리아로 도망가는 사이 번역을 했지만, 중간에 동행자가 원본을 가지고 어디론지 가버렸고, 작자는 원전을 구하려고 했으나 정작 찾아낸 원전은 자신이 번역한 내용과는 전혀 딴 판의 책이었고, 그래서 원본을 영영 구할 길이 없어졌다는 이야기.
장미의 이름은 일종의 액자소설[11] 이지만 이는 아드소가 노년에 이 수기를 쓰면서 다시 회고하게 되는 구성. 책의 입수 과정은 그냥 서문에만 언급된 설정이다. 세상에는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책도 존재한다는 말이 복선으로 깔려 있기는 하지만.
- 보면 알겠지만 체코 영화계를 비롯해 갓 융성하던 체코 문화의 정점이자 엄청난 후폭풍을 안긴 사건이었다. 소련 당국의 검열에 된서리를 맞은 밀로스 포먼는 미국으로 이민가버렸고 [12] 베라 치탈로바 역시 9년이나 커리어가 단절되어버렸다. 얀 슈반크마예르도 그렇고 이 시절 작가나 감독들 중 검열의 된서리를 맞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13] The Plastic People of the Universe 활동 역시 프라하의 봄의 흥망성쇠랑 같이 한다.
- 서방 측은 이 사건에 대한 개입을 검토했지만 사태가 지나치게 빠르게 마무리되는 바람에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베트남 전쟁과 68운동[14] 때문에 내부적으로도 사정이 좋지 않았다. 당장 자기네들도 주요도시 지역에서 시위가 대규모로 벌어지고 있던참이라서 여유가 되지 않았다. 다만 국제적인 비난은 잊지 않았다. 또한 이 사건은 이전의 헝가리 혁명과는 달리 여론에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서방 내 좌파들의 소련에 대한 감정이 크게 나빠졌고[15] 중립국들 중에도 미국 편에 서려는 나라들이 나오면서 결국 소련도 다시는 같은 방법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어쨌건 위성국가들이라도 주권은 있는지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동유럽의 민주화 움직임을 막지 못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2015년 5월 말 러시아 TV에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군대가 온 건 쿠데타 진압을 위해서였으며 고의가 아니었다"라는 식으로 프라하의 봄을 왜곡보도하자 체코 정부에서 불쾌감을 표시한 일이 있었다. 푸틴 이후 러시아의 우경화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 지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 중 하나.
5. 등장 매체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프라하의 봄 시기를 다룬다. 1988년 영화화되어 대니얼 데이루이스와 쥘리에트 비노슈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 자체는 원작을 그다지 잘 영화화한 것 같지는 않다는 평이었지만 배우들의 연기만큼은 인정받았다. 한국에서는 원제가 너무 길다고 생각했는지 '프라하의 봄'으로 제목을 바꿔서 수입되었다.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의 냉전 시나리오의 하위 이벤트 중에 등장한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민주 혁명이 발발했다는 메세지와 함께 직접적으로 개입하면 원래는 적이어야 할 체코 진영이 아군으로 등장해서 바르샤바 조약과 같이 싸운다(물론 이 행위를 하려면 많은 수의 자금을 지불하고 소련에 선전포고 해야한다. 바르샤바 조약의 본거지인 폴란드 바르샤바를 점령하면 동유럽 전역이 나토 영역으로 편입된다. 만약 소련과의 데프콘이 최고 상태라면 핵을 날리려고 든다.)
6. 언어별 명칭
체코어: Pražské jaro
슬로바키아어: Pražská Jar
영어: Prague Spring
러시아어: Пра́жская весна́
폴란드어: Praska wiosna
[1] 프라하를 진압한 군대는 소련, 동독,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5개국 군대로 사진 속 전차는 폴란드군 소속이다.[2] 대면 당시 그를 향해 불신임 제스쳐를 팍팍 보냈다.[3] 여담으로 이때가 T-10의 유일한 실전 기록이다.[4] 결국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그 예상이 맞았음이 증명됐다.[5] 베트남 전쟁에 신경 쓰느라 프라하의 봄 신경 쓸 시간도 없었다. 당연히 공화당은 존슨 행정부의 이런 대응을 까댔다.[6]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침공군의 주축들이었던 폴란드와 동독도 옛날에 반소 시위를 겪었던 적이 있다. 여담으로 하나 더 얘기하자면 당시 폴란드의 국가원수였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는 아예 반소 시위 강제진압의 여파로 스탈린주의파의 위세가 위축되자 폴란드 공산당 내에서 민족주의적 성향을 발판으로 인기를 얻었고 그 덕택에 주도권을 잡아 집권한 사람이다! 12년만에 다른 행보를 보이게 된 것. 그리고 2년 뒤에 생필품 가격을 인상하자 인민들의 반발로 인해 에드바르트 기에레크에게 정권을 내주었다.[7] 당장 미국은 베트남 전쟁때문에 동구권에 큰 신경을 쓰지 못했고, 영국, 프랑스, 서독 등 서유럽 국가들도 68혁명의 여파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상황을 신경쓸 처지가 아니였다.[8] 그래도 헝가리 때와 달리 처형된 사람은 없고, 대부분 징역 혹은 추방으로 끝났다. 브레즈네프가 둡체크를 밀어서 체코 수반으로 앉힌 원죄도 있고, 너지 임레를 처형했다가 헝가리에서 지속적인 반소 운동이 생기게 된 것을 참고하여 체코에 대해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둡체크는 소련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었기에 둡체크를 죽여버리면 체코 내부에 있는 소련파의 세력이 급격히 약해질 가능성이 높은 점도 고려했다고 한다. 그래서 둡체크는 소련에 끌려간 지 몇년만에 석방되고,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또한 굴라그로 가지 않고 구치소에서 강제노동 없이 감금만 됐다고 한다. [9]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와 그 사회 체제에 영합하고 관료화된 공산당 등의 체제 내 좌파정당에 의해 소외감을 느낀 사람들을 중심으로 발생.[10] 정책 이름이다. 즉, 프라하의 봄 이전 시대의 정책으로 돌아가겠다는 뜻.[11] 소설내에서 듣는 이야기나 회고의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소설. 대표적으로 김동리의 등신불이 있다.[12] 소방수의 무도회 당시 벌어졌던 스캔들은 누벨바그 일원들이 항의 성명을 낼 정도로 큰 스캔들로 꼽힌다.[13] 얀 슈반크마예르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엔 제작 체계가 국영이라, 검열도 검열이지만 기획 단계에서 빠꾸 먹은게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기획서를 쌓아두다가 민주화 이후 꺼내서 만들었다고.[14] 다만 프라하의 봄이 진압되었을 때 프랑스 총선과 이탈리아 총선에서 여전히 여당이 승리하였기 때문에 생각보다 큰 변수는 아니었다.[15] 게릴라들-총을 든 사제에서 주인공 게릴라 일행이 납치한 미군 장교 맥두걸이 "어차피 혁명해봤자 러시아처럼 될 거다." 라고 조롱하자 게릴라 중 한 명이 "우린 절대로 그 관료주의자 놈들처럼 되지 않는다!" 라고 반박한다. 물론 현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