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

 




'''동오 추존 황제'''
'''昭獻文皇帝 | 소헌문황제'''
'''시호'''
소헌문황제(昭獻文皇帝)
'''작위'''
남양왕(南陽王)
'''성씨'''
(孫)
''''''
(和)
''''''
자효(子孝)
'''능묘'''
명릉(明陵)
'''생몰연도'''
224년 ~ 253년
가족관계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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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
효의왕 손종(孝懿王 孫鍾)
'''조부'''
시조 무열황제 손견(始祖 武烈皇帝 孫堅)
'''아버지'''
태조 대황제 손권(太祖 大皇帝 孫權)
'''어머니'''
대의황후 왕씨(大懿皇后 王氏)
'''아내'''
본처:장비(張妃)
첩:소헌황후 하씨(昭獻皇后 何氏)
<:> '''''' ||<(><bgcolor=#FFFFFF> [[손등#s-2|{{{#000 선태자 손등(宣太子 孫登)
]]
건창후 손려(建昌侯 孫慮)
}}}}}}
1. 개요
2. 상세
3. 여담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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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는 자효(子孝). 시호는 소헌문황제(昭獻文皇帝).

2. 상세


손권의 삼남으로, 친모는 대의황후 왕씨. 본처는 장승의 딸 장비(張妃), 첩은 하희. 아들은 손호, 손덕(孫德), 손겸(孫謙), 손준(孫俊) 넷이 있었는데[1] 이 중 손호는 첩 하희 소생, 손준은 본처 장비(張妃) 소생이고 손덕, 손겸은 친모가 누군지 기록이 없다.
손화전 주석 오서에 따르면 손화는 어려서부터 총명해 손권이 더욱 총애하여 항상 주변에 있게 하면서 의복의 등급이나 하사품 등이 여러 아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문학을 좋아하고 말타고 활쏘는 것을 잘했으며 스승을 따라 배우되 견식이 정밀하고 명민하였고 스승을 존경하고 인물을 애호하였다. 채영 등이 매번 조정에 나가 하례를 드릴 때 손화는 항상 뜻을 낮춰 기쁘게 대접하였다. 경의를 강론하면서 시비를 종합하여 고찰하고 조신들을 방문해 자문을 구하는 와중에 행동과 능력을 살펴서 우열을 알고 각자 계통이 있었다.
이후에 제갈일이 가짜 반란을 일으켜 제갈탄을 유인했는데 손권이 군대를 잠복시키고 기다렸다. 손화는 손권이 바깥에서 작전을 하고 또한 전쟁은 흉한 일이라 항상 걱정하여 다시는 같이 모여서 밥을 먹지 못할까 슬퍼하였으니 수차례 간언을 올려 움직임을 신중히 하여 완전히 이길 수 있는 전투에 힘쓰라고 하였다. 손권이 돌아오고 나서야 감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후 형이었던 손등손려가 요절하자 태자가 되었다. 하지만 손권이 태자 손화와 번왕인 손패의 구별을 없애자 신하들은 자연스럽게 손화파와 손패파로 분열해 이궁의 변이 일어난다.
많은 이들이 손권에게 손화의 태자 지위를 공고히 할 것을 간언하였으나 손권은 이를 모두 물리쳤다. 나중에 말이 많아지자 결국 손패를 자결시켜 죽이고 250년 손화를 태자에서 쫓아내고 252년에 남양왕으로 임명해 장사로 귀양보내는 어리석은 조치로 끝냈다.[2]
이후 손권의 막내 아들 손량 시대에 정권을 잡은 제갈각이 손화의 장비(張妃)의 외숙부였고 민간에는 제갈각이 손화를 맞아들이려 한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손준이 제갈각을 암살하고 권력을 차지하자 손준은 손화의 인수를 빼앗고 신도로 보내어 죽였다.[3]
죽을 때 손화의 나이는 불과 30세로, 손화의 본처 장비(張妃)도 손화를 따라 죽어 남은 손화의 자식들은 첩 하희가 길렀다. 나중에 손화와 하희 사이의 아들 손호손휴 대에 오정후에 봉해져 손휴 사후 황제에 올랐으며, 손호가 황제에 즉위한 후 문제(文帝)로 추증된다. 무덤을 명릉(明陵)으로 이장하고 원읍 2백 호를 배치했으며, 영(令)과 승(丞)을 두어 받들도록 했다. 다음 해 정월, 또 오군과 단양 아홉 현을 분할하여 오흥군을 만들었으며 오정(烏程)에 관소를 두고 태수를 배치하여 사계절마다 제사를 받들었다.
억울하게 죽긴 했지만 '''사실상 손호를 세상에 내보낸 것만으로도 오에 대한 원한을 다 갚은 셈이 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실제 손권의 차남이었던 손려가 생략된 탓에 실제론 손권의 삼남이었던 손화가 연의에서는 손권의 차남으로 나오며, 손노반과 불화해서 그녀의 참소로 태자에서 폐해져 한을 품어 죽는다. 연의에서는 이궁의 변이 생략된 탓에 어머니 대의황후 왕씨의 죽음이 손화의 죽음이 되었다.

3. 여담


생전에 바둑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 시간에 학문을 탐구하고 무예를 훈련하고 익힐 일이지 무슨 바둑이냐는 얘기. 오죽했으면 손화 본인이 '유희나 오락은 술먹고, 연회를 열고, 음악듣고, 말타고, 활을 쏘는 것이지 바둑이 무슨...' 라는 말을 공공연히 했으니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 그는 곁에서 모시고 있는 자들 가운데 여덟 명에게 각기 바둑에 관한 의론을 지어 자신의 생각을 보충하도록 명령했다.
이때 위요가 논한것을 손화는 빈객들에게 보여주었는데 당시 채영이 바둑을 좋아하여 그의 관서에서 직접 일하는 자들 중 그에게 바둑을 배우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그를 풍자한 것이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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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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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평범한 문관형 무장으로 등장한다. 손화의 인생 자체는 정말 억울하고도 안습한 피해자의 일생인데, 얼굴은 잘생기게 나왔지만 인상은 매우 험악한 일러스트로 나온다. 아무리 오나라의 폭군 손호의 아버지라고 해도 상당히 부당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4] 삼국지 2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2/무력 44/지력 66/정치력 72. 능력치는 영 아니지만 투함을 가진 것은 유용하다. 그 이외의 병법으로는 노병계 병법인 제사, 지식계 병법인 조영, 모략계 병법인 혼란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23/무력 31/지력 67/정치력 73/매력 70에 특기는 기술과 간첩. 총 2개 뿐.
삼국지 12에서의 일러스트는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31/39/68/71, 특기는 농업 4, 문화 3, 설파 3, 수영 2. 전수특기는 농업이며 전법은 창병선동.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31, 무력 39, 지력 67, 정치 71, 매력 73으로 전작에 비해 지력이 1 상승했다. 개성은 인맥, 주의는 할거, 정책은 호적정비 Lv 3, 진형은 안행, 정란, 전법은 혼란, 구축, 시람, 친애무장은 감택. 설종, 손등, 오찬, 종리목, 혐오무장은 손노반, 손패다.
삼국전투기에서는 본처 장비(張妃)가 쿠로누마 사와코, 첩인 하희쿠루미자와 우메로 패러디되면서 카제하야 쇼타로 패러디된 걸로 밝혀졌다. 형인 손등도 카제하야 쇼타로 나오고, 폐위되기 전 태자 때의 모습을 보면 동생인 카제하야 토우타도 반영되었을지도 모른다.

[1] 후일 손휴가 제위에 오르자, 손덕은 전당후(錢唐侯)에 봉하고, 손겸은 영안후(永安侯), 손준은 기도위(騎都尉)에 봉하였다.[2] 이와 관련해서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이궁의 변 항목을 보도록 하자.[3] 하희전에 따르면 손노반(전공주)이 손준에게 시킨 것이다.[4] 생각해보면 손호가 폭군이 된 이유 중에 하나는 아버지 손화의 억울한 삶과 죽음으로 인한 울분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