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궁의 변
1. 개요
오나라 황제 손권의 후계자 선정을 놓고 일어난 사건이자 오나라가 막장으로 치닫게 된 원인이며, 손권이 멀쩡하던 후계자 문제를 꼬아놓는 바람에 터진 일이다.
명칭에서의 '이궁(二宮)'은 태자 손화와 노왕 손패 각자의 궁을 지칭하며, '이궁의 변'이라는 명칭은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 사건을 '이궁의 변(二宮の変)'이라 칭하고, 중국에서는 '이궁지쟁(二宮之爭)'이나 '남노당쟁(南魯黨爭)'[1] 이라고 칭한다.
후세 사람들에게 손권이 노망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정도로 심각한 실책이지만, 해당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에 손권이 치매 환자처럼 정신이 오락가락했다거나 광증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오히려 후계자 문제나 숙청 건 외의 외교적, 군사적 일처리는 아주 멀쩡했다. 보즐과 주연이 촉의 배반을 의심해도 논리적인 이유를 들어 반박했으며(오주전), 위군 측에서도 이 당시 손권을 만만하게 보지 않아서 제갈탄이 왕기에게 의논을 할 정도였다(왕기전). 손권이 정신적으로 쇠약한 상태였다면 저런 일화들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일련의 사건들을 '노망'이라는 선입견을 빼고 보면 꽤나 복잡한 내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해 정확한 평가를 하려면 "손권의 노망 때문이다"식의 편한 해석이 아닌, "손권이 일련의 행적을 보인 이유", "손화파와 손패파의 정치적, 가문적 배경"에 대해 고찰해봐야 한다.[2]
다만 치매 같은 중증 질환이 아니더라도, 노환이 손권의 행동 요인에서 아예 배제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육체적 건강과 심리적 불안은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노환이 불안으로 인한 판단력 저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결론도 나온다. 조조도 치매는 아니었지만 말년에는 젊은 시절의 과감함을 많이 잃어버리고 소심해 보이는 언행들을 여럿 했었듯, 손권 또한 오랫동안 부실한 정통성을 가진 오나라의 군주로 살며 늙은 결과, 국가를 위한 큰 계책보다 당장 자신의 권위만 생각하는 근시안적인 상태로 시야가 위축되고 불안과 의심이 커져 후계 문제에 한해서 판단력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손권은 이 막장 권력투쟁의 최대 원인 제공자였기 때문에, 오나라를 안정시킨 '수성의 군주'라는 좋은 이미지도 희석되었고, 하북과 중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던 장강 이남을 경제-문화적으로 발전시킨 치적 등 여러 업적도 다 빛이 바랬다. 이 사건이 삼국지연의에서 생략되었다는 이유로 손권을 삼국지연의의 수혜자로 평가하는 사람들마저 다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실책이었다. 연의에서의 손권은 몇몇 활약과 업적이 생략되고 대충 넘어간 감이 있지만, 이궁의 변을 패스한 것으로 장료, 조운, 관우 급으로 잘해준 거나 마찬가지라는 논리. 실제로 삼국지연의를 주로 접해 정사 삼국지를 잘 몰랐던 사람들은 이궁의 변을 알게 되면 크게 충격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국에서는 제갈량 사후는 연의가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 소재인데다, 상대적으로 오는 위나 촉에 비해 덜 주목받기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사를 읽은 사람들이 늘면서 조금씩 다루기 시작(#)했고,[3] 최훈도 삼국전투기에서 전투외편으로 냈다.
2. 배경
이 모든 문제는 '''손권의 아들들이 일찍 죽은 비극'''에서 시작됐다. 차남 손려가 232년에 고작 20세로 요절한 것도 모자라 242년에는 장래를 촉망받던 태자 손등#s-2이 33세의 나이로 죽는다. 그러자 손권은 삼남 손화를 태자로 삼는데, 이때 사남 손패를 같은 궁에 살게 하면서 예법에 따로 구분을 두지 않는다.[4][5] 그리고 나중에 신하들의 반대로 다른 궁에 살게 되나, 오히려 이때부터 오나라는 신하들이 두 파로 분리되어 치고박고 싸우기 시작하니 이를 '''이궁의 변'''이라 한다.
3. 세력 분류
등장하는 관직명을 보면 알겠지만 모두 상당한 고위직들이다. 말 그대로 온 나라가 반으로 나뉘어 싸웠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
손화 편에 선 인사들은 육손, 제갈각, 고담, 주거, 주적, 장휴 등 오의 대호족이거나 대호족의 자제들, 외부파 인사들 중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고위직에 오른 사람들과 그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오의 최상위 인사들과 그 자제들이었다. 사실은 이게 당연한 것이, 손화는 하자가 전혀 없는 멀쩡한 황태자였다. 위의 두 형이 죽으면서 자연스럽게 태자가 된데다 손화를 태자로 책봉해달라는 전 태자 손등의 유언도 있어 정통성이나 책봉 과정의 문제도 없고, 손화 본인도 능력이나 인격 면에서 이렇다 할 흠이 없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신하라면 정당한 후계자를 지지하는 게 당연한 일이니 파벌을 운운할 일도 아니다.
반면 손패의 편을 든 인사들은 보즐, 여대, 전종, 손준, 여거, 손노반 등 중소호족파와 중간급 위치에 있는 인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손권의 친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거기다 훗날 숙청의 달인과 황제폐하 큰 딸내미도 있었다.
이 때문에 손권이 그냥 노망이 나고 손패가 마냥 좋아서 손패를 민 것이 아니라, '''오에서 가장 큰 세력이지만 동시에 황권에 잠재적인 위험이 되는 호족 세력에 대한 견제'''였다는 시각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즉 이것은 후계문제를 두고 예법을 고수한 오의 최상위권 인사들과 그에 도전하는 중간파들의 싸움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다만 손화파 인사들에 비해 명성이나 세력이 부족했을 뿐 보즐, 여대, 전종 등이 손화파에 비해 능력이 부족한 인물들은 아니었다.
3.1. 태자파
- 태자 손화
- 승상 육손
- 상서선조랑 육윤
- 시상독→대장군 겸 형주자사 제갈각
- 태상 겸 평상서사 고담
- 경하독 겸 잡호장군고승
- 편장군 고제
- 표기장군→승상 대리[6] 주거#s-2
- 주거의 아내 손노육(주공주)
- 회계태수 등윤
- 평위장군 주적#s-2
- 상서 정밀#s-3
- 태자태부 오찬
- 우림도독 겸 잡호장군 장휴
- 상서복야 굴황
- 무난독 진정
- 오영독 진상
- 장순(張純)
- 손화의 어머니 대의황후 왕씨
3.2. 노왕파
- 노왕 손패
- 표기장군→승상 보즐
- 진남장군→상대장군(명예직에 가깝지만) 여대
- 대사마 전종
- 무위도위 손준
- 마한부우독 겸 월기교위 여거
- 태자소부 겸 중서령 손홍
- 제갈각의 장남 기도위 제갈작.
- 양축, 오안,[10] 손기#s-2
3.3. 기타
- 좌대사마 주연: 손패파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으나, 그 아들 주적이 「손화전」 주석에 손화파의 일원이라고 적혀 있기에 여기 기술한다.
- 독군사자 양도
- 상서복야 시의: 손패의 부상으로 있었으며 그를 극진하게 섬겼으나, 그가 올린 상소문의 내용은 손화파의 내용과 가깝다.
4. 사건의 진행
4.1. 초기 상황
손권이 태자 손화와 번왕인 손패의 구별을 없애자, 신하들은 자연스럽게 손화파와 손패파로 분열해 서로 치고 받고 싸우기 시작했다. 이에 손패의 부상으로 있으며 손패를 극진히 섬기던 시의조차 "두 황자 사이의 위계질서를 세우고 손패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손패를 바깥으로 내보내 국경을 지키게 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세 번이나 올렸으나, 손권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로써 손권이 사실상 후계 대결을 공인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고, 오나라 조정 사람들은 손화파와 손패파로 제각기 줄을 대며 시시각각 갈라지기 시작한다. 시어(侍御)와 빈객(賔客)들이 두 패로 갈라지고, 나중에는 대신들까지 두 패로 갈렸다.
이때 전종은 자신의 아들 전기를 파견하여 손패를 섬기게 하고 육손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데, 육손은 전종에게 그건 옳지 않은 행위라고 경고하지만 전종은 듣지 않는다. 여기에 손패파로 들어간 전기가 둘 사이를 이간질하니 육손과 전종의 사이는 더 틀어지고, 육손은 다시 한 번 김일제[12] 의 사건을 보라며 경고하지만 전종은 아예 답변조차 하지 않아 둘 사이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13]
또한 손패는 손화파지만 같은 손화파인 제갈각과 사이가 나쁜 주적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직접 그의 관서까지 찾아가나, 주적은 땅으로 내려가면서까지 합당을 사양하니 결국 실패하고 만다.[14]
이렇게 중신들이 두 파로 갈려 싸우게 되니 손권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손패와 손화에게 사람들의 왕래를 끊게 하고 궁궐에 처박혀 두 사람에게 독서나 하라고 하는데, 여기서 양도라는 자가 상소를 올려 다시 왕래를 허락하게 하라고 하며 헬게이트를 열어버린다.
4.2. 손패파의 공격
선제공격은 손화의 어머니인 대의황후 왕씨와 사이가 나빴던 손노반이 시작한다. 손화가 손권을 대신하여 종묘에 제사를 지내러 갔을 때, 손화의 본처 장비(張妃)의 숙부인 장휴의 집이 근처에 있어 손화는 장휴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손노반이 이를 두고 손권에게 '''"손화가 일은 안 하고 지 아내 집에만 간다"'''고 모함하니, 가뜩이나 충동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손권은 나이가 들면서 판단력과 주의력이 흐려지기라도 한 것인지 제대로 확인도 해보지 않고 손노반의 거짓말에 속아 크게 화를 냈으며, 대의황후는 이 일을 근심하다 죽고 만다. 이런 궁중 권력 투쟁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에게는 미운털이 박힌 손화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게 되었으며, 결국 손화 본인이 손패파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상황에 처한다.
이를 보고 육손과 고담은 각각 상소를 올려 손권의 이러한 행위를 비판하지만 손권에게 손화파의 말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고, 이 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을 들은 손패는 화가 나서 고담과의 사이가 더더욱 악화되었다. 거기에 전종과 그 아들들 역시 고담을 미워하게 되는데, 원래 고담은 전종의 아들 전기의 성격이 간사한 것을 간파하고 그를 멀리하고 있었다. 거기다 과거 위나라와의 전쟁 때 장휴와 고승의 공이 전서와 전단의 공보다 크다고 하여 장휴와 고승은 잡호장군으로 승진하고 전서와 전단은 그보다 아래인 편장군, 비장군의 직위로 오르게 된 적이 있는데,[15] 이 전서는 전종의 아들이자 전기의 형이고 전단은 전종의 조카였으므로 전종과 전기는 그들을 더욱 미워하고 있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손패의 편을 드는 손권의 언행에 힘입어, 손패파는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한다.
4.3. 손화파의 연달은 패배
손패파가 먼저 목표로 삼은 것은 241년 수춘 전투에서 적의 기세를 꺾어 피해를 막은 장휴와 고승이었다. 앞서 설명한대로 전기는 과거에 형 전서의 공이 이들 때문에 과소평가되었다고 미워하던 터라,[16] 양축, 오안, 손기, 전기를 중심으로 한손패파가 손권에게 장휴와 고승이 진순과 내통해서 거짓으로 공을 늘렸다고 참소한다.
손권은 그 둘에게 벌을 내리고 연좌제로 그들의 친족들에게도 벌을 내리는데, 이때 고승의 친족인 고담 또한 연좌제로 벌을 받게 된다. 손권은 그래도 자신이 총애하던 고담인지라 그에게 사죄하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하나 고담은
라고 외치는 패기를 보여준다. 이에 사무를 맡은 관리는 "저런 불경죄를 저지르다니! 저건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라고 외치나, 손권은 여기서 쥐꼬리만한 아량을 베풀어 조부 고옹을 생각해 봐준다며 장휴, 고승, 고담을 교주[18] 로 유배보낸다. 이렇게 유배를 간 장휴와 평소 사이가 나빴던 손홍이 장휴를 참소, 장휴는 41세에 죽고 고담 또한 유배간 지 2년 만에 죽었으며 고승 또한 37세의 나이로 죽는다.'''폐하, 참언[17]
이 흥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양축은 20가지의 이유를 들어 육손을 고발하고, 손권은 이것에 즉각 반응하여 육손은 조정에서 쫓겨나 무창에 머물게 된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손화파인 오찬은 시의의 상소문처럼 손패를 내보내 하구를 지키도록 하고 온갖 더러운 일을 맡아서 하는 양축을 내보내 경사에 있지 못하도록 건의했고 조정에서 쫓겨나 자세한 내용을 듣지 못하는 육손에게 계속해서 소식을 전해준다. 육손은 오찬을 통해 정보를 얻은 후 손권에게 끊임없이 표를 보내 잘못된 상황을 개선하려고 하지만, 손패파는 이에 반응해 양축과 함께 오찬을 힐난하고 손권은 '''오찬을 투옥시키고 결국 오찬은 옥사한다.'''
4.4. 손패가 드디어 태자로?
이런 손패파의 공격에 손화는 폐위될 것을 걱정하고 손패는 더욱 불손해진다. 그리고 손패는 양축, 오안, 손기, 전기와 함께 손화를 위해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던 상황. 이때 손권은 양축과 밀회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 양축은 자신의 주특기인 입털기로 손패를 칭찬하고 손권은 이 자리에서 양축에게 '''손패를 태자로 세우기로 약조한다.'''
손권에 의해 아무런 상의 없이 태자가 교체될 위기에 처했으나, 평상 밑에 숨어있던 손화파의 인물이 이 사실을 손화에게 알린다. 손화에게는 진짜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는 상황. 일단 그는 때마침 자기를 보기 위해 온 육윤에게 상의했고, 육윤이 이를 육손에게 알려 육손이 손권에게 표를 올려 진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받은 손권은 반성하기는 커녕 육손이 이걸 어떻게 알았느냐며 양축을 불러다가 "누구 마음대로 내 결정을 유출하느냐"라고 성을 낸다. 양축 본인도 어떻게 그 약조가 유출되었는지 몰라 부인하자, 손권은 일단 양축을 풀어주며 유출한자가 누군지 조사하라 한다. 이에 양축은 조사 결과 그 당시 서쪽으로 간 것은 육윤밖에 없었다며 육윤이라고 보고를 하고, 육손 또한 누구에게서 그런 정보를 얻었냐는 질문에 육윤이 알려주었다고 그대로 보고한다.
이에 결국 육윤은 잡혀오고, 손권은 육윤을 고문하기 시작한다. 육윤 입장에서 실제로 어떻게 정보를 얻었는지를 말하면 손화가 피해를 볼 것은 당연한 사실. 육윤은 그런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그리고 계속된 가혹한 고문에도 다른 말을 하지 않으니 손권은 이번에는 양축을 데려다가 고문을 시작한다. 양축은 육윤과 다르게 그 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자신이 육윤에게 말했다고 거짓으로 시인한다. 손권은 이 말을 듣고 "과연 내가 예상했던 대로군."이라고 하며 양축을 죽여서 시체를 개울가에 던져버린다.양축이 신에게 말했습니다!
당연히 양축의 일족도 다 피해를 입었지만, 양패의 형 양목의 경우 과거 육손이 양축을 조심하고 아예 가문을 따로 차리라고 경고했었던 것을 따라 그동안 양축을 여러 번 말려서 선을 그었던 점이 참작되어 남쪽 주로 유배가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4.5. 육손 분사, 손패파의 몰락
손권은 육손에게 계속해서 궁궐의 사자를 보내 그의 행동을 비난하는데, 육손은 이를 이기지 못하고 245년에 결국 분노와 통탄으로 죽고 만다. 그리고 이런 육손의 분사에도 불구하고 손권은 상주인 육항에게까지 환관을 보내 양축이 고발한 20가지에 대해 설명하게 하지만, 다행히도 아버지를 닮아 뛰어난 능력을 물려받은 육항이었기에 이에 대해 막힘없이 조리있게 반박, 손권도 감탄하며 의심은 점점 풀리게 된다.
이 와중에 245년 7월에는 이런 혼란을 틈타 마무라는 자가 손권과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위에 항복하려는 계획을 세우다 발각되어, 마무와 그의 무리가 모두 처형된다.
또한, 양축의 죽음으로 손화를 해치려던 손패의 계획이 모두 밝혀지게 된다. 지금까지 손패에 대한 칭찬이 전부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고 손패에 대한 정나미가 떨어진 손권은 250년 8월에 손패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고 전기, 오안, 손기 또한 손패를 따라 온갖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기에 처형한다.
이것으로 손화의 자리가 유지되고 그대로 끝났으면 괜찮았겠지만… '''갑작스레, 손화가 태자에서 폐위되어 유폐된다.'''
4.6. 뜬금없는 손량파의 급부상
사실 양축이 죽고 상황이 손패에게 좋지 않게 흘러가자, '손패는 글렀다'고 생각한 손노반은 반부인의 후손인 손량파로 귀신같이 갈아탄다. 손노반은 이미 대의황후 왕씨와 손화를 모함해왔고 대의황후의 죽음에 크게 일조한 격인지라 이제와서 손화파로 갈 수도 없고, 가만 있다가 손화가 제위에 오른다면 1순위로 제거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손노반은 남편 전종의 조카인 전상의 딸 전혜해를 손량의 아내로 삼게 하고 연일 침이 마르게 손량을 칭찬한다. 이제 7살밖에 안 된 아이를 남편의 일족 여성과 결혼시키면서 외척으로서 개입하려는 속셈이었다.
손권은 태자 자리를 차지하려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손패에게 정나미가 떨어지고, 손노반의 참소로 대의황후를 죽게 만든 후 그 아들 손화도 꼴보기 싫던 판에 자신이 이뻐하는 어린 반부인의 아들을 칭찬하니 손준을 불러다가 "자제들이 화목하지 않으면 신하들이 나뉘어서 장차 원씨와 같이 실패함이 있게 되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만약 한 사람을 세워 놓게 된다면 어찌 혼란이 일어나지 않겠소?" 라고 말하면서 '''손량을 태자로 세울 계획'''을 하고 잠자코 몇 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런 손권의 행위에 배송지는 길게 주석을 달아 손권을 비판한다.
신 배송지가 생각하건대 원소와 유표는 (장남이 아닌) 원상과 유종을 현명하다 말하고 본래부터 후사를 전할 뜻이 있었으니, 이는 손권이 기왕에 손화를 태자로 세워 놓고서도 다시 손패를 총애하여 앉아서 난리를 만들고 스스로 집안의 화를 빚어낸 것과는 다르며, '''원소, 유표보다도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남이 더욱 심합니다.''' 보즐은 덕과 도리를 칭하여 오나라의 대신이 되었음에도 손패에게 아부를 떨고 양공과 같이 일을 도모했으니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손화를 기왕에 태자의 자리에 올려놓고 적자와 서자를 갈라 정했으니, 비록 재능과 덕이 특출나지 않다 해도 오히려 의로운 이는 서자를 편들지 않아야 하는 것인데, 손패가 실제로 저지른 일을 듣지 않고서 손화에게 후사를 잇게 한단 말입니까? (그게 제대로 이뤄지겠습니까?) 무릇 사악하고 편협한 자라도 그 행하는 근본에 어찌 장점이 없겠습니까마는, 만약 하나라도 선하지 않은 행동이 있다면 그 많은 장점은 모두 사라져 버릴 뿐입니다. 보즐에게 만약 이런 일이 있었다면 그 나머지는 족히 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여대, 전종의 무리들도 대개 논할 필요가 없을 뿐입니다.
4.7. 손화파의 몰락
250년, 손권은 결국 손화가 장휴와 짜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손화를 폐위시켜 유폐한다'''.[19]
이 소식에 손화파는 심각하게 당황했다. 그래서 주거와 고제 및 수많은 신하들이 함께 상소를 올리지만 손권은 듣지 않고[20] 무시해버리니 주거는 굴황과 함께 여러 관리들을 이끌고 머리에 진흙을 바르고 스스로를 결박한 다음에 연일 손화를 석방할 것을 요구한다. 이 일을 백작관에 올라가 본 손권은 그들에게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면박을 주고 어린 반부인으로부터 얻은 손량을 태자로 세우려 한다. 이에 진정과 진상이 편지를 올려 진헌공과 해제의 고사를 들어 이 일을 말리지만, 손권은 화가 치밀어 진정과 진상은 물론 그들의 일족까지 모두 주살하고 주거와 굴황은 곤장 백 대를 때린다. 굴황은 곤장을 맞아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태자를 바꾸면 안된다고 간언하지만, 이미 정신이 나갈 대로 나가버린 손권은 그를 추방해서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주거 또한 신도궁의 승으로 좌천되며 손권에게 간언하던 장순은 처형되어 시체가 저잣거리에 버려진다.
한편 제갈각은 손화파이고 그의 아들 제갈작은 손패파였는데 손패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손권은 제갈각에게 아들 교육 좀 잘 시키라고 하고, 이에 제갈각은 손권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아들에게 독을 먹여서 죽인다'''. 이 행동으로 제갈각은 다른 손화파와 다르게 손권의 호감을 산다.
이처럼 간언을 하다가 주살되거나 좌천된 사람이 수십 명이 넘었으며, 사람들은 모두 이들이 억울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손권은 끝내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4.8. 태자는 손량
손패를 죽이고 손화를 폐출하고 신하들도 죄다 쫓아내거나 숙청해 더는 거칠 것이 없었던 손권은, 신하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250년 11월 아직 7살밖에 되지 않은 손량을 황태자로 책봉한다.
이전까지는 백보 양보해서 유력 호족들과 신하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황권을 강화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쳐도, 이제 손권은 70 가까운 나이에 자주 병에 시달렸고 총애하는 후궁 반부인과의 사이에서 늘그막에 얻은 막내 손량의 나이는 7살에 불과했다. 후계구도 선정에서 호족들과 친분이 있는 손화와 손패 둘을 이용해 호족들 사이의 자중지란을 일으켜 세력을 약화시키고 아직 어려서 호족들과의 연관성이 적었던 손량을 후계자로 올리는 판을 짰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손량이 허울뿐인 황태자가 되고 손노반과 손준을 위시한 황족과 전씨 일가를 주축으로 하는 호족들이 실권을 장악한데다 나라를 지탱해야 할 유능한 대신들은 대부분 숙청당하고 권력을 잃은 상황이 되고 말았다. 명분으로나 인물로나 문제가 없었던 태자 손화의 세력을 다 꺾어놓고 한다는 짓이 겨우 이건가? 차라리 노망이 나서 이 사달을 냈다는 게 그나마 말년의 손권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21] 그리고 250년 12월에 신인이 편지를 주어 연호를 바꾸고 황태후를 임명하라고 했다는 것을 이유로, 251년 5월에는 어린 부인 반부인을 황후로 세워버린다. 문제는 이 반부인이 아주 잔학한 인물이었다는 것인데, 다른 비빈들을 무고해서 죽였고 궁녀들에게도 아주 가혹해서 죽거나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런 여자가 황후가 되었으니 여론이 좋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손권이 병에 걸려 누워버리니 이때다 싶은 손패파의 손홍은 손권의 거짓조서를 만들어서 좌천되어 임지를 향해가는 주거를 죽여버린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때 손권은 요양차 도성으로 온 육항을 만나 자신은 그저 간신배에게 속아 육손과 육항을 욕하게 되었다며 육항을 비난한 편지를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다 불태워달라는 찌질한 부탁까지 한다. 물론 그 편지들이 나중에 정치판에서 약점이 될 수도 있으니 제거하는 것이 좋기는 하다.
4.9. 마지막 희망은 사라지고
그렇게 미쳐 돌아가던 오나라에도 마지막 희망이 비치니 251년 11월, 남교에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풍질을 만난 손권은 '''"손화에게 내가 너무 심했던 것 같은데, 다시 태자로 삼자"'''는 발언을 하지만, 이미 병에 걸려 쇠약해진 그에게는 레임덕 수준의 충성심밖에 없었다. 손노반, 손준, 손홍은 이를 반대하며 오나라의 마지막 기회는 물 건너가버리고 결국 252년 1월, 손화는 남양왕으로 임명돼 장사로 떠나게 되어 태자가 될 마지막 가능성마저 사라진다. 한편, 이렇게 손권이 오늘내일 하고 있을 때 반부인은 손홍 등을 시켜 전한의 여후가 섭정하던 전말을 조사케 했다. 쉽게 말해 손권이 죽으면 여후처럼 섭정이 되어 자신이 권력을 휘두르겠다는 것.
그러나 그 잔혹한 성품으로 궁내외에서 미움을 산 반부인은 252년 2월, 손권을 간병하다 지쳐 침대에 누워 자는 틈에 들이닥친 후궁과 궁녀들에게 목이 졸려 죽고 만다. 이들은 반부인이 병에 걸려 급사했다고 꾸미려 했으나 목졸린 흔적 때문에 들통났고 모두 체포되었다. 손권은 반씨의 악랄함 때문에 자초한 일인 줄은 알았으나 황후를 살해한 자들을 용서할 리가 없기에 결국 가담자 예닐곱 명이 주살당한다. 이처럼 죽을 때까지 피비린내 나는 일생을 보낸 손권은, 4월에 건강이 악화되자 제갈각, 손준, 등윤, 손홍, 여거를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죽는다.
5. 피해를 받은 인물
5.1. 손화파
- 손화 - 일단은 생존.
- 육손 - 화병으로 사망.
- 육윤 - 생존.
- 제갈각 - 아들을 제물로 생존.
- 고담 - 유배후 사망.
- 고승 - 유배후 사망.
- 고제 - 아버지 제사를 지내다가 극심한 슬픔으로 사망.
- 주거 - 좌천후 손홍의 문서조작으로 처형.
- 손노육 - 생존.
- 등윤 - 생존.
- 주적 - 생존.
- 정밀 - 생존.
- 오찬 - 양축의 참소로 손권이 처형.
- 장휴 - 유배후 손홍의 참소로 처형.
- 굴황 - 유배후 기록 없음.
- 진정 - 일족 전멸.
- 진상 - 일족 전멸.
- 장순 - 끔살 후 시장바닥에 시체 뒹굼.
- 대의황후 왕씨 - 상황 걱정하다가 사망.
5.2. 손패파
- 손패 - 명령에 의한 자결.
- 보즐- 도중에 자연사.
- 여대 - 생존.
- 전종 - 도중에 자연사.
- 손노반 - 생존.
- 전기 - 손패 사망 후 끔살.
- 전단 - 생존.
- 손준 - 생존.
- 여거 - 생존.
- 손홍 - 일단은 생존.
- 제갈작 - 아버지의 생존을 위한 제물로 희생.
- 양축 - 본인만 끔살 후 강가에 시체 투하.
- 오안, 손기 - 손패 사망 후 끔살.
제갈작의 경우는 제갈각전에만 실려있어 시행시기가 모호하고 국역 삼국지에는 노왕의 사건과 연류되었다고만 나와 손패파라는 점에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원문을 보면
라는 부분에서 노왕과 교류했다는 것을 통해 손패파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恪長子綽,騎都尉,以交關魯王事,權遣付恪,令更教誨,恪鴆殺之。
(제갈)각의 장자 (제갈)작은 기도위였으며, 노왕과 교유했기 때문에 (손)권이 (제갈)각에게 보내 가르쳐 꾸짖게 했거늘, (제갈)각이 짐살했다.
6. 그 후 인물들의 행보
손권이 죽은 직후 손패파의 일원인 손홍은 주거를 죽였던 방법처럼 거짓 조서를 만들어 제갈각을 죽일 계획을 세우지만 그 자리에 있던 손준이 이 사실을 제갈각에게 보고했고, 제갈각은 손홍을 불러 자문을 요청한 다음에 대답하지 못하자 바로 그를 죽여버린다.
그 후, 권력을 잡은 제갈각이 잘 나가면서 손화파에게도 빛이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253년 합비신성 공략 실패로 제갈각의 세력이 약해졌을 때, 손준의 계획으로 제갈각과 그의 일족은 주살되고, 손준이 권력을 잡아 '''손패파인 손준+손노반+전씨일가라는 세력이 세워진다. ''' 권력을 잡은 이들은 결국 '''손화도 죽이고 손노육도 죽이며''' 손화파 정리에 들어간다.
즉, 피의 권력에 특화된 손패파가 손준-손침 시대를 열면서, 오나라의 개막장 역사에 일조하게 된다.
256년 9월 14일 손준이 죽고 손침이 뒤를 잇는데,[22] 이에 여거와 등윤이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해 둘 다 죽는다. 그리고 257년 제갈탄의 반란 때 '''출진했던 전씨 일가가 모조리 위에 투항해버린다'''. 그 후 오나라에서 전씨 일가는 풍비박산나고 얼마 안 되어 손노반도 유배당하고, 드디어 손패파도 깨끗이 정리된다.
7. 평가
손권의 아들들인 손등, 손려[23] , 손화, 손휴는 모두 명군의 자질이 있었다. 심지어 어린 막내 손량마저도 똑똑함을 칭송하는 미담들이 사서 곳곳에 기록될 정도이니 너무 어렸을 뿐 충분히 좋은 군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조위와 촉한의 창업군주인 조조와 유비는 둘 다 사실상 자식농사를 망쳤다는 걸 생각해보면, 손권은 정말 축복받은 케이스였다.
조조의 후계자인 조비는 지능이나 학식, 문학적 재능 등 문(文)의 능력은 뛰어났으나 무(武)의 능력은 어중간했고 종합적인 리더로서의 능력도 그럭저럭이었지만 무엇보다 '''인격에 심각한 결함이 있어서''' 군주로서는 좋은 인물이었다 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던 조식은 문의 능력은 너무나도 뛰어났으나 무의 능력은 검증된 바가 없었고 성격이 방종하고 방탕했으며, 조창은 조식과 완전히 반대로 성격이 듬직한 맛이 있어 조조가 좋아했고 무의 능력은 상당했으나 문에 대해 관심이 거의 없다시피해서 군주로 부적합했다. 장자인 조앙은 197년의 장수 토벌전 때 조조의 어리석은 짓으로 완성에서 전사했고, 어리지만 총명해서 조조의 총애를 받던 조충은 13살에 죽었다.
유비의 후계자인 유선은 성품이 어질고 무난했으나 난세의 군주로 살아남기에는 능력이 부족했고, 유봉은 양자라는 약점이 있었던데다 번성 공방전 당시 상용을 지키면서도 관우의 구원 요청을 무시하는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유영과 유리는 207년 출생인 유선과 나이 차가 상당했다고 하니, 유비가 사망한 223년에는 어린아이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이궁의 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육손, 주거, 고담, 고승, 장휴 등 오나라의 우수한 인재들이 목숨을 보전했을 것이며, 손등만큼은 아니지만 명군의 자질을 보인 손화도 비참하게 죽을 일이 없을 것이고, 손화가 죽지 않았다면 아들인 손호가 미쳐돌아갈 가능성도 현저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애당초 손화의 정실인 장비(張妃) 소생의 적자 손준이 황제가 될 확률이 높았을 테니, 설령 손호가 포악한 성격을 가졌더라도 그가 황제가 되어 나라가 황폐해질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든다.
심지어, 당대에 원소와 유표라는 확실한 반면교사의 사례가 있었음에도 이를 참고하지 않고[24][25] 이들의 전철을 밟아 나라를 망친 것은 손권의 평가를 더욱 떨어뜨린다.
덤으로, 손화와 손휴는 각자 태자,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숙청으로 죽고 손패는 자기가 자결시킨 것을 생각하면 인륜적으로도 손권은 아들들의 인생을 망친 희대의 막장 부모라 봐도 무방하다. 실수로 조앙을 죽게 한 조조와 양아들 유봉을 숙청한 유비도 아들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생각하면... 게다가 손패는 자업자득이기는 했어도 과연 손권이 손패에게 힘을 실어주는듯한 언행을 보이지 않았다면 그래도 손패가, 그리고 손패파가 손화와 손화파를 공격할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보면 손화는 당연히 억울하고 손패도 조금 억울한 면이 있다.
- 손권의 어리석은 후계 판단
손권이 죽은 지 5년도 안 돼서 손화파에 가담한 인물들 중 살아남아 관직을 지낸 자는 정밀과 육윤, 주적밖에 없을 정도로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 된다. 그 와중에 제갈각 사후에는 손준과 손침이 전횡을 일삼고 나라를 말아먹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자초한 것은 손권이므로, 그는 다른 업적에도 불구하고 이 실책으로 비난받는다. 오주전과 비빈전에 있는 진수의 평이 대표적.
단, 배송지의 경우 "그래도 모든 책임이 손권의 잘못은 아니다"라고 했다.[26] 또한, 먼저 죽은 황태자 손등이 후계자로 손화를 지목했다고 하나 이후에 후계자를 다시 손패로 바꾸는 것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27]
문제는 손화를 그대로 태자 자리에 둔 채 손패를 총애하며 동등하게 대우하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고, 황제인 손권이 하필이면 개막장인 손패파의 역성을 들면서 후계자로서 별 문제가 없는 손화와 그를 옹호한 개념인들을 대거 숙청한 것이다. 결국 모든 일이 손패에 대한 편애에서 시작되었음을 생각하면, 손권이 원인을 제공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단, 배송지의 경우 "그래도 모든 책임이 손권의 잘못은 아니다"라고 했다.[26] 또한, 먼저 죽은 황태자 손등이 후계자로 손화를 지목했다고 하나 이후에 후계자를 다시 손패로 바꾸는 것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27]
문제는 손화를 그대로 태자 자리에 둔 채 손패를 총애하며 동등하게 대우하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고, 황제인 손권이 하필이면 개막장인 손패파의 역성을 들면서 후계자로서 별 문제가 없는 손화와 그를 옹호한 개념인들을 대거 숙청한 것이다. 결국 모든 일이 손패에 대한 편애에서 시작되었음을 생각하면, 손권이 원인을 제공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 손권의 권력욕이 빚은 참사
손권은 기존의 대세력인 호족파와, 이들과 연계하며 입지가 강화된 외부 인사들이 마뜩찮았던 모양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목표가 되었던 것은 미운 털이 박힌 장소와 그 일족이었다. 꼬장꼬장하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장소를 손권이 숙청할 수 없었던 것은, 원로 대신이라는 위치뿐 아니라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웠을 때 주유보다도 먼저 손권을 후계자로 인정함으로써 자신이 오의 전권을 물려받는 데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손권은 손등을 주유의 딸과 결혼시키고 주유의 맏아들을 손노반과 결혼시킨 것처럼, 장소의 손녀를 손화와 결혼시킴으로써 표면상으로는 그를 존경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손권은 손화가 싫다는 핑계로, 아주 잔혹하게 장소의 아들 장휴를 비롯한 일족을 숙청해버린다. 이로 보아 손권이 장소를 보는 시각은 애증이나 츤데레 근처에도 못 가며, 하나만 걸려라 식으로 언제 저 마음에 안 드는 늙은이 일족을 박살낼지 벼르던 것이다.
또 오의 사성인 고옹과 주환의 일족도 박살내버렸다. 특히 고옹의 일족은 손자 고담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모두 축출당하거나 사망했기 때문에, 정계에서 다시는 이름을 떨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몰락했다. 자기는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면서 아끼는 척했고 어린 시절 그렇게나 귀여워해준 제갈근-제갈각 일족도 마찬가지다. 만약 제갈각이 아들 제갈작을 자기 손으로 독살하지 않았다면, 제갈각은 섭정이 되기도 전에 본래 역사보다 더 일찍 손권에게 일족이 멸망당했을 것이다. 이민족을 성공적으로 정벌하고 각지에서 자신의 재능을 뽐내며 새로운 호족 세력이 된 제갈각에 대해, 손권은 어렸을 적 총애했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그에게 냉담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제갈근이 공연히 제갈각의 오만한 성격을 우려하며 일족의 미래를 걱정하던 것도 사실은 이런 손권의 의중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에게 손량의 섭정을 맡긴 것도, 하도 많은 신하들이 죽는 바람에 마지못해 맡긴 것일 뿐이다.
또 손권은 호족연맹체인 오나라에서 황권 강화와 영토 확장을 위해, 형주보다는 자신이 이끄는 합비와 여강 방면 공격에 지속적으로 집착한다.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고 합비를 넘어 서주, 예주를 먹는 등 엄청난 전공을 세워 손가의 입지를 강화시킨다'는 계획이었다.[28] 처음에는 이런 계획이 어느정도 들이맞는 듯 보였다. 하지만 첫 단추인 강하 공략부터 문빙에게 막히면서 계획이 어긋났고, 장료와 만총에게 계속 막히면서 전공으로 입지를 강화하는 손권의 구상은 뒤틀려버린다.[29] 그런 의미에서 손권의 이런 군사활동이 주춤해지는 241년경이 이궁의 변이 시작되는 시점이란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런 와중에 기존의 뛰어난 인재들, 외부 인사, 호족 등 신하세력들은 죄다 손등의 유지를 받은 태자 손화에 붙은 상황,[30]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새로운 친위세력 격으로 자신이 총애하는 손패에게 붙은 이들을 띄워주지만, 이들 중에는 능력이나 인성이나 함량미달인 전기나 양축 같은 인물이 많았다. 손권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실상 이들의 온갖 패악질과 계략을 반쯤 조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의미에서, 손권 본인의 친정은 계속 실패하는데, 이릉대전의 승전 등 거대한 군사적 실적을 가진데다 오의 사성 중 하나로 유력 호족이기도 한 육손은 역시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이궁의 변 사건이 한창 진행중일 때, 같은 뛰어난 장수라도 자기 측근인 주연과 그렇지 않은 육손을 다루는 손권의 태도는 이미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육손이 없었더라면 이릉대전 이후 손오가 진짜 위험에 처할 수 있었으며 그가 오나라의 기둥이라는 사실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 없었을 것이다.[31]
또 오의 사성인 고옹과 주환의 일족도 박살내버렸다. 특히 고옹의 일족은 손자 고담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모두 축출당하거나 사망했기 때문에, 정계에서 다시는 이름을 떨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몰락했다. 자기는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면서 아끼는 척했고 어린 시절 그렇게나 귀여워해준 제갈근-제갈각 일족도 마찬가지다. 만약 제갈각이 아들 제갈작을 자기 손으로 독살하지 않았다면, 제갈각은 섭정이 되기도 전에 본래 역사보다 더 일찍 손권에게 일족이 멸망당했을 것이다. 이민족을 성공적으로 정벌하고 각지에서 자신의 재능을 뽐내며 새로운 호족 세력이 된 제갈각에 대해, 손권은 어렸을 적 총애했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그에게 냉담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제갈근이 공연히 제갈각의 오만한 성격을 우려하며 일족의 미래를 걱정하던 것도 사실은 이런 손권의 의중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에게 손량의 섭정을 맡긴 것도, 하도 많은 신하들이 죽는 바람에 마지못해 맡긴 것일 뿐이다.
또 손권은 호족연맹체인 오나라에서 황권 강화와 영토 확장을 위해, 형주보다는 자신이 이끄는 합비와 여강 방면 공격에 지속적으로 집착한다.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고 합비를 넘어 서주, 예주를 먹는 등 엄청난 전공을 세워 손가의 입지를 강화시킨다'는 계획이었다.[28] 처음에는 이런 계획이 어느정도 들이맞는 듯 보였다. 하지만 첫 단추인 강하 공략부터 문빙에게 막히면서 계획이 어긋났고, 장료와 만총에게 계속 막히면서 전공으로 입지를 강화하는 손권의 구상은 뒤틀려버린다.[29] 그런 의미에서 손권의 이런 군사활동이 주춤해지는 241년경이 이궁의 변이 시작되는 시점이란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런 와중에 기존의 뛰어난 인재들, 외부 인사, 호족 등 신하세력들은 죄다 손등의 유지를 받은 태자 손화에 붙은 상황,[30]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새로운 친위세력 격으로 자신이 총애하는 손패에게 붙은 이들을 띄워주지만, 이들 중에는 능력이나 인성이나 함량미달인 전기나 양축 같은 인물이 많았다. 손권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실상 이들의 온갖 패악질과 계략을 반쯤 조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의미에서, 손권 본인의 친정은 계속 실패하는데, 이릉대전의 승전 등 거대한 군사적 실적을 가진데다 오의 사성 중 하나로 유력 호족이기도 한 육손은 역시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이궁의 변 사건이 한창 진행중일 때, 같은 뛰어난 장수라도 자기 측근인 주연과 그렇지 않은 육손을 다루는 손권의 태도는 이미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육손이 없었더라면 이릉대전 이후 손오가 진짜 위험에 처할 수 있었으며 그가 오나라의 기둥이라는 사실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 없었을 것이다.[31]
- 손패파의 폭정이 승리하다
당시 손권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냉철한 판단을 내리면서 국정을 돌보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32] 노년군주제의 말년은 필연적으로 썩어가기 마련인데, 손패파가 이런 시점을 잘 노려서 "황제님 기분에 거슬리는 놈들 다 역적임 다 죽여버리셈"이라고 교묘하게 알랑거리면서, 손권의 의심병과 숙청성향을 권력장악에 써먹은 것이다.
손권은 나이를 먹을수록 정치적 숙청을 잔인하고 철저하게 실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태생적으로 호족들의 권력이 강했던 오나라의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계획으로 보인다. 하지만 손권의 마지막 숙청은 나라를 한데 모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반목과 증오심을 퍼트렸으며, 오나라를 하나로 뭉칠 이렇다 할 비전도 없이 그냥 자기 눈에 거슬리면 죽인 꼴이기에 권력강화의 목적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별 소득은 없었다고 평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육손과 고담 일족을 포함해 오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재능과 비전을 가지고 있던 주요 인재들이, 손권의 입맛에 맞는 손패파의 폭정에 휩쓸려 비참하게 사망했다는 점이다.[33] 물론 손패파도 많이 죽었지만, 손노반과 전씨 일가를 비롯한 핵심 세력은 일찌감치 손량으로 갈아타 살아남는 데 성공한다. 그나마 손량 즉위 초기에는 손화파에 속했던 제갈각이 활약했고, 이 때의 리즈시절을 잘만 유지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제갈각은 합비신성에서의 대패를 계기로 완전히 망가져 기어이 손준을 필두로 한 손패파에게 숙청당할 빌미를 만들게 된다.
게다가 여태까지 그나마 정상적으로 행동하던 손준[34] 도 한번 정권을 잡은 이후로 제갈각 저리가라 할 개막장으로 돌변, 결국 이들이 집권하면서 벌인 부정부패와 피의 통치는 두고두고 오나라 내부에 악영향을 끼친다.
물론, 기존 태자를 옹립했던 손화파도 자세히 파고들면 정당한 방식만을 쓴 것은 아니었다.[35] 그러나 손패파의 행위는 손화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막장이었고, 그야말로 한숨이 나오는 3류 양아치 같은 방식으로 국가권력을 중간에서 왜곡시켰다. 심지어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덕을 세우지 못하고 피를 뿌렸으니, 이후 오나라의 정치 상황은 더욱 수렁으로 빠져든다.
근본적으로 손화파인 대호족 세력과 외부 인사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자칫하면 나라가 붕괴할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닌 후계 문제 때문에 뭉친 것이었다면, 손패파인 중소 호족과 방계 황족들은 자기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손패에 붙었고 실제로 손패를 지지하던 중소 호족과 방계 황족들은 손패가 자결을 강요받자 미련없이 손패를 버린다. 그들이 손패에게 가담한 목적은 손패가 황태자가 되어 제위를 계승하는 것이나, 능력있는(실제로는 없을 확률이 높았지만) 아들이 황제가 되어 오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대호족과 고위 외부 인사들이 가진 권력을 자신들이 차지하고 싶다는 추악한 욕심이 그들의 행동 동기였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하의 권력을 꺾을 생각에 안달이 난 손권은 손패파의 술수에 아주 충실하게 놀아나주었다.
손권은 나이를 먹을수록 정치적 숙청을 잔인하고 철저하게 실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태생적으로 호족들의 권력이 강했던 오나라의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계획으로 보인다. 하지만 손권의 마지막 숙청은 나라를 한데 모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반목과 증오심을 퍼트렸으며, 오나라를 하나로 뭉칠 이렇다 할 비전도 없이 그냥 자기 눈에 거슬리면 죽인 꼴이기에 권력강화의 목적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별 소득은 없었다고 평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육손과 고담 일족을 포함해 오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재능과 비전을 가지고 있던 주요 인재들이, 손권의 입맛에 맞는 손패파의 폭정에 휩쓸려 비참하게 사망했다는 점이다.[33] 물론 손패파도 많이 죽었지만, 손노반과 전씨 일가를 비롯한 핵심 세력은 일찌감치 손량으로 갈아타 살아남는 데 성공한다. 그나마 손량 즉위 초기에는 손화파에 속했던 제갈각이 활약했고, 이 때의 리즈시절을 잘만 유지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제갈각은 합비신성에서의 대패를 계기로 완전히 망가져 기어이 손준을 필두로 한 손패파에게 숙청당할 빌미를 만들게 된다.
게다가 여태까지 그나마 정상적으로 행동하던 손준[34] 도 한번 정권을 잡은 이후로 제갈각 저리가라 할 개막장으로 돌변, 결국 이들이 집권하면서 벌인 부정부패와 피의 통치는 두고두고 오나라 내부에 악영향을 끼친다.
물론, 기존 태자를 옹립했던 손화파도 자세히 파고들면 정당한 방식만을 쓴 것은 아니었다.[35] 그러나 손패파의 행위는 손화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막장이었고, 그야말로 한숨이 나오는 3류 양아치 같은 방식으로 국가권력을 중간에서 왜곡시켰다. 심지어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덕을 세우지 못하고 피를 뿌렸으니, 이후 오나라의 정치 상황은 더욱 수렁으로 빠져든다.
근본적으로 손화파인 대호족 세력과 외부 인사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자칫하면 나라가 붕괴할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닌 후계 문제 때문에 뭉친 것이었다면, 손패파인 중소 호족과 방계 황족들은 자기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손패에 붙었고 실제로 손패를 지지하던 중소 호족과 방계 황족들은 손패가 자결을 강요받자 미련없이 손패를 버린다. 그들이 손패에게 가담한 목적은 손패가 황태자가 되어 제위를 계승하는 것이나, 능력있는(실제로는 없을 확률이 높았지만) 아들이 황제가 되어 오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대호족과 고위 외부 인사들이 가진 권력을 자신들이 차지하고 싶다는 추악한 욕심이 그들의 행동 동기였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하의 권력을 꺾을 생각에 안달이 난 손권은 손패파의 술수에 아주 충실하게 놀아나주었다.
더욱이 손패파 입장에서는 중간에 손패에서 손량으로 갈아탄 것도 어찌 보면 그들에게는 더 좋은 일이었는데 손패는 자결 당시 적어도 20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이미 손패는 자결할 때 성인이었고 때문에 아무래도 손량보다는 손패가 손패파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릴 가능성이 적다. 실제로도 손량 재위 시절에 손량 개인의 존재감은 거의 없고 제갈각-손준-손침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더 눈에 띄는 것도 손량이 직접 정치를 할 정도로 나이가 많지 않아서였고 손량 다음의 황제인 손휴, 그리고 손휴 다음에 제위를 이은 손호는 모두 즉위 당시 나이가 20대로 직접 정치를 할 수 있는 나이였고 또 그리하였다. 심지어 손휴는 즉위 당해에 손침을 제거하기도 했으니 성인이기만 했다면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고 손호도 폭군이라 문제지 나름 똑똑했다는 평도 있고 실제로도 요절하지 않은 채 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14년간 제위한걸 보면 자리도 못 지킬 정도로 멍청한건 아니다.
그럼 다시 손패쪽으로 돌아와서 보면 결국 손패도 손휴나 손호처럼 손패파가 멋대로 다루기가 만만치 않았을 수 있다. 자기 패거리에 배신당하다시피하여 죽기는 했어도 손화 역시도 직접 나서지는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했던걸 가능하면 마냥 저평가의 요소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기에 만일 손패가 손화를 제치고 제위에 올랐다면 손준-손침으로 이어지는 막장시대는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손패가 손호처럼 막장정치를 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36]
- 이후의 안습한 황제들
이렇게 숙청당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호족이므로 황권 강화와 중앙집권을 꾀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런 실권이 없는 9살짜리 어린아이가 제위에 올랐으니, 황제에게 어떤 권한이 생기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손량의 일화를 보면 머리는 확실히 좋았다지만, 어린 황제가 뭘 할 수 있겠는가?
권력을 가진 호족들이 상당수 죽고 몰락해 얼마 남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어린 황제가 그들을 통제하는 것도 무리였을 것이다. 실제로 손량은 재위기간 내내 손준과 손침의 꼭두각시였으며, 나중에는 손침 암살을 꾀하다 폐위당하고 만다.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손휴는 손침이 꼭두각시로 만들 요량으로 즉위시켰으나 즉위 2개월만에 손침을 잡고 혼란을 잠재우는데, 이는 손휴가 워낙 유능했기 때문이고 일반적으로는 이대로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 손권에게 변명의 여지는 없다. 무엇보다도 손패를 노골적으로 총애하면서 적장자를 우선한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인재들을 죽였기 때문에, 손권의 뒤를 이은 손량은 친위세력을 구축하기가 어려워졌고 손휴 사후 보신주의자들인 복양흥, 장포 등이 손호를 황제에 올렸다.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자들을 죽여 신하들을 시세에 영합하고 자기 보신에만 신경쓰도록 만들었으니 조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그 후 이 손휴마저 요절하면서, 다음 황제로 즉위한 자가 손호다.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손호는 촉한의 암군 유선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지능이나 재능은 유선보다는 나아보이지만 그 머리로 폭정을 일삼아서 평가가 더 안 좋다. 유선을 놀기 좋아하는 한량으로 비유하자면 손호는 사람 죽이기 좋아하는 사이코패스 수준이니... 여담으로 손호는 이궁의 변으로 희생당한 태자 손화의 아들인데, 손호가 사치와 폭정으로 오를 완전히 망치는 바람에 손화는 사실상 손호를 세상에 내보낸 것만으로도 오와 손권에 대한 원한을 다 갚은 셈이다.[37]
권력을 가진 호족들이 상당수 죽고 몰락해 얼마 남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어린 황제가 그들을 통제하는 것도 무리였을 것이다. 실제로 손량은 재위기간 내내 손준과 손침의 꼭두각시였으며, 나중에는 손침 암살을 꾀하다 폐위당하고 만다.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손휴는 손침이 꼭두각시로 만들 요량으로 즉위시켰으나 즉위 2개월만에 손침을 잡고 혼란을 잠재우는데, 이는 손휴가 워낙 유능했기 때문이고 일반적으로는 이대로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 손권에게 변명의 여지는 없다. 무엇보다도 손패를 노골적으로 총애하면서 적장자를 우선한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인재들을 죽였기 때문에, 손권의 뒤를 이은 손량은 친위세력을 구축하기가 어려워졌고 손휴 사후 보신주의자들인 복양흥, 장포 등이 손호를 황제에 올렸다.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자들을 죽여 신하들을 시세에 영합하고 자기 보신에만 신경쓰도록 만들었으니 조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그 후 이 손휴마저 요절하면서, 다음 황제로 즉위한 자가 손호다.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손호는 촉한의 암군 유선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지능이나 재능은 유선보다는 나아보이지만 그 머리로 폭정을 일삼아서 평가가 더 안 좋다. 유선을 놀기 좋아하는 한량으로 비유하자면 손호는 사람 죽이기 좋아하는 사이코패스 수준이니... 여담으로 손호는 이궁의 변으로 희생당한 태자 손화의 아들인데, 손호가 사치와 폭정으로 오를 완전히 망치는 바람에 손화는 사실상 손호를 세상에 내보낸 것만으로도 오와 손권에 대한 원한을 다 갚은 셈이다.[37]
- 기타
이궁의 변은 손오 역사상 가장 많은 인재들이 죽어나간 아침 드라마급 대숙청의 시대였으며, 이후에 시작될 혼란 시대의 개막이었다.
종종 조조의 천하통일 기회를 완전히 날려버린 적벽대전이나 그의 최대 악행으로 유명한 서주 대학살, 유비의 수만 군사와 촉한의 차세대를 이끌 인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국력의 거대한 손실을 불러온 이릉대전에 비견된다는 사실에서 그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으며,[38] 국가 내정에 끼친 악영향으로는 지속적인 폭정과 유력 가문들의 손가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다는 점에서 그 이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손권이 받는 혹평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는 사건이며, 이 때문에 삼국지를 논할 때 촉빠가 조조를 까고 위빠가 유비를 깔 때, 오빠는 손권을 깐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종종 조조의 천하통일 기회를 완전히 날려버린 적벽대전이나 그의 최대 악행으로 유명한 서주 대학살, 유비의 수만 군사와 촉한의 차세대를 이끌 인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국력의 거대한 손실을 불러온 이릉대전에 비견된다는 사실에서 그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으며,[38] 국가 내정에 끼친 악영향으로는 지속적인 폭정과 유력 가문들의 손가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다는 점에서 그 이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손권이 받는 혹평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는 사건이며, 이 때문에 삼국지를 논할 때 촉빠가 조조를 까고 위빠가 유비를 깔 때, 오빠는 손권을 깐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8. 비슷한 사례
- 조선의 중종 말~명종 초 상황: 세자(인종)+대윤 VS 경원대군(명종)+소윤[39]
양측이 정당한 후계자와 지지자 VS 정통성이 딸리는 경쟁자와 지지자 구도이며 지지세력도 전자가 명분아래 모였다면 후자는 그 집단 자체의 이득을 위해서라는 점이 닮았다. 왕실 여인이 개입한 것도 같으며[40] 재위 후반기에 결정권자가 후자에 더 힘을 실어준 것도 비슷하다.[41] 그 와중에 심하게 충돌하고 피도 흘렸고 조금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첫 승 자체는 전자가 했지만[42] 최종적으로 후자가 승리한 후 나라꼴이 엉망이 된 것도 닮았다.
다만 이궁의 변과는 달리 정작 양대 당사자끼리의 사이는 좋았고[43] 첫 선공은 전자에서 날렸으며[44] 후자 세력은 지지하는 후보를 교체하지 않았다.[45] 또 조선은 오나라처럼 나라 인재풀까지 박살나지는 않았다.
다만 이궁의 변과는 달리 정작 양대 당사자끼리의 사이는 좋았고[43] 첫 선공은 전자에서 날렸으며[44] 후자 세력은 지지하는 후보를 교체하지 않았다.[45] 또 조선은 오나라처럼 나라 인재풀까지 박살나지는 않았다.
9. 기타 창작물
[image]
삼국전투기에서도 다뤄졌고, '''"손권 이 쥐새끼야"''' 라며 장렬하게 까였다. 손권의 치적과 업적은 확실히 고평가하지만, 이 이궁의 변으로 이어지는 후반기의 실책은 절대로 쉴드쳐주지 않는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삼국전투기에서 작가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욕하면서 비난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첫 컷의 비스트(마블 코믹스)는 감택. 마지막과 그 바로 전 컷의 한량은 전기.
TV프로그램 천일야사에서도 이궁의 변이 다뤄지는데, 부제가 참 적절하다. "오나라의 비선실세는?".
삼국전투기 이외에는, 국내에 유명한 삼국지 관련 2차 창작물 중 이궁의 변을 제대로 다룬 창작물은 거의 없다. 해외의 경우도 너무 극후반이라 조조나 유비 등 초반부 인물에 초점을 맞추는 창작물에서는 다루지 않고, 연의에서 생략된 사건이라 후반부를 다루는 창작물도 이궁의 변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진삼국무쌍 시리즈의 경우, 스토리 플롯이 6편부터 촉의 멸망까지 확장되었음에도 사마의와 사마씨 가문에 초점을 맞춘 후반부 스토리 때문에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나마 사마의가 주인공인 화봉요원은 다룰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이궁의 변 시기가 사마의 말년에 일어난 일인데다 사마씨 가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건도 아니라서 비중있게 다뤄질지도 미지수이고 애초에 이 만화 연재속도가 너무 처참하여 언제 사마의 말기까지 갈지도 미지수이다.(...) 게다가 작가 인터뷰 언급 중 애당초 스토리 플롯을 오장원까지만 잡고 있다고 언급하며 사마의의 말년을 안 다룰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까지 확인사살.
[1] '남노(南魯)'는 태자 손화의 거처인 ''''남'''궁(南宮)'과 손패의 왕작인 ''''노'''왕(魯王)'에서 따온 것이다.[2] 참고글 http://neight_nesia.blog.me/220334803388[3] 이 글의 작성자는 손권의 노망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오히려 손권이 조장했다고 분석하였다.[4] 같은 아들끼리 평등하게 대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평범한 가정의 이야기일 뿐, 일정 규모 이상의 조직에서는 후계자인 아들과 그렇지 않은 아들의 관계를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나아가 현대도 아니고 고대 군주제 국가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황태자와 다른 황자들은 사적으로는 형제이지만 공적으로는 엄연히 군신관계라 할 수 있다. 이등체강 원칙이 군왕이 아니라 친왕으로 대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조직에서 후계자와 그렇지 않은 이를 동등하게 대우하는 건 후계자의 자리를 노리고 도전하라는 신호나 다름없으며, 손권의 행보는 실제로 이러했고 당연히 계승 문제는 개판이 된다. 가후가 괜히 원소와 유표의 사례를 들며 후계자로 정통성있는 장자인 조비를 민 것이 아니다.[5] 사실 조비의 경우도 조식의 존재 때문에 꽤 부작용이 심한 사례였다. 촉한의 경우 유선은 유비의 첩이었던 감부인 소생이고 이후 유비가 오의의 여동생을 정식 황후로 맞이했기 때문에 원래는 분쟁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았을 테지만, 나중에 감부인을 정식 황후로 승격시키고 유선을 위해 유비의 양자 유봉을 미리 숙청한데다 유비와 제갈량이 모든 권위를 유선에게 몰아줬기 때문에 촉한이 망할 때까지 왕족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유선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고 숙청당한 왕족도 거의 없었다. 이후 촉의 권력은 고명대신 제갈량에게 집중되었으나 제갈량은 왕권에 도전하려 들지 않고 국가 발전을 위해 크게 힘썼으며, 다른 신하들 또한 이에 충성했으며 최소한 반발하지는 않았다. 내부 사정이 이 정도로 굉장하게 좋았음에도 정작 그 후계자라는 인물의 역량이 부족해 다 말아먹긴 했지만 이건 별개의 문제...[6] 손권의 사위이기도 하다.[7] 장온의 일가는 이미 실각을 했기 때문에 빠졌던 거지, 실각하지 않았으면 이곳에 들어가 있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8] 진표는 역시 손등 생전에 이미 고인이었다. 마찬가지로 생존해 있었으면 이쪽이였을 확률이 농후하다.[9] 고담은 오의 사성이랑 동오사우 둘 다 속해있다.[10] 오경의 손자.[11] 그냥 뛰어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호부견자 수준이다. 보협은 위나라의 하후무랑 맞먹을 오나라 최악의 졸장이고, 보천은 훗날 손호 치세 때 자기의 조카들, 즉 보즐의 손자들을 진나라에 팔고 투항한 매국노다.[12] 곽거병의 흉노 토벌 때 잡혀온 흉노 번왕의 왕자로(선견지명 참조), 자신의 아들이 황제의 자식들과 지나치게 친하게 지내자 아예 자기 아들을 죽여서 우환이 될 소지를 막은 것으로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김일제를 언급하는 것은 '''자식 교육 똑바로 시키라'''는 소리를 완곡하게 돌려서 말하는 것이다.[13] 둘 사이 서신의 자세한 내용은 육손#s-2.8 참고.[14] 그리고 후에 주적은 강릉전투에서 제갈각의 동생 제갈융과의 사건으로 인해 제갈각과의 사이는 더 악화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손패파로 노선을 변경한 것 같지는 않다.[15] 전서 문서에서도 설명하는데, 요약하면 위나라 왕릉의 추격을 장휴와 고승이 막아내자 그 분위기를 타고 전서와 전단이 공격해 오히려 퇴각시키고 승리했다. 이에 적을 물리친 건 전서, 전단의 공이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을 만든 장휴, 고승의 공이 더 크다고 하여 더 높은 직위에 오른 것이다. 이게 타당한 건지 아니면 권위있는 호족 집안인 장휴, 고승에게 편파적인 거였는지는 각자 판단할 일.[16] 참고로 전서는 이궁의 변이 일어나기 전에 요절했다.[17] 거짓으로 남을 헐뜯는 말.[18] 지금의 베트남.[19] 손화와 장휴가 무슨 관계인지는 위의 '손화파의 연달은 패배'항목을 볼 것. 보면 알겠지만 별 일도 아니다.[20] 상소 내용은 주거 참고.[21] 원소는 아들들 중 자질이 뛰어난 막내 원상을 후계로 정하고 사전작업을 들어가려 했으나 원소 본인이 급사하여 후계구도를 굳히지 못하는 돌발변수 때문에 어그러졌고, 유표는 조조처럼 독자적인 무력기반을 갖고 호족들과 연대한 군웅이 아니라 채씨 일족의 협력으로 현지 호족들을 무력 기반으로 삼은 군웅이라 호족들을 쳐내고 후계구도를 정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참작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손권은 이미 칭제건원을 한 제국의 초대 황제였으며 모든 상황을 자초했다.[22] 이 와중에 9월 16일에는 여계가 늙어서 죽는다.[23] 손권의 차남이나 손등보다 먼저 죽었다.[24] 조조의 경우, 조비와 조식 사이에서 후계자를 고민하다 이 사례를 기억하라는 가후의 조언으로 조비를 후계자로 굳혔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조는 '''"아들을 낳으려면 손권 같은 아들을 낳아야 한다. 유표의 아들은 개돼지나 다름없다."'''는 말을 남겼다(...)[25] 그나마 원소나 유표도 '''능력있는 아들을 밀어준다'''는 확실한 기준을 삼기라도 했지 손권은 이도 저도 아니었다.[26] 배송지가 섬긴 유송의 태조 유의륭은 형 유의부가 황음무도하여 신하들에게 참살된 다음 즉위했고, 유의부의 아들 유의진도 황음하다는 평가를 받아 함께 살해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시대적 상황의 영향으로 배송지가 다른 사가들과는 달리 정통성보다는 유능함을 강조하는 평가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 있다. 물론 그놈의 유능함조차 손패가 손화보다 뭐가 더 나은지 모르겠지만 말이다.[27] 물론 이마저 손화에게 심각한 결격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28] 실제로 한참 후인 5세기 초 동진의 유우는 북벌을 통해 자기 입지를 넓혀나갔고, 나중에는 유송의 초대 황제가 된다. 다만 이 때는 유우의 북벌에 점차 한계가 생겨가던 시기로, 이대로 가다가는 쌓은 입지가 흔들릴까봐 선수친 면도 있다.[29] 일찌감치 위를 한참 몰아붙이던 촉한과 연계했다면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선택지는 손권 자신이 파토내버렸고 어쩔 수 없이 한참 후에나 다시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30] 엄밀히 말해, 전 태자 손등의 유지를 받든데다 생존한 아들들 중 최연장자라는 정통성을 갖추고 태자에 책봉된 손화와, 그저 손화의 동생일 뿐인 손패 중 누가 손권의 후계자가 되어야 할지는 자명하다. 만약 손화가 이궁의 변 이전에 요절했다면 손패에게도 정당한 계승권이 생겼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손패는 정당한 계승권이 없다. 즉 손화파 인사들은 어느 쪽에 붙을지 계산했다기보다는 당시 기준으로 지극히 상식적인 선택을 한 것에 가깝다.[31] 육손은 호족인 것에 더해, 손책과 육강의 악연 문제까지 겹쳐있다. 육강의 전사로 손가와 육가의 사이가 나빠지자 손권이 이를 무마하기 위해 손책의 딸 손씨를 육손에게 시집보낸 것이다.[32] 황제 즉위 이후 여일 같은 간신을 등용해 이미 국정을 망친 적이 있다는 것을 볼 때, 이미 암군의 싹이 트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 손권의 나이는 50대였다. 물론 충분한 잉여 생산물이 비축되고 의료기술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50대는 이영도 작가가 피를 마시는 새 작중에서 묘사한 것처럼 자신의 의중에 담고 있던 진짜 일을 추진할 수 있는 관록을 갖춘 연배로 묘사되기 마련이지만, 고대 중국 사회에서 50대는 자리보전하고 후계자나 제대로 짚으면 다행인 당장 내일도 장담하기 힘든 고령층이었다. 그러나 삼국의 한 축인 유비가 40대 후반에야 비상하기 시작해 환갑 가까운 나이까지 활약했고, 조조는 60대에 접어들면서 젊은 시절의 패기를 잃기는 하지만 나라를 망치는 수준은 아니었으며 50대 후반의 나이에 마초를 위시한 관서군벌의 무시무시한 기세를 죽을 고비를 넘겨가면서도 격파해냈다. 손권의 50대 이후 행적은 유비와 조조에 비해 시원찮은 게 사실이다. 적어도 유비도 조조도 60대에 후계문제에서는 손권만큼 실패하지는 않았다.[33] 육손만 해도 형주 공방전에 참여하고 이릉대전을 승리로 이끈 능력있는 인물이었다. 그나마 육항을 살려두지 않았다면 오나라의 멸망은 훨씬 앞당겨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34] 상술한 내용과 본인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궁의 변 당시에도 손패 측에 선 것 이외에 딱히 별다른 악행은 저지르지 않았고, 애시당초 제갈각이 정권을 안정적으로 잡을 수 있게 된 것도 손준의 도움이 컸다. 결국 그 제갈각을 숙청한 것도 손준이었지만, 그 당시 제갈각이 워낙 큰 실책을 저릴렀기에 명분적으로는 그렇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이때까지는.[35] 육윤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양축에게 혐의를 덮어씌운 것이 그런 일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상황상 말도 안 되는 손권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한 필요악이었다는 변명은 할 수 있겠지만.[36] 앞서 말했듯 손패는 기본적으로 태도가 영 좋지 않았다. 아무리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있다고 한들 정석대로라면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며 거듭 자신이 제위에 관심도 없다는걸 보여야 했다. 물론 사람이 다 그럴수는 없고 오히려 그런 총애에 기대어 '나도 한 번...'하는 심상으로 권력욕이 동하기 쉽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손패는 아버지의 총애만 믿은 채 너무 오만방자했다. 본인이 죽게 된 것도 본인 주변인물들 탓도 있지만 손패 역시도 손화를 해치려는데 가담했고 손권도 손패에 대한 정나미도 떨어진걸 보면 역시 본인 행실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손패가 제위를 계승했을 시 손휴 수준의 명군이 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37] 실제로 이게 손호의 의도였을 수도 있다.(...)[38] 적벽대전과 이릉대전은 타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결과였으나 이궁의 변은 손오 내부의 권력 암투라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 서주 대학살과 이릉대전은 그나마 살해당한 가족의 복수라는 동기라도 있었지만, 이궁의 변은 노망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그 동기를 이해하기 힘든, 아들들의 인생을 아버지가 자기 손으로 망친 만행이다.[39] 태자 손화와 태자파 VS 노왕 손패와 손패파 구도와 같다.[40] 오나라쪽은 공주인 손노반[41] 정순붕이 대소윤의 갈등을 아뢰자 중종은 윤임(세자의 외숙부이자 대윤 수장), 윤원형(경원대군의 외숙부이자 소윤 수장) 모두 처벌하면서도 윤임은 김안로와 짝짜꿍한 놈이라며 더 큰 벌을 줬다.[42] 이쪽은 손패 처형, 조선 쪽은 인종 즉위[43] 인종은 천성이 워낙 어질어서 경원대군은 그냥 어린애라서 서로 충돌할 여지도 없었다. 사실 또 그래서 서로 경쟁관계였다고 보기도 어렵다.[44] 이미 대윤에 가까운 김안로가 문정왕후 폐위 음모를 꾸민 바 있다.[45] 이는 문정왕후의 존재 때문으로 손패의 어머니는 정작 손패파에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경원대군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는 엄연히 소윤편이었다. 소윤의 수장인 윤원형 또한 경원대군의 외숙부였으니 소윤에겐 경원대군 외의 대안은 없던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