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건
宋建
? ~ 214년
1. 소개
후한 말의 군벌.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당한 뒤, 관중#s-4 지방이 혼란에 빠지자 부한현(枹罕縣)[1] 을 점거하고 '''하수(河水) 평한왕(平漢王)'''을 자칭했다.
고작 현 하나 빼앗아 왕위를 참칭하고 문무백관을 설치해 승상까지 두었다. 현은 규모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1만 호 전후였다. 한국으로 치자면[2] '작은 군을 하나 점령하고선 대통령을 자칭하고 국가행정을 설치하고 국무총리 이하 관료들을 두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부한현이 한무제 때 서강과 흉노의 침략을 자주 받는 변방 중의 변방이라 공손연과 비슷한 변방 맹주이다. 관중 지방은 당시 너무나 혼란스러워 이런 어이없는 인간이 또 수십 년이나 왕 노릇 잘 해먹으면서 별 일 없이 잘 살았다.
그러나 이렇게 얘기하면 요동 반도에선 나름 상당한 영향력을 자랑하던 공손연에게 실례다. 송건이 군림하던 부한현의 위치는 서평군과 천수군 사이에 위치한 시골깡촌이다. 지형 자체가 고지대고 부한현 4시 방향에서 11시 방향까지는 치련 산맥 줄기가 있어 천험의 요새였고, 게다가 12시~1시 방향은 한국의 충주호보다 큰 호수가 막고 있으니, 단지 중원과 멀리 떨어져서 변방 취급을 받는 요동과는 전혀 사정이 다른 것이다. 티베트 지역으로 넘어갈 목적이 아니면 이 부한현을 구태여 들를 일이 없는데, 자신들끼리 세력의 존망을 걸고 싸우던 후한 말기 군웅들이 뭣하러 이런 자그마한 산골 마을에 들려서 송건 따위가 왕놀이 하고 있는 걸 막겠느냔 말이다. 군사적으로도 사회 경제적으로도 아무런 이득이 없는 동네라서 다른 군웅들에게 방치되었던 것이고, 그렇게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20여 년을 통치(?)할 수 있었던 셈. 아마 인근의 이민족이 약탈하러 오는 거나 좀 막았을 듯 싶다. 과거 진시황 이후에도 살아남았던 위나라와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214년 10월[3] 에 조조가 관중 군벌들을 진압할 때 하후연을 파견했고 거기다 장합과 장기라는 훌륭한 장수들까지 가세한 호화찬란한 진용으로 공격했다. 놀랍게도 송건은 그들을 상대로 무려 한 달이나 버텨냈다. 포한현이 워낙 지세가 험준하여 지키기 좋은 지역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나름대로의 능력은 있었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조조군은 결국 한 달만에 포한현을 도륙해 전멸시키고 송건과 그 부하들은 참수되었다.
교감기에 따르면 급고각본과 후한서집해본에는 주건(朱建), 후한서집해에서 전대흔의 설에 인용한 바에 따르면 동탁전에서는 종건(宗建)으로 적었다고 한다.
부자에 따르면 송건은 소를 잡아 빌면서 굿했고 끝에 가서는 스스로를 불살라 죽었다고 한다.
2. 창작물에서
토탈 워: 삼국의 DLC 캠페인 182년 천명에서 마이너 세력인 변장 세력의 초기 장수로 등장하며, 149년생으로 설정되어 182년 시점의 나이는 33세. 유형은 감시자, 칭호는 평한왕, 특성은 집요함, 반항적, 경쟁적임, 능력치는 최대 200을 기준으로 전문성 88, 결의 52, 책략 50, 본능 57, 권위 40.
삼국지: 한말패업에서 등장해 군사 66, 무용 77, 지모 40, 정무 47, 인사 52, 외교 44의 능력치로 164년생으로 나온다.
3. 기타
수십 년이나 왕을 해먹은 것 때문인지 아틀라스 중국사라는 책에 있는 삼국 시대의 지도에서 세력 중의 하나로 표시됐다. 그러나 연의에선 아예 짤리는 바람에 정사까지 파는 웬만한 삼덕이 아닌 이상, 아니 웬만한 삼덕도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일각에서는 송건이 칭제한 것과 승상을 둔 것은 맞지만 그 규모가 지나치게 협소해서 문무백관이 승상 1인, 장군 2인을 포함 총 7인에 불과하고 병력도 고작 40인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단, 헌제기 주석인 무제기에선 한수와 연합하려 했음에 조조를 위협한 역적으로 올라와 그 세가 위와같이 작지는 않았을걸로 보여진다.
여담으로 금성군은 그 이름 탓에, 환빠와 대륙빠들이 경주시와 같게 본다.단, 헌제기 주석인 무제기에선 한수와 연합하려 했음에 조조를 위협한 역적으로 올라와 그 세가 위와같이 작지는 않았을걸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