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삼국지)

 

1. 후한 말의 군벌인 원소의 수하 장수
1.1. 미디어 믹스
2.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2.1. 미디어 믹스
3. 후한 말의 관원
3.1. 미디어 믹스
4. 후한 말의 관료이자 의원


1. 후한 말의 군벌인 원소의 수하 장수


蔣奇
생몰년도 미상
200년 10월에 관도의 싸움에서 원소가 도독인 순우경을 시켜 식량 수비를 위해 그를 오소에 배치할 때, 저수가 장기에게 별동대를 이끌게 하여 순우경과 연동해 조조의 기습에 대비하라는 진언을 올렸지만 원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관도에서의 패전 이후 맹대와 함께 사이가 나쁜 동료인 심배를 참언해 실각시키려고 했으나 봉기의 변호로 기각 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안량, 문추 사후 장합, 고람, 순우경, 한맹 등과 나란히 원소군의 용맹한 장수들로 소개된다. 관도의 싸움에서 조조가 친히 오소의 양식 저장소를 야습할 때 장기의 군대라고 속였고, 돌아오는 길에 정작 장기는 조조의 용장 장료의 손에 죽었으며, 조조군에서 장기군으로 속여 거짓 사신을 보내 장기가 오소의 적을 물리쳤다고 원소를 속여 그의 구원병 보낼 길을 막았다.

1.1. 미디어 믹스


연의에서는 순우경, 장합, 고람 등과 동렬의 대장으로 꼽히나 한맹과 마찬가지로 활약이 전무한 탓에,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그냥 잡장 수준인 초촉, 장남, 마연, 여광, 여상만도 못한 인지도. 오직 삼국지 3에만 등장한다.[1] 그나마 위안거리는 삼국지3 내에서의 능력치는 무력이 70대로 무력 60대인 저들보단 높다는 것.[2]
삼국전투기에서는 곰돌이 푸로 나온다. 군량이 위치한 오소가 스페인어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관도 전투 (10)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
관도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원소의 명령으로 오소 쪽에 급파됐지만 부장이 빨리 가자고 재촉함에도 여유를 부리며 설렁설렁 이동하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상황이 완전히 종료된 뒤에나 오소에 도착했다. 오소가 함락된 것도 모른 채 원소군의 지원군이라고 말했다가 하후돈에게 당하면서 비명을 지르는 것을 끝으로 더 등장하지 않는다.
84부작 삼국지에서는 오소에 원군으로 가나 갑자기 등장한 장료를 보고 놀라 별다른 대응도 하지 못하고 창에 찔려 사망한다.
최강무장전 삼국연의에서도 원소군을 자칭하는 장료의 거짓말에 속아서 철군하려다가 이내 본색을 드러낸 장료에게 2합 만에 썰린다.
화봉요원에서는 원방의 부곡으로 연진에서 배를 이끌고 있으면서 원방의 지시에 따라 원담, 원상 등에게 오소의 지휘권을 넘기면서 오소의 군량고가 불타면 그들에게 양초를 불태울 책임을 뒤집어 씌우게 하면서 황하를 건너려는 원소군을 못본 척 하면서 자신들에게 정치적인 뜻이 가장 안 맞는 자들을 늦게 배에 태웠다. 원방이 죽은 후 그 사실을 모른 채로 단전과 합류했다가 헤어지는 길에 방덕에게 죽는다.

2.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張旣
(? ~ 223)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덕용(德容). 사례(司隷) 풍익군(馮翊郡) 고릉현(高陵縣) 출신.
장기가 어린 아이였을 때, 그 군의 공조 유은#s-2(游殷)[3]이 그를 관찰하고는 특이하다고 평가하였다.
그의 나이 16세일 때, 군의 작은 관리가 되었다. 장기는 그의 가문이 명문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력으로는 승진할 길이 없음을 알고는, 상등품의 칼과 붓과 서판(書版)을 모아 놓았다가 상급 관리들 중에서 이러한 물건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주어 얼굴을 익혔다고 한다.
위략에 따르면 처음 장기가 군의 작은 관리로 있었을 때, 공조 서영(徐英)이 몸소 장기를 서른 번이나 채찍질한 적이 있었다. 서영은 풍익의 유명한 성씨출신으로 강하고 차가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장기보다 낫고 향리에서의 명성과 품행 또한 앞선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이전에 장기에게 치욕을 주어서 장기가 고귀한 성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장기에게 청원할 수는 없었다. 장기는 옛날 일을 돌아보지 않고 서영과 친하려고 했다. 일찍이 술기운을 빌려 서영과 친하려고 했지만, 서영은 받지 않고 다시는 기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장기가 옛날의 원망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며, 서영 역시 굴복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 노력 덕분인지 후에 중요한 직무를 역임하였고, 효렴으로 천거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조조가 사공으로 있을 때 그를 불렀지만 가지 않았으며, 무재로 천거되어 신풍(新豊)의 현령으로 임명되었다. 당시의 치적은 삼보(三輔 ; 장안 주변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제일이었다고 한다.
건안 7년(202년) 원소가 죽은 후, 원상은 여양에서 조조의 공격에 조조에게 저항하며, 한편 하동태수 곽원과 병주자사 고간과 남흉노의 선우인 호주천에게 평양(平陽)을 공격하게 하였으며, 관중(關中) 지방의 군벌들과 연합하려 하였다. 이에 장기는 사례교위 종요의 명으로 관중의 유력자인 마등을 설득하였고, 마등은 자신의 아들인 마초방덕에게 1만 군사를 주고 조조를 돕게 하였다. 종요는 파견된 원군으로 곽원을 죽였고, 호주천을 조조군에 항복시켰다.
이후 조조에게 항복한 고간이 병주를 들어 반기를 들고 하내 사람 장성의 무리 1만여 명은 귀의할 곳이 없어서 효산과 면수 사이에서 소란을 피웠는데, 하동의 위고와 홍농의 장염이 각기 병사를 일으켜 그들에게 호응했다. 조조는 장기를 의랑(議郞)으로 임명하여 종요와 함께 공격하게 하였다. 장기는 마등을 다시 합류시켰고, 위고를 무찌른 뒤 고간을 형주로 달아나게 하였다. 이러한 공적을 세워, 장기는 무시정후에 봉해졌다.
조조는 형주를 징벌하려고 했지만, 마등 등이 관중에서 할거하고 있었으므로 또 장기를 보내 마등 등을 설득하여 부하들을 해산시키고 귀향하도록 요구했다. 마등은 이것을 허락하였지만 여전히 이전과 같은 행동을 하였으므로 장기는 사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였다. 그래서 여러 현에 문서를 보내 식량 등을 준비하도록 하고, 이천 석(二千石, 군수)에게 교외까지 나가 맞이하도록 했다. 마등은 부득이 동쪽으로 출발했다. 조조는 상주하여 마등을 위위로 임명하고, 아들 마초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그 무리를 인솔하도록 했다.
건안 16년(211년), 마초와 관중 지방의 군벌들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장기는 조조의 명령을 받아 화음에서 마초를 무찌르고, 관우[4]를 평정하여 경조윤(京兆尹)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달아난 유민들을 불러 모아 진정시켜 현과 읍을 추스렸다.
이후 위나라가 세워지자 상서, 옹주자사를 역임했다가 장로 정벌에 참여했는데, 따로 산관(散關)으로부터 들어가 모반한 저족 사람을 토벌하고, 그들의 보리를 거두어 군량미로 제공했다. 장로가 투항하자, 장기는 조조에게 한중의 백성 수만호를 취하여 장안과 삼보를 든든히 하도록 권했다. 그 후 조홍과 하변에서 오란을 격파하였고, 또 하후연과 송건을 토벌하고[5], 따로 임조, 적도를 공격하여 그들을 평정했다.
이때, 조조는 백성들을 이주시켜 황하 북쪽을 충실히 하려, 농서, 천수, 남안이 불안해 했다. 장기는 세 군 사람들로 장수나 관리가 된 자에게 휴가를 주어 주거지를 수리하고, 물방아를 만들게 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조조는 한중의 수비를 철수하였는데, 유비가 북쪽으로 무도(武都)의 저족을 취하여 관중을 압박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어 장기에게 물었다.

저족에게 북쪽으로 나가 곡물이 있는 곳으로 가서 적을 피하도록 하십시오. 먼저 도달한 자에게 총애와 상을 후하게 주시면, 먼저 달려간 자는 이로움을 알 것이고, 뒤에 달려간 자는 반드시 그들을 흠모할 것입니다.

조조는 그의 계책에 따라, 친히 한중으로 가서 군사들을 철수시키고, 장기를 무도로 가게하고 저족 5만여 명의 부락을 이주시켜 부풍과 천수의 경계지역에서 살도록 했다. 이때, 무위의 안준, 장액의 화란, 주천의 황화, 서평의 국연 등이 일제히 군을 들어 모반하여 스스로 장군이라고 부르며 서로 공격했다. 안준은 사자를 파견하여 모친과 아들을 조조에게 인질로 보내고 원조를 청했다.

안준 등은 밖으로는 나라의 권위를 빌리고, 안으로는 오만하고 배반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 계책이 확정되고 세력이 충족되면 즉시 모반할 뿐입니다. 지금 바야흐로 촉나라를 평정하였으므로 잠시 쌍방을 존재하게 하여 싸우게 하는 것은 전국시대의 변장자(卞莊子)가 호랑이를 찔러 죽였을 때 앉아서 그 시신을 거두는 것과 같습니다.

1년여 후에 화란은 안준을 죽였고, 무위의 왕비가 또 화란을 죽였다. 이때 양주를 설치하지 않았고, 삼보로부터 서역에 이르기까지 모두 옹주에 예속시켰다.
조비가 왕위에 올라 처음으로 양주를 설치하였을 때, 안정태수 추기를 자사로 임명했다. 장액의 장진은 군수를 체포하고 병사를 일으켜 추기에 거부했다. 황화와 국연은 각기 이전 태수를 좇아서 병사를 일으켜 그에 호응했다. 장기는 호강교위 소칙의 세력을 키우게 하기 위해 병사들을 나아가게 하였고, 때문에 소칙은 공을 세우게 되었다. 장기는 도향후(都鄕侯)로 승진되어 책봉됐다. 양주의 노수호, 이건기첩(伊健妓妾), 치원다(治元多) 등이 모반하자 하서는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조비는 장기가 아니면 양주를 안정시킬 수 없다고 하여 추기를 소환하여, 장기와 교체시켰다.
조비는 호군 하후유와 장군 비요 등을 파견하여 그의 후속부대가 되도록 했다. 장기는 금성까지 와서 황화를 건너려고 했는데, 장수들이 병사는 적고 길은 험하므로 깊숙이 들어갈 수 없다고 했으나 장기는 길이 비록 험하더라도 정형처럼 좁지는 않을 것이고, 적은 전한 초기의 이좌거의 계략도 없으니 위급한 무위를 구원하기 위해선 빨리 가야한다고 했다.
황하를 건너자 적 70여 기병은 전읍 입구에서 위나라 군사에 저항하였는데, 장기는 전음을 지나 선전하였고, 몰래 차차로부터 나와 무위에 도착했다. 오랑캐는 그가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현미(顯美)로 돌아왔다. 장기가 무위를 점령한 후, 비요는 도착했지만 하후유 등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장기는 장수와 병사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상을 내리고, 진군하여 공격하려고 했다. 장수들이 모두 사병들은 피곤하고 적군은 기세가 왕성하므로 그들과 싸워 승리하기는 어렵다고 했으나 장기는 저들이 아군이 집결한것을 보고 산중으로 도망하 추격하면 궁지에 몰리거나 굶주리게 될 것이라 했다.
그래서 현미까지 진군하였다. 오랑캐 기병 수천 명은 거센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진영을 불태우려고 하였으므로,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장기는 밤에 정예 병사 삼천 명을 매복시켜 복병으로 삼고, 참군 성공영에게 천여 명의 기병을 인솔하여 도전하도록 하고 퇴각하는 것처럼 하도록 명령했다.
오랑캐는 과연 다투어 기병을 추격하였고, 이때 복병을 보내 그들의 뒤를 끊도록 하여 앞뒤에서 일제히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이겼다. 죽거나 포로가 된 오랑캐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조비는 매우 기뻐하며 장기를 승진시켜 서향후(西鄕侯)로 봉해지고, 식읍 2백 호를 받아 이전 것과 합쳐 4백 호가 되었다.
주천의 소형이 반란하고 강족의 호족 인대 및 정령의 이민족 만여 기병과 함께 국경지대의 현을 공격했다. 장기는 하후유와 그들을 격파하고, 소형과 인대 등은 모두 투항했다. 그래서 장기는 상소를 올려 하후유와 함께 좌성(左成)을 수리하고 요새를 구축하고, 봉화대와 군량물자를 쌓아둘 곳을 설치하여 오랑캐의 침입에 방비할 것을 청했다. 서강족(西羌族)은 두려워하며 2만여 명의 백성들을 인솔하여 투항했다. 그 후 서평의 국광 등이 그 군수를 살해했으므로, 장수들은 그를 공격하려고 했는데, 장기는 군사로 그들에 대응한다면,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피차 서로 돕도록 할 것이니 그들에게 높은 상금을 걸어 모집하고, 포로나 노획한 물건은 모두 그들에게 보내 밖으로는 그들의 세력을 상하게 하고, 안으로는 그들의 관계를 끊어놓으면, 반드시 싸우지 않고 평정할 수 있다 했다.
그래서 격문을 하달하여 각 북쪽 이민족 부락을 설득했고, 국광 등과 연루된 사람을 사면하고, 적의 장수를 죽여 머리를 보내는 자에게는 반드시 영토와 상을 주도록 했다. 그래서 국광 부하들은 국광의 머리를 베어 보냈다. 그 나머지는 모두 과거처럼 안정되었다.
장기는 옹양주를 10여 년간 통치했는데, 그의 정치와 은혜는 높이 평가받았다. 그가 예의로써 초빙한 부풍의 방연, 천수의 양부 안정의 호준, 주천의 방육, 돈황의 장공, 주생열등은 모두 명성과 지위가 있었다.
황초 4년(223)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인 장집의 딸은 조방의 황후였는데 따라서 장집은 조방의 장인이다.

2.1.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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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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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지력과 정치력이 모두 높고 통솔력도 문관치곤 나쁘지 않은 편이라 적절히 사용하기 좋다. 특이하게도 초대판인 삼국지 1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그 뒤로 쭉 출연이 없다가 삼국지 7에서 오랫만에 복귀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6/무력 31/지력 77/정치력 91의 정치력 강자. 제사, 조영, 배반, 고무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7/무력 35/지력 79/정치력 86/매력 87에 특기는 8개.(농업, 상업, 보수, 치안, 일제, 진정, 반목, 지리) 전장에서도 쓸 만은 하지만 농업, 상업 특기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정쪽의 가치가 더 크다. 후방에 적절한 부하들 딸려서 태수로 임명하면 정치가 높기 때문에 보급이 든든해진다.
삼국지 11에서는 통솔력 74/무력 35/지력 75/정치력 88/매력 81로, 정치력과 무력을 제외하고 하향되었으나 준수한 능력치를 자랑한다. 그렇지만 특기가 잉여인 친강으로 쓰임새가 안타까운 무장 중 하나. PK라면 내정용 특기(능리, 번식, 축성 등)로 최대한 빠르게 갈아타자.
삼국지 12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4/무력 35/지력 76/정치력 88로, 훌륭한 정치가 스탯. 특기로 상재/경작을 모두 가지고 있어서 내정에 매우 쓸 만하다. 전법은 공격약화로 손유의 대타격 등과 더불어 컴퓨터가 자주 좋아하는 전법 중 하나라 일러스트를 자주 본다. 전장에서 써도 나쁠 건 없다. 친애무장으로, 원상 토벌전에서 곽원을 함께 물리친 종요와 마초를 함께 물리친 하후연이 등록되어 있다. 일러스트는 마등을 설득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그대로이고 전법은 철벽지휘로 좋은 전법을 부여받았으나, 전투 특기가 단 하나도 없다(...). 부장을 붙여서 활용하던가, 뒤에서 전법만 써 준다던가 하는 식으로 사용해야 한다. 다행히 내정에서는 상업 3, 농업 5, 문화 2, 설파 6, 교섭 7로 문관으로써 있을 건 다 있는 수준. 전수특기는 교섭이다. 중신특성으로 화기생재를 가지고 있으나, 지력이 높지 않으므로 차라리 특성이 없더라도 내정중신으로 쓰는 것도 좋다. 정치력이 2만 올라가면 90이라서 임무장이 2장이 되므로 가치가 있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74, 무력 35, 지력 75, 정치 88, 매력 85로 전작에 비해 지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조달, 교화, 개수, 친강, 주의는 할거, 정책은 시설개발 Lv 4, 진형은 장사, 정란, 충차, 전법은 견제, 업화, 정란, 충차, 친애무장은 미축, 손건, 유비, 전예, 진밀, 혐오무장은 없다.
삼국전투기에는 최유기저팔계로 등장. 상관인 종요가 현장 삼장으로 등장했기 때문인 듯. 여담으로, 사오정은 원소군의 곽원.[6] 평양 전투 (2)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는 것으로 처음 등장했다.
평양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종요의 부하로 등장하며, 종요와 같이 평양에 도착해서 분수의 지형을 확인하기도 했다. 분수가 다른 지역보다 훨씬 차가운 이유로 어디선가 차가운 지하수가 합류하는 것 같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이후 원상군의 곽원에 이어 흉노까지 침입해 오면서 종요의 작전에 차질이 생기게 되자 종요의 명으로 마등에게 지원을 요청하러 갔다. 마등은 진작에 심배와 맹약을 맺었었기 때문에 지원을 하기 주저하지만, 장기가 원소 쪽은 끝물에 막장을 달리고 있다고 마등을 설득하여 마등의 지원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신야2 전투에서는 종요의 명을 받아 또 마등에게 찾아가서 마등을 구워삶아 마등이 자발적으로 업으로 이주하게 만들었다.
화봉요원에서는 마등을 찾아가 일부러 조조에게 적대하도록 설득하러 갔는데, 가족이 낙양에 있는 것으로 인해 사마의가 보낸 자로 의심을 받는다. 이는 사마의가 상황에 따른 행동을 보이는 곽원의 계획을 분쇄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었다.

3. 후한 말의 관원


張岐
생몰년도 미상
감릉 사람으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낙랑태수를 지낸 적이 있으며, 원소, 한복이 시켜서 의논한 내용을 지니고 유우에게 존호에 오르도록 권했다. 그러나 유우가 엄중한 목소리로 천하가 어지러운 때에 목숨을 다해 나라의 수치를 제거하지도 못했으면서 감히 역모를 꾸미고 충신을 더럽히려 한다는 꾸짖음만 들었다.
원소, 한복이 시켜서 유우에게 사신으로 보냈다는 내용만 언급되었기에 누구 휘하인지 명확하지 않다.

3.1. 미디어 믹스


삼국지 천도의 주인에서는 하간상으로 나오고 유성이 반동탁연합을 상대해 손수에서 유총을 격파했는데, 기주에서 반동탁연합에 호응해 황보숭, 한복, 왕광, 왕예 등과 함께 거병한 것으로 언급된다.

4. 후한 말의 관료이자 의원


《상한론》의 저자이자, 화타, 동봉과 함께 건안삼신의(建安三神醫)로 꼽히는 장중경(張仲景)의 본명.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1] 저 잡장들은 영걸전이나 후속작에도 꾸준히 등장.[2] 무력만 놓고 보면 무려 순우경, 고람, 악진, 이전 등과 같은 급이다.[3] 여담으로 이 인물은 후에 사이가 나빴던 사례교위 호진에게 무고한 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당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호진도 한 달 후에 병사.[4] 인명이 아닌 지명.[5] 장기전에는 이렇게 되어 있는데 송건 토벌과 하변 전투의 선후관계가 뒤집혀 있다.[6] 종요의 외조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