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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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유럽과 남유럽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슬로베니아의 역사. 오늘날의 슬로베니아인들은 해당 지역에 정착한 슬라브인들과 지중해 주민들 사이의 후손으로, 이탈리아 북부 및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슬라브인 정체성을 민족주의 차원에서 재해석하여 고유의 민족 정체성을 지켜왔다.
2. 고대
고대에는 일리리아의 일원으로 일리리아인 및 켈트족이 거주하였고, 고대 로마의 확장 이후 서기 원년 전후부터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당시 슬로베니아는 판노니아 속주와 노리쿰 속주에 속해 있었다. 오늘날의 류블랴나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아에모나라는 도시가 세워졌다. 서기 4세기 훈족의 침입으로 게르만족들이 대거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고 로마 제국은 이 지역을 포기하고 철군하였으며 이 와중에 대부분의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이후 현지인들은 게르만족의 침략을 피해 고산 지대로 대피하여 양을 치고 살았다. 5세기에는 동고트족의 영토가 되었으며 롬바르드족과 동로마 제국. 동고트 왕국 사이에 완충지가 되었다.
3. 중세
서기 6세기 후반 아바르(Avars)라는 유목민족의 공격에 시달리던 슬라브족들은 서쪽으로 떠밀려 나갔고, 6세기 이후 남슬라브족이 이 곳에 이주해 왔다. 현 슬로베니아 지역은 가장 서쪽에 위치한 알프스 슬라브족의 영토가 되었고, 이탈리아 베네토 지방에 근접했기 때문에 빠르게 라틴 문명에 동화되었다. 로마 가톨릭을 가장 먼저 수용한 슬라브족 중 하나로 추정된다.
초창기의 알프스 슬라브족은 아바르 칸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서기 623년 사모 왕을 중심으로 뭉친 알프스 슬라브족들이 잠시 독립을 쟁취하는 듯 하였으나 사모 왕 사후 슬로베니아의 알프스 슬라브족들은 다시 아바르 칸국의 지배를 받았다. 대신 오스트리아와 티롤 일대의 알프스 슬라브족은 카란타니아(Carantania) 공국을 이루며 독립하였다. 다른 일파인 카르니올라(Carniola)족은 비슷한 시기에 프랑크 왕국에 복속되었다.
서기 8세기 바이에른 공국과 프랑크 왕국의 영향으로 알프스 슬라브족들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류데비트(Ljudevit Posavski)의 반란으로 카르니올라족은 프랑크 왕국의 탄압을 받게 된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었고, 카린타니아족과 카르니올라족은 바이에른 부족 공국(Stem duchy)의 구성국이 된다. 프랑크 왕국 분열 후 동프랑크 왕국과 독일 왕국을 거치며 신성 로마 제국이 들어서게 된다.
바이에른 공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2세는 976년 바이에른 공국의 남부 지방을 분할하여 케른텐 공국,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을 독립시켰다. 이 중 케른텐 공국의 남쪽 지역이 오늘날의 슬로베니아에 해당하며, 케른텐 공국의 북쪽과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이 오늘날의 오스트리아를 이룬다.
1040년 신성 로마 제국은 케른텐 공국에서 슬라브인들이 사는 남쪽 지역을 따로 분리하여 변경백국을 신설했고, 1180년 신성 로마 제국은 케른텐 공국의 동쪽을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으로 분리했다. '''크라인 공국 전역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남부 지방이 오늘날 슬로베니아에 해당'''한다.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은 독립한지 얼마 안된 1192년 오스트리아 공국의 바벤베르크 가문이 차지하면서 오스트리아에 귀속되었다. 바벤베르크 가문의 대가 끊긴 후 오스트리아를 통치하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이 1335년 케른텐 공국과 크라인 공국을 합병하면서 슬로베니아 전역이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합스부르크의 통치는 1918년까지 이어졌다.
슬로베니아의 영토 위에 있던 두 개의 공국은 동시에 오스트리아 영토를 구성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오랜동안 슬로베니아라는 영역 개념도 제대로 없이 모두 아울러 오스트리아라고 불려왔다. 이처럼 슬로베니아는 행정적, 정치적으로 오스트리아에 거의 완전히 귀속된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슬로베니아의 상황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다른 구성원들인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이 폭넓은 자치를 누렸던 것과는 상황이 달랐다. 슬로베니아인이 문헌에 최초로 언급된 시기도 16세기였다.
4. 근세
15세기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3세기에 걸쳐 합스부르크 제국와 오스만 제국의 기나긴 공방전이 지속되었다. 16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동부를 차지하며 오스트리아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오자 오스만 제국의 잔혹한 통치를 피해 발칸 반도에 살던 남슬라브인들이 대거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이탈리아 등지로 이동했는데, 이때 크로아티아 이남에 살던 남슬라브인들이 슬로베니아 지역으로 대거 유입되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끝나고 베네치아 공화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이 슬로베니아 지역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으며, 잦은 전란으로 인한 혼란기 와중에 중과세에 시달린 슬로베니아인 농노들도 여러 차례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16세기에는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슬로베니아어로 된 서적이 최초로 출간되었다. 16세기 후반에는 성경 전체가 슬로베니아어로 번역되었으며 이 외에도 여러 종교 책자들이 슬로베니아어로 발간되었다. 슬로베니아 내 루터교회는 17세기 이후 축출당하면서 오늘날 슬로베니아는 가톨릭 국가로 남았지만, 종교개혁 당시 이루어진 슬로베니아어 번역 및 출간 사업은 이후 슬로베니아 민족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외에도 17세기 후반에는 이웃 이탈리아 베네토 지방에서 많은 음악인들과 건축가들이 슬로베니아 일대에 정착하여, 슬로베니아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중세 문단에서 언급된 공국들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18년까지 폐지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현재에도 저 네 공국의 영토 구분은 오스트리아의 행정구역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과거엔 슬로베니아도 사용했으나, 현재는 행정구역 단위를 폐지했다.
이전에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역사를 공유해왔다고 서술되었는데, 크로아티아의 역사는 슬로베니아보단 주로 헝가리와 연관되어 있다. 합스부르크 시대 이전 시대에는 크로아티아 왕을 헝가리 왕이 겸직해 왔고, 1526년 크로아티아가 서부 헝가리, 보헤미아와 함께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하게 된 이후에도 헝가리의 크로아티아 종주권은 이어졌다. 1867년 대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성립되었을 때, 헝가리가 통치권을 행사했던 유일한 외부 영토가 크로아티아였다. 크로아티아를 제외한 보헤미아, 모라비아, 슬로베니아 등은 모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5. 근대
1805년부터 1813년 사이에 기간 동안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유럽을 정복하면서 이 지역도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새로 류블랴나를 수도로 하는 일리리아 주가 세워졌다. 17세기 부흥하던 슬로베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여기에 열광하였으며 나폴레옹 제국이 붕괴하기까지의 8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슬로베니아 민족주의에 많은 진전이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 제국에 정복된 이후에도 슬로베니아에서는 슬로베니아어에 대한 민족주의적 접근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이탈리아와의 교류로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근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던 크라인 공국의 인구는 절대다수가 슬로베니아어를 사용하는 슬로베니아인이었고,[1] 크라인 공국 지배 역사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 자치를 넘은 독립 열망이 강할 수 밖에 없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슬로베니아인들은 발칸 반도의 범슬라브주의의 물결을 타고 유고슬라비아 연합 왕국이 출범할 때 합류하였다.
6. 현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오스트리아에서 분리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탄생하자 그 부속 국가가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멸망한 뒤엔 이탈리아와 헝가리, 나치 독일에 병합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5년 11월 크로아티아 외 몇몇 나라들과 함께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가맹했으며, 구성국이 되었다. 1980년 티토가 죽은 뒤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강화되자 이에 반발하여, 1989년 동유럽의 민주화에 따라 슬로베니아에서도 1990년 4월 자유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공산당이 패배하고, 그해 12월 독립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88.5%가 독립을 지지함으로써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에 세르비아가 주축이 된 유고 연방 정부가 개입하여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발발하였으나, 다행히도 슬로베니아 영토 내에는 세르비아인이 거의 없어 개입 명분이 적었기 때문에 구 유고연방 국가 중에서는 가장 피해가 적었다. 이 전쟁은 독립선언 직후인 6월 27부터 7월 7일까지 10일밖에 치르지 않아 ‘10일 전쟁’(Ten-Day War)라고 한다. 슬로베니아의 군사력이 월등히 높기보다 유고 연방군 내부에 혼선이 빚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전쟁 당시 유고슬라비아군의 참모총장이던 블라고예 아드지치 장군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독립을 저지하자고 주장했지만, 당시 국방장관이던 벨리코 카디예비치가 무력 사용을 반대하였다.[2] 아무튼 유고군대는 슬로베니아를 침공해서 소규모 전투를 벌였으나 곧 물러났다. 7월 7일 브라유니 협정으로 전쟁은 끝났고, 결국 유고 연방은 독립을 승인하여 슬로베니아는 독립하였다.
독립 이전에도 슬로베니아는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와 인접해있다는 점을 톡톡히 살려서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잘사는 구성국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는데 1990년 당시 1인당 GDP는 9107달러대로 이탈리아 1인당 국민소득의 절반에도 못미치기는 했지만[3] 그럼에도 포르투갈의 1인당 국민소득 7800달러보다는 높았다.
또한 1990년대 초중반에 경기침체의 영향을 진하게 받으면서 1인당 국민소득이 잠시 6000달러대로 떨어지기는 했지만 이 수치는 전쟁터가 되었던 타 연방국에 비해서는 크게 양호한 수준이었고 또한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참화를 전혀 입지 않았기 때문에 1990년대 중후반에는 경제가 회복되어서 대한민국과 비슷한 수준의 1인당 GDP수준을 지니게 되었다. 슬로베니아는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2000년대 이후로 빠르게 서유럽 경제에 편입되었다.
2004년 옛 유고 연방 국가 중 가장 먼저 유럽연합에 가입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공산주의 국가였던 국가들 중 1인당 GDP가 2만 4천달러 수준으로 가장 높다. 최근 크로아티아와 사소한 영토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별다른 대외 마찰 없이 안정되어 있는 평화로운 나라다.
2020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경제 장관을 대상으로 불신임 투표를 진행했으나 부결됐다. 관련 기사 또, 총리 불신임 안건을 부결되기도 했다.#
야네스 얀사 총리 된 이후에 권위주의로 가던 중에 자국에 비판적인 언론사에 대한 재정지원을 중단하자 슬로베니아 언론계에서 비판했다.#
2021년 2월 15일에 슬로베니아 의회가 보수 성향의 현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부결했다.#
[1] 1846년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크라인 공국 인구 중 428,000여 명은 슬로베니아인이었고 38,000여 명이 독일인이었으며, 이후 1910년에는 격차가 더 벌어져 슬로베니아인은 52만여 명인 반면 독일인 인구는 28,000여 명으로 감소하였다.[2] 그러나 정작 카디예비치는 옆나라이자 다른 유고 연방의 구성국인 크로아티아의 전쟁에선 민간인 학살 등 전쟁범죄를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3] 사실 이때는 이탈리아 경제가 세계 5위를 차지할만큼 전성기였던 시절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