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게미츠 마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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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이자 외교가로 활동했던 '''A급 전범.''''''"지옥이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 사이판 함락 소식을 들은 후
2. 생애
오이타현에서 출생했다. 오이타현 오노군 미에마치[1] 에서 오노 군수를 지내는 아버지 나오마사(直愿)와 어머니 마츠코(松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머니의 친정(시게미츠가 본가)에 아이가 없어 입양된 시게미츠가 26대 당주가 되었다. 구제 기쓰키 중학교[2] , 구제 5 고등학교 독일 법학과를 거쳐서 1911년 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다. 이어서 외무부에서 관료 생활로 출세길에 올라 중국 공사가 되었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나자 그것이 일본군의 조작임을 알고도 후원했으며 송호정전협정 체결 과정에 참여했다. 이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에 휘말려서 오른쪽 다리를 부상당해서 나중에 절단하고 의족 신세를 지게 된다. 이후 미주리 호의 갑판에 오를 때도 다리를 전다.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시게미쓰 마모루는 외무대신이라는 고위직에 오르고, 1944년에는 대동아장관을 겸한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의 전권 대사로서 미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조인한다.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유일하게 영어로 재판에 대답 및 임했으며, A급 전범 중 유일하게 금고 7년형을 받았다. 물론 도고 시게노리라는 A급 전범도 20년의 유기 금고형을 받았지만 그는 감옥에서 사망했다.
1950년, 시게미쓰 마모루는 형기를 마치지 않고 가석방되었다. 이어서 개진당 총재와 일본 민주당 부총재 등을 거쳐 다시 외무대신이 되었다. 1957년, 시게미쓰 마모루는 가석방된지 7년만에 사망하였다.
3. 역사
3.1. USS 미주리 함 함상 항복 문서 조인식
1945년 9월 2일, 시게미쓰 마모루는 도쿄만에 정박한 미합중국 해군 전함 USS 미주리 함에서 이루어진 항복 문서 조인식에 일본대표로 참여하였다. 시게미쓰 마모루는 특유의 절뚝거리는 다리로 입장하여 항복 문서에 날인하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이장면은 오랫동안 기록 영화에서 반복되어 사용됐으며 가장 유명한 장면으로 기록되었다.
시게미쓰 마모루가 절뚝거리는 걸음을 걷게 된 이유는 바로 윤봉길 의사와 관련이 깊다. 1932년 4월 29일, 시게미쓰 마모루는 중국 상하이 천장절 축하연에 참여하였는데 그때 윤봉길 의사의 폭탄 공격을 받았다. 그 후 시게미쓰 마모루는 한쪽 다리를 잃어버렸고 의족을 착용해서 절뚝거리게 되었다. 위의 뉴스릴 영상 2분 10초경을 들어보면 '몇년 전 상하이에서 한국의 애국자(patriot)에 의해 부상을 입었으며, 현재 그의 한쪽 다리는 의족이다'라는 윤봉길 관련 언급이 나온다.
3.2. 쿠릴 열도: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장관과 대화
1956년 8월 18일,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은 런던에서 시게미츠 마모루 외무대신을 만났다. 그는 쿠릴 열도와 관련하여 시게미츠 마모루에게 아래와 같이 발언했다.
이런 미국의 경고에 일본 정부는 ‘2개 섬 우선 반환론’에서 ‘4개 섬 일괄반환론’으로 선회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러시아와 평화조약이 보류되었다.“만약 일본이 2개 섬(쿠릴 열도)으로 만족한다면, 미국도 오키나와(당시 미국의 신탁통치 중이었다)에 영원히 머물 것이다.”[4]
4. 범 롯데가와의 연관설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의 둘째 아내인 시게미츠 하쓰코가 이 시게미츠 마모루의 조카라는 설이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신격호는 시게미츠 마모루의 조카사위인 셈. 다만 이 설은 진위 여부가 불확실하다. 자세한 내용은 신격호 문서 참조.
5. 대중매체에서
1967년작 영화 <일본제국과 폭탄의사>에선 배우 최훈이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