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호

 




<color=#fff> '''초대 회장'''
'''신격호'''
'''辛格浩|Shin Kyuk-ho'''
'''일본명'''
시게미츠 다케오
重光 武雄(しげみつ たけお | Takeo Shigemitsu
'''출생'''
1921년 11월 3일[1]
경상남도 울산군 삼동면 둔기리
(現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2]
'''사망'''
2020년 1월 19일 (향년 98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2동 서울아산병원
'''국적'''
대한민국[3]
'''직업'''
기업인
'''경력'''
일본 롯데 대표이사 사장 (1948~2009)
롯데제과 대표이사 사장 (1967~1978)
롯데그룹 회장 (1978~2011)
호텔롯데 대표이사 회장 (1998~2016)
롯데쇼핑 대표이사 회장 (1998~2017)
일본 롯데홀딩스 회장 (2009~2017)
롯데그룹 총괄회장 (2011~2018)
일본 롯데홀딩스 명예회장 (2017~2020.1)
롯데그룹 명예회장 (2018~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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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상전
象殿
'''본관'''
영산 신씨
'''학력'''
울산공립농업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부설 와세다실업학교 고등부 (화공과 / 졸업)
'''종교'''
불교
'''부모'''
아버지 신진수, 어머니 김필순
'''형제'''
남동생 신철호 전 롯데화학 사장[31],신춘호 농심그룹 회장, 신준호 푸르밀(전 롯데우유) 회장, 신선호 산사스 회장, 여동생 신소하[32], 신정희
'''배우자'''
노순화
시게미쓰 하쓰코[사실혼]
서미경[첩][33]
'''자녀'''
장녀 신영자[34]
장남 신동주
차남 신동빈
차녀 신유미[35]

젊은 시절
2013년 5월 6일 고향 울산 둔기마을에서 사비로 여는 마을 잔치에서. 결국 이 마을 잔치가 '''생전 마지막 마을 잔치'''가 되었다.[4]
2016년 5월 16일 정신감정을 받기 위해 서울대학교병원 방문.[5]
1. 개요
2. 생애
2.1. 출생과 일본으로
2.2. 한국으로 오다
2.3. 롯데판 왕자의 난
2.4. 사망
3. 특징
4. A급 전범 가문과의 연관설
4.1. 연관설 긍정
4.2. 연관설 부정
6. 후원
7. 수상 경력
8. 관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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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일본기업인. 롯데그룹 창업주 겸 초대 회장이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출신으로, 본관은 영산 신씨. 호는 상전(象殿), 일본 이름은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6] 홀수 달에는 한국에서, 짝수 달에는 일본에 머물며 그룹을 경영해 ‘대한해협의 경영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1세대 재벌 총수 중에서는 정주영과 함께 손꼽히는 자수성가 재벌이기도 하다.[7]

2. 생애



2.1. 출생과 일본으로


1921년 경상남도 울산군 삼동면 둔기리(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서 빈농인 신진수(辛鎭洙)의 5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5년 언양공립보통학교 (현 언양초등학교)를 마치고[8] 가정형편상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일을 거들다가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울산농업보습학교에 진학했다. 1938년 졸업하면서 경남도립종축장의 기수보(技手補)로 취업했는데 주 업무는 양털깎기와 양돈 등이었고 박봉이었다.
부산 남포동광복동 일대에 머물며 사업가의 꿈을 키우던 신격호는 1941년 부인 노순화와 둘 사이에서 낳은 딸인 신영자를 비롯해 가족과 고향을 모두 뒤로 한 채 성공하겠다면서 부산항에서 일본으로 밀항을 한다. 도쿄에 도착해 방을 하나 빌려 자취하면서 우유 배달 일을 하며 와세다실업학교 고등부의 야간부 화공과에 적을 두고 학업을 이어갔다.
고학을 하며 어렵게 생활하던 중 1944년 기회가 찾아왔다. 성실함을 인정받아서 하나미츠(花光)라는 사람이 5만 엔이라는 거금을 빌려 주면서 공장을 해보라고 했다. 이 돈으로 전쟁통에 수요가 충분했던 커팅오일과 밥솥을 만드는 공장을 차려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공장이 폭격을 당해서 완파되는 바람에 완전히 쫄딱 망했다. 다시 하나미츠에게 빌려서 다시 커팅오일 공장을 운영하는데 1년 반 뒤에 다시 미군의 폭격으로 망했다.
1945년 광복이 되었고, 하나미츠도 살길을 찾으라 위로를 하며 거액의 투자금을 포기한다. 진짜 자살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에까지 몰렸으나, 이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고, 죽을 땐 죽더라도 자신에게 거금을 빌려준 하나미츠에게 빌린 돈이라도 갚자는 심정으로 일어섰다. 1946년엔 와세다실업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린 후 이번에는 세탁비누, 세숫비누, 포마드 크림 등 유지류를 만드는 공장을 차렸다. 다행히도 장사는 상당히 잘 되었다. 솥단지 하나로 시작해 1년 반 만에 하나미츠에게 빌린 돈을 모두 갚고 자신에게 돈을 빌려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집 한 채까지 선물했다.
이후 신격호는 약간 남은 밑천으로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를 차리고 유지류나 특수고무같은 물질들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당시에 시판되고 있는 들을 죄다 사다가 한 번씩 다 씹어보고 각각의 껌들에 한두 가지씩 존재하는 장점들을 모두 집약해서 껌을 개발했다. 그런데 신격호가 이렇게 개발한 껌이 인기가 엄청 좋아서 과자점 주인들이 서로 납품하겠다고 신격호의 연구소 앞에서 새벽부터 줄을 섰다. 이에 신격호는 투자자를 모집해서 본격적으로 회사를 차려서 껌을 팔기로 했는데, 1948년 현 롯데그룹의 모체인 (주)롯데를 세웠다. 창립 시기 일본 정부가 불량식품 단속을 위해 제정한 '식품위생법'은 오히려 롯데의 성장에 원동력이 되어 주었는데, 단속 당시 롯데껌이 타 업체보다 상품력이 앞서서 공신력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950년엔 신주쿠에 새 공장을 지었다.
당시 일본 껌 시장은 판껌 선두주자였던 '하리스'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신격호는 주력 시장이던 풍선껌 외에 판껌 시장에도 진입해 1953년엔 하리스를 따라잡았고, 1960년대까지 미스롯데 선발대회(1953년)나 TV광고 같은 홍보매체를 적극 활용해 일본 껌 시장점유율을 70%까지 올렸다. 이렇게 승부를 결정짓게 한 계기는 미국 리글리와 천연 치클을 50:50 비율로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 1962년에 스위스 초콜릿 장인 막스 브락크까지 스카우트한 후 초콜릿 개발에 착수해내 1964년 '가나초콜릿'을 선보였고, 1969년엔 캔디, 1972년 아이스크림까지 각각 손을 댔다. 더 나아가 롯데애드, 롯데부동산, 패밀리, 롯데리아 등 계열사 설립에도 힘을 기울였다.

2.2. 한국으로 오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국교가 정상화되었다. 당시 경제개발을 위해 해외자본 유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던 때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일본에서 제과 사업을 일으켜 성공한 신격호 회장에게 정부가 외자도입법에 따라 지원을 해줄테니 고국에 투자하라고 권유했다. 이에 신 회장은 모국으로 사업을 확장하기로 결심했고 1967년 4월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 '롯데제과'를 세웠다. 신격호 자신은 사장을 맡았고, 회장엔 유창순 전 경제부총리를 추대했다. 다음해 1968년에 두번째로 부산 거제동 출장소를 열어 사업을 확장했으며 롯데제과는 이미 일본에서 성공한 경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당시 해태, 크라운, 오리온이 장악하고 있던 한국 제과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1970년에는 껌과 과자 포장 은박지 생산을 위해 동방알미늄을 인수하여 '롯데알미늄㈜'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고만고만한 제과회사로 그칠뻔 했던 롯데의 명운이 바뀌게 된 것은 엉뚱한 사건 때문이었다. 1970년 서울시의 대대적인 부정식품 단속 결과 롯데제과 껌에서 쇳가루가 검출되었는데, 엉뚱하게도 이것이 롯데가 한국에서 급성장하여 재벌과 대기업의 반열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서울에는 변변한 고급호텔이 없어 국빈들이 방한했을 때 묵을 만한 장소조차 마땅치 않았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국격을 위해서라도 서울에 고급호텔이 하나 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 여건상 고급호텔 사업은 수지가 맞지 않다고 여겨 기업들이 발벗고 나서지 않고 있었다. 이때 롯데제과에서 쇳가루가 검출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구실로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던 신격호 회장을 이용하여 호텔을 짓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1970년 11월 13일 정부는 롯데제과에 3개월 제조 정지 명령을 내렸고 같은 날 박정희 대통령은 도쿄에 머물고 있던 신격호 회장을 청와대로 불러 서울에 호텔을 지어 호텔사업을 하면 롯데제과의 정지 처분을 해결해 주겠다고 제안 했던 것이다.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맡고 있었던 손정목 교수는 이날을 '롯데재벌 탄생이 결정된 날'로 기록하고 있다.
롯데호텔 건립은 1973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신 회장은 1973년 '호텔롯데'를 설립했고, 1974년 정부의 반도호텔 민영화 공개입찰에 롯데가 단독 입찰하여 낙찰받았다. 이후 김종필 국무총리와 양택식 서울시장이 나서서 롯데호텔 건설을 지원했다. 정부는 롯데호텔 부지 마련을 위해 정부 소유의 반도호텔과 국립중앙도서관을 신 회장에게 매각했다. 정부는 신 회장에게 국립중앙도서관을 헐값에 매각한 후 남산 어린이회관(현 서울특별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건물)으로 이전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신 회장에게 부동산취득세, 재산세, 소득세를 모두 면제해 주었다. 법적 근거는 외자도입법이었다. 신 회장이 일본에 거주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외자도입법에 근거하여 관련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그리하여 1979년에 '롯데호텔 서울'을 준공했다. 신 회장은 롯데호텔 건설 중에 롯데호텔 옆에 백화점을 짓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 정부가 도심 과밀화 억제 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하고 있던 때라 도심에 백화점 허가가 어려웠으나 외국인 투숙객을 위한 쇼핑 시설을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허가를 받았고 이후 설계를 변경하여 당초 허가 때보다 훨씬 크게 지어 롯데호텔과 동시에 롯데쇼핑센터를 완공했다. 롯데호텔과 롯데쇼핑을 건립하면서 롯데는 제과업에서 유통업, 서비스업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했고 유통업을 통해 롯데는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편 1970년의 제조 정지 위기를 무사히 넘긴 롯데제과는 이후 급격한 매출 성장을 이루었다. 일본에서 성공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70년대 중반에 제과 시장의 최강자로 자리잡았다. 아울러 인수합병을 통해 식품업의 규모를 확장했다. 1974년 칠성한미음료(현 롯데칠성)를 인수했고 1977년엔 삼강산업(현 롯데푸드)을 인수하였으며 1978년 롯데유업까지 세워 종합 식품사업군을 구축시켰다.
한편 1973년에는 일본 파이오니아사와의 합작으로 롯데파이오니아를 세워 카세트, 오디오 등 음향 전자기기을 생산했다. 1980년 출시한 오디오 파이오니아는 큰 인기를 얻었다. 80~90년대 대한민국에서 오디오붐이 불면서 각 가정마다 고가 오디오를 한대씩 장만하는 것이 유행했는데[9] 롯데 오디오는 인켈에 이은 국내 2위의 오디오 생산 업체였고 그 뒤를 태광, 아남 등이 이었다.
1978년 그룹회장으로 추대된 후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초창기 식음료사업군 중심에서 서비스 산업 중심으로 점차 바뀌었고, 1997년 차남 신동빈이 부회장이 되면서 2세 승계작업은 점차 속도를 더해갔으며, 무차입 경영을 고수해 외환위기 역시 비켜나갔다. 2007년엔 일본 (주)롯데를 '롯데홀딩스'로 출범시켜 기존 계열사들을 '투자법인'으로 만들어 사업부를 신 법인에 넘겼다. 2011년에는 신동빈 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키며 자신은 '총괄회장'으로 추대됐다. 2017년 6월 24일 오전 일본 롯데홀딩스는 도쿄 신주쿠 하쓰다이 본사에서 주주총회를 열고 임기가 만료된 신 총괄회장을 새 이사진에서 배제한 인사안을 의결했다. 이에 따라 신 총괄회장은 1948년 (주)롯데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롯데그룹을 창립한 지 약 70년 만에 롯데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명예회장직을 대신 받게 되었지만 사실상 불명예 퇴진이나 다름 없다.

2.3. 롯데판 왕자의 난



2015년 7월 28일 신격호는 일본 롯데홀딩스 회장직에서 전격 해임되고 '''총괄회장'''에서 '''명예회장'''이 되었다[10] 27일 장남인 신동주 전 부회장이 한국롯데 몰래 롯데가 인사 여럿과 함께 일본에서 자신을 제외한 차남 신동빈 회장을 포함 여섯 명의 이사들을 해임하려고 했다가 이사회에서 제동을 건 것이다. 한마디로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이 고령의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을 등에 업고, 차남 신동빈 회장 체제를 무너뜨리려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한 것이 된다.
문제는 장남 신동주가 처음에 해임했던 인물들에 포함된,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쓰쿠다 다카유키가 예전에 신격호 총괄회장으로부터 "잘 부탁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점. 그런 쓰쿠다를 신격호+신동주가 다시 해임했다는 것은 신격호 회장이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에서 장남에게 설득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기자들의 분석이 있다. 하여 차남 신동빈 측에서는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는 것. 이 때 롯데 자이언츠 구단주 대행 신동인[11] 역시 신동주의 쿠데타에 가담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롯데 자이언츠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무능함의 대명사이자 롯데 자이언츠 CCTV사건에도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는 신동인이 드디어 짤릴 수 있다면서(…).
하지만 2015년 5월 22일 롯데월드타워를 방문하여 건설보고를 받는 모습을 밀착취재한 기사들만 봐도 노병용 롯데물산 사장과 무리 없이 대화 했다고 하거나 건설에 대한 매우 상세한 사항을 물어보며 현장의 상황을 살폈기에 위의 신동주 쿠데타-신격호 노환설을 부정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무엇보다도 신격호는 꾸준히 신동빈을 밀어주고 있었는데 이제와서 끈 다 떨어진 신동주를 다시 당긴다는 건 아귀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신격호가 신동주를 이용하여 양국 회장급에 취임한 신동빈에게 어떤 제스처를 취하며 권력의 운용과 책임에 있어서 무한대로 자유로운 상왕으로서의 포지션을 취하려고 했는데 신동빈의 갑작스러운 제스처에 당해 권력없는 태상황이 되어 버렸다고 분석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이로 인해 본인은 1948년 회사설립 이후 처음으로 일본롯데의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이고 신동빈 체제가 확고하게 굳어질 것으로 보인다. 귀국 때 엄청난 취재진이 몰려 곤욕을 치렀다.
그런데 2015년 7월 30일 신동주 부회장이 일본롯데에 대해 주주총회 소집을 요구했고 그 골자가 신격호 회장의 복위(+ 신동주 부회장의 복위)라고 한다. 신동빈 회장은 펄펄 뛰는 중이라고. 또한 신동주 측에서 "아버지 신격호 역시 신동빈+쓰쿠다를 그만두게 했다"라며, 이와 관련한 신격호의 (일본어) 육성 녹음 파일을 공개하면서 상황이 묘연해지고 있다. 신격호가 이전에 쓰쿠다에게 "잘 부탁한다"라고 한 것은 "(그만두고 나서도) 다른 데 가서 잘 하라"는 덕담이었다는 것(…). 기사 신동빈 쪽에서는 "롯데 경영 전반에 있어 아버님(신격호)의 의중이 중요하긴 하지만, 신동빈+쓰쿠다 해임 지시는 제대로 된 절차 없이 이루어진 것이므로 따를 수 없다"며 맞서는 중. 신격호의 장녀 신영자는 신격호+신동주에 가세하는 양상. 하지만 2011년에 신동빈을 한국 롯데 회장에 임명해 놓고 그런 적이 없다고 하는 등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모습을 보여 정말 신격호가 판단력에 문제가 없는 것인지도 의심 되었었다.
2015년 8월 2일 신동주 부회장이 인터뷰에서 한 발언에 따르면 6월달에 롯데그룹의 중국 진출 과정에서 손해가 발생한 것에 대해 신동빈 회장을 추궁하던 중 격노하여 뺨을 때렸다고 한다.# (...) 결국 8월 28일에 있던 일본 롯데홀딩스 주주총회에서 신동주 측의 안건이 죄다 부결됨에 따라 1차 표결은 신동빈 측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2015년 10월 15일 둘째 아들 신동빈으로부터 집무실에 CCTV 를 설치 당하고 직원들의 감시에 놓이게 되자 즉각 철수를 요구하였고, 10월 16일 장남 신동주와 직원들이 집무실에 진입하여 신격호의 거처를 탈환(..)하였다. 이후 한국 언론과 인터뷰 하였는데 고령이라 귀가 잘 들리진 않았지만 인터뷰도 아주 똑바로 하고 의사표시도 분명하게 하는 걸로 봐선 그간의 정신이상설은 모두 근거없는 헛소문임이 거의 확실해젔다. 롯데그룹의 언론플레이가 의심되는 상황. 이 인터뷰에서 다시 한번 장남 신동주에 대한 지지의사를 확고히 하였다. 기사,기사2
2016년 2월 12일, 신동주는 신격호가 경영관 분쟁과 관련해 인터뷰하는 동영상과 친필 서명이 들어간 일본어 문서를 공개했다. 일본말로 진행된 해당 인터뷰에서 신격호는 “당연히 장남인 신동주 전 부회장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 신동빈을 롯데에서 추방해야한다는 내용도 남겼다. 문서는 2015년 12월 30일자 서명이 있었다. #
하지만 2016년 3월과 6월에 두 차례에 걸친 일본 롯데홀딩스의 주주총회에서 또 다시 신동주 측의 안건은 죄다 부결되면서 신격호의 롯데그룹 자체의 장악력이 이제는 떨어진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2016년 6월 29일, 신격호 회장이 2010년부터 치매약을 복용 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기사
보도의 출처는 롯데그룹이 아닌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 측으로 알려졌으며, 현재 진행 중인 롯데그룹의 각종 비리 의혹 문제에 자신들이 휘말릴수 있음을 우려한 신격호 회장과 신동주 측이 각종 수사를 피해가기 위해 뒤늦게 기존의 주장을 뒤집은 것으로 보인다.
2017년 6월 2일, 신격호는 대법원으로부터 한정후견인 판정을 최종적으로 받게 되면서 사실상 본인이 제대로 의사결정을 할 수 없음[12]이 확정되고 말았다. #
그리고 2017년 6월 24일 일본 롯데홀딩스 주주총회에서 자신의 이사직 재선임안이 통과되지 않음에 따라 결국 회사의 경영일선에서 모두 물러나고 말았다. 4차에 걸친 신동주 vs 신동빈의 싸움에서는 신동빈의 완승으로 끝나게 되었고, 신격호는 자신이 세운 기업의 경영 일선에서 불명예 퇴진하게 되었다. #

2.4. 사망


명예회장 추대 후 2020년 1월 18일 밤 병세가 위독해져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다음날인 1월 19일 오후 4시 29분 경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만 98세. 유산 분배에 대하여 유언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진 신격호 회장의 재산 1조가 누구의 손으로 갈 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이다.[13]
대한민국의 대기업 1세대 중 마지막으로 생존해 있던 신격호 회장이 별세하면서[14] 1세대 경영인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20년 1월 22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영결식을 치르고 신격호 회장이 평생의 꿈으로 생각했던 롯데월드타워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고향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선영[15]에 안치됐다.
2020년 6월 일본 도쿄에 사무실 금고에서 신격호 회장이 2000년 3월에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유언장이 발견됐다. 이 유언장에는 신동빈 회장을 후계자로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유언장은 일본 법원에서 상속인들의 대리인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개봉됐다.

3. 특징


  • 한동안 그의 국적은 미스터리였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이고 일본에서는 일본인인 기묘한 형태. 때문에 편법적 이중국적자로 의심받았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일관계의 역사적 배경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 회장은 한일 국교 정상화 이전에 일본 국적을 취득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일본과 대사급 외교 관계가 없었던 제1공화국 체제에서는 그의 일본 국적 취득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한국 국적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또한 일본 정부는 1985년까지 이중국적을 허용했으므로 일본 내에서도 그의 한국 국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중국적이지만 이중국적이라 말할 수 없고, 신격호는 한국인이고 시게미쓰 다케오는 일본인이라는 기묘한 상황이 지속된 것이다. 그런데, 한 언론사가 입수한 일본 롯데 계열사의 대주주 목록에는 신격호와 시게미쓰 다케오가 함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며, 신격호 회장은 한 번도 일본 국적 취득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중 호적이 심히 의심되는 상황이다.
  • 괴테의 소설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히로인 샤롯데를 자신의 이상형으로 보고 회사 이름까지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애초 로테(Lotte)는 독일어권에서 샤롯데(샤를로테)의 애칭(nickname)이기도 하기 때문이고, 실제로 괴테 소설에서도 이러한 애칭이 등장하기도 한다.
  • 현대식 츄잉껌을 처음 만들어 낸 Wringley사가 맨 처음 내놓은 츄잉껌은 두 종류인데 하나는 여성을 타겟으로 한 Vassar,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반시장을 타켓으로 한 Lotta였다. 또한 신격호가 츄잉껌 시장에 뛰어든 1948년 당시 츄잉껌의 주 소비계층인 젊은층, 특히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고 한다.[16] 창작물 캐릭터가 이상형이라서 회사 이름까지 그렇게 지었다는 것 보단 최초의 츄잉껌 이름 + 당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 = 롯데(Lotte)가 더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실제로 롯데의 각종 건물, 브랜드, 온갖 서비스 명칭엔 늘 샤롯데가 붙는다. 각종 언론에서는 첩 서미경 씨를 신격호 회장의 샤롯데라 불렀다.
  • 젊은 시절, 문학을 좋아해서 작가가 되고 싶어했다고 전해진다.[17] 하지만 현실은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였기에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여러 일을 하다가 주변으로부터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사업을 꾸리게 된 것. 롯데의 이름을 짓게 된 원인이라고 한다.
  • 야구팬, 특히 롯데 자이언츠 팬들에게는 생전에 그다지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과거 롯데의 야구단 운영 사례를 보면 "짠돌이"라는 별명이 자동적으로 붙을 정도로 투자에 인색했고[18] 구단에 대한 인색한 지원이 결국 성적 부진으로 연결됐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더구나 매년 팬북에는 20년 가까이 같은 프로필 사진을 붙일 정도여서 "야구단에 관심이 있기는 한거냐"라는 비판이 따랐다. 자이언츠 특유의 짠돌이 운영 방침이나 프런트의 각종 병크를 생각한다면 신격호의 야구단 운영에 대해 폄하하는 의견이 꽤 많다. 그러나 자이언츠 야구단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상당히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 일본 롯데 오리온즈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인 1970년대 실업야구단 롯데 자이언트를 창단하며 야구의 프로화를 먼저 지향하기도 했고[19] 한동안은 야구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다만 시간이 갈수록 신격호 스스로 야구에 대한 관심이 뜸해지고 측근이나 부하들이 자행한 엉뚱한 행동들로 구단이 망가져서 문제일 뿐...
  • 다른 재벌들에 비해서는 잠이 다소 많은 편이며 이건희, 정몽구 등 다른 재벌 총수들이 꼭두새벽에 기상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20]
  • 신격호가 다른 재벌들과는 달리 큰 실패를 겪고도 불굴의 의지로 일어나서 재벌이 된 경우이기 때문에 롯데그룹은 입사시험을 위한 면접과정에서 신격호의 이력을 묻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신격호의 공과는 사람들마다 평이 다르겠지만, 창업자로서 가지는 노력과 끈기/도전정신 등은 높이 평가 받을 만하다.[21]
  • 일본식 기업풍토에 안정적인 현금흐름과 시장지배력을 중시하는 재일교포 특유의 경영행태로 많은 화제를 낳았다. 2013년 12월 골절상 이전까지 구순이 넘은 나이에도[22]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했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작업복 차림으로 영업이 끝난 백화점이나 마트 등을 둘러보고 담당자에게 세부적인 관리내용을 전화 등으로 꼬치꼬치 묻는가 하면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비행기도 민간 항공사 1등석을 혼자서 탑승하는 사실은 재계에서는 꽤나 유명했다. 심지어 2011년에 구순의 나이로 롯데월드타워 공사현장에 나타나기도 했다. 어떤 사업이던 간에 '친정 경영'을 우선시한 탓에 타 대기업과 달리 상대적으로 계열사 CEO들의 권한이 낮았다.
  • 그는 '얼굴보다 실적이 우선이다'라는 신조를 지키며 언론 노출도 꺼려서 인터뷰나 기고문 등은 별로 쓰지 않았고, 재계 모임에도 참석을 잘 안 했다. 심지어 그룹 내에선 신년 하례식, 그룹 사장단 회의, 전략 결정 회의체를 각각 꾸리지 않았으나, 2007년에야 사장단 회의를 열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롯데 자이언츠 팬북이나 계열사 사사 등지에 쓰이는 사진은 거의 20여 년 동안[23] 변하지 않았고, 계열사 대표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타 그룹 계열사 대표들과 달리 언론 노출이 적다. 한때 치매설과 정신 이상설이 시중에 나돌았지만, 근거없는 낭설로 취급되기도 했다.
  • 일각에서는 롯데가 범 삼성가범 현대가 같은 재벌들과는 달리 의료기관을 운영하지 않는 이유로 신격호 회장 본인부터가 원체 병원 갈 일이 없어서라고 해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속칭 왕자의 난 이후 신병 이상에 관한 이야기들이 언론 보도로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롯데 측 핵심 관계자의 증언를 소스로, 2010년대 초반에 알츠하이머 치매 진단을 받았으며, 치료제을 복용하기 시작한지 오래되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다만 이후의 신격호 명예회장의 인터뷰를 보건데 이 주장은 롯데그룹의 언론 플레이일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기사

4. A급 전범 가문과의 연관설


신격호 회장의 현재 부인이자, 신동주, 신동빈의 어머니는 일본인인 시게미쓰 하쓰코인데, 그가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 외무대신(한국의 외교부장관)을 지냈던 A급 전범 시게미쓰 마모루의 외조카라는 설이 있다.
전범 연관설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98년에 출판된, 언론인 출신 정순태 씨가 쓴 책 ‘''신격호의 비밀''’[24]이란 책이다. 롯데그룹의 A급 전범 집안의 비호 아래 일본에서 승승장구했다는 것이다. # #
2015년 롯데판 왕자의 난 때문에 가족 관계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전범 가족의 그룹이라는 설이 대대적으로 알려지면서 한국 내 이미지가 급격히 나빠지게 되었다. 창업주가 전범 시게미쓰 마모루의 조카 사위일 가능성이 있으니 말이다.
일부에서는 과거 일본롯데의 엄청난 사업 성공을 보면 A급 전범 연관설이 신빙성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80년대 중반 한때 포브스지에서 신격호를 세계 4위의 재벌로 공인할 정도로 신격호가 일본에서 사업을 크게 성공시켰는데, 매우 폐쇄적이고 외국인, 타민족을 배척하는 일본 사회에서 A급 전범 집안 정도 되는 소위 '명문가'의 비호 없이 신격호가 그 정도로 성공할 수 있었겠냐는 것이다. 근데 이 주장도 근거가 빈약한 게 일본롯데의 매출은 5~7조 정도로 분명 적은 편은 아니나 일본의 경제규모가 한국의 3배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 기준으로 후하게 계산해봤자 매출 2~3조의 중견그룹에 불과하다. 롯데가 일본에서 그 이상으로 성장했다는 기록이나 정황은 찾아볼 수 없고 예나 지금이나 지분구조와는 별개로 롯데의 본진은 한국이었다. 무엇보다 정치적인 빽이 있었다고 가정해도 그게 꼭 A급 전범가문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포브스지에서 신격호가 세계 4위 부자가 된 이유는 매출면의 성공이라기보다 당시 사두었던 비교적 시골(?)이었던 도쿄 땅들이 일본 부동산 버블 때 최고의 알짜 땅으로 올라서면서 부동산 재벌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도쿄에 있는 부동산을 다 팔면 미국 전체 부동산을 살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본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뛸 때였다.
이런 이야기는 1990년대부터 떠돌던 이야기인데 그동안 롯데그룹에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다가, 경영권 분쟁으로 한국내 여론이 악화된 2015년조선일보에 정정보도를 신청하는 등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문단에서 긍정의견과 부정의견을 모두 다룬다. 판단은 기본적으로 독자가 해야될 일이라고는 하지만, 긍정론의 근거를 보면 알겠지만 제대로 된 물증은 찾아볼 수 없고 막연한 정황을 늘어놓고 있다. 이 문제를 다룬 오마이뉴스의 기사에서는 '다만 하츠코씨가 실제 시게미쓰 마모루 가문과 무관한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그동안 국내 각종 언론 보도에서 하츠코씨는 시게미쓰 마모루의 조카나 외손녀, 심지어 딸로 지목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로선 이를 입증할 증거도, 부인할 증거도 확인할 수 없다.'라고 했는데 '''이건 그냥 입증할 근거가 없다'''는 얘기일 뿐이다. 거증책임의 원칙을 생각해 보자.
2015년 현재도 이 의혹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시게미츠 하츠코 여사가 멀쩡히 살아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아무런 입장 표명도 하고 있지 않다.

4.1. 연관설 긍정


  • 정실 부인을 놔두고 공공연히 첩을 거느린 가부장적 가치관의 신격호가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에게 그룹을 좌지우지하는 크나큰 지분을 순순히 넘겨주었을 리가 없다. 이는 하쓰코의 배경인 시게미쓰 가문의 지분이라고 볼 개연성이 충분하다.
  • 시게미쓰로 창씨했다 해도 기업을 키우는 과정에서 시게미쓰 가문에서 성을 갈라는 압력이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신격호는 일본 성을 갈지 않았을뿐더러 압력을 받았다는 어떠한 공식적·정황상 증거도 남아 있지 않다.

4.2. 연관설 부정


  • 정황상 근거를 토대로 신격호가 전범의 사위가 아니라고 추정한 글이 있다. 이쪽은 신격호가 탄 줄은 기시 노부스케 쪽이고, 재일조선인 폭력단 라인을 시작으로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후원을 받아 성장한 것으로 보고 있고, 장인뻘이라는 시게미쓰 마모루가 윤봉길훙커우 공원 의거로 혼쭐이 난지라, 조카가 한국인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할 리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기시 노부스케 역시 A급 전범이므로 이 경우에도 신격호가 전범의 비호를 받았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창시개명 당시 영월 신(寧越辛)씨는 중광(重光; 시게미쓰), 신도(辛島; 가라시마)'로 바꿨다는 기록이 있다. '영월 신씨'는 영산 신씨에서 분관한 것으로, 영산 신씨인 신격호의 아버지 역시 '시게미쓰'로 창씨 개명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신격호 회장도 일본에서 창씨개명으로 바뀐 성씨를 그대로 썼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또한 많은 신씨 성을 가진 조선인들이 시게미쓰 성씨를 선호한 것으로 나타나 원래의 시게미쓰 가문이 시게미쓰 성씨를 못 쓰게 막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 신(辛)씨가 중광(重光)으로 성씨를 바꾼 가장 큰 사유는 바로 고갑자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10간 중 하나인 辛에 대응하는 글자가 바로 重光이기 때문이다.
  • JTBC에 따르면, 시게미쓰 가문이 자신들은 시게미쓰 하쓰코나 신격호, 롯데그룹과 아무 상관없다고 밝혀왔다고 한다.
  • '시게미쓰'는 신격호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부터 조선에서 사용하던 성씨다.『신격호의 비밀(1999)』의 저자 정순태는 그 책에서 "울산 삼동초등학교에 답사 갔을 때 봤던 졸업생 목록에 '중광무웅'(시게미쓰 다케오)이라는 이름이 있었다"며, 이 설이 신빙성 없는 카더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 '시게미쓰'의 논란의 핵심은 시게미쓰 하쓰코(重光 初子)가 시게미쓰 마모루와 같은 일족이냐는데 있는데, 실제로 시게미쓰 하쓰코는 혼인하기 전 이름이 다케모리 하쓰코(竹森 初子)였고,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서 시게미쓰(重光)으로 바꾼 것이기에 시게미쓰 마모루와 다케모리 하쓰코의 직접적인 인척관계가 밝혀지지 않는 이상, 성씨만 가지고 엮는 것은 헛된 짓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인척관계 확인은 기자들이 추적하면 금방 알 수 있는 문제다.) 아무래도 여성이 결혼과 상관없이 본인의 성을 유지하는 한국과는 달리 결혼 후 여자의 성을 바꾸는 구례를 가진 일본을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한 해프닝이라고 보아야 할 듯.

5. 가족 관계



현재 공식적인 부인 역할을 하는 사실혼 배우자 시게미쓰 하쓰코[25](결혼전 이름: 다케모리 하쓰코)는 이때 즈음에 만나 동거를 시작한 것으로 보여진다.[26]
한국으로 돌아와 사업을 확장하며 승승장구 하는데 1967년 롯데제과를 비롯 계속 여러 회사를 인수해 롯데그룹을 키워나갔다. 아역배우이자 1972년 초대 미스 롯데 출신 서미경과 중혼적 사실혼 관계를 맺었다. 둘 사이에 낳은 딸이 신유미. 참고로 서미경과 신격호 나이 차이는 무려 '''38세'''. 거기에다가 딸 신유미는 1983년생인데 태어났을 당시 그의 나이는 '''만 62세, 진갑'''이었다.[27]
형제도 여럿인데 5남 5녀(10남매) 중 신격호가 장남이며, 3남 신춘호농심그룹[28] 회장, 5남 신준호푸르밀[29] 회장, 4남 신선호는 일본 산사스 사장, 여동생 신정희는 동화면세점 사장이다. 가족 관계에 대한 내용은 범 롯데가 참고.

6. 후원


2013년까지 매년 5월 고향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를 찾아 마을잔치를 열었다. 생가가 있던 이 마을은 1970년 울산공단의 용수공급을 위한 대암댐 건설과 함께 수몰되어 지금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 됐다.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던 주민들은 집과 전답을 버리고 인근의 도시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전해듣고 1971년부터 마을 이름을 따 '둔기회'를 만들고 자비를 털어 해마다 주민들과 그 가족들을 불러 마을 잔치를 열었다. # 수몰된 고향을 그리워 하며 어쩔수 없이 흩어진 친척들에게도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의 뜻과는 반대로 그룹에서는 형제 간의 분쟁이나 아들들의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2014년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애도를 위해 중단하였고, 원래 마을잔치를 열려고 했던 잔치비용 전액은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기부 되었다. 2015년에는 더이상 마을잔치를 열지 않는다고 롯데 측에서 밝혔다. 이유는 해마다 늘어나는 잔치 참석 인원들로 인한 교통 불편을 주변 주민들이 호소했기에 받아들인 것. 하지만 고향에 투자는 계속 될 것이라고 한다. # 그러나 마을 사람들 사이에선 마을에 지원을 제대로 안 해 줬다는 견해도 있다.
일본 교민회에서 조치훈의 형과의 인연으로 조치훈을 후원하기 시작해 20년 이상 후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0] # 한국 체육인 중 홍수환박찬호그에게 도움을 받았으며, 유창순노신영 전 국무총리와도 관계가 돈독했다. 장훈을 비롯한 일본에서 활약하던 재일 한국인들 중에서 신격호 회장의 도움을 안받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7~80년대 일본에서 유학하거나 사업 또는 외교를 할때 신격호 회장의 도움이 많았다고 한다. 별다른 인연도 없는데 한국에서 왔다고 도와준 일이 많았다고 한다.(주간조선 기사)

7. 수상 경력



8. 관련 문헌



[1] 음력 10월 4일 주민등록상으로는 1922년 11월 22일 생 이지만 실제 출생년도는 1921년 11월 3일에 태어났다.[2] 인근의 하잠리, 조일리와 함께 영산 신씨 집성촌이다.[3] 위의 재일교포와 본인이 작은 아들이랑 일본어로 대화하는 모습까지 포착되어 일본 국적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신격호는 일본 국적이 아닌 일본 특별영주권을 소유하고 있다.[4] 참고로 뒤에 마스크를 착용한 남성은 장남 신동주. 뒤에서 모자 쓴 여성은 며느리 조은주. 오른쪽이 장녀 신영자.[5] 위에 사진과 비교해 3년 밖에 안 지났는데 얼굴이 많이 상했다.[6] 당연한 얘기지만, 신격호는 전술했듯이 일본 국적이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 존재하는 본명이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데, 일본 특별영주권이 있는 점을 감안하면 법적으로 존재하는 본명일수도 있다.[7] 1세대 재벌 중에서는 지주의 자손으로 태어난 이병철, 조중훈도 있고 적산기업을 불하받아 재벌로 키운 최종건, 김종희 등도 있다. 구인회의 LG 역시 부유한 집안이었으며, 창업 과정에서 만석꾼이자 공동창업주였던 허만정의 자금 지원이 있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밑바닥부터 고생을 해가며 재벌의 위치까지 성장한 사례는 정주영과 신격호가 대표적이다.[8] 학업성적은 57명중 42등[9] 당시 오디오는 자동차에 이어 두번째로 비싼 소비재였다.[10] 애초에 이전에 '명예회장'이라는 직함을 거부하고 '총괄회장'을 맡았던 것 역시 끝까지 경영을 직접 하겠다는 신격호의 현역 의지 때문이었다 기사 해당 기사는 신격호와 신동빈의 경영 스타일 차이에 대해서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11] 신격호의 5촌 조카. 신동주, 신동빈의 6촌 형.[12] 다만 성년후견이 아니라 한정후견이라서 경영 같은 중대한 결정만 못 할 뿐이지 일상적인 의사결정은 가능한 모양이다.[13] 상속인은 신영자, 신동주, 신동빈, 신유미 이렇게 4명이다. 일부 뉴스에선 시게미쓰 하쓰코를 상속인으로 보도했으나 사실혼 관계이므로 상속 대상이 아니며, 자녀의 경우는 혼외자 여부와 무관하다. 상속인들 간에 협의가 있다면 협의대로, 협의가 없으면 4명은 같은 비율로 상속받게 된다.[14] 1세대 재벌 총수로 분류되는 인물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최종건 SK그룹 창업주-최종현 SK그룹 2대 회장 형제,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등이 있다. 구인회 회장이 1960년대에 가장 먼저 별세했고 최종건 회장이 1970년대에, 김종희 회장과 이병철 회장이 1980년대에, 최종현 회장은 1990년대에, 정주영 회장과 조중훈 회장은 2000년대에 별세했다. 그들과 같은 세대는 아니나 그들과 2세대 총수들 사이에 끼어 1.5세대 총수로 분류되는 김우중 대우그룹 창업주와 구자경 LG그룹 제2대 회장 역시 한 달 전인 2019년 12월에 각각 향년 82세, 94세로 세상을 떠났다.[15] 이 선영에는 신격호 회장의 부친 신진수 씨의 묘소도 있는데 1999년 유해 도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유해 도굴 사건에 대한 현장검증 때 신준호 푸르밀 회장의 막내아들인 신동학 씨가 찾아와 도굴범을 폭행하기도 했다.[16] 같은 패전국인 독일의 작품이라는 점도 한몫 했다고.[17] 일본 유학생 혹은 밀항자들은 힘든 현실로 인해 소설을 읽고 자신이 직접 쓰고 싶다는 마음에 문학가를 동경하는 경우가 있었다.[18] 최동원 90만원 사건이나 강병철 감독이 이희수 코치의 계약금을 언급한 이른바 '과자값 사건'이나 이대호의 일본 진출 이전 시절 연봉과 관련된 구단과의 분쟁 등이 대표적으로 드러난 사건들이다.[19] 실업 시절 롯데 자이언트는 오늘날 롯데 자이언츠의 모태 역할을 했다. 만약 신격호가 한국에서 실업야구단을 창단하지 않았다면 자이언츠 프로야구단은 없었을 수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20] 여담으로 새벽에 기상하는 재벌들은 다른 사람보다 일찍 잠에 든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9시 뉴스를 잠깐 보다가 잠에 들어서 새벽 4시쯤에 일어나던 왕회장.[21] 1980년대 이후에는 재무관리와 금융체계의 발전으로 투자안 평가 및 대출이 산술적으로 진행되고 사업 실패시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청산이 이루어지기에 신격호처럼 실패 후 다시 돈을 빌려 사업을 반복하는 경영자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 신격호의 실패와 재도전에는 수요초과와 경제 급성장이라는 시대적 특성도 한 몫을 한다고 보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나친 평가절하는 곤란한 것이, 무슨 그 시대라고 개나소나 돈 빌려서 리스크 높은 사업 벌일 수 있던 것이 아니다. 돈을 빌린건 단순 운이 아니라 멸시와 편견에 시달리던 식민지 조선인임에도 일본인이 두번이나 돈을 빌려줄 만큼 그가 성실도와 신뢰감을 쌓았기 때문이지 무슨 세뇌어플 가지고 나에게 돈을 빌려다오 명령한게 아니다.[22] 보통 93세 노인이면 거동도 힘든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리고 염색을 자주 하는지 흑발인 사진만 있다.[23] 1990년대 이전까지 공개된 사진에선 입을 굳게 다물었으며, 예외적으로 2009년 발간된 <롯데쇼핑 30년사>에선 최근 찍힌 사진을 썼다.[24] 해당 책이 발간되자 신격호 본인은 롯데그룹 홍보담당 임원들을 질책해 책을 전량 수거토록 하면서 레어템이 됐으며, 1999년 선친 묘소 도굴사건 당시 범인이 해당 책을 읽고 범행에 참고한 게 알려져 책이 화제가 됐다. 2015년 조갑제닷컴에서 <거인의 황혼>으로 재발간됨.[25] 둘 사이에 아들 2명이 있는데, 신동주(시게미쓰 히로유키)와 신동빈(시게미쓰 아키오)이다. [26] 본처가 한국에 살고 있는데 새로운 여자와 가정을 이루었다.[27] 불륜이지만 1988년 호적에 올렸다.[28] 신춘호 롯데공업 사장이 1960년대 라면사업에 뛰어들자 신격호 회장이 회사 말아먹을 짓이라며 반대해서 둘사이가 완전 벌어졌다고 한다. 이후 롯데라면으로 성공해서 회사 이름을 농심으로 바꾸고 독립했으며 그 이후로는 아버지 제사도 따로 지내는 등, 이제는 완전히 남남사이라고. 관련 기사[29] 신격호와 1990년대 부동산 소유권 분쟁으로 재판까지 갔으나 패하자, 롯데우유를 가지고 독립했다. 이후 푸르밀로 사명을 변경했다.[30] 아마 조상연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조치훈이 개명하기 전의 이름이 바로 조풍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