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판 전투

 

'''사이판 전투'''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의 일부
'''날짜'''
1944년 6월 15일 ~ 1944년 7월 9일
'''작전명'''
Operation Forager (약탈자 작전)
'''장소'''

남양군도, 마리아나 제도 사이판
'''교전국'''
<^|1>[image] 미국
<^|1>[image] 일본 제국
'''지휘관'''
<^|1>[image] 홀랜드 스미스
<^|1>[image] 사이토 요시츠쿠
[image] 나구모 주이치
'''결과'''
[image] 미군의 승리
'''영향'''
일본 본토 폭격을 위한 안정적인 B-29의 기착지 확보
'''병력'''
71,000명
31,000명
'''피해 규모'''
3,426명 전사
10,364명 부상
24,000명 전사
5,000명 '''자살'''
1. 개요
2. 전투의 원인
3. 전투
4. 민간인들의 운명
5. 양측의 피해
6. 전투 이후
7. 창작물에서의 묘사
8.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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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Battle of Saipan. 제2차 세계대전 도중의 태평양 전쟁의 전투이다.

2. 전투의 원인


미드웨이 해전 이래 과달카날, 알류산 열도, 애투, 타라와, 마킨 섬에 이르기까지 졸전을 거듭하며 줄줄이 패전한 일본군은 1943년 9월 인도네시아-뉴기니-필리핀-마리아나 제도를 잇는 이른바 "절대국방권"을 설정한다. 일종의 최후 방어선으로, 이 선에서 기필코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44년에 들어서자 절대국방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 방어선의 전초기지 격이었던 마셜 제도에 들이닥친 미군에게 뚫려버린다.[1]
계속되는 승리와 막대한 물량으로 자신감을 되찾은 미국은 일본 본토와 가까우며, 새로이 개발된 미 육군 항공대의 초장거리 폭격기 B-29의 기착지로도 매력적인 북마리아나 제도사이판 섬에 대한 공략을 준비한다. 일본군은 부랴부랴 사이판의 방어 준비를 서둘렀고, 자기들 딴엔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이판 섬 방어시설을 '''확실하게''' 보장합니다.

도조 히데키, 사이판 방어시설 강화를 계속 요구하는 해군의 구사카 류노스케 중장에 보내는 서신에서

'''육군은 미군이 상륙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위의 편지를 전달한 육군 대좌

그러나 개전 초기의 어뢰 문제를 해결한 미 해군잠수함이 들끓는 바람에 사이판으로 향하던 일본 육군해군의 수송선이 대거 격침되면서 수많은 물자와 장비와 병력이 바닷속으로 사라졌으며, 살아남은 수송선도 사이판에 접근을 못하고 가까운 대만이나 오키나와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에 사이판에는 애초의 계획과는 거리가 먼 3만여명의 병력만이 집결할 수 있었고 격침된 수송선에서 구조된 병력은 장비를 대부분 상실해 맨몸에 가까운 상태라 전력이라 할수 없는 상황이였다. 또한 사이판을 공격하기 전, 미 해군 함대가 주변의 일본 육해군 비행장을 초토화시켜놓아서 항공력까지 전무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중국 전선에서 국민당 육군의 예상치 못한 선전으로 인하여 마리아나 제도로 전용하려던 관동군 병력들의 발이 묶여 버린 것도 일본으로선 치명적이었다. 원래 일본 대본영은 1943년 말에 중국 중부 방면군에서 육군 제3사단과 제13사단을 마리아나 제도로 보내기로 결정했으나 동정호 서안의 도시인 상덕[2]에서 벌어진 전투가 계획된 기간 이상으로 질질 끌다가 끝나자, 아예 대륙타통작전을 새로 수립하면서 해당 사단의 마리아나 제도 파견을 취소했다. 그 바람에 사이판에 각각 2개 사단을 배치시켜 방어하려던 원래의 발상이 1개 사단으로 축소되면서 심각한 전투력 저하가 발생한 것이다.
병력들을 모두 사이판에 집중시킬 수도 없었다. 이나 티니안도 방어해야 했던 데다, 당시 대본영에서는 미군이 마리아나보다는 팔라우 쪽으로 먼저 치고 와서 필리핀 탈환할 교두보로 삼을 거라고 생각했던 의견들도 만만치 않았고, 최소한 미군이 그 둘 중에서 간보는 시간이라도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 사이판에 그렇게 일찍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3] 게다가 '팔라우-필리핀' 루트를 경시했다가는 본토와 자원생산지의 연결이 확 끊기는 사단이 생길지도 모르니 저쪽을 경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셜제도 전투에서 보았듯 미군의 정보력은 생각보다 대단했고[4], 약한 고리가 있다면 그곳을 먼저 옥쇄지로 만들어 놓았을 테니 말이다.[5]
지휘관 인선 또한 최악이었는데 수비대의 핵심인 43사단장 사이토 요시츠구 중장은 기병 병과 출신으로 기병부대에서 오래 복무하긴 했지만,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진 못하고 관동군에서 보충마창장, 군마보완부 본부장, 즉 군마를 관리하고 조달하는 업무를 맡다가 사이판에 발령난 사람이었다.[6] 보급부대에 근무했다고 무능한 건 아니긴 하지만 오직 일선 전투부대와 도쿄의 참모본부만을 중요시여기는 일본군에서, 야전을 오래 떠나있던 보급부대 담당 장교가 총지휘관이었다는 것은 총체적 난국이었다.[7]

3. 전투


일본군의 예상보다 훨씬 이른 1944년 6월 미군이 사이판을 공격한다. 6월 11일에 먼저 도착한 항모기동부대 소속 함재기들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사이판을 비롯한 마리아나 제도 상공의 제공권을 장악했고, 6월 15일 미 해병대 7만명이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그에 맞서는 일본군은 절반이 채 안되는 3만 1천명이었다. 일본군 사령관 사이토 장군은 해안방어전술로 미군을 상대하기로 결정하였으나[8] 상륙 전에 있은 미 해군의 지원사격으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는다.[9]
그래도 해안에 죽치고 있던 일본군은 원래 작전인 해안방어전술을 사용하기 위해 미리 해상에 표적깃발을 부표로 달아놓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므로 함포사격에서 살아남은 일본군 생존자들은 다가오는 미군에게 맹렬히 저항했고, 상륙이 완료되고 교두보가 확보될 때까지 미군은 1,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야 했다. 상륙 첫날 밤엔 역시 어김없는 일본군의 야습이 있었지만 미군의 화력에 말 그대로 소멸된다.
한편 사이판을 구원하고 미 해군 기동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달려온 일본 해군 연합함대필리핀 해 해전에서 역관광당하고, 사이판은 일본 대본영에게 버려진 채 완전히 고립되어 버린다. 일본군은 섬 안의 전차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미군이 상륙한 둘쨋날 (6월 16일) 밤, 야습을 건다.[10] 37대의 전차로 이루워진 일본군 기갑부대는 어둠을 틈타 돌격을 감행했는데, 이는 태평양 전선에서 벌어진 전차전 중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다고 한다. 언덕 밑에 자리잡았던 미군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처음에는 당황하였다.[11] 그러나 일본군이 보유했던 하고 전차에 달린 안습한 성능의 37mm 주포와 일본군의 두루뭉실한 계획, 야습의 이점인 어둠이 미군의 조명탄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된 점으로 인해 미군들은 일부 전차가 방어선을 돌파하여도 침착하게 대열을 추스른 뒤 일본군 전차들을 차례차례 격파한다. 근거리에서의 싸움이 계속되는 등, 꽤나 혼란스러운 전투였지만 미군은 가벼운 손실만 입고 전투에서 이기게 된다. 이날 밤 전투에서만 일본군이 손실한 전차는 사이판 방어군 기갑 전력의 3/4 정도라고 한다.[12]
이때까지도 일본군은 연합함대가 자신들을 구하러 오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합함대를 관광보내러 떠난 미 기동부대를 연합함대를 피해 도주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기뻐하였지만 사흘 후 바다를 메꾼 함대는 미 해군이었다.
승기를 잡은 미군은 대공세를 감행했고 일본군은 속수무책으로 소탕당했다. 게다가 6월 24일에는 일본 대본영에서 사이판 포기 결정을 내려버렸다. 제공권과 제해권은 미군에게 완전히 넘어왔고, 7월 3일 사이판 최대의 도시였던 가라판은 미군의 손에 떨어졌다.
그나마 살아남은 일본군은 산지와 동굴에 숨어서 끝까지 항전하려 했으나, 앞서 언급된 해안방어전술 때문에 식량과 장비와 탄약을 해안선에 분산배치한 실수를 범했으므로 이들 물자들이 개전 초기에 미군의 손안에 떨어지자 장기적인 저항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먹고 살 수단도 없는 절박한 처지에 놓였다. 그리고 사이판섬은 과달카날이나 부겐빌같은 큰 섬이 아니므로 미군의 입장에서는 비행장 주변에 교두보를 만들고 방어하는 전략보다는 차라리 섬 전체를 토벌하는 것이 방어면에서나 비용면에서나 우월하기 때문에 섬을 완전 점령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 5일, 함대를 잃고 사이판에서 해군 육전대를 이끌던 해군중장 나구모 주이치 제독권총 자살했다. 그 뒤를 이어 사이판 방어 책임자였던 육군의 사이토 장군도 자살했고, 이날 새벽 4,000명이 넘는 모든 잔존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 최대 규모의 반자이 어택을 감행하고 전멸함으로써 사실상 일본군의 저항은 끝장났다. 일부 육군 장병들은 더 이상 투항할 곳이 없자 그대로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고, 이 절벽은 현재 '자살 절벽'이란 명칭이 붙었다. 아래 설명될 반자이 절벽과는 가까이 있는 곳이지만 다른 장소이며, 주로 일본군은 고지대인 자살 절벽에서, 민간인들은 해안가에 위치한 반자이 절벽에서 투신했다. 일본의 귀축영미 프로파간다에 세뇌되어 미군의 잔혹함을 두려워한 많은 현지 일본인 민간인들 또한 절벽에서 투신하여 자결했다. 자신의 아이를 절벽에 먼저 던지고 뒤를 따르는 식이였다고.[13]
[image]
한편, 미군 내부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는데, 6.24일 사이판 상륙 지상군 지휘관인 제5상륙군단장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이 육군 제27보병사단장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을 해임한 것이다. 위 지도에서 보듯 27사단은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있는 곳을 담당했기[14]때문에 진격 속도가 늦었고 23일에는 일본군 주저항선에서 격전을 벌이느라 진격이 멈추었다. 그러나, 7개월 전 마킨 섬 전투에서부터 27사단장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의 지휘능력에 의심을 가지고 있던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은 평소 급한 성격 때문에 앞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의 공격정신이 부족하다고 지레 짐작하여 상급 지휘관인 미 제5함대 사령관 스프루언스 제독의 승인을 얻은 뒤 그를 해임한다.[15] 덕분에 랄프 스미스 소장의 직속상관이던 태평양 방면 육군사령관 로버트 리처드슨 중장은 폭발했고, 사이판 전투가 끝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니미츠 제독의 허락하에 사이판으로 날아가 육군을 시찰했다. 문제가 터질 것을 예상한 스프루언스 제독은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 및 리치몬드 켈리 터너 해군 중장을 불러 리처드슨 육군 중장이 뭔 말을 하더라도 화내지 말아달라고 약속할 것을 부탁했다. 스미스 중장은 자기가 한 짓이 후폭풍을 불러올 거라고 생각은 했는지 그에 동의했으나, 켈리 중장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홀랜스 스미스 해병중장은 리처드슨 육군중장의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해병 제 4단장 해리 슈미트 소장과 함께 리처드슨 중장의 사령부를 찾아갔으나, 리처드슨은 그에게 대놓고 폭언을 퍼부었다. 이 때 스미스 중장은 그 다혈질 성격답지 않게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16] 그러나 켈리 해군중장은 리처드슨 육군 중장이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처음엔 지휘계통을 지켜달라고 말했으나 리처드슨이 따르지 않자 역시 그도 폭언을 퍼부으며 맞섰다.[17]
이 사건은 중부 태평양 지역의 전 군을 지휘통제하는 미 제5함대(사령관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 해군 대장)가 편성된 이후 5함대 내에 주요 보직을 해군과 육군 중 누가 맡을 것인지를 놓고 벌어진 미묘한 신경전을 심화시켰다. 각 군 합동작전에서는현역 해병사단과 주방위군 27보병사단의 전력차이나, 해병대와 육군의 전투교리 차이 등을 고려했어야 하고, 통합군 사령관이라는 직책은 타군과의 연계를 공고히 하고 소외감을 주어서는 안되는, 즉 정치적인 능력도 상당히 요구되는 직위였음에도 불구하고 홀랜드 스미스 장군은 그 부분을 간과한 것이다. 그 결과 미 해군과 육군의 갈등이 폭발한다.
타라와 전투에서 해병대의 엄청난 인명손실로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은 전 국민적 비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여론은 이번 사건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즉, 해군의 지상부대인 해병대는 육군이 지휘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예하 해군부대와 육군부대의 갈등에 대해서 불필요한 감정 싸움이라고 생각했고, 합참과 육군에서도 공감했기 때문에 육군은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을 태평양에서 빼냈고, 홀랜스 스미스 해병 중장의 상급 지휘관인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 미 해군 참모총장 겸 함대 총사령관 킹 제독은 육군참모차장 조셉 맥너니 중장의 제안을 받아들여[18] 사이판 전투가 종료된 후 그 즉시 그를 아무 실권이 없는 태평양 함대 해병대(FMF Pacific) 사령관으로 영전시키는 형식으로 일선 전투 임무에서 빼버렸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해 홀랜드 스미스 장군은 해군과 육군에게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히면서 태평양 함대 해병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면서도 항복조인식에조차 참석하지 못하였다. 자신이 요청을 했으나 니미츠 제독이 거절했다고.[19]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은 당연히 군경력이 끝장났고[20][21], 해임 이후 하와이 수비대[22]였던 육군 제98보병사단장으로 잠시 지냈다[23]본토에 있는 캠프 로빈슨에서 보병보충대장(훈련소장)을 지내고, 주프랑스 미국대사관의 국방무관으로 근무하다 1948년 대령으로 전역했다. 이후 105세까지 장수하다가 1998년 사망하였다.
사실 홀랜드 스미스 중장을 전폭적으로 밀어준 것은 스프루언스 제독이었으나, 육군은 그를 거의 비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랄프 스미스 소장 해임 건으로 인해 스프루언스 제독이 그것을 불허하면 육군과의 관계는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면 북부상륙부대 사령관인 홀랜드 스미스 중장의 권위는 치명타를 입어 해병대의 사기 저하는 물론이고 지휘가 거의 불가능해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홀랜드 스미스 중장을 제외하고 태평양 방면에 대신 앉힐 수 있을 만한 해병대 장성도 없었다.[24] 거기에 북부상륙부대는 해병대가 주축이었던 바, 홀랜드 스미스 중장 대신 육군 장성을 앉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육군도 이 사정을 알고 있어 스프루언스 제독에 대한 비난은 거의 하지 않았다.

4. 민간인들의 운명


사이판에 거주 중이던 민간인들은 끔찍한 운명을 맞았다. [25]
6월 16일 새벽에 일본군은 여자와 아이들이 포함된 민간인들을 방패막이로 삼아서 야습을 감행했다. 민간인들이 항복하러 오는 줄 알았던 미 해병대 제4해병사단 제25연대는 그 뒤에 일본군이 숨어서 따라오는 것을 보고 포격으로 응수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군은 격퇴당했다.
이후에도 민간인들의 운명은 끔찍했다. 평소 일본군으로부터 미군은 악마라는 세뇌를 받아왔던 그들은 미군에게 투항하지 않고 잇따라 자살해 버린 것이다. 미군은 이들에게 계속 투항을 권고하는 한편 좋은 대우를 약속했지만 주민들은 이미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였기 때문에, 전투가 사실상 끝난 9일, 사이판의 북쪽 절벽에선 5천 여 명의 민간인이 미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덴노 헤이카 반자이'[26]를 외치며 모두 바닷속으로 투신자살했다. 당시 미군이 촬영한 기록영상들도 남아있다.[27]
현재 이 장소에는 만세 절벽(Banzai Cliff)라는 명칭이 붙어있으며 당시 자살한 이들을 기리는 위령탑이 남아있다. 그런데 일본인 위령탑, 조선인 위령탑, 오키나와인 위령탑이 각각 따로 있다. 이렇게 위령탑이 많은 이유는 당시 사이판은 일본이 사탕수수 농장을 잔뜩 가꿔 놓은 상태여서 인부로 조선인, 오키나와인들도 많이 와 있었고, 역시 일본인 민간인과 함께 죽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자살한 건 아니고, 망설이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한 예로 미군이 자살하려고 망설이던 민간인을 발견했는데, 그 직후 곁에 있던 일본 육군 병사가 자살을 독촉하기 위해 민간인들을 사살했다. 이 만행에 분노한 미군은 문제의 일본군을 즉결처분해 버렸다고 한다.
한편 이 때 뛰어내렸다가 기적적으로 나뭇가지에 걸려 살아남은 일본 여성도 한 명 있어서 나름 화제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일어났던 일화 중 동굴에서 겁먹은 아기의 입을 막기 위해 옷으로 입을 막았다가 아기가 사망하는 일도 일어났다.[28]
이 때까지 일본군이 민간인까지 현지에서 강제징집해서 싸우거나, 일본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군과 같이 싸운 전례는 있었어도 일본군이 자국 민간인들에게 자살을 강요하거나 살해하는 사태가 대량으로 발생한 것은 사이판 전투가 최초이며, 바로 인근 섬인 티니안 섬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의문점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런 참상을 불러온 원인이 밝혀졌다. 일본 제국천황쇼와 덴노가 1944년 6월 30일에 칙명을 내려서 '''사이판의 민간인에게 자살을 권유'''한 것이었다.[29] 그 이유는 사이판에 거주하는 일본 민간인이 잡혀서 미국의 선전방송에라도 나가게 되면 일본의 사기가 떨어지고 미국의 사기가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30] 이 명령에 도조 히데키 총리대신조차도 '폐하께서 이러실 리가 없다'며 칙명을 중간에서 가로채서 멋대로 보류하는 상황까지 발생했으나, 결국 7월 1일 사이판 전투의 지휘관들에게 히로히토의 칙명이 방송으로 전달되었다.[31]
사이판 전투를 앞두고 미국 언론에서 미군의 일본군 전사자 사체 훼손 사건이 보도된 것도 원인이 되었다. 위 사건은 미국 내에서 보도되었기 때문에 조작이라 볼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당연히 일본에도 전해져 보도되었다. 게다가 비주얼적으로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이후 일본 민간인은 미군에 대하여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공포심은 이후에도 이어져 미군 상륙작전시 일본인 민간인이 잇따라 자살하는 계기가 되었다.[32]
사이판 전투에서 일본 측 민간인은 2만 200여 명이 쓸모없이 목숨을 끊었는데, 이는 그 지역 민간인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되는 규모였다.[33] 즉 사이판 전투에선 무고한 민간인들마저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5. 양측의 피해


미군은 3400명이 넘는 사망자, 일본군은 24000명 가량 나온바 1:7의 비율이 된다.하지만 미군 부상자가 10,364명이나 되어 사상자 기준으로는 1:1.8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에 민간인 사망자도 2만명이 넘었다. 대부분의 민간인 사망자는 자살자, 또는 강요에 의해 죽은 자들이다.

6. 전투 이후


사이판 점령 후 미 육군은 섬에 활주로를 건설하고 목표했던 B-29의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을 개시했다. 미국은 사이판 점령으로 태평양에서의 승리는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후 유럽 전선에 편하게 집중하여 독일군을 맘껏 유린한다.
사이판 전투가 일본제국 수뇌부에게 준 충격은 거대했다. 이전에도 여러 번 패배했지만 사이판 전투의 패배는 여러모로 수뇌부에게 그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 사이판 함락 이전의 전투들은 미드웨이나 과달카날과 같이 공격전이 실패했거나, 애투섬과 같이 큰 의미없는 곳에서의 방어전이었거나, 타라와와 같이 시간끌기나 몸빵용으로 확장해 놓은 전선에서의 방어전이었거나 하는 식이어서 수뇌부 입장에서도 패배에 대한 정신승리거리가 충분히 존재했다. 제대로 된 방어망이 여유를 가지고 구축된 곳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방어전에서 일본군이 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전쟁 전부터 일본의 위임통치지역인 사이판에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벌인 전투에서 육군 해군이 죄다 전멸을 당하면서, '우리 구역에서 각 잡고 제대로 싸워도 일본군이 쪽도 못 쓰고 깨지게 되는구나' 라는 사실을 수뇌부들이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 말 그대로 진검승부라고 여겼던 전투에서 그야말로 학살을 당하면서 '이쯤 되면 우리가 빠져야 될 때가 아닌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본격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실제로 이전 임팔 전투 때만 해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던 히로히토 덴노도 이 때를 기점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의견 개진을 중단한다.
사이판 함락으로 일본군의 절대국방권은 산산조각났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 내각이 붕괴하고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이 성립되었다.
해군군령부총장 나가노 오사미 원수는 전후 미군 조사에서

'''사이판을 잃었을 때 우리에게 지옥이 다가왔다.'''

라고 언급했으며, 고가 미네이치 제독의 참모장 후쿠도메 시게루 중장은

'''사이판을 잃었을 때 마지막 기회가 사라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라고 평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후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된 고가 미네이치 제독은 사석에서 일본이 승리할 확률은 '''3%'''도 되지 않는다고 평했으나 그 희박한 확률조차도 사이판 함락 후에는 '''0%'''로 떨어졌다. 즉 사이판 함락으로 '''일본 제국의 멸망은 확정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이판 전투와 필리핀 해 해전으로 일본해군의 항모기동부대가 전멸해 버렸다.

2. 일본 본토가 B-29의 폭격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

3. 미군 잠수함의 작전반경이 크게 늘어났다.

4. 도조 내각 붕괴와 함께 일본 정부의 전쟁수행의지와 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후,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나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등의 의한 출구전략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외교적 접촉이 가능했던 소련, 스웨덴, 스위스 대사관을 중심으로 조금이라도 나은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얻어내기 위해 강화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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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육군 제18보병연대의 오오바 사카에 대위는 생존한 부하 장병들과 민간인을 모아 타포차우산(Mountain Tapochau)에서 1944년 7월부터 1945년 12월 1일까지 저항을 벌여 '사이판의 여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옥쇄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반역자로 찍혔고, 비무장한 군인들을 공격한 적도 있었기에 미군에게도 비겁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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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그의 일화는 미 해병대 출신의 작가 돈 존스(Don Jones, 1924 ~)가 1982년에 출간한 실록소설인 'Oba, The Last Samurai: Saipan 1944-45'로 소개되었으며, 이 소설은 2011년에는 히라유마 히데유키 감독이 찍은 '태평양의 기적, 폭스라고 불리운 남자'라는 영화로 영화화되었다.

7. 창작물에서의 묘사


  • 윈드토커가 사이판 전투를 다루고 있다. 영화 내용은 제2차세계대전판 영웅본색이지만 일본군 장비의 고증에 나름 신경을 쓴 작품.
  •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나온다. 일본 육군은 사이판 사수를 위해 731부대의 세균전을 미군에게 시전하려 하지만 일본 육군 위생병이던 장하림이 저지한다. 이후 장하림은 미군의 포로가 되어 OSS에 가담한다. 다만 사이판에서 세균전을 저런 식으로 준비했다는 건 이 작품의 온전한 창작이다. 일본군들이 도를 지키려고 해서 그런 건 아니고, 이 전투에서 진다는 건 애시당초 생각을 안 하고 있던게 그 이유.... 드라마에서는 전투 전에 유독 비장한 각오로 전원 옥쇄가 당연한 듯한 분위기이나 실제로는 미군과 붙기 전부터 그러지는 않았다고...
  • PS2로 발매된 메달 오브 아너 시리즈의 콘솔판 작품중 하나인 라이징 썬의 중반부에서 이 전투를 다루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의 첫번째 미션은 필리핀 탈환전부터 진행된다.

8. 관련 자료



[1] 미군이 마셜 제도를 점령함으로써 마리아나 제도는 미군의 공격 범위권에 들어섰다.[2] 중국판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지칭되기도 한다. 다만, 11군장 요코야마 중장의 재빠른 철수와 국민당군의 대규모 기갑부대와 공군력의 부재로 포위섬멸에는 실패하였다.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나, 더 이상의 전략예비대가 없던데다 그나마 멀쩡한 부대들은 미국의 압력으로 버마 공략에 투입한 중국군에게 다음 해에 벌어진 대륙타통작전은 치명적이었다.[3] 사이판, 괌이 있는 마리아나 제도와 팔라우, 트럭 등이 있는 캐롤라인 제도 방어를 위해서 31군을 창설하고 사령부를 사이판에 놓았지만 정작 사이판에 미군이 상륙했을 때 31군 사령관 오바타 히데요시는 팔라우를 시찰하고 있다가 도조에게 당장 귀대하라며 욕을 먹으면서도, 한참 지옥도가 시작된 사이판에 귀대를 못 하고 괌에 임시 사령부를 차려 놓게된다. 이외에도 미군의 공격으로 사이판에 집결하지 못한 부대들도 있었지만, 미군 어뢰 때문에 팔라우나 트럭으로 가야 할 병력들이 사이판에 발이 묶여 있다가 전투를 맞게 된 경우도 있었다.[4] 미군은 마셜 제도의 섬들 중 사령부가 있는 콰잘레인 섬이 병력의 분산으로 도리어 전력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콰잘레인을 바로 먼저 쳐버렸다.[5] 일본군이 팔라우 쪽에 방어를 집중했다면 마리아나 쪽을 쳤을 거고, 그 반대였다면 필리핀을 어떻게든 탈환하고 싶어하는 맥아더가 팔라우를 지나 필리핀으로 직행해버릴 터였다.[6] 그 전 사단장은 가야노미야 츠네노리오라는 황실 인물이었다. 이쪽이야말로 사실 더 했는데, 그나마 지휘부가 바뀐 게 1944년 4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43사단이 사이판에 상륙 완료한 건 44년5월의 일.... 그나마 2선 부대의 경우는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서 장비를 많이 상실한 상태였다. 43사단 외에는 일부 혼성여단이나 야포대대 정도의 육군부대와 해군부대 약간이 있었다.[7] 엄밀히 말하면 사이판 전투에서 총책임자는 31군 사령관인 오바타 히데요시였으나 상술했듯 팔라우 출장중에 미군이 상륙하는 바람에 사이판에 가지 못했던 탓에 저리 되었던 것이기는 하다.[8] '해안가에 일렬로 참호를 파서 기다리다가 올라오는 족족 쏴죽인다'는 작전이다.[9] 사실 상륙작전에서 공격군이 가장 취약한 시기는 바로 상륙하는 순간이다. 바닷물, 모래사장 등 때문에 기동성에 제약이 걸리고 방어군은 준비만전의 태세로 공격군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상대가 미군이었다는 것으로 미 해군은 수백대의 구축함, 순양함, 전함도 모자라 항공모함의 함재기를 통해 섬에 보이는 모든것을 박살내는게 전매특허였다. 당연히 해안가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은 죄다 몰살당했다.[10] 단 해군육전대는 이 계획을 무시하고 먼저 주간공격을 하였다가 전멸했다. [11] 실은 항공 정찰 등으로 방어선 자체는 준비돼있었다. 어디로 올지를 몰라서 그랬지.[12] Greatest Tank Battles: "The Tank Battles of the Pacific"[13] Greatest Tank Battles: "The Tank Battles of the Pacific"[14] 지도의 27사단의 주공 방향 지형들에 붙은 이름에 주목해볼 것. Death Valley, Hell’s Pocket, Purple Heart Ridge(이 능선에 올라가면 반드시 상이기장을 탄다는 무시무시한 의미이다. 즉 올라가면 반드시 부상당하거나 죽는다는 의미) 그야말로 살벌하다.[15] 홀랜드 스미스 중장, 스프루언스 제독, 리치먼드 캘리 터너 제독 모두는 같은 소리만 반복하며 결단을 쉽게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3명을 보다 못한 칼 무어 해군대령이 총대를 메고 해임 명령서를 작성해 스프루언스 제독의 서명을 받아내었다.[16] 그의 회고록인 <산호와 장성들>에서는 스프루언스 제독과의 약속 때문이었다고 서술했다. 다만 그는 리처드슨 중장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보고서를 니미츠 제독에게 제출했다.[17] 여기서 총대를 멘 칼 무어 해군대령은 리처드슨 육군 중장과 리치몬드 캘리 터너 제독의 분노를 달래느라 엄청 고생했다.[18] 맥너니 중장은 육군 27사단에 문제가 있었음을 깔끔히 인정했고, 27사단장에서 하와이의 98사단장을 맡게 된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 을 빼내서 유럽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방침과 함께 대신 해군에게는 어떠한 육군 부대도 홀랜드 스미스 중장의 지휘 하에 전투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중재안을 내밀었다.[19] 이 때문에 전후 홀랜드 스미스 장군은 회고록을 내면서 자신이 해군에 의해 희생양으로 버려졌다고 니미츠 제독을 비난했다. 그리고 역시나 랄프 스미스 소장도 그의 사견이 잔뜩 들어간 회고록을 썼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장성들 간의 지휘권 다툼이나 작전에 대한 충돌 및 입장차에 대해 각자의 사견이 잔뜩 들어간 회고록들을 써댔기 때문에 전후에도 여러 논쟁이 많이 벌어졌다.[20] 그의 해임과정를 둘러싸고 해군 및 해병대과 갈등을 빚었던 육군의 내부(or 수뇌부)에서도 사건의 발단이었던 그의 실책을 나름 인정했기에 경력을 구제해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라면 조지 패튼처럼 다시 중요한 보직을 줘서 핵심적으로 재기용하려 했을 것이다. 또한 전쟁중에 군대 규모가 폭증하고 여기에 비례해 전쟁으로 빛을 보게된 실력 좋고 잠재력이 높은 많은 장성, 장교들이 기존의 무능한 장성/장교들을 대체하는 일도 빈번해서 랄프 스미스 장군은 육군 수뇌부에서 딱히 보호해야 할 인재는 아닌게 명백했다. 이 사건으로 워낙 찍혀서 그런지, 전후 미군이 군축을 단행하면서 그도 강등(Termination of rank)대상이 되어서 1946년 10월 30일에 전시계급이었던 소장과 준장 2계급이 동시에 박탈되고 대령으로 지내다 48년 전역한다.[21] 관련 사료를 접해보니 2차대전 전후의 미군은 구성원 상당수가 1차대전 전후와는 다르게 전시 계급을 유지할수 있었다. 다만, 역시 평시 계급이 확정(대개는 전쟁 전의 계급이 되기보단, 전시 진급의 일부를 참작해서 반영한 것이다.)되어서 급여같은 부분은 평시 수준으로 받고 보직은 전시 계급에 맞게 주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계속 한직/ 뺑뺑이로 돌린 듯하다. 만약 정말 강등(Termination of rank)되었다면 주로, 전쟁중에 상부에 찍힐만한 실책을 저질렀거나 나이에 비해 급속 진급하여 그런듯 하다.[22] 당시 하와이는 전간기부터 미군의 핵심 전략거점으로 인지되어 태평양 함대의 모항이 있었고 주둔중인 지상군과 방어화력도 본래 많았으며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대개 본토에서 보내는 신규 함정, 병력, 물자는 하와이를 경유하여 최전선으로 보내졌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 수비대가 최전선으로 이동하면 본토에서 새로 파병된 사단들이 자리를 메꾸는 일이 전쟁 내내 빈번했는데 45년이 되면서 최전선이 일본 본토에 근접해지고, 파병의 영향으로 미국 본토에는 전투부대가 거의 없었는데 하와이에만 1개사단이 붙박이로 배치되었다. 98사단은 유일하게 종전까지 하와이 주둔군으로 지내다 일본 항복후 GHQ의 점령군으로 일본에 보내졌다가 명달 안되어 해체되었다.[23] 여담이지만 후임 사단장은 바로 사이판 전투에서 미군의 군단포병대를 지휘한 아서 하퍼 육군 준장(포병)이 소장 진급후 보임되었고 부대가 해산되는 그날까지 맡았다. 이해가 안될지도 몰라서 덧붙이면, 장군쯤 되면 그간의 관록과 영관 시절 각종 보수교육(진급 코스)의 이수로 병과를 초월한 지휘력이 검증되어 보병 병과가 아니어도 사단급 이상 고급 지휘관이 될 여지가 많고 현재도 그렇다.[24] 굳이 따지자면 로이 가이거 소장이 있었는데 기수상으로는 스미스 중장보단 몇년 후배였지만 경력면에선 비슷했고(같은 군단장), 가이거 장군은 육군과의 관계가 원만했다. 다만 이 당시 그는 제2차 괌 전투를 지휘할 제3상륙군단장으로 있는 상태라 대타역할은 불가능했다. 스미스 중장은 전투 종결후 후방직책으로 밀려나지만 가이거 장군은 계속 실전부대를 지휘하여 펠렐류, 오키나와 전투(후반에 버크너 중장의 전사로 잠시 제10군 사령관으로 대행)에 참가했고 미주리 호의 항복식에 스미스 중장을 대신하여 미 해병대 대표로 승선했다.[25] 문제는 이게 다음 해인 1945년에도 똑같은 상황이 나온다는 거다. 오키나와 전투 참고.[26] 천왕 폐하 만세[27] 일본에서도 전투 전에 민간인들을 소개시키려던 노력을 하기는 했는데, 하필 민간인을 본토로 소개하던 수송선이 미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서 소개되던 민간인들이 전원 사망하는 일이 생겼다. 그 이후로 민간인 소개 작전은 포기, 사이판의 민간인들은 알다시피 비참한 운명을 맞게 된다. 비단 세뇌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민간인들이 마냥 미군을 믿을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28] 일본 제국 패망사 p.803[29] Bergamini, David(1971). Japan's Imperial Conspiracy.[30] 자살한 민간인에게는 전사자로 간주해서 명예와 예우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다는 부언도 붙기는 하였다.[31] 이 사건을 포함하여 사이판 전투의 여파는 엄청나 전투가 끝난 후에 도조 히데키와 히로히토가 전쟁에서 손을 떼버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도조는 표면상으로만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었고, 실제로는 후임 총리인 고이소 구니아키를 내세우고는 배후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하였지만 말이다.[32] Harrison, Simon (2006) Skull trophies of the Pacific War[33] 일본 제국 패망사 p.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