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리(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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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리는 2차대전으로 3개의 종군휘장을, 한국 전쟁으로 5개의 종군휘장을 수여받았다.
별명은 미주리 주의 약자 Mo를 따서 "Mighty Mo" 혹은 "Big Mo"였다. 상세한 제원은 아이오와급 전함 참조.
진수되는 미주리
취역 직후 각종 테스트와 관숙 항해를 거친 뒤 1944년 11월 11일에 노포크를 출항하여 18일에 파나마 운하를 통과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기함 임무를 맡기 위해 약간의 시설 개장을 거치고 12월 14일 출항하여 1945년 1월 13일에 캐롤라인 제도에 도착하여 드디어 태평양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현장에서 마크 미처 제독의 기함을 한동안 맡았다. 1월 27일에 TF 58에 소속되어 항모들을 보호하기 위해 출격하였으며[3] 2월 16일에는 1942년 호넷에서 이함한 둘리틀 특공대 이후로 처음 일본을 공습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 임무는 항모의 호위에 그쳤지만.
이후에는 이오지마 전투에서 2월 19일부터 화력지원을 시작했다. TF 58이 울리시에 귀항한 이후로 이번에는 항모 요크타운[4] 을 따라 3월 14일 출격하여 18일 일본 본토를 공격하면서 항모로 접근하는 적 항공기 4기를 격추하였다. 이후 항모 프랭클린이 일본군의 폭격으로 대파당하자 그를 호위하여 3월 22일까지 울리시 방면으로 동행하다가 귀환하여 오키나와 전투에 앞서 사전 포격에 나섰다.
4월 7일에는 야마토급 전함 1번함 야마토를 포함한 일본 해군의 잔존부대가 접근하였으나 미주리가 나설 것도 없이 함재기들의 공습으로 인해 어뢰로 격침되었다. 생존한 4척의 일본 구축함들은 사세보로 귀항했다. 4월 11일 미주리는 카미카제 공격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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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유로 인해 화재가 발생하였으나 함 자체의 손상은 미미했고 화재도 금방 진압되었다.
4월 17일 12마일 거리 밖에 있는 잠수함을 발견하여 대잠작전을 유도하였다. 결국 구축함과 경항모 바탄에 의해 일본 잠수함 이56이 격침되었다. 이 때까지로 미주리는 오키나와에서의 임무를 중단하고 기동부대에서 빠져나와 울리시로 귀항했다가 5월 18일 윌리엄 홀시 제독의 3함대 기함이 되어 오키나와로 복귀했다. 그리고 다시금 포탄을 퍼부었다. 이후로 6월 2일부터 3일까지 큐슈의 일본 비행장을 타격하였다.
6월 5일에서 6일간 윌리엄 홀시 제독이 이후로도 두고 두고 까이는 태풍 속 항해를 결행하였으나 미주리는 상부 구조물에 일부 손상을 입는 선에서 그쳐 중요한 부위의 손상은 피해갔다. 3함대는 8일에 다시 큐슈를 두들기다가 레이테 만으로 물러났다.
1945년 6월 13일 미주리는 레이테의 산 페드로에 도착하였다. 오키나와에서 지원작전을 편 지 3개월 만이었다. 7월 8일 일본을 향해 북쪽으로 항로를 잡고 7월 10일에 도쿄를 기습하었으며 7월 15일에는 수상함 최초로 일본 본토에 포격을 개시했다. 홋카이도의 무로란을 포격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 강철과 와니시 철공소의 시설이 파괴되었다.
일본 본토에 대한 공해 합동 타격은 7월 25일까지 지속되었으며 미주리는 주로 도쿄를 직접 타격하는 항모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7월 말이 되면서 일본에게 영해란 개념이 거의 상실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8월에는 드디어 일본에서 원자탄이 터지면서 일본이 항복하게 된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미주리는 점령함대 기함 임무를 일시적으로 1번함 아이오와에게 넘긴 뒤 29일 항복 조인식장으로 쓰이기 위해 도쿄만으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9월 2일 미주리의 함상[5] 에서 전쟁이 끝났다. 5일에는 기함 임무를 사우스다코타에게 완전히 넘기고 괌에서 귀환병들을 태우고 본토로 돌아왔다.
뉴욕의 해군 공창에서 한 차례 오버홀을 받은 뒤 1946년 3월 21일 주미 터키대사의 시신을 고국인 터키로 옮기는 임무를 맡았다. 여기에는 상당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미주리가 터키로 향한다는 것은 미국이 터키와 그리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정치적인 제스쳐였다. 당시 그리스는 지중해로 패권을 노리는 소련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내전을 일으킨 상황이었다. 소련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위협을 느낀 것은 터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미주리의 입항을 환영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미주리는 입항하면서 예포를 18발 발사함으로써 최대의 예우를 갖추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리스를 들러 소련을 견제한 것은 물론이다.
이후로 대서양 함대에 배속되어 항해훈련을 주로 하다가 1949년 9월 23일부터 1950년 1월 17일까지 오버홀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뜻하지 않은 전쟁 준비가 되고 말았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주리는 8월 19일 UN군에 합류하기 위해 노포크에서 출항했다. 9월 14일 큐슈의 서쪽에서 UN군과 합류한 미주리는 바로 스미스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미주리는 한국 영해에 진입한 최초의 미군 전함이 되었으며 UN군과 합류한 바로 다음 날인 15일 삼척 앞바다에서 삼척에 포격을 가했다. 이는 인천 상륙작전의 양동작전의 성격이 짙은 것으로 삼척에 상륙 전 사전포격을 가하는 것처럼 움직인 것이다. 이후 중순양함 헬레나[6] 와 구축함 두 척과 합류한 미주리는 미 8군의 진격을 지원하게 되었다. 미주리는 9월 19일 인천에 도착하였으며 10월 10일 제5순양함 전대장 히긴스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10월 14일에는 사세보에 도착하여 7함대 사령관 스트러블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에식스급 항공모함 밸리 포지의 호위함으로 동해안에 있던 미주리는 10월 12일부터 26일까지 청진과 단천에 포격을 가했으며 그 뒤에는 원산을 포격했다. 12월 23일에는 흥남 앞바다에서 미군 제3보병사단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철수하는 것을 지원했다. 이른바 '''흥남 철수'''다.
1951년 3월 19일까지 미주리는 항모 호위와 지원 포격 임무를 수행하다가 요코스카로 물러나 3일 뒤인 3월 24일에 요코스카에 입항했다. 그리고 잠시간 임무에서 해제되어 미국으로 돌아가 훈련에 쓰이다가 오버홀을 다시 받고 1952년 10월 17일 요코스카로 돌아와 7함대 사령관 클라크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다시금 해상 포격 임무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단천, 청진, 성진, 원산, 함흥, 흥남이 미주리의 타겟이었다. 이 임무는 1953년 1월 2일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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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리는 1953년 1월 5일 사세보로 잠시 돌아갔다가 23일 영국 해군제독 가이 러셀의 방문을 받은 뒤 바로 다음 주부터 다시금 지원 포격에 나섰다. 원산, 단천, 흥남 등지를 두들기며 북한군의 동해안 보급선을 끊었다. 그러나 3월 6일 미주리의 함장 워너 러셀 대령이 심장마비로 쓰러지면서 임무는 잠정 중단되었고 기함 임무도 2번함 뉴 저지에게 넘겼다. 미주리는 4월 7일 요코스카에서 출항하여 5월 6일 노포크로 귀항했다. 그리고 미주리의 한국전쟁은 그대로 끝났다.
이후 미주리는 주로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항해훈련을 하다가 1954년 9월 18일 퓨젯사운드 해군 공창에서 오버홀을 받고 1955년 2월 26일 퇴역하여 예비 전력이 되었다. 미주리는 태평양 예비함대에 배속되어 브레머튼에 정박하여 연간 10만 명 정도의 관광객들을 받았다. 그리고 미주리가 다시는 현역으로 돌아올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1984년 미군은 잠들어있던 미주리를 다시 깨워 개장을 시작했다. 미주리는 무장 플랫폼으로서 전 세계에 퍼진 미 해군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에 쓰이게 된다. 미주리는 1986년 5월 10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재취역했다.
미주리는 4개월 후 오스트레일리아, 디에고 가르시아, 이집트, 터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파나마 등 8개국에 돌아다니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1987년 7월 25일 중동의 정세가 급변함에 따라 미주리는 인도양으로 급파되었다. 페르시아만, 인도양, 북아라비아해 등지에서 100일 이상 수상에 머물던 미주리는 1988년 미국으로 귀환했다. 이후 몇 개월 뒤 림팩 훈련에도 참여하였다.
1989년 롱비치 해군 공창에서 정기 점검을 받았고 후반기에는 독립기념일 불꽃놀이에 참여하는가 하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한 배우와 가수들이 미주리의 선수쪽 갑판에서 락 뮤직 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했다.
1989년 10월 24일 한국에 방문하여 부산광역시에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림팩 훈련에 참여하였는데 이 때는 대한민국 해군도 참여하였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8월 중순에 조지 부시 대통령은 선발대와 함께 강력한 함대를 사우디 아라비아로 파견하였다. 미주리는 당초 서태평양을 순회할 예정이었으나 출항하기 며칠 전에 모든 일정이 취소되고 중동으로 파견되었다.
11월 중순에 아라비아만으로 향한 미주리는 진주만에서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필리핀을 경유하여 태국을 거쳐 훈련을 진행하며 이동했다. 포격 이외에도 화학전을 대비한 훈련이 주가 되었다.
미주리가 아라비아만에 도착한 것은 1991년 1월 초로 1월 17일에 이라크군을 향해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하였다. 총합 28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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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는 미주리가 드디어 16인치 주포를 사격하였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로 처음 쏘는 것이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16인치 포탄 783발을 발사했으며 무인기로 탄착관측사격을 실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2월 28일 이라크가 항복하면서 전쟁도 끝나고 미주리도 귀환하였다.
1991년 추수감사절 직후 미주리는 마지막 임무를 부여받았다. 바로 50년 전 진주만에서 1941년 12월 7일 숨진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한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미주리의 마지막 공식 항해는 미국 본토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1,000발의 16인치 포탄과 6,000발의 5인치 포탄, 그리고 16개의 하푼 미사일과 남은 토마호크 미사일을 하역해야 했다.
미주리는 1992년 3월 31일 롱비치에서 마침내 퇴역하였다.
1998년 5월 4일 해군청장 존 달트는 미주리를 호놀룰루의 미주리 기념사업회에 기증함으로써 완전히 미주리를 민간에 이양하게 되었다.
현재 미주리는 진주만의 포드 섬에 정박해 있으며 아직도 바다 속에 있는 애리조나의 애리조나 기념관 근처에 있다. 그러니까, 미국의 태평양 전쟁 참전의 시작을 연 전함과, 태평양 전쟁의 종전을 알린 전함이 서로의 근처에 있는 것.
미주리도 박물관으로 보전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애리조나를 보러 갈 때 같이 들르기에 좋다. 단, 미주리는 애리조나와 달리, 입장료를 받는다.
2018년 2월경에 팰렁스, 하푼, 토마호크 등 현대전 무장을 들어내고 2차 세계 대전과 한국전쟁 때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린 것이 확인되었다. 제적은 이미 1995년에 실행됐기 때문에 현대전 무장이 철거된 것이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매체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매체에서 아이오와급 전함이 등장한다 싶으면 대체로 미주리인 경우가 많다. 주역으로 나온 영화도 있고 스쳐 지나가듯 나오는 경우도 많다. 아이오와급의 얼굴마담인 셈. 일본 매체에서 등장하지 않는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1. 개요
아이오와급 전함의 3번함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도중에 뉴욕 브루클린 해군 공장에서 건조되었다. 1944년 1월 29일 진수되어 동년 6월 11일에 취역했다. 초대 함장은 윌리엄 M. 캘러건 대령이며 미주리라는 이름을 받은 네 번째 배다. 즉 4대 미주리. 현재는 버지니아급 잠수함 중 한 척이 미주리의 이름을 물려받아 활동 중이다. 한 번 퇴역했다가 재취역해서 전쟁을 한 번 더 겪은 우여곡절이 많은 전함이고 한국과의 인연도 은근히 깊은 함이다.'''Strength for Freedom'''
'''자유를 위한 힘'''
USS 미주리(BB-63)의 표어
미주리는 2차대전으로 3개의 종군휘장을, 한국 전쟁으로 5개의 종군휘장을 수여받았다.
별명은 미주리 주의 약자 Mo를 따서 "Mighty Mo" 혹은 "Big Mo"였다. 상세한 제원은 아이오와급 전함 참조.
2. 활약상[2]
2.1. 제2차 세계대전
진수되는 미주리
취역 직후 각종 테스트와 관숙 항해를 거친 뒤 1944년 11월 11일에 노포크를 출항하여 18일에 파나마 운하를 통과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기함 임무를 맡기 위해 약간의 시설 개장을 거치고 12월 14일 출항하여 1945년 1월 13일에 캐롤라인 제도에 도착하여 드디어 태평양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현장에서 마크 미처 제독의 기함을 한동안 맡았다. 1월 27일에 TF 58에 소속되어 항모들을 보호하기 위해 출격하였으며[3] 2월 16일에는 1942년 호넷에서 이함한 둘리틀 특공대 이후로 처음 일본을 공습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 임무는 항모의 호위에 그쳤지만.
이후에는 이오지마 전투에서 2월 19일부터 화력지원을 시작했다. TF 58이 울리시에 귀항한 이후로 이번에는 항모 요크타운[4] 을 따라 3월 14일 출격하여 18일 일본 본토를 공격하면서 항모로 접근하는 적 항공기 4기를 격추하였다. 이후 항모 프랭클린이 일본군의 폭격으로 대파당하자 그를 호위하여 3월 22일까지 울리시 방면으로 동행하다가 귀환하여 오키나와 전투에 앞서 사전 포격에 나섰다.
4월 7일에는 야마토급 전함 1번함 야마토를 포함한 일본 해군의 잔존부대가 접근하였으나 미주리가 나설 것도 없이 함재기들의 공습으로 인해 어뢰로 격침되었다. 생존한 4척의 일본 구축함들은 사세보로 귀항했다. 4월 11일 미주리는 카미카제 공격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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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유로 인해 화재가 발생하였으나 함 자체의 손상은 미미했고 화재도 금방 진압되었다.
4월 17일 12마일 거리 밖에 있는 잠수함을 발견하여 대잠작전을 유도하였다. 결국 구축함과 경항모 바탄에 의해 일본 잠수함 이56이 격침되었다. 이 때까지로 미주리는 오키나와에서의 임무를 중단하고 기동부대에서 빠져나와 울리시로 귀항했다가 5월 18일 윌리엄 홀시 제독의 3함대 기함이 되어 오키나와로 복귀했다. 그리고 다시금 포탄을 퍼부었다. 이후로 6월 2일부터 3일까지 큐슈의 일본 비행장을 타격하였다.
6월 5일에서 6일간 윌리엄 홀시 제독이 이후로도 두고 두고 까이는 태풍 속 항해를 결행하였으나 미주리는 상부 구조물에 일부 손상을 입는 선에서 그쳐 중요한 부위의 손상은 피해갔다. 3함대는 8일에 다시 큐슈를 두들기다가 레이테 만으로 물러났다.
1945년 6월 13일 미주리는 레이테의 산 페드로에 도착하였다. 오키나와에서 지원작전을 편 지 3개월 만이었다. 7월 8일 일본을 향해 북쪽으로 항로를 잡고 7월 10일에 도쿄를 기습하었으며 7월 15일에는 수상함 최초로 일본 본토에 포격을 개시했다. 홋카이도의 무로란을 포격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 강철과 와니시 철공소의 시설이 파괴되었다.
일본 본토에 대한 공해 합동 타격은 7월 25일까지 지속되었으며 미주리는 주로 도쿄를 직접 타격하는 항모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7월 말이 되면서 일본에게 영해란 개념이 거의 상실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8월에는 드디어 일본에서 원자탄이 터지면서 일본이 항복하게 된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미주리는 점령함대 기함 임무를 일시적으로 1번함 아이오와에게 넘긴 뒤 29일 항복 조인식장으로 쓰이기 위해 도쿄만으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9월 2일 미주리의 함상[5] 에서 전쟁이 끝났다. 5일에는 기함 임무를 사우스다코타에게 완전히 넘기고 괌에서 귀환병들을 태우고 본토로 돌아왔다.
2.2. 대전 이후 한국전쟁 전까지
뉴욕의 해군 공창에서 한 차례 오버홀을 받은 뒤 1946년 3월 21일 주미 터키대사의 시신을 고국인 터키로 옮기는 임무를 맡았다. 여기에는 상당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미주리가 터키로 향한다는 것은 미국이 터키와 그리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정치적인 제스쳐였다. 당시 그리스는 지중해로 패권을 노리는 소련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내전을 일으킨 상황이었다. 소련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위협을 느낀 것은 터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미주리의 입항을 환영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미주리는 입항하면서 예포를 18발 발사함으로써 최대의 예우를 갖추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리스를 들러 소련을 견제한 것은 물론이다.
이후로 대서양 함대에 배속되어 항해훈련을 주로 하다가 1949년 9월 23일부터 1950년 1월 17일까지 오버홀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뜻하지 않은 전쟁 준비가 되고 말았다.
2.3.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주리는 8월 19일 UN군에 합류하기 위해 노포크에서 출항했다. 9월 14일 큐슈의 서쪽에서 UN군과 합류한 미주리는 바로 스미스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미주리는 한국 영해에 진입한 최초의 미군 전함이 되었으며 UN군과 합류한 바로 다음 날인 15일 삼척 앞바다에서 삼척에 포격을 가했다. 이는 인천 상륙작전의 양동작전의 성격이 짙은 것으로 삼척에 상륙 전 사전포격을 가하는 것처럼 움직인 것이다. 이후 중순양함 헬레나[6] 와 구축함 두 척과 합류한 미주리는 미 8군의 진격을 지원하게 되었다. 미주리는 9월 19일 인천에 도착하였으며 10월 10일 제5순양함 전대장 히긴스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10월 14일에는 사세보에 도착하여 7함대 사령관 스트러블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에식스급 항공모함 밸리 포지의 호위함으로 동해안에 있던 미주리는 10월 12일부터 26일까지 청진과 단천에 포격을 가했으며 그 뒤에는 원산을 포격했다. 12월 23일에는 흥남 앞바다에서 미군 제3보병사단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철수하는 것을 지원했다. 이른바 '''흥남 철수'''다.
1951년 3월 19일까지 미주리는 항모 호위와 지원 포격 임무를 수행하다가 요코스카로 물러나 3일 뒤인 3월 24일에 요코스카에 입항했다. 그리고 잠시간 임무에서 해제되어 미국으로 돌아가 훈련에 쓰이다가 오버홀을 다시 받고 1952년 10월 17일 요코스카로 돌아와 7함대 사령관 클라크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다시금 해상 포격 임무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단천, 청진, 성진, 원산, 함흥, 흥남이 미주리의 타겟이었다. 이 임무는 1953년 1월 2일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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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리는 1953년 1월 5일 사세보로 잠시 돌아갔다가 23일 영국 해군제독 가이 러셀의 방문을 받은 뒤 바로 다음 주부터 다시금 지원 포격에 나섰다. 원산, 단천, 흥남 등지를 두들기며 북한군의 동해안 보급선을 끊었다. 그러나 3월 6일 미주리의 함장 워너 러셀 대령이 심장마비로 쓰러지면서 임무는 잠정 중단되었고 기함 임무도 2번함 뉴 저지에게 넘겼다. 미주리는 4월 7일 요코스카에서 출항하여 5월 6일 노포크로 귀항했다. 그리고 미주리의 한국전쟁은 그대로 끝났다.
2.4. 퇴역
이후 미주리는 주로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항해훈련을 하다가 1954년 9월 18일 퓨젯사운드 해군 공창에서 오버홀을 받고 1955년 2월 26일 퇴역하여 예비 전력이 되었다. 미주리는 태평양 예비함대에 배속되어 브레머튼에 정박하여 연간 10만 명 정도의 관광객들을 받았다. 그리고 미주리가 다시는 현역으로 돌아올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2.5. 재취역
1984년 미군은 잠들어있던 미주리를 다시 깨워 개장을 시작했다. 미주리는 무장 플랫폼으로서 전 세계에 퍼진 미 해군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에 쓰이게 된다. 미주리는 1986년 5월 10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재취역했다.
미주리는 4개월 후 오스트레일리아, 디에고 가르시아, 이집트, 터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파나마 등 8개국에 돌아다니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1987년 7월 25일 중동의 정세가 급변함에 따라 미주리는 인도양으로 급파되었다. 페르시아만, 인도양, 북아라비아해 등지에서 100일 이상 수상에 머물던 미주리는 1988년 미국으로 귀환했다. 이후 몇 개월 뒤 림팩 훈련에도 참여하였다.
1989년 롱비치 해군 공창에서 정기 점검을 받았고 후반기에는 독립기념일 불꽃놀이에 참여하는가 하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한 배우와 가수들이 미주리의 선수쪽 갑판에서 락 뮤직 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했다.
1989년 10월 24일 한국에 방문하여 부산광역시에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림팩 훈련에 참여하였는데 이 때는 대한민국 해군도 참여하였다.
2.6. 걸프 전쟁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8월 중순에 조지 부시 대통령은 선발대와 함께 강력한 함대를 사우디 아라비아로 파견하였다. 미주리는 당초 서태평양을 순회할 예정이었으나 출항하기 며칠 전에 모든 일정이 취소되고 중동으로 파견되었다.
11월 중순에 아라비아만으로 향한 미주리는 진주만에서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필리핀을 경유하여 태국을 거쳐 훈련을 진행하며 이동했다. 포격 이외에도 화학전을 대비한 훈련이 주가 되었다.
미주리가 아라비아만에 도착한 것은 1991년 1월 초로 1월 17일에 이라크군을 향해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하였다. 총합 28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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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는 미주리가 드디어 16인치 주포를 사격하였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로 처음 쏘는 것이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16인치 포탄 783발을 발사했으며 무인기로 탄착관측사격을 실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2월 28일 이라크가 항복하면서 전쟁도 끝나고 미주리도 귀환하였다.
2.7. 재퇴역
1991년 추수감사절 직후 미주리는 마지막 임무를 부여받았다. 바로 50년 전 진주만에서 1941년 12월 7일 숨진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한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미주리의 마지막 공식 항해는 미국 본토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1,000발의 16인치 포탄과 6,000발의 5인치 포탄, 그리고 16개의 하푼 미사일과 남은 토마호크 미사일을 하역해야 했다.
미주리는 1992년 3월 31일 롱비치에서 마침내 퇴역하였다.
1998년 5월 4일 해군청장 존 달트는 미주리를 호놀룰루의 미주리 기념사업회에 기증함으로써 완전히 미주리를 민간에 이양하게 되었다.
현재 미주리는 진주만의 포드 섬에 정박해 있으며 아직도 바다 속에 있는 애리조나의 애리조나 기념관 근처에 있다. 그러니까, 미국의 태평양 전쟁 참전의 시작을 연 전함과, 태평양 전쟁의 종전을 알린 전함이 서로의 근처에 있는 것.
미주리도 박물관으로 보전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애리조나를 보러 갈 때 같이 들르기에 좋다. 단, 미주리는 애리조나와 달리, 입장료를 받는다.
2018년 2월경에 팰렁스, 하푼, 토마호크 등 현대전 무장을 들어내고 2차 세계 대전과 한국전쟁 때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린 것이 확인되었다. 제적은 이미 1995년에 실행됐기 때문에 현대전 무장이 철거된 것이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3. 매체에서의 등장
일본의 매체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매체에서 아이오와급 전함이 등장한다 싶으면 대체로 미주리인 경우가 많다. 주역으로 나온 영화도 있고 스쳐 지나가듯 나오는 경우도 많다. 아이오와급의 얼굴마담인 셈. 일본 매체에서 등장하지 않는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 메탈기어 솔리드 4에서는 SOP를 전면도입한 미군 이 리퀴드 오셀롯에 의해 미 해군의 전력마저 봉쇄당한 상황에서 아우터 헤븐에 대항하는 유일한 재래식 함선으로 등장한다. 진주만에서 끌고 왔다는 것이 언급된다.
- 네이비필드에서 미국 AUS 함선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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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배틀쉽의 진주인공. 수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현대 이지스함 따위는 요트로 만들어 버리는 위풍당당한 풍채와 더불어 작중 등장한 함선들을 모두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린 외계인의 포탄을 몇방이나 직격당하고도 버티는 막강한 내구도와 약속된 정당한 화력의 16인치 주포로 외계인을 화끈하게 박살내며 활약하는 모습에 전함덕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 전함소녀에 등장한다. 성능은 역시나 아이오와급 전함답게 가히 최강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처음 일러스트가 공개되었을 때 옆구리의 끼어있는 문서가 항복문서인 줄 알았으나 나온 후 정보로는 카사블랑카 해전 보고서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자세한건 미주리(전함소녀)항목으로
- 영화 언더 시즈의 주역이긴 한데 촬영 당시에는 현역이었던지라 대역을 쓰셨다.
- 신세기 에반게리온 8화에서 등장.
- 영화 핵소 고지에서 화력지원함으로 등장.
- 월드 인 컨플릭트에서도 딱 한 번 출연하는데 이후로는 스토리 상 후반에 격침되었다고 언급만 된다. 등장한 미션에서는 화력지원을 공짜로 지정한 구역에 3초 내로 착탄시켜주는 소련군의 기갑웨이브를 모랄빵시켜주는 무지막지한 위력을 보여준다.[7] 살상 반경은 크지 않지만 가끔 중장갑 표적은 살아남기도 하는 일반적인 포병 사격과는 달리 그 안에 든 적은 무엇이든 확실하게 박살내며 무엇보다 포인트를 잡아먹지 않고 공짜로 쏴준다는 점에서 절이라도 해야 할 판.
- 월드 오브 워쉽에서 프리미엄 9티어 전함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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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val Creed:Warships에서 프리미엄 5티어 전함으로 나온다, 전용 레이더의 성능은 좀 거시기 하지만, 전용 대공 소모품은 항공모함의 공격 분산도만 올리지만, 동시에 적포탄의 분산도도 올려서 사용하기 좋은 소모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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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람항로 2019년 크리스마스 특집방송 이벤트로 엔터프라이즈 성우인 이시카와 유이가 미주리를 방문하여 이 전함의 이곳저곳을 가보고 촬영하였다. 마지막에는 헬리콥터를 타고 배 주변을 돌면서 전함 전체의 사진을 찍기도. 가기전에 나온 말로 내년에 미주리를 실장할 예정이니 가서 함선 조사를 해달라 부탁하는걸 보면 벽람항로에도 미주리가 나오는게 확정된 것으로 보인다.[8]
- 어비스 호라이즌에 전함으로 등장한다.
- 영화 마이웨이에서 노르망디 포격 때 등장했는데, 고증오류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1944년 6월 6일에 개시될 때, 미주리는 1944년 6월 11일에 취역했으며 종전까지 태평양 전선에서 활동했다.
- 모형상품화로는 타미야[9] , 하세가와, 트럼페터[10] , 베리파이어[11] 등에서 다양한 스케일의 프라모델이 발매되어 있다. 한국 회사로는 합동과학에서 뉴저지와 더불어 1/400 스케일로 내놓은 바 있고, 아카데미과학의 스냅타이트, 옥스포드 완구의 블록으로 출시되었다. 안그래도 함선모형이 난이도 높은데, 독도함 다음으로 인젝션으로 나와 입문하기 좋게 출시되었다. 꽤 괜찮은 품질이나 단차가 조금은 있으며, 접착제가 필요한 부분도 있으니 구입시 유의.
[1] 이 부분은 미 해군의 미주리 설명을 참조하였습니다.[2] 이 부분은 미 해군의 미주리 설명을 참조하였습니다.[3] 에식스급 항공모함 렉싱턴의 태스크 그룹에 소속되었다.[4] 당연하지만 요크타운급 1번함이 아니라 에식스급 항공모함이다.[5] 한쪽 다리를 절뚝 거리며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와 항복 문서에 싸인을 하는 일본 측 인사는 A급 전범이자 외무대신인 시게미츠 마모루인데,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부상을 입어 당시에는 의족을 착용한 상태였다.[6] 경순양함 헬레나와는 다른 배이다.[7] 일반적인 포병사격은 8초 정도 걸리기 때문에 적이 피하는 경우도 있으나 미주리의 함포사격은 3초면 떨어지므로 쏘는 족족 소련군에게 맞는다고 보면 된다.[8] 하지만 어떠한 이유인진 불명이나 2020년엔 나오지 않았다. 별개로 시나노가 나왔고 UR 등급이라는 SSR 상위 등급으로 나왔는데 아이오와급은 네임벨류로는 야마토급에 밀리지 않기에 UR 등급 나올 가능성이 있다.[9] 1/350 스케일. 2차대전 당시(1945년)를 재현한 구판은 절판되었고, 퇴역 직전의 현대화 개수를 거친 1991년의 모습을 재현한 버전으로 리뉴얼되어 판매 중이다.[10] 1/200 스케일.[11] 2016년에 등장한 중국 모형회사. 타미야에서는 더이상 나오지 않는 1945년 버전을 주포 포탑까지 재현하여 고퀄리티로 뽑아내고 있다. 이외에도 아이오와, 뉴저지, 위스콘신 등 타 아이오와급 동형함 모형도 판매하고 있고, 몬태나급 전함 1/350 스케일 모형도 판매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