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항복
1. 개요
일본의 항복은 일본 제국이 1945년 8월 14일에 연합국에 통보하고 하루 지난 8월 15일에 쇼와 덴노가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한 사건이다. 이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은 종결되고 연합군의 일본 점령으로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또한 천황 중심의 일본제국은 붕괴하고 일본국 헌법을 기축으로 하는 일본국으로 바뀌었다.
2. 옥음방송
1945년 8월 15일, 정오 뉴스에 방송된 일본 제국의 종전 선언. 옥음방송 문서 참고.
3. Victory over Japan
[image]
USS 미주리 호에 새겨진 동판. 항복을 기념하고자 만든 것이다.
[image]
일본의 항복 소식이 알려진 직후 뉴욕 타임 스퀘어에서 옆의 간호사에게 키스하는 미 해군 수병. 하도 유명해서 그 자리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2][3][4][5]
https://en.wikipedia.org/wiki/Dancing_Man 위의 사진 다음으로 유명한 시드니의 춤추는 남자.
미국이 일본 제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날. V-J Day라는 표기도 자주 보인다. 또 태평양 전쟁의 종결이라는 의미에서 V-P Day (Victory in the Pacific Day)라고 하기도 한다. 이로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완전히 끝났다. 그 이후 산발적인 교전은 있었지만 당연히 영향력은 하나도 없었다.
[image]
베트남 사이공에서 영국 해군에 항복하며 일본군도를 반납하는 일본 해군 장교.
동남아시아에 넓게 전개된 일본군은 항복 선언 이후 명령에 따라 현지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공식적인 항복 조인식은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아이오와급 전함 미주리 호의 선상에서 진행했다.
[image]
일본의 공식 항복 문서 및 서명. 사진의 문서 원본은 일본 외무성에서 보관하고 있다. 서명 목록을 보면 뭔가 줄이 이상하고 수정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캐나다 대표로 참석한 로렌스 무어 코즈그레이브(Lawrence Moore Cosgrave) 대령의 실수였다. 코즈그레이브 대령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애꾸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서명 란을 잘못 보고 바로 밑에 있는 프랑스 대표의 서명란에 서명을 해 버리고 이후의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대표도 덩달아 밀려쓰게 된 것. 서명이 끝난 뒤 뒤늦게 이를 알아챈 시게미쓰 마모루는 이를 수정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당연히 연합군 측에서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를 보던 리처드 서덜랜드(맥아더의 참모장)가 이 요청을 받아들여서 각 서명의 국명을 직접 수정해주었다고. 문서를 2개 만들었기에 제대로 된것도 있다. 당연하지만 일본에겐 밀려쓴 것을 주었다.
이날 항복 조인식에 참석한 각국 대표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일본 제국 대표 시게미츠 마모루 외무대신, 우메즈 요시지로 육군참모총장
-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 미국 대표 체스터 니미츠 (미 해군 태평양함대 사령관)
- 중화민국 대표 쉬융창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군령부장)
- 소련 대표 쿠즈마 데레뱐코(Кузьма́ Никола́евич Деревя́нко) 육군 중장
- 영국 대표 브루스 프레이저(Bruce Fraser) 제독(영국 태평양함대 사령관)
- 호주 대표 토마스 블레이미(Thomas Blamey)
- 뉴질랜드 대표 레너드 이시트(Leonard M. Isitt)
- 네덜란드 대표 C.E.L. 헬프리흐(Conrad Emil Lambert Helfrich)
- 프랑스 대표 필리프 르클레르
- 캐나다 대표 로렌스 무어 코즈그레이브(Lawrence Moore Cosgrave)
4. 항복의 이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은 이미 국력 이상의 무리한 전선의 확장과 연이은 패배[7] , 일본군의 한계로 군대가 거의 궤멸에 가까운 상황이였다. 이에 연합군은 포츠담 선언 등을 발표하며 일본에게 전쟁을 끝낼 기회를 주었으나 일본제국이 이를 묵살하고 결사 항전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일본의 전쟁 의지를 꺾고 더 이상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8]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불가침조약으로 중립 관계였던 소련이 만주 작전으로 관동지역에 주둔한 75만명 가량의 관동군을 짧은 시간내에 궤멸시키자 결국 버틸 수 없었던 일본 제국은 항복하였다.
5. 기타
일본 근대사를 연구하는 미국의 역사학자 존 다우어는 쿠로후네 사건의 미국 전함으로 시작된 일본의 100년 몽환이 또 다시 미국의 전함으로 마무리 되었다는 평을 남겼다.
USS 미주리를 비롯해서 항복 조인식 당시 참석한 함선들의 명단은 다음 링크를 참고할 것. 출처는 해군역사문화사령부(NHHC) 사이트.
[1] 그는 USS 미주리 호에 다리를 절뚝이면서 나타났는데,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다리에 부상을 입어서이다. 이는 일본의 항복을 보도하는 1945년 당시의 미국 뉴스에서도 시게미츠의 등장 장면에서 "몇 년 전 상하이에서 '''한인 애국자'''에 의해 부상을 입고 의족을 달았다"고 직접 언급된다. 1분 49초 경[2] 사진사의 증언에 따르면 해당 수병은 광장에 있는 여자면 할머니든 소녀든 상관않고 죄다 키스를 퍼부었다고 한다. 그러다 한 간호사를 낚아챈 순간을 포착해 찍었다고 한다.[3] 그 수병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3명이나 있다. 승리의 기쁨으로 키스를 퍼붓는 사람이 워낙 많았고 간호사는 얼굴을 못 봤다고 해서 사실상 미스테리다.[4] 한때 간호사가 에디스 셰인이 설이 대중적이었으나, 나중에 그레타 프리드먼이라는 여성으로 밝혀졌다. 본인 말로는 그 수병과는 처음 보는 사이였다고, 그 키스는 첫 키스였다고 한다. 그녀에게 키스한 수병은 조지 멘도사로, 이 키스가 로멘틱한 이벤트가 아닌, 그저 주위의 누군가와 종전을 축하했을 뿐이라고 인터뷰했다.[5] 이 사진은 여러 매체에서 활용되었고, 잭 스나이더의 왓치맨 오프닝에서도 인용된 바 있다.[6] 남북한은 광복절 참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은 아니지만, 독립을 기념하는 동시에 일본이 졌다는 것에도 기뻐하는 날이라서 여기에 들어간다.[7] 미드웨이 해전, 레이테 만 해전, 사이판 전투,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임팔 작전 등[8] 이래도 항복하지 않았다면 몰락 작전이 개시되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