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고 시게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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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鄕茂德 (とうごう しげのり)
(1882 - 1950)
1. 소개
2. 집안의 배경
3. 생애
4. 여담


1. 소개


일본 제국외교관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에 외무대신(외교장관)이었다. 한국계 일본인인데 조선에서 건너간 도공의 후손이다. 한국식 이름은 박무덕(朴茂德).

2. 집안의 배경


임진왜란 당시에 종군한 일본군[1]은 각자 속셈이 달랐고 경제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 조선인들을 납치했다. 특히 유학자나 도공 등이 이에 해당했다. 끌려온 도공들은 일본 내에서 게토처럼 조선인 커뮤니티를 형성했고 19세기까지 조선어를 쓸 정도였다고 한다.
다만 조선 통신사가 와도 이들의 정체를 숨겼다는 에도 막부였으니 카쿠레키리시탄 못지 않게 본토의 조선어와는 다른 조선어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던 것이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면서 막부가 무너지고 일본 신정부가 들어서면서 아이누, 류큐를 향한 동화가 이뤄지고 얼마 안 남은 조선인 커뮤니티도 이때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3. 생애


도고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대에 연행되어 온 도공 박평의의 후손이었다. 도고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은 도자기를 만들던 가업을 산업화하여 도자기를 외국에 수출하였으며, 도고의 어머니인 박토메는 조선인의 후손이었다. 1882년 규슈 가고시마에서 태어났는데 1886년에 아버지가 도고라는 사무라이 가문의 족보를 사들여 도고로 개성(改姓)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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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도쿄대학 독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문학청년으로 문집발간에 힘을 쏟았다. 3수 끝에 외교관 시험에 합격했다. 도고는 집안의 도움없이 아르바이트를 뛰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는데, 외교관 시험을 준비할 때도 낮에는 독일어 강사를 하고 저녁엔 공부를 하는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수험기간이 길어진 것이었다. 위의 사진 외무성 합격이 결정된 뒤에 본가로 내려와 찍은 사진으로 제일 왼쪽이 시게노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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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성 관료의 예복을 입은 모습. 외교관 특히 해외 파견되는 외교관들이 제복을 입지 않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말에나 되며 보편화된 현상인데, 그간 외교관들의 화려한 제복은 국력의 과시의 일환으로 일상적으로 지급되었고, 현재도 많은 나라의 외교관들은 사복을 입지만 대신 무시당하지 않도록 고급 의류를 입고 다닐 수 있게 품위 유지비를 많이 지급받는다. 외교관에 합격해 공무원이 되자 아버지는 본적을 옮겨 조선인 출신이란 흔적을 없앴다.[3] 이는 나중에 무덕이 출세할 때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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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엔 독일 베를린에 파견됐는데 거기서 만난 유대계 독일인 에디타 데 랄란데(Edith de Lalande)[4] 와 1922년 결혼하였다. 아내는 결혼하면서 이름을 도고 에지(東郷エヂ)로 바꾸었다. 40세의 나이에 결혼했는데 그 전에는 일본인과 결혼하려고 할 때마다 혈통 문제로 실패했다고 한다. 에디타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이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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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아내와 찍은 사진. 데릴사위를 두어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로 자기 호적에 올린다. 사위도 외교관을 지냈고 1975년에 외무차관으로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1923년에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1937년에 대사가 되어 독일에 다시 부임했다.
도고는 나치에 부정적이어서[5] 육군에 의해 경질되었다. 1938년에 소련 대사로 부임했는데 할힌골 전투의 정전협정을 맺었다. 소련이 장제스 지원을 포기하는 대신에 사할린을 소련에게 넘기는 것으로 소일 불가침 조약도 추진했는데 일본 정부에서 반대해서 뒤엎고 후임이 새롭게 소일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1941년 도조 히데키총리가 되자 도고는 외무대신이 됐다.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점령지에서 철군하는 걸 기초로 한 협상안을 마련했으나 군부가 반대했고 미국도 강경한지라 무산되고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한다. 그 와중에 주미 일본대사관은 선전포고를 공격 뒤에 전달했고 이로 인해 도고는 도쿄 재판에 나중에 서게 된다.
그후 도조 히데키가 대동아성이라는 한국으로 치면 대동아부라는 부서를 만들려고 해서 마찰을 빚다가 사임했지만, 1945년에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들어서자 다시 외무대신이 된다. 7월 포츠담 선언에서 무조건 항복이 요구되지만 일본은 거절하고 을 맞고 소련이 참전한다. 도고는 항복을 주장했고 총리인 스즈키 칸타로와 히로히토는 이를 받아들였다. 군부에선 결사항전을 주장했지만 대세는 기울어졌다. 1946년에 전범으로 잡혔고 진주만 직전에 거짓 협상을 벌여 연합군을 기만했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아 20년형을 받아 수감됐다. 이후 1950년 수감 중에 사망하였고, A급 전범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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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면회 온 외손자들(가즈히코, 시게히코)

4. 여담


  • 일본의 극우들은 그의 예를 들어 일본은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 나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소수민족으로서 성공한 극소수의 케이스만을 근거로 들며 소수민족 전반에 대해 대우를 잘 해주고 차별이 없었다는 식의 주장이다. 도고를 싫어하는 극우들도 많은데[6] 전쟁을 반대했다는 점, 조선인 도공 후손이라는 점, 그리고 그의 손자가 반극우 인사라는 점이 그 이유이다.
  • 도고가 당시 조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인 최초로 외교관 시험에 합격한 장철수를 개인적으로 불러 격려하고 술도 같이 마신 걸 보면 친근하게 느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당연하지만 이 일화는 일본 극우들이 도고 시게노리를 매우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 조선인 도공의 후손이라는 사실 때문에 한국에서 주목을 많이 받았으며, 다큐멘터리나 서적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 외손자인 도고 가즈히코(東郷和彦, 1945-) 역시 외교관이었으며 서울대에 교수로 초빙되기도 했다.
  • 가즈히코의 쌍둥이인 시게히코(茂彦)는 아사히 신문에서 기자로 일했다. 근데 시게히코 이 인간은 인성 면에서 문제가 많은데 알려진 것만 1973년, 1998년, 2001년에 치한 행위로 체포됐다.
[1] 오늘날 같은 국민개병제에 입각한 게 아니라 다이묘 휘하의 군인을 끌고 온 것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별로 안 보내는 등 다이묘마다 달랐다.[2] 물론 헤이지 혈통의 도고 헤이하치로와는 전혀 관계 없다.[3] 일본은 한국과 달리 내적으로 급변한 적이 없어서 과거에 어디가 천민들이 살았고 사족들이 살았는지 추적이 가능하다. 부라쿠민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조선인들의 후손은 조선인 후손끼리 마을을 이뤄 살았기 때문에 어느 마을 출신이냐로 구분이 가능했다.[4] 그녀는 조선총독부의 설계를 맡았던 남편 게오르크 데 랄란데(Georg de Lalande) # 와 사별한 4명의 딸과 1명의 아들을 둔 과부였다.[5] 일단 개인적 성향은 둘째치고 아내가 유대인이었다.[6] 특히 재특회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