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악
辛泰悪
일본식 성명 : 三川泰悪 또는 三川淸[1]
1902년 3월 4일 ~ 1980년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영월(寧越)#, 이명은 신수악(辛秀悪), 아호는 일성(一星)이다.
1902년 함경북도 부령군 부거면 사구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경성공업전문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학생대표로 참가하여 6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1921년 신의주설화사건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연희전문학교에 재학하다 일본 와세다대학과 주오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31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고 귀국하여 1932년 경성부에서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1940년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태평양 전쟁을 지지하고 대동아 공영권 논리를 홍보하는 친일 연설을 하였다.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친일 단체에서도 활동하였다.
8.15 광복 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우익 정치인으로서도 활동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1952년 자유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본부 감찰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중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국민당 윤치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5월부터 같은 해 9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정일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일본식 성명 : 三川泰悪 또는 三川淸[1]
1902년 3월 4일 ~ 1980년
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영월(寧越)#, 이명은 신수악(辛秀悪), 아호는 일성(一星)이다.
2. 생애
1902년 함경북도 부령군 부거면 사구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경성공업전문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학생대표로 참가하여 6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1921년 신의주설화사건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연희전문학교에 재학하다 일본 와세다대학과 주오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31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고 귀국하여 1932년 경성부에서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1940년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태평양 전쟁을 지지하고 대동아 공영권 논리를 홍보하는 친일 연설을 하였다.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친일 단체에서도 활동하였다.
8.15 광복 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우익 정치인으로서도 활동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1952년 자유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본부 감찰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중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국민당 윤치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5월부터 같은 해 9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정일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